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사형문 (10)
상강(霜降)에 하얗게 얼어붙은 풀밭을 거닐 듯, 초가을 늦은 저녁 사방을 둘러싼 안개를 헤쳐가듯 늙은 당태세의 발과 몸에 걸리는 것은 하얗고 검은 연기 덩어리들뿐이었다.
사방으로 퍼져나가는 불길은 이미 사람의 키 높이로 번지며 며칠째 비를 맞지 못해 바싹 마른 이삭과 풀줄기를 분별없이 태우며 옆으로 뻗어나갔다.
매캐한 훈연이 사람의 코를 들쑤시며 연기가 하늘과 땅을 가득 메웠다. 오감(五感)이 길을 잃고, 시력을 빼앗았다. 하지만 당태세는 마치 혼이 나간 사람처럼 불타는 논을 향해 발을 내밀고 들어섰다.
사방의 불길과 연기가 사람의 갈 방향을 흔들어 놓고 숨을 못 쉬게 만드는데도 당태세는 인상 하나 찌푸리지 않고 그 가운데로 걸어 들어갔다.
당태세의 앞과 뒤에서 불이 일었고 옆에서 연기가 일었다. 하늘은 시꺼멓고 하얀 연기에 가려 보이지 않았고 땅은 발이 디디는 곳이 땅인 줄 알 따름이었다.
노인은 그곳에서 멍하니 연기와 불을 보며 서 있는 또 다른 노인을 찾아내었다.
표범무늬 비갑을 입고 근사한 검대를 두른 사형문주 유독중은 당태세와 함께 불붙은 땅의 한 가운데 서 있었다.
멍하니 허탈한 표정으로 사방을 돌아보던 유독중은 지팡이를 짚고 자신을 찾아온 당태세를 발견하자 표정이 급변하며 이를 드러내었다.
“당태세! 이리 와라! 나와 여기서 자웅을 겨뤄보자! 내가 십칠년 간 가꿔 온 모든 것이 하루 아침에 날아갔다! 당태세! 네놈 때문에!”
“……왜 그랬느냐?”
분을 못 이기는 유독중에 비하여 당태세의 목소리는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네 놈이 아무리 잔학하고 무도하여도 협(俠)을 숭상하는 무문의 장(長)이다. 어찌하여 그 자리에서 그런 선택을 하였느냐?”
“아직도 지나간 옛 포한 타령이냐? 순천문주 당태세! 내 모든 것을 지금 다 앗아가 놓고!”
“너는 과거는 필요 없고 현재만이 중하냐.”
유독중이 이를 부드득 갈며 불타는 사방을 바라보더니 칼을 들어 당태세의 얼굴을 가리키며 울부짖었다.
“죽기 싫어서 그랬다! 이유없이 내 사형문을 희생시키기 싫었다! 명(明)이 무엇인데! 내가 왜 나라를 위해 내 사문을 희생시킨단 말이냐!”
“나라가 없고도 사형문은 살아남는다 이것이냐?”
“그래! 내가 그것을 증명하려 십칠년을 이렇게 아등바등 살았다! 나라가 뭐냐? 국체(國體)가 뭐냐! 한족, 만주족이 뭐가 중하냐! 내가 사형문의 깃발을 천하사방 일으켜 어느 성 어느 지방에서든 볼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살아온 보람 아니냐! 이렇게 떳떳하게 살 수 있고 또 다른 대계를 꿈꾸며 살 수 있으면 되는 것이지 왜 그곳에서 개죽음을 당해야 하는 것인데!”
당태세의 무표정한 얼굴에 슬슬 다시 웃음이 올라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 지난한 복수행의 마지막에는 말할 수 없는 분노가 피어오를 것이라 생각했던 노인은 자신의 입에 미소가 새어나오는 것이 너무나도 이상했다.
하지만 가슴 속에서 피어오르는 희락(喜樂)을 제어할 방법이 없었다. 노인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우하하하하!”
불길 속에서 원수의 얼굴을 보며 웃고 또 웃었다. 가슴이 아파올 정도로 웃고 나자 슬며시 웃음의 꼬리를 잡고 스멀스멀 떨리는 분과 격정이 밀려 올라오기 시작했다.
노인의 활짝 드러난 이가 어느새 송곳니를 드러낸 채 벌어지며 짐승 같은 신음소리가 새어나왔다.
“이런 말을 들으려고 내가 십칠년을 지옥에서 살았구나!”
날아드는 불티와 밀려드는 연기 속에 얼굴을 찌푸리던 유독중은 당태세의 말을 듣자 더욱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한껏 주름을 잡았다. 늙은 사형문주는 당태세의 말에 이를 드러내며 가감없이 적개심을 드러냈다.
“이 모든 것이 네 탓이다 당태세! 네놈이 우리를 꾀어 망해가는 명(明)의 황성 문루에만 올리지 않았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 네놈이 우리말을 듣고 성문에서 내려갔어도 이런 일은 없었다! 네놈이 마지막에 죽어서 다시 튀어나오지 않았더라도 이런 일은 없었을 것이고 마지막에 내 말을 따랐더라도 이런 마무리는 없었을 것이야!”
“그래, 이게 내가 네가 주는 대답이다. 유독중! 이 배신자야! 사람의 죽음으로 자기 영달을 꾀하는 독물(毒物)아! 과거를 숨기고 현재를 아름답게 치장하는 속물아! 사람을 이용해 먹고 종당에는 그 골수를 파먹는 괴물아!”
당태세의 드러난 이와 번쩍이는 눈빛을 보던 유독중 역시 눈에 슬슬 광망(光芒)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네놈과 명은 그 자리에서 망할 놈들이었어! 네 돼먹지 못한 명분 덕에 우리는 죽을 뻔하였다! 현실을 모르는 네놈이 그 자리에서 죽는 건 당연한 일이지! 네놈과 네 자식놈은 거기서 죽었어야 했다!”
“죽인다! 유독중! 얄팍한 사리(私利)를 대의로 포장하는 배반자 놈아! 네 입으로 내 아들을 능멸하지 마라!”
“배신한 것이 우리뿐이냐! 네 제자도 너를 배신하지 않았더냐! 누구 하나 우리를 도와주길 하였더냐! 우린 고군(孤軍)이었다! 그렇게 순절하고 싶은 게 네 욕망이었겠지! 네 제자 하나 설득하지 못해놓고! 이제 와서! 다 늙은 지금에 와서, 십칠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 네 한을 왜 우리가 받아야 하느냐!”
순간, 당태세의 드러난 이가 다시 입술 사이로 들어갔다. 노인의 표정이 굳으며 목괴가 앞으로 뻗었다. 순간 분위기가 바뀐 당태세를 보며 유독중이 눈을 깜박이더니 자신의 검을 치켜든 채 그를 향해 한 발 다가섰다.
“왜, 당태세. 내 말에 생각이 바뀌기라도 하였느냐?”
“그래. 생각이 바뀌었다.”
“……그럼 이제 어찌 하겠느냐?”
“내 너와 함께 이곳에서 죽으려 하였다만 내 너를 죽이고 이곳에서 살아 나가야겠다.”
유독중의 눈이 커지며 당태세를 바라보는데, 당태세는 목괴를 앞으로 뻗으며 오른발을 뒤로 슬쩍 내뻗었다. 노인의 눈동자가 가늘어지며 광기어린 눈동자가 침잠하며 서늘한 한기를 발산하기 시작했다.
“그랬지, 한 놈이 더 있었어. 내 제자, 철비준 유함명. 그 놈이 남아있었지.”
“뭐?”
“네놈을 잡고 나는 이곳을 나간다. 이 지옥을 벗어나 다시 이생으로 나간다.”
유독중이 검집을 바닥에 내던졌다.
“이 미친 놈! 미친놈아! 복수에 인생을 말아먹었느냐!”
“세월이 지나서 잊을 수 있는 일이라면 그건 복수가 필요 없는 일이다.”
당태세는 서늘한 눈을 들어 유독중을 바라보았다.
“오냐, 나는 복수한다. 내 여생을 다 걸고 복수한다!”
땅에 박혀 있던 이삭과 잡초들이 연기와 불을 뿜으며 두 늙은이를 향해 달려왔다.
사방에서 뿜어 오르는 열기와 매캐한 냄새가 살아 숨쉬는 모든 것들을 사방으로 내쫓았다. 오직 두 노인만이 이 불타는 나락에서 서로에게 맞서 눈을 번득이고 있었다.
한 줄기 바람이 불어 일어나 하얀 연기를 두 노인 사이에 뭉클하니 쏟아버렸다. 그 순간, 두 사내의 손에 들린 지팡이와 검이 연기를 동시에 꿰뚫었다.
바람과 연기와 불꽃이 검과 함께 당태세를 향해 쏟아져 나왔다. 묵룡(墨龍)이 용틀임을 하며 발톱을 뻗어내듯 검은 연기 가운데서 검이 뻗어 나오며 목괴의 길을 막고 당태세의 목을 찔렀다.
당태세의 몸이 옆으로 움직이며 고개가 슬쩍 옆으로 움직였다.
빛줄기가 목 옆으로 날아들며 살가죽을 찢었다. 당태세의 목괴가 앞에서 옆으로 움직이며 백룡(白龍)같은 흰 연기를 사방으로 흩으며 유독중의 어깨를 후려쳤다.
유독중의 몸이 바람과 함께 연기와 불꽃을 두르며 뒤로 빠지더니 사각(死角)에서 당태세의 어깨를 노리고 검을 뻗었다. 당태세의 목괴가 들어오는 검을 보지도 않고 막으며 다리를 돌려 퇴각으로 유독중의 허리를 걷어찼다.
유독중의 무릎이 올라오며 들어오는 당태세의 퇴각을 막고 그대로 몸을 낮추고 검을 뻗어 당태세의 배를 노렸다. 이번에는 당태세가 하얀 연기에 싸여 뒤로 한 발 물러섰다.
흑백의 연기와 붉은 불씨가 사방으로 흩날리며 두 노인의 춤사위를 구경하며 모였다가 흩어졌다.
광영예둔(光影銳鈍)의 모든 절기를 한 몸에 지닌 사형문주 유독중의 검날은 매섭고 화려하며 독랄하면서도 무거웠다.
노인의 손가락과 손목과 팔과 허리가 움직이며 굳건한 다리가 그를 받쳐 앞으로 나아갈 때 수십 가지의 변화가 일어나며 바람과 불꽃을 휘감고 자르며 적수의 요혈과 급소를 한 번에 베고 찌르는데, 연기와 불꽃이 사방으로 갈라지며 노인의 검기를 앞으로 내보냈다.
당태세의 목괴는 들어오는 모든 초식을 하나하나 요격하며 두 발과 팔을 같이 움직여 보이지도 않게 출수하는 유독중의 검을 막아내고 되치고 뻗으며 유독중의 목과 허리를 노렸다.
하지만 목괴가 유독중의 몸에 닿기 전에 이미 유독중은 몸을 빼내며 다시 사각으로 몸을 넣고는 연기와 함께 튀어나와 불꽃의 열기와 함께 당태세를 덮쳤다.
순간 화끈한 통증이 어깨와 허리에서 느껴졌다. 두 번의 참격이 목괴를 벗어나며 당태세의 몸을 쓸고 가는데,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쓰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깊지 않은 상처였지만 이미 피가 배어나오고 있었다.
“지쳤구나. 귀린갈.”
지옥 한가운데에서 연기와 불꽃이 비웃으며 노인에게 말을 걸었다.
당태세는 천천히 소도와 단괴를 분리하여 들고 앞을 바라보았다. 거대하게 소용돌이치는 연기와 불꽃이 사방을 잡아먹고는 당태세를 향해 다가오는데, 어디선가 들려오는 지옥의 목소리는 당태세를 마치 위에서 내려다보는 듯 웅웅대고 있었다.
“사라져라. 내 모든 것을 앗아갔으니 나는 네 목숨으로 그 빚을 갈음할 것이다.”
“……웃기지 마라. 내 빚을 먼저 청산하는 것이 먼저일 것을.”
“네 놈은 늘 허황한 말이 몸을 좀먹는구나.”
순간 뒤쪽의 바람에서 살기가 일며 당태세를 향해 예리한 기운이 폭사했다. 당태세의 단괴가 뒤로 돌며 들어오는 검날을 받고 검날의 끝에 있는 주인을 향해 소도를 내질렀다.
하지만 이미 그 자리는 텅 빈 연기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유독중은 어느 새 몸을 옮기고 번개처럼 일검을 내지른 뒤였다. 서걱하는 소리와 함께 가슴팍의 옷자락이 썰려나갔다. 아마 피부도 약간 베어나갔을 터였다.
당태세는 몸을 다시 돌렸지만 가쁜 숨과 통증이 밀려오는 발이 보법을 무디게 하였다. 그간 쌓였던 피로가 일시에 몰아닥치며 당태세의 몸을 무겁게 만들었다.
순식간에 유독중의 모습이 연기와 불꽃을 뚫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사형문주의 악문 입이 당태세의 눈에 가득 들어왔다. 손에 들린 검이 번득이며 당태세의 눈앞을 검광으로 가득 채웠다.
당태세의 손에 잡힌 단괴가 들어오는 검광을 따라 움직이며 예리하게 찔러오는 칼을 막아내고 소도를 뻗어 들어오는 검날을 받으며 앞으로 내뻗었다.
하지만 그 앞에, 그 옆에 걸리는 것은 오직 검은 연기와 밝게 빛나며 날아오르는 불꽃뿐이요 도에 걸리는 실체는 없었다. 그저 가볍고 허무하며 헛된 초식의 연속일 뿐이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가쁜 숨을 내쉬었다. 몸이 따르지 않았다. 마지막까지 남은 것이라고는 오직 두 손에 잡힌 병기와 놓지 못하는 일념 하나뿐이었다.
“운천.”
당태세의 입에서 아들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그 장렬하던 싸움에서 한 줄기 꽃부리 같던 아이는 이미 저 멀리 있는데 조금만 더 다가가면 그 아이의 듬직한 어깨를 다시 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람이 몰아치고 연기를 검이 베면서 들어와 당태세의 다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무의식적으로 뻗은 목괴가 퉁겨나가며 팔뚝을 검이 베고 지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제는 팔과 다리의 감각도 무디어질 대로 무디어져 있었다.
당태세는 비틀대며 뒤로 물러서고 또 물러섰다.
노인의 눈 앞에 비친 거대한 연기의 장막이 걷히며 그 곳에서 웅장한 건물의 형상이 보이는 듯하였다. 건물의 문이 열리며 그 앞에 서 있는 헌헌장부의 모습이 당태세의 눈 앞에 비치는 것 같았다.
“운천!”
당태세의 입이 벌어지며 다시 한 번 아들의 이름이 울려 퍼졌다.
바람이 잦아들고 연기가 사라지고 불꽃이 사방에 깔리며 세상이 적막함으로 물들고 암흑이 내려와 사방을 감싸며 노인의 육신을 평안하게 감싸줄 때, 당당하게 앞에 서 있던 사내의 고개가 들리며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당태세는 그 순간 눈을 번쩍 떴다.
그 얼굴은 당운천이었지만 한 편으로는 진언표였다. 두 사내의 얼굴이 한 얼굴에 같이 나타나며 당태세를 바라보며 싱긋 웃음을 지어보였다.
사내의 입이 열리며 천지를 진동시키는 대갈일성이 당태세를 향해 울려 퍼졌다.
-마땅히 갈 길을 홀로 당당히 가시오!-
순간 당태세의 부릅뜬 눈이 하늘을 보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당태세의 이가 악물리며 두 손을 위로 치켜들었다. 순간 허공에서 떨어지던 유독중의 검이 목괴와 소도에 막히며 튕겨나갔다. 당태세의 발에 힘이 들어가며 앞으로 뻗어나갔다.
한 보가 들어가고 한 보가 더 들어가며 노인의 목괴가 검을 따라 움직이며 유독중의 출수를 막았다. 순간 유독중의 낯빛이 변하여 칼을 돌려 단괴를 제끼며 당태세의 목을 향해 보검을 뻗었다.
그 순간 당태세의 소도가 보검의 날을 막고 그대로 앞으로 뻗어 유독중의 심장을 향하였다.
실로 혼신의 힘을 다한 쾌격(快擊)이 뻗어 들어가는 순간, 유독중의 검이 시각을 속이듯 미끄러져 들어오며 당태세의 소도를 검으로 막아내었다. 그때 당태세의 입이 열렸다.
“마땅히 할 일을 하는 것이다!”
당태세의 소도를 잡은 손은 검날을 타고 그대로 뻗으며 도를 쥔 손이 권(拳)이 되어 유독중의 배꼽 아래를 그대로 강타했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유독중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하단전에 일격을 당한 유독중이 자기도 모르게 손발이 풀리며 방어를 풀어버리는 순간, 당태세의 소도가 번득이며 날아가 유독중의 오른팔과 왼팔의 힘줄을 그대로 베어버리며 제 자리로 돌아왔고, 유독중이 비명을 지르는 순간 왼손의 단괴가 그대로 내려오며 유독중의 옆머리를 강타하였다.
유독중이 그대로 다리가 풀리며 그 자리에 풀썩 무릎을 꿇자 당태세는 단괴와 소도를 하나로 만들더니 유독중의 앞에 지팡이를 세우고 당당하고 오연하게 허리를 폈다.
당태세의 이글대는 눈이 유독중을 내려다보았다. 늙은 순천문주의 두 손은 부들부들 떨리며 입술 역시 떨리고 있었다. 오히려 힘줄이 끊기고 단전이 부서진 유독중의 모습이 더 의연해보였다.
“빌어먹을…….”
유독중은 힘없이 늘어진 자신의 두 손을 내려보며 믿기지 않는다는 듯 당태세를 쳐다보았다.
당태세의 눈 안에는 살기와 승리감이 동시에 피어오르며 무릎을 꿇은 유독중을 말없이 노려보는 중이었다. 유독중은 당태세를 보며 이를 부드득 갈았다.
“죽여라. 당태세!”
당태세는 떨리는 손으로 유독중의 가슴팍을 열어젖혔다. 그 안에서 꼬깃꼬깃 접은 사면부를 발견하고 주섬주섬 자신의 품 안에 증서를 밀어넣은 노인은 가슴이 벅찬 듯 아무런 말없이 무릎 꿇은 노인을 한참동안 노려보다 말을 이었다.
“철비준…유함명…내 제자…그 놈…어디 있느냐….”
“……복건 하문(夏門)에 있다고 들은 게 마지막이다.”
“복건 하문…….”
“이제 죽여라 당태세! 더 이상 모욕을 주지 마라! 네가 원하는 것이 이것 아니냐!”
당태세는 유독중의 말을 듣더니 고개를 천천히 저으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유독중은 눈을 크게 뜨고 당태세의 하는 양을 살펴보았다. 당태세는 계속 고개를 젓더니 천천히 지팡이를 짚고 유독중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네 놈 덕에 나는 나라와 가족과 문파와 내 벗들을 모두 잃었다.”
“그러니까 죽여라.”
“그리고 나는 그 긴 세월을 허비하며 지금에서야 네 앞에 나왔다.”
“나더러 어쩌란 말이냐! 네 삶에 대한 보상이라도 해 주랴? 네가 독을 풀어놓은 저 집 안에 돈이 있다! 네 맘대로 가져가려면 가져가든가! 그전에 날 먼저 죽이란 말이야!”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유독중의 뒤로 불길이 다가와 있었다. 이미 불길은 사방에 번져 후끈대는 열기가 자욱한데 당태세는 그런 유독중의 말에 대답 대신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삶에 대한 보상은 하늘이 할 것이다.”
“뭐?”
순간, 당태세가 자기 변발의 끝을 잡더니만 그대로 유독중의 뒷목 아래쪽을 있는 힘껏 눌렀다.
유독중의 눈이 화들짝 커지더니 갑자기 입이 크게 벌어졌다. 유독중은 둥그렇게 커진 눈으로 연기 자욱한 앞의 광경을 보면서도 눈 한번 깜짝이지 않았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흘러나왔지만 유독중은 무릎 꿇은 자세 그대로 연기와 불이 자욱한 벌판을 바라볼 뿐이었다.
유독중의 뒤에서 당태세가 조용히 읊조렸다.
“네 팔의 근맥을 끊었으니 너는 칼을 잡지 못할 것이요, 백사은침이 네 뇌호(腦戶)를 뚫었으니 너는 이제 봐도 본 것을 알지 못하고 본 것을 말로 펴지 못하며 알던 것을 잊고 새것을 익히지 못할지니 너는 그저 일어나 먹고 마시며 배설하며 자고 걸어다닐 수 있으리라. 죽을 때까지 너는 네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것이나…….”
당태세가 무릎 꿇은 유독중을 일으키자 유독중은 엉거주춤 일어나 멍하니 앞을 보며 서 있었다.
당태세는 그의 어깨를 부드럽게 밀어 아직 불이 붙지 않은 곳으로 사내를 움직이니 화려한 표범무늬 비갑을 차려입은 사내는 두 팔을 축 늘어뜨린 채 천천히 발을 옮겨 당태세가 떠민 방향으로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좋은 인연을 만난다면 무탈하게 살 것이니, 아무쪼록 인연을 만나거라.”
유독중의 눈은 깜박이지 않았고 벌린 입은 다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당태세는 연기와 불꽃 사이에서 좌우로 뒤뚱대며 걸어가는 유독중을 보며 입을 열었다.
“하늘이 네게 천수(天壽)를 주실 것을 바라노라! 천천세를 하거라! 만만세를 하거라!”
당태세가 조금씩 멀어지는 유독중을 바라보다가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살다 살다 네 육신이 원없이 살다죽어 명부에 갈작시면….”
노인이 눈을 꿈틀거리더니 이윽고 목소리가 이지러지기 시작했다. 당태세의 눈에 유독중의 걸어가는 모습이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노인의 목소리에 울음이 섞이기 시작했다.
“명부에 갈작시면 내 사문과 황제폐하를 뵙고, 백성들을 보고, 내 아들을 보고…내 아들을 보고!”
당태세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노인이 입을 열고 흐느끼기 시작했다.
“사죄하거라! 영원히 사죄하거라!”
노인은 무릎을 꿇고 통곡하기 시작했다. 온 몸을 들썩이며 노인은 울음을 터트렸다. 그동안 쌓여있던 모든 것이 한순간에 터져 나왔다. 노인이 애써 남겨놓았던 설움과 고독과 공포가 빗장을 풀고 쏟아져 나왔다.
노인은 땅에 입을 대고 고함을 지르며 울었다.
“사죄해라!”
사내는 주먹으로 땅을 치며 울고 또 울었다.
마치 울다 죽어야 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울었다.
하늘로 흑백의 연기가 오르고 땅 위로 진홍의 불꽃이 오가며 사람들이 분주히 다니며 잔불을 잡아내고 있을 동안 어디선가 땅이 울부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그치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것 같았다.
팔기는 하늘이 노하였다 말하였고 녹영은 지신이 노하였다 두려워하였다. 땅 위를 뒤덮었던 연기가 스러지고 불이 다 잡히도록 사천 성도의 땅은 울고 또 울었다.
참으로 서럽게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