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2. 복건(福建)으로
“어디로 가신다고요?”
모두가 모여 앉은 저녁 식사시간에 당태세가 조용히 말을 꺼내자 아룡의 눈이 화들짝 커졌다.
“숙부님, 복건은 청나라의 남쪽 끝입니다. 사천 성도도 끝이라면 끝인데……극과 극이라고요! 거기까지 가려면 적어도 한 달은 넘게 걸리실 겁니다.”
“누가 뭐라더냐? 그 정도 시간 걸리는 건 염두에 두고 있느니라.”
“아니 대체 그곳까지 왜….”
아룡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당태세를 바라보자 당태세는 먹고 있던 밥그릇에서 젓가락을 떼 놓지도 않은 채 한가로운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아니, 가야 하니까 가는 거지 무슨 말이 그리 많으냐? 네가 아니라 내가 간다니까?”
“그게 그거 아닙니까?”
아룡의 말을 듣던 당태세가 슬쩍 아룡을 바라보더니 밥그릇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같이 밥을 먹던 마숙영이 눈을 깜박이며 아룡과 당태세를 번갈아 바라보는데 당태세는 부드럽지만 근엄한 표정이 되어 아룡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무두리. 이 일은 내가 가야 할 일이고 내 개인적인 일이니라. 지금까지는 내 일이 어찌어찌 하여 청나라의 역도들을 몰아내는 일과 합(合)이 맞았다만 지금부터는 그게 아닐 수도 있음이다.”
“개인적인 일이오?”
당태세는 철없는 진짜 조카를 바라보는 듯한 표정으로 아룡을 보더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룡은 말없이 옆에서 반찬을 집어먹는 종리세리를 쳐다보았다.
“그럼 종리천호께서도 안 가십니까?”
“나는 가네.”
“가요?”
아룡이 눈을 휘둥그레 뜨자 종리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부터는 종리세리라고 부르게. 그게 싫으면 종리사형이라고 부르던가.”
“대체 무슨 소리….”
아룡은 돌아가는 상황이 무슨 연유인지는 몰라도 뭔가 불합리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뚱한 표정의 아룡을 보던 당태세는 차를 마시더니 슬쩍 이마를 누르고는 결심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무두리. 네가 나를 따라 천하를 주유한 지 벌써 일 년여가 다 되어가지 않느냐.”
“그렇지요?”
“그렇다면 이제 너에게도 내 과거사를 이야기해줄 때가 되었구나. 아니, 이미 늦어도 한참 늦었지.”
의외의 말에 눈을 번쩍 뜬 아룡을 바라보며 당태세가 말하였다.
“그 동안 비밀을 지키려고 네게는 아무런 언질을 주지 않았지만 너 역시 이곳까지 오면서 온갖 수고를 마다 않았고, 때로는 목숨을 내걸고 나를 도왔으니 이제는 네게도 당당히 말해야 할 때가 온 듯싶다.”
“이미 대충 숙부님의 과거가 범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있었습니다. 제가 그 정도 눈치는 있습지요.”
“너는 내 이야기를 들을 각오가 되었느냐?”
“아니, 각오랄 게 뭐 있습니까? 그냥 숙부님 이야기라면 당연히 이 무두리가 들어야지요!”
당태세는 피식 헛웃음이 새어나왔지만 이내 표정을 바로 하고 무두리를 보며 입을 열었다.
“오냐, 무두리라 칭하는 아룡, 네게 북경 순천문주 귀린갈 당태세의 이야기를 전해주마.”
익히 마숙영과 종리세리는 알고 있었지만 아룡은 모르던 당태세의 과거지사가 저녁 식탁 위에서 장구하게 펼쳐졌다.
종리세리와 마숙영은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밥을 먹고 있는데 옆에 앉은 아룡은 입을 쩍하니 벌리며 멍하니 넋을 잃고 순천문주 당태세의 입을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기나긴 이야기가 끝나고, 사청 성도에서의 이야기에서 모든 것이 마무리되자 당태세는 입을 닫고 차를 마셨다. 하지만 아룡은 멍하니 식탁 주변의 사람들을 둘러보더니만 연신 혀로 입맛을 다시더니 마숙영과 종리세리를 보며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두 사람도 알고 있었어요?”
마숙영과 종리세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아룡은 여전히 얼이 빠진 모양새로 멍하니 당태세를 바라보더니만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비실대며 식탁에서 걸어 나갔다. 마숙영이 손을 뻗어 아룡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뒤에서 조용한 당태세의 소리가 울려 퍼지자 손을 멈추었다.
“그냥 놔 두게. 저 녀석 입장에서는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나.”
차를 마신 당태세의 목소리는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유야 어찌되었던 저 녀석을 속인거나 마찬가지지. 나는 명의 유신(遺臣)이나 마찬가지요. 저 놈은 청(淸)의 백성이라 자청하는 놈인데.”
“속상하겠어요.”
마숙영이 아룡이 나간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말하자 당태세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입술을 찡그렸다.
원래는 데리고 다니며 이용가치가 없어지면 사람없는 강이나 골에서 해치우고 자취를 없애려고 했던 녀석이었다. 본 성품도 개차반에 가까웠고 한족 주제에 만주족의 습속을 동경하는 정신없는 놈이었다.
그런데 어느덧 천하를 같이 종횡하며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정이 들어버렸으니 마치 유려한 그림을 받쳐 놓은 아래 종이에 그림의 윤곽이 묻어나는 것 같고, 처마의 물줄기가 섬돌을 뚫는 것이나 매한가지였다.
“……속상하겠지. 하지만 이제 슬쩍 이별해야 할 때가 된 것 아니겠나.”
“과거를 알린 채 놔두어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종리세리의 차가운 목소리에 당태세는 한참동안 찻잔을 살피다 고개를 끄덕였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짓고 있었다.
“이제 알려진들 뭐가 어떻겠나? 그리고 저 놈이 떠벌리는 말을 나 말고 들어줄 사람도 없을 것인데.”
당태세는 그제야 그간 자신이 외로움을 느끼지 않은 이유를 알게 되었다.
***
다음날 아침, 당태세와 종리세리는 차가운 공기가 거리를 감싼 안개 낀 아침 거리를 향해 말을 내었다.
어느덧 여름은 지나가는 객이 되었고, 가을의 공기는 차갑게 사방을 감싸며 금세 다가올 겨울을 위해 터를 닦고 있었다. 두 사람이 탄 말을 준비해준 마숙영은 작은 전대를 당태세의 손에 쥐여주며 슬쩍 고개를 숙였다.
“만사에 감사드리옵니다.”
“얘야. 나는 네 삶에 불청객으로 찾아와 씻지 못할 상처를 남겨두고 가는구나.”
아침 풍경만큼이나 스산한 표정으로 당태세가 말을 걸었지만 마숙영은 노인의 우울함에 영향을 받지 않은 듯, 오히려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문주님. 어차피 결정은 제가 한 것이고 저 역시 무슨 일이 있을지 각오하고 있었지요. 제 삶이 이렇게 온전해진 것은 오히려 문주님 덕입니다.”
가신과 부모와 원수를 모두 잃고 홀로 남은 여인의 목소리는 밝았다. 밝아서 서러운 목소리인데 당태세는 괜한 감상으로 여인의 작별을 망치고 싶지 않았다. 단지 이 모든 업보를 늙은 당태세가 받기만을 하늘에 홀로 기원할 뿐이었다.
“앞으로 홀로 이 곳을 꾸려갈 수 있겠느냐?”
“율중일적(䫻中一寂) 마길의 딸은 약하지 않사옵니다.”
차가운 바람이 먼지를 쓸어가는 적막한 거리에 어울리지 않는 눈부신 미소가 여인의 아름다운 얼굴에 피어났다.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여인과 여인의 뒤에 서 있는 포일연을 바라보았다.
“선한 것으로 네 여생이 채워지기를 기원하노라.”
“감사합니다.”
두 사내가 말에 올라 골목의 안개를 헤치며 마숙영의 눈에서 조금씩 멀어져갔다.
여인은 두 사내의 모습이 희뿌연 안개에 가로막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포일연의 앞에 서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마치 피 섞인 오라비와 아비를 보내는 것처럼 여인의 배웅은 간절함이 있었는데 당태세는 여인을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다.
“저 여인은 잘해 나갈 것입니다.”
“종리세리 너도 그리 생각하느냐.”
“그렇습니다.”
“그리 되었으면 좋겠구나.”
당태세의 조용한 말에 종리세리는 슬쩍 자신이 뒤를 돌아보더니만 다시 당태세를 보며 중얼거렸다.
“그나저나 아룡이 같이 가지 않는 것이 섭섭하지 않으십니까?”
“그 녀석이 갈 길은 여기까지 아니겠느냐. 내가 마지막에는 과하게 아이를 몰아붙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공도 내공도 없는 그 놈은 서안까지 가는 것도 버거웠을 것이다.”
“그래도 같이 가자면 가실 것 아닙니까.”
당태세는 입맛을 다시더니만 씩 웃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간다면 좋기야 하겠다만 여기까지가 인연인 모양이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뭐?”
“나귀 하나가 빠르게 우리 뒤로 붙고 있으니 말입니다.”
당태세가 종리세리의 말에 눈을 크게 뜨고 쳐다보니 실제로 내공 하나 느껴지지 않는 사내 하나가 당나귀 위에 올라탄 채 두 사람을 향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었다. 다름 아닌 아룡이었다.
아룡은 두 사람을 보더니만 손에 쥔 보자기를 흔들어 보이며 골목 안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
“마소저가 깜박하고 드시라고 싸 놓은 떡을 안 줬다지 뭡니까요! 거 참, 다 큰 처자가 이리 정신이 없어서야 어찌 저 큰 야장을 운영하려는 건가. 그냥 나 같은 이가 하루종일 붙어있어야 정신을 차리고 살 것인데.”
아룡은 당태세의 얼굴을 보더니 히죽 웃음을 지어보이며 당태세와 종리세리 사이로 나귀를 몰고 들어와 두 말의 보조를 맞추며 달리기 시작했다.
당태세가 어이없다는 듯 아룡을 바라보더니만 투덜대는 말투로 말을 거는데, 노인은 말투와 달리 입 끝이 슬쩍 뺨으로 올라가 있었다.
“이 놈아. 그렇게 마소저가 걱정되면 같이 붙어 있거라. 내가 생각하기에 저 정도 미색은 중원 천하에 찾아보기 힘드니라. 네 연분이 될지 어찌 아느냐?”
“숙부님, 아무리 열심히 일한다고 객(客)이 신랑이 되는 경우가 있습니까? 마소저가 천하절색이긴 하더라도 저하고는 출신 자체가 달라서 안 됩니다. 게다가 제가 누굽니까? 이 강건성세의 대청제국을 유람하는 천하의 무두리 아닙니까? 어찌 제가 못 속의 물건이 되어 평생을 풀무질만 하면서 살라고 하십니까? 인연은 여기저기 많이 있는 법인데!”
“그래서 지금 네놈이 나와 종리세리가 가는 길을 따라오겠다 이것이냐?”
아룡은 슬쩍 종리세리와 당태세를 보더니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솔직히 말씀드리겠습니다. 여기 있는 종리천…종리사형이 무공이야 저보다 낫겠습니다만 저보다 객잔을 잘 잡겠습니까, 사람들 풍월을 잘 물어오겠습니까? 상인들하고 드잡이질해가며 돈을 깎겠습니까?”
당태세와 종리세리가 슬쩍 서로를 쳐다보고는 다시 가운데 아룡을 바라보니, 아룡은 두 사람을 보며 어깨를 으쓱대더니 엄지손가락으로 자기 가슴을 가리켰다.
“이 무두리가 있어야 두 분 신색이 편해진다 이겁니다. 숙부께서는 천하의 경륜이 있지만 객잔 하나 못 잡지 않으십니까?”
“별 허튼소리를 다 듣는구먼.”
당태세는 이렇게 말하면서도 결국 껄껄대며 웃음을 터뜨려보였다. 종리세리도 아룡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옆에서 말을 몰았다.
아룡은 어느새 두 사람 사이에서 달리는 게 거추장스럽다는 듯 나귀의 속도를 높이며 두 사람의 선두로 올라섰다.
“어차피 배를 타고 가실 것 아닙니까?”
“복건으로 가려거든 동으로 붙어서 배를 타고 장강을 타고 내려간 뒤 구강이나 남창까지 가야 할 것이네. 그 다음부터 육로로 복주까지 내려간 뒤 다시 하문으로 가야 하네.”
“그럼 뱃삯은 제가 흥정해야겠네요.”
종리세리와 아룡이 하는 말을 듣고 있던 당태세가 조용히 아룡을 보며 말하였다.
“무두리, 지금부터 가는 길은 멀고 험하며, 이젠 나도 앞에 뭐가 있는지 알지 못하느니라. 어쩌면 지금보다 힘든 여로가 될 것인데 네가 그 길을 감당하겠느냐?”
당태세의 말을 듣던 아룡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반짝이고 있었다.
“제가 숙부님을 따른 것은 숙부님이 청의 간적들을 제거해서가 아닙니다! 오직 제 평생 저를 인정하고 제대로 대해준 사람은 숙부님 밖에 없으니 이렇게 따라가는 겁니다!”
당태세는 아룡을 바라보며 잠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데, 아룡은 그런 당태세를 보면서 히죽 해맑은 웃음을 지어보였다.
조금씩 동편 하늘에서 해가 떠올라 안개를 몰아내고 있었다. 당태세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룡을 보며 낮고 힘찬 목소리로 명을 내렸다.
“그래, 무두리. 가자, 복건으로 가는 길을 열거라!”
“존명!”
세 사람이 가고 있었다. 간난산고를 겪으며 사천까지 왔던 이들은 다시 동쪽으로 방향을 틀며 말을 내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