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9. 사형문 (9)
청조(淸朝)에서 한인(漢人)이 날붙이를 들고 횡행하는 것은 즉결처분감이었다.
더군다나 도당(徒黨)을 결성하며 무기를 들고 그 안에서 조련을 하는 행위는 빼도 박도 못할 역적질이었다. 이건 청조(淸朝)가 아니라 고래의 어떤 왕조라도 당연히 처벌할 일이었다.
하물며 한인에게 가혹하기로 소문난 팔기(八旗)와 녹영군의 앞에서 무기를 들고 사방에 피칠갑을 한 장원이 드러난다면 이것은 그날 부로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었다.
설상가상 만약 불이 자욱한 논밭을 확인하러 달려온 팔기들 앞에 병장기를 들이대는 한인들이 나타난다면 그 뒷일은 명약관화한 일이었다.
“그간 돈을 꽤나 많이 뿌렸겠지. 팔기의 지휘사 뿐 아니라 녹영의 참장까지도 배부르게 챙겨 주었을 터, 그런 이들이 사형문의 장원에 불이 났는데 그냥 보고만 있다면 더 이상한 일이겠지.”
“네 이놈 당태세!”
“네놈이 일궈 놓은 모든 것들은 오삼계가 가져가기도 전에 팔기들에 의해 끝장날 것이다.”
“네가 우리 한족을 끝장냈어!”
당태세의 입 끝이 씰룩이더니 찬웃음을 머금었다.
“네놈은 한족이 아니라 사형문 외에는 관심이 없는 놈 아니냐. 너는 난리통에 네 세력을 확장하는 것에만 관심이 있는 놈일진대, 오늘부로 네놈이 키워놓은 모든 것은 물거품이 될 것이다.”
당태세의 말에 안색이 변한 유독중이 번개처럼 검대에서 검을 뽑아들었다. 사내의 입이 일그러지며 평온 엄숙했던 표정은 마치 악귀 나찰처럼 험상궂게 변해있었다.
“오늘 이 자리에서 네놈을 파묻겠다! 네놈은 이 자리에서 죽어 사라질 것이다!”
당태세는 그 말에 입에 지었던 찬웃음이 너털웃음으로 바뀌었다. 당태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유독중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공방(攻防)의 세가 바뀌어 있었다.
“아쉽구나. 이 건물도 오늘 너와 함께 사라질 것인데.”
“뭐라고?”
“네 놈은 신도예귀만 독을 쓴다고 생각했느냐?”
당태세는 함박웃음을 지으며 뒤에 있는 제단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유독중은 멍하니 제단 위를 쳐다보았다. 당태세가 분향해 놓은 화로 위에서 기묘한 빛깔의 연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제단 아래로 천천히 깔리기 시작했다.
“유독중 네놈은 예전 사천에 있었다는 당가(唐家)의 유물(遺物)을 아느냐?”
“사천당가? 하! 귀린갈, 오랫동안 못 본 새에 정신이 나간 게로구나! 사천당가가 망한지 백년이 넘었거늘…….”
“만장백편독(萬丈百翩毒)이라고 들어 보지 않았느냐? 제독불가의 흉독 말이야. 내가 장사에서 어렵게 저 놈을 구해왔다. 아까 동환(銅丸)을 녹이느라 고생 좀 했지.”
순간 유독중의 눈이 다시 향로로 돌아가더니 저절로 입이 벌어졌다. 당태세는 히죽 미소를 지으며 박도를 흔들며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이 건물은 이제 흉가(凶家)다. 아무도 살지 못하리. 누구 하나 들어올 엄두를 내지 못하는 귀신들린 집이 될 터. 네놈은 이곳에서 영영 귀신과 놀음이나 하며 살거라.”
회색의 연기가 마치 살아있는 듯 꿈틀대며 제단에서 밀려나왔다.
유독중은 창밖을 바라보았다. 희뿌연 안개 같은 연기가 넘실대며 담을 건너 사형문의 본채로 밀려들고 있었는데 어느새 말발굽이 천지를 울리는 소리가 같이 넘실대는데 안팎이 연기로 물들어 유독중을 향해 밀려오는 중이었다.
“마길! 당태세를 죽여라!”
순간 유독중의 몸이 허깨비처럼 아래로 가라앉는가 싶더니만 갑자기 사라져버렸다. 어느새 바닥으로 뚫린 작은 구멍을 통해 이층으로 빠져나가버린 것이었다.
당태세는 이를 악물고 박도를 움켜쥔 뒤 구멍을 향해 몸을 날렸다.
그 순간, 앞에서 번개 같은 그림자 하나가 솟구치며 당태세의 발길을 막고 매서운 일격을 당태세의 목을 향해 날렸다. 살초였다.
당태세의 칼이 반사적으로 들리며 들어오는 공격을 막아낸 뒤 대적자를 향해 칼을 뻗었다. 자신의 앞에 칼을 들이대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포일문주 마길이었다.
당태세의 눈동자가 새파랗게 불타올랐다.
“율중일적(䫻中一寂) 마길, 물러서라. 그렇지 않으면 너부터 베겠다.”
“내가 너를 베겠다. 귀린갈. 너를 유독중에게 보낼 수는 없다.”
“대체 네 놈은 귀신이 씌였느냐! 뭐하는 짓이냐!”
포일문주 마길의 검은 조금 전까지 마길의 허리에 두르고 있던 요대였다. 포일문주의 연검(軟劍)은 마치 살아있는 뱀처럼 구불거리며 당태세의 앞길을 막아서는데, 당태세의 뒤에서는 회색 연기가 넘쳐흐르듯 꿈틀대며 사방의 모든 것을 핥으며 다가왔다.
“유독중의 말은 모두가 진실이야. 저 자가 아니었으면 나는 이미 상심하여 죽었을 것이네. 은인을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이 협객아닌가.”
“마군(魔軍)에 먹힌 것이냐! 저놈은 세치 혀로 네놈을 조종하는 것이다! 네 부인이 죽은 틈을 타 허해진 네 심사를 갉아먹은 게야!”
“아니야. 자네는 몰라. 내가 겪은 고통을 유독중이 얼마나 같이 고민하였는지를.”
“섭설평이 죽으면서 외친 말을 기억해라. 마길!”
“되었네. 이제 죽어주게. 모두 쳐라!”
마길의 신호와 함께 장지문이 열리며 문 앞을 지키고 있던 시위들이 한꺼번에 물밀 듯 들어오며 당태세를 감쌌다.
“머저리들!”
당태세의 눈이 뒤집히며 이가 드러났다.
사내의 두 발이 땅을 박차며 앞으로 튀어나가더니 들어오는 시위들의 칼날을 한 합에 튕겨버리고 도배로 사내들의 허리춤을 후려친 뒤에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모두 곱게 죽고 싶으면 나가라! 독무(毒霧)가 너희들을 집어 삼키리라!”
그 순간 마길의 발이 기묘한 보법을 밟으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사내의 손에서 채찍처럼 움직이는 연검이 궤적을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휘어지고 구부러지며 당태세의 손목과 목을 노리고 찔러 들었다.
당태세의 박도가 들어오는 연검을 받아치는 순간, 연검의 끝이 다시 한번 휘며 당태세의 소매를 찢어버리고 어깨춤의 실밥을 끊어버리고는 시큰한 통증을 안겨주었다.
“제기랄!”
당태세가 인상을 찌푸리며 마길의 연검을 향해 도를 움직였다. 마길의 연검은 들어오는 당태세의 박도를 어려움 없이 받아내며 들어오는 박도를 튕기고 재빠르게 자격을 가하였다.
원래 연검은 재질이 연하여 강격에 부딪히면 여지없이 우그러지는 것이 상례이거늘, 마길의 연검은 당태세의 박도와 부딪힐 때 천근의 무게가 실려있었고, 가슴을 향해 찔러들어올 때에는 여느 검보다 날카롭게 뻗은 일직선의 기세를 타고 있었다.
모든 것이 마길의 정순한 기공이 실려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때라면 절초라고 찬탄이 나올 법한 공방이었지만 당태세는 입을 꽉 다물고 마길의 연검과 밀려드는 시위들의 도를 번갈아 상대하였다. 무경학 섭설평을 길러낸 마길이었다.
절대로 그 무공이 팔대문파의 장문들에게 쳐지지 않았고, 오히려 당태세와도 호각을 이룰 수 있는 저력이 있었다. 당태세가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그때였다. 뒤로 돌아서 당태세를 잡으려고 오던 시위 하나가 끔찍한 비명을 지르며 회색 안개속에 파묻히더니 칠공(七孔)에서 피를 분수처럼 쏟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던 시위들의 동작이 일시에 멈췄다.
“이 견자들아! 모두 달아나라고!”
그 순간, 연검이 찰나의 틈을 파고들며 당태세의 어깻죽지를 그대로 찍었다.
엄지 반마디 정도의 깊이로 검날이 쑥하고 당태세의 어깨를 파고들며 불에 타는 듯한 통증이 밀려들었다. 당태세가 인상을 쓰며 마길에게 욕을 퍼부었다.
“이런 인의도 생각도 없는 놈아!”
당태세의 박도가 허공에서 춤을 추었다. 마길의 연검이 박도를 휘감으며 옆으로 빠져나가더니 다시 좌우로 꿈틀대며 당태세의 손목을 휘감았다.
당태세의 소맷단이 갈기갈기 찢겨나가며 팔뚝에 혈흔이 비치기 시작했다. 당태세가 입술을 지그시 깨물더니 슬쩍 반보 뒤로 물러서며 마길의 자세를 바라보았다.
이미 시위들은 꽁지가 빠지도록 달아나 남은 이가 하나도 없는데, 당태세의 등 뒤로 회색 연기가 꿈틀대며 밀려내려오고 당태세의 앞에서는 눈을 홉뜬 마길이 부드러운 연검을 꼿꼿이 세운 채 당태세가 덤벼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제 손속에 인정을 기대 마라. 마길.”
“덤벼라. 귀린갈.”
마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당태세의 몸이 포탄처럼 튀어나가며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박도를 휘둘렀다.
마길의 연검은 태산을 무너뜨릴 것만 같은 당태세의 도를 부드러운 연검으로 가볍게 막아낸 뒤, 한 발을 들고 그대로 춤을 추듯 한 바퀴를 돌며 연검을 채찍처럼 휘둘러 당태세의 등을 향해 깊숙이 검을 뻗었다.
하지만 당태세의 몸은 그 자리에 없었다.
당태세는 그대로 들어오는 칼을 막을 생각도 없이 앞으로 튀어나가며 유독중이 아래로 내려간 구멍으로 그대로 몸을 날렸다.
노인의 몸이 바닥을 뚫고 이층 바닥에 가볍게 착지하는 순간, 위에서 날카로운 살기와 함께 연검을 앞으로 뻗은 마길의 몸뚱어리가 머리부터 거꾸로 떨어져 내렸다.
당태세의 박도가 들어오는 연검을 후려치며 몸을 옆으로 피하였다. 손목이 찌릿하니 울릴 정도로 엄청난 반동이 전해였다.
마길의 정순한 기공으로 강검처럼 빳빳해진 연검이 팔방(八方)을 베며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빠르게 움직이며 당태세의 박도를 후려쳤다.
쇳덩이가 쇳덩이를 깎아내는 소리가 울려 퍼지며 당태세의 박도 날이 번쩍이는 섬광과 함께 듬성듬성 깎여 날아갔다.
당태세가 이를 드러내며 박도를 세워 채찍처럼 파고드는 연검을 막아내며 뒤로 빠졌다가 다시 한번 한 보 앞으로 다가가며 박도를 눕혀 마길의 목을 찔렀다.
순간 연검이 박도를 밀어내며 한 바퀴 허공에서 똬리를 틀더니 그대로 당태세의 목을 향해 이를 들이밀었다.
그 순간, 마길의 눈동자가 휘둥그래졌다. 당태세의 좌수(左手)가 연검의 주둥이를 엄지와 검지 중지로 잡아채고는 그대로 종이를 접어올리듯 연검을 위로 꺾어버린 것이다.
“내공은 너만 있다더냐.”
마길이 이를 악물고 연검에 힘을 주자 다시 연검의 휘어진 부분이 팽팽하게 펼쳐지며 강력이 돌아왔다.
그 순간, 당태세의 오른손이 박도를 떨어뜨리더니 왼손이 잡고 있는 연검의 휘어진 부분을 같이 감싸 쥐고는 그대로 연검을 꺾으며 온 몸으로 마길을 향해 달려들었다.
빳빳해진 채 주둥이가 꺾인 연검이 그대로 마길의 가슴속을 파고 들어갔다.
마길의 입에서 바람빠지는 소리가 들려오며 그대로 연검의 내공이 풀려버렸다.
당태세의 두 손이 검에서 떠나가자 검은 주인의 가슴에서 스르륵 빠지며 땅에 놔뒹구는데, 마길은 멍하니 자신의 가슴을 바라보다가 비틀대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서다 털썩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사내의 깜박이던 눈이 멍하니 땅바닥을 보더니 위로 고개를 돌려 늙은 옛 벗을 바라보았다.
“당태세.”
“포일문주 마길.”
마길은 묵묵히 가슴에서 뿜어져 나오는 선혈을 바라보더니만 다시 당태세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당태세를 바라보는 사내의 눈은 맑기 그지없었다.
“당태세. 일이 이렇게 되어서 미안하네. 모든 게….”
“이제 정신이 드나.”
“정신은 원래 멀쩡했어.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고 있었을 뿐이야.”
“자네도 여전히 팔기의 장군이 준 사면부를 지니고 있는가?”
마길은 눈을 껌벅이더니만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 사면부는 성도의 포일문에 있네. 내 처소의 문갑 안에 있지.”
당태세는 한숨을 쉬며 마길을 내려다보았다. 그 눈에는 적개심을 찾아볼 수 없었다. 단지 노인의 눈에 남아있는 것은 피를 뿌리며 쓰러진 옛 벗을 바라보는 측은함뿐이었다.
“내가 진짜로 그렇게 말했던가? 십칠년 전 그날, 자네들 앞에서 내가 성루에 올라온 것을 후회한다 하였던가?”
마길은 물끄러미 당태세를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흔들었다.
“……모르겠어. 유독중이…자네가 그랬다고…하였으니.”
당태세는 이를 악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긴 한숨이 새어나왔다.
세치 혀가 극한으로 만들어내는 간교한 거짓말은 시간과 공간이 만든 진실마저 왜곡하는 법이었다. 심지어 당태세 마저도 자신의 과거를 의심할 정도였다.
“왜 그랬나? 왜 자네가 나를 배신했나? 십칠 년 전에 왜 그런 건가?”
당태세의 말에는 자기도 모르게 떨림이 들어가 있었고, 옛 벗이자 원수의 질문을 받은 마길은 고통스러운 듯 가슴을 손으로 움켜쥔 채 이를 악물고 입을 열었다.
“태중(胎中)의 아이 때문이었네. 살리고 싶었어. 내 딸을 살리고 싶어서 막역지우를 배신하고 황제를 배신하였다.”
“그랬나.”
당태세의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남아있지 않았다. 분노도, 허탈함도, 서러움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저 멍하니 자신을 배반하고 죽음 대신 삶을 택한 옛 친구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히려 깜박이는 두 눈에서 눈물이 떨어지고 있는 것은 포일문주 마길이었다.
“나는 그 벌을 받았다. 나라와 벗을 배신한 죄과를 오늘까지 받았어. 내 아내가 죽었고, 제자들이 죽었고, 이제는 금지옥엽 내 딸마저 죽었어! 내 목숨 하나 자네에게 끊기는 것은 내 업이니 달게 받겠네만…내가 지은 죄가 이리도 큰 지 몰랐었네! 미안하네! 당태세!”
“마길. 네 죄가 크다.”
“미안하네! 미안하네! 정말로 미안하네! 진실…….”
울컥 마길의 입으로 피가 넘어오며 말문을 막았다. 사내는 이제 게슴츠레 젖은 눈을 뜨고 당태세를 바라보는데 마지막 남은 잔명을 다할 때까지 옛 벗에게 말없이 사과를 계속할 것처럼 보였다.
당태세는 천천히 땅에 떨어진 이 빠진 박도를 집어들고 핏속에 누워있는 마길을 빤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마숙영은 살아있다.”
이제 말을 잇지 못하는 마길의 눈이 천천히 커졌다. 마길의 눈동자를 바라보던 당태세는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애써 담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약을 썼네. 그 아이는 다시 기력을 회복하고 멀쩡히 살아갈 것이네.”
마길의 눈동자가 당태세를 바라보며 좌우로 흔들렸다. 매캐한 냄새가 사방을 감쌌다. 이제 산 자는 떠나야 할 시간이었다.
“자네 딸은 유독중의 손아귀에서 벗어났네. 어디에도 구애받지 않는 삶을 살 것이야. 포일문도, 사형문도, 순천문도 없는 마숙영의 삶을 살 것이네.”
마길의 입이 천천히 벌어지며 두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사내는 간신히 손을 들어 당태세를 향하였지만 이내 허공에서 땅으로 손이 떨어졌다. 당태세는 입을 다물고 눈을 질끈 감은 채 서 있다가 이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노인이 사라지고 포일문주 홀로 텅 빈 방을 지키고 있을 때, 허공에서 회색 연기가 너풀대며 아래로 내려오기 시작했다. 회색 연기는 천천히, 하지만 넓게 퍼지며 사방을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당태세가 일층으로 내려와 옥외로 나왔을 때, 이미 사방은 아비규환이나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 말을 타고 갑옷을 두른 팔기와 녹영의 병사들이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몰아가는데, 이미 넓은 사형문의 바닥에는 무기들이 즐비하게 아무렇게 던져져 있었다.
팔기는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연신 내뱉으며 녹영군을 닦달하는 중이었고 녹영군은 몽둥이로 매질을 하며 사형문도를 한곳으로 몰아붙이고 있었다.
드넓은 사형문의 정원은 조금씩 원치않는 형태로 진정되어 가는 듯 보였다. 그때였다. 한 사내가 급하게 당태세가 서 있는 곳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다름아닌 종리세리였다.
사내는 온 몸이 붉게 물든 상태였는데, 그의 손에는 예의 당태세가 지니고 다녔던 목괴가 들려있었다.
“종리세리.”
“안 나오시는 줄 알고 깜짝 놀랐습니다. 모두 해결하신 겁니까?”
“표범무늬 비갑을 입고 검을 든 노인 하나를 보지 못하였는가?”
종리세리는 당태세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저는 보지 못했습니다. 이곳에서 싸우는 동안 본채에서 이쪽으로 나간 이는 없습니다.”
“그럼 정문으로 나갔겠구먼.”
“정문 쪽에서는 팔기와 녹영이 들이닥쳤으니 쉽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면 문이라고는 서문밖에 없겠지요.”
종리세리는 말을 마치고 서쪽을 바라보았다. 당태세 역시 서쪽을 바라보았다.
서쪽 하늘은 지금 불타는 논밭의 연기로 자욱한데, 장원 서쪽에 펼쳐진 드넓은 전답들은 하늘과 땅의 경계를 알아볼 도리가 없었다. 노인의 입이 열렸다.
“놈이 갈 곳으로 갔구나.”
당태세는 종리세리에게 목괴를 받아들고 천천히 서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자욱한 연기 사이로 시뻘건 불길이 솟아오르는 논의 모습은 말 그대로 지옥이나 다름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