213. 복건(福建) (1)
“먼저 문주께서 아셔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 사람은 장강의 물길에 몸을 싣고 동쪽으로 흘러가는 중이었다.
종리세리의 계산에 의하면 복건 하문을 가기 위해서는 장강을 타고 남창까지 내려간 뒤, 그곳에서 육로와 배를 번갈아 타고 복주(福州)까지 내려가서 다시 해안을 타고 하문까지 가야 하는 긴 여정을 소화해야만 하였다. 하지만 그 전에 종리세리는 당태세에게 먼저 알아야 할 것을 설명하는 중이었다.
“복건은 청(淸)의 강역이지만 황제의 강역은 아닙니다.”
“뭐라고?”
“복건은 번국(藩國)입니다. 운남의 평서왕 오삼계와 마찬가지로 만주족이 중원을 평정하는데 혁혁한 도움을 준 명나라 출신의 항장(降將), 정남왕(靖南王) 경중명에게 주어진 봉토가 되어 있습니다.”
“번국에 항장이라고?”
당태세가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인상을 쓰는데 종리세리는 그 모습을 보면서 으레 당태세의 감정을 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남창 아래의 남쪽 강역은 문주께서 아직 깨어나시기 직전까지도 전란(戰亂)이 발발하던 지역이었습니다. 여전히 명나라의 수복을 위해 싸우던 이들이 있던 곳입니다. 그래서 그곳을 토벌하기 위해서 지역을 잘 아는 수군출신의 경중명이 복건으로 들어갔고, 그곳에서 명의 잔당을 물리치고 자신의 번국을 하사받았지요. 지금은 경중명의 아들 경계무가 정남왕이 되어 있을 것입니다.”
천호의 직을 벗어던지고 서림각라씨에 대한 미련이 없어진 종리세리는 담담하게 지나온 상황을 불편부당(不偏不黨)하게 설명하는데,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탄식을 하며 주먹을 쥐여보였다.
“결국 나라가 망한 것은 바깥이 아니라 속에서부터였구나. 산해관 바깥의 청(淸)이 국경을 침노해서 진 것이 아니라 이자성의 반도들이 나라를 몰아삼켰듯, 마지막까지 백성을 핍박하는 것은 결국 같은 한족 출신이었단 말이냐!”
“한족이라는 게 다 그 모양 아니겠습니까? 만주족이 훨씬 낫다니까요?”
옆에서 말을 듣던 아룡이 예의 빈정대는 말투로 투덜거렸지만 종리세리는 신경쓰지 않고 계속 말을 이어갔다.
“운남도 마찬가지지만 복건 역시 청(淸)의 신하를 자처하나 실상은 자치국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들 나름대로 벼슬을 운용하고 세금을 뜻대로 거둔다 들었습니다. 그곳에는 만성에 주둔하는 팔기도 없으며 녹영병이 있어도 정남왕의 수하나 마찬가지라고 들었습니다.”
“그 말인즉, 팔기의 규율이 소용없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렷다?”
“제가 걱정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제가 별 효용이 없을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지금 찾아가는 배신자가…….”
“철비준 유함명.”
종리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곳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니 만반의 준비를 해 놓으십시오. 행여 정남왕의 신하라도 되어 있다면 문제가 커집니다.”
당태세는 종리세리의 말이 무엇을 염려하는지 알 수 있었다. 고립무원(孤立無援)은 성도뿐 아니라 복건에서도 벌어질 수 있다는 말이었다.
무엇보다 이번에는 청(淸)의 법률과 팔기의 관할이라는 기묘한 아군을 써먹을 수 없다는 말도 되었다.
당태세는 눈살을 찌푸리고 자신이 젊은 시절 복건성을 다녀봤던 일을 기억해내려 애썼다. 하지만 강호의 습속을 다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당태세에게도 복건은 운남 만큼이나 낯선 곳이었다.
“왜 그런 곳까지 내려가서…….”
당태세가 혼잣말을 두런대고 있자니 아룡이 그 모습을 보고 넌지시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그런데 복주로 달아났다는 그 철비준인지 뭔지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협객이었지.”
아룡과 종리세리의 눈이 의외의 말에 슬쩍 커지는데, 말을 꺼낸 당태세는 이마에 주름을 가득 잡고는 꺼내기 싫은 말을 시작했다는 듯한 표정이 되어 뱃전 밖을 쳐다보았다.
천길 높이의 절벽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은 이제 살을 엘 정도로 추운데, 바람을 맞으며 과거를 되씹는 노인의 표정은 바람 탓인지 생각 탓인지 깊은 골이 한가득 패어 있었다.
“순천문의 어떤 이들보다 생각이 곧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의협의 기질을 지니고 있었다. 게다가 일신의 무공은 다른 제자들보다 승(勝)하여 하나를 보면 열을 깨우칠 재능과 천리 길을 쉬지 않고 갈 수 있는 근골도 지닌 이였지. 나는 내심 순천문의 후계를 그로 만들 것이라 생각한 적도 있었다.”
당태세는 가파르게 흘러가는 물살을 바라보며 입을 앙다물었다.
“풍전등화나 마찬가지던 북경에 남아서 끝까지 황실을 사수하자 말한 것 또한 철비준이 효시나 마찬가지였다. 그 이야기에 감화된 내가 다른 북경의 여덟 문파를 불렀지. 실로 그 아이가 모든 것을 시작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마지막에 배신을 한것도 그 자라는 말입니까?”
종리세리의 말에 당태세는 대답없이 고개만을 끄덕였다.
당태세는 천천히 손을 들어 오른 가슴 언저리를 매만졌다. 등에서부터 찌른 창날이 그대로 오른 가슴을 뚫고 흉터를 만들어 내었는데, 이 창법이야말로 애오라지 순천문의 것이었고, 그 창의 주인은 다름아닌 철비준 유함명의 것이었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제자는 이런 일을 벌인 것인지 당태세는 어림짐작도 할 수 없었다. 분명 그 단초를 사형문주 유독중의 감언이설이 제공했을 테지만 세치 혀의 속삭임에 단번에 넘어갈 만큼 심지 얕은 이도 아니었다.
“가 보면 알겠지.”
당태세가 허탈하게 내뱉은 말 외에는 답이 없었다.
사람의 사정과 고백은 결국 얼굴과 얼굴을 맞대고 직접 들어야 정확하게 결판을 낼 수 있는 것인데, 지금 이곳에서 괜한 억측을 하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남아있었다. 사천의 유독중에게서도 확인한 바, 철비준 유함명은 십칠년 전의 배신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은 혀가 아니라 칼로 문답을 할 것이다.”
마지막에 내뱉은 당태세의 말은 세찬 강바람에 실려 밖으로 나갔다. 가을은 물길과 함께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
당태세 일행은 사천에서 출발하여 긴 장강을 타고 남창까지 내려가 그곳에서 육로로 소무(邵武)까지 내려간 뒤 다시 배를 잡아타고 남으로 내려가니 어느새 세 명은 복건의 강역에 몸을 들여놓은 셈이었다.
실로 사천부터 시작하여 여행한 길은 천리가 넘었고 두 달이 너끈히 걸리는 긴 여로였는데 개중 태반이 선상에서 보낸 시간인지라 마른 땅에 발을 디디는 것이 오히려 어색할 지경이었다.
당태세는 작은 배로 옮겨 타고 복주를 향해 내려가며 주변에 펼쳐진 산세를 바라보았다. 노인의 입에서 감회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언제봐도 희한한 곳이로다.”
당태세의 눈에 비친 복건의 풍광은 수십 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더라도 낯선 것이었고 지금까지 봐 온 중원의 식생과는 거리가 있었다.
복건은 원래 명(明)과 청(淸)의 남단이라. 여름의 뜨거운 기운은 말로 설명할 수가 없고 겨울도 다른 곳에 비하면 따스하기 그지없어 눈이 내려야 할 시기에 비가 오는 것이 상례였다.
남으로는 거칠 것 없는 대양이 펼쳐져 있고, 머리 뒤로는 험준한 산세가 지엄하게 늘어서 있으니 실로 어진 백성이 농사를 짓고 살기보다는 칼과 창을 쥐고 세상을 들쑤시는 호걸이 준동하기 좋았다.
사람들의 성격은 기후를 닮아 순후하고 변화무쌍한 세사를 잘 받아들이지만 한 번 난리가 벌어지면 친족과 벗의 어깨를 끼고 죽을 때까지 물러나지 않는 불퇴전(不退轉)의 근기 또한 있는 곳이었다.
바꿔 말하면 적응력이 강하면서도 끈덕진 유대를 놓치지 않으려는 이들이었다.
이런 성향은 세 사람이 도착한 복주(福州)의 성읍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성곽과 가옥의 모습은 옛 명(明)의 자취가 물씬 풍기는데, 그 안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이들 역시 변발을 제외한다면 일찍이 당태세가 알고 있는 명의 정취를 그대로 풍기고 있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수염을 쓸어내리며 감탄인지 한탄인지 모를 소리를 내었다.
“역도가 다스리는 성읍이 가장 옛 나라의 정취에 가까우니 이게 무슨 경우란 말인가.”
한편 아룡은 발에서 불이 날 정도로 바쁘게 뛰어다니고 있었다. 어찌 보면 검결이 없는 평시에 가장 바쁜 사람이 아룡이었다.
아룡은 복주에 도착하자마자 세 사람이 쓸 객잔을 알아보았고, 두 번째로 복주에서 하문까지 가는 마편을 찾고 있었다. 첫 번째 일은 아룡의 장기였으니 금새 해결이 되었다. 하지만 두 번째 일은 생각 외로 난항이었다.
“숙부님, 문제가 좀 있습니다. 하문에서 올라오는 마편은 있지만 이곳에서 하문으로 내려가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라고 합니다.”
아룡이 잡은 객잔에 앉아있던 당태세와 종리세리가 눈을 깜박이자 아룡은 손뼉을 한번 치더니만 서쪽으로 내려가는 길을 가리키며 중얼거렸다.
“지금 하문에 복주의 병력이 다 내려가서 해적(海賊)과 일전을 불사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리 내려가는 일반 백성들은 엄격히 통제하고 있다고 합니다. 불시검문은 예사고 잘못하면 세작(細作)으로 오인받고 그대로 옥에 갇힌답니다.”
“해적하고 싸우는데 세작은 또 무엇이냐? 해적의 규모가 얼마나 되기에 복주의 병력이 다 내려가 있고?”
“아니, 숙부님, 저희가 소주에서 들었던 말 있지 않습니까. 해적이 예전에 강을 타고 올라와 소항까지 들어와서 백룡문…그 놈들하고 일전을 벌인 적이 있었다고 말입니다. 여기서 싸움을 벌이는 이가 그 해적입니다! 한인 해적인데 이름이 뭐더라…….”
아룡이 당태세를 보더니 허공에 손가락을 뭔가를 그리면서 자신이 들은 말을 다시 풀어내는데 당태세는 멍하니 아룡의 말을 듣다가 눈을 크게 떴다.
“정성공? 남명의 수군도독 정성공 말이냐?”
“그렇지! 바로 그 놈하고 싸우고 있다는 겁니다!”
당태세는 종리세리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아직까지 남명(南明)의 유지를 간직하며 청나라에 싸움을 벌이고 있다던 정성공의 세력이 일망타진 당한 것이 아니었다는 말 아닌가. 종리세리 역시 팔짱을 끼고 심각한 표정을 짓더니만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가능한 일입니다. 정성공의 세력은 실로 강대하여 남쪽 해안을 다 석권한 적도 있었다 하니 그들의 세력이 일거에 없어지진 않았겠지요. 그리고 청군은 원래 수군 쪽에 있어서는 명의 장수들을 이기기 힘듭니다.”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하문이고, 그곳에 철비준 유함명이 있다는 말이구나.”
복건의 용병이냐. 아니면 정성공의 용병이냐. 이도저도 아니면 그곳에서 무엇을 하는 게냐.
당태세는 이마를 손으로 어루만지더니 말없이 손가락을 까닥거리며 바깥을 쳐다보았다.
복건의 가을공기는 사천과 장강의 칼바람에 비하면 봄철 꽃바람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노인의 표정은 북풍한설을 맞고 있는 노송에 가까웠다.
한참동안 그렇게 앉아있던 당태세가 슬쩍 고개를 들더니 전대에서 쇄은을 꺼내고는 아룡을 쳐다보았다.
“무두리, 그동안 힘든 여로 중에 객고가 심하지 않았느냐?”
“네? 갑자기 새삼스레 왜 그러십니까요?”
“이 돈으로 나가서 주루나 들렀다 오거라. 술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놈이 육십여 일을 스님처럼 살았는데 그게 쉬운 일이 아님을 안다.”
아룡은 종리세리의 얼굴을 슬쩍 보더니 손사래를 쳤다.
“아니, 어찌 저 혼자 가서 술을 먹습니까? 여기 종리천…종리사형이라도 같이 대동하고 간다면 모를까 혼자 가기는 눈치가 보이지요.”
종리세리가 슬쩍 아룡을 보더니 고개를 저었다.
“나는 독작(獨酌)이 낫지 여럿하고는 같이 안 마시네. 그리고 내가 가면 누가 옆에 오겠나?”
“네?”
당태세가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아룡을 바라보았다.
“마음껏 마시고 돌아오너라. 오는 김에 하문 가는 길 좀 알아보는 것도 좋긴 하겠구나.”
그제야 아룡은 눈이 둥그래지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앞으로 나와 당태세가 주는 쇄은을 덥석 받아 들었다. 아룡의 얼굴에 그제야 예전의 시건방진 미소가 올라오더니만 쾌활한 어조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역시 제가 숙부님의 명을 거스를 수는 없는 노릇이지요! 걱정마십시오. 이 무두리가 누굽니까! 맡겨진 명을 확실하게 수행하고 들어오겠습니다!”
어깨춤을 추면서 객잔을 빠져나가는 아룡을 보던 종리세리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당태세를 돌아보자 당태세는 손을 들며 종리세리 대신 먼저 말을 하였다.
“걱정말게. 저 놈, 저리 보여도 주루와 기루에서는 제갈공명일세. 뭐 하나는 물어 올 테니 기다려 보세나.”
그리고 늦은 밤이 되자 당태세의 호언장담은 곧 사실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