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5. 사형문 (5)
묘광조 남궁지천은 광(光)자 배분을 쓰는 십대제자중 수위를 다투는 이라. 그 정묘하고 현란한 도법은 사형문 안에서 발군이요, 북경 구대문파 중에서도 다섯 손가락에 안에 들어갈 경지의 위인이었다.
그것도 평범한 안령도나 대도가 아닌 무겁기로 소문난 구환도로 구현하는 화려한 도법은 일신에 지니고 있는 무공이 어느 정도 경지에 이르렀는지를 짐작케 하였다.
하지만 지금 그의 적수는 다름 아닌 순천문주 귀린갈 당태세였으니, 북경 근역에 적수가 없다고 알려져 있던 일세의 고절(高節)과의 검투는 누가 낫고 누가 낮다고 말할 수 있는 계제가 아니었다.
“오래 걸리지는 않겠구나.”
당태세가 산책하며 시를 읊듯 한가로이 말하며 이 빠진 박도를 들이대자 남궁지천 역시 구환도를 들고 쇠고리를 대답대신 짤랑거렸다.
두 사내가 천천히 맴돌며 새파란 대나무가 만들어놓은 어두운 광장 안을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푸른 하늘은 수평으로 유장하게 뻗어있고 초록 죽림은 하늘에서 땅으로 수직으로 내려와 사방을 세세하게 가르고 청록(靑綠)의 깃대를 하늘로 올려놓았다.
죽엽(竹葉)은 땅에 떨어져 노랗게 변하며 땅의 색을 닮아 가는데, 그 위로 세찬 바람이 지나가자 죽은 나뭇잎이 땅 위를 기어 다녔다.
“네놈이 명부로 가기 전에 하나만 더 물어볼까?”
“하문하십시오.”
“왜 나에게 칼을 들이대었느냐?”
“문주의 명을 거스르지 못함이 사문의 도리였소.”
“오직 그 이유뿐이었느냐?”
“속하(屬下)는 칼잡이요. 다른 이유가 무엇이 필요하리이까.”
“그 나이 먹도록 생각하는 변명에 다른 것이 없으니, 네 삶이 올곧았거나 생각이 없거나 둘 중 하나란 말이냐?”
당태세의 신랄한 물음에 남궁지천은 슬쩍 눈썹을 꿈틀대더니만 입맛을 다시고 한숨과 함께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문주에게 칼을 들이댐은 명령이었으니 지금도 일절의 후회가 없소이다. 다만….”
“다만?”
“내 나라가 망한 것을 보고도 아직까지 살아있음은 늘 후회하고 있었소.”
당태세의 시선이 천생 무인의 눈동자를 향하였다. 두 사람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바람이 불고 대나무가 흔들리자 가지가 울었다. 가지가 울자 끝에 달려있던 이파리들은 근본과 떨어져 몸을 세차게 감으며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졌고, 이파리들이 석상처럼 칼을 든 채 멈춰 선 사내들의 머리를 지나 눈으로 떨어질 때, 두 사람의 팔이 떨어지는 이파리를 쪼개며 앞으로 날아갔다.
아홉 고리 강철이 매달린 두껍고 무거운 도가 바람을 쪼개며 적수를 향해 움직였다.
날이 빠진 박도를 들고 있던 노인은 들어오는 중병(重兵)을 가볍게 올려막고 빈자리를 찾아 팔을 뻗었다.
두 사람의 몸이 바람을 걷어차고 물처럼 움직였다. 사내들의 움직임은 그침이 없고 계속 이어져 점이 아닌 선이 되는데, 사내들의 팔에 들린 칼은 쉬지 않고 움직이며 바람을 뚫고 들어오는 상대편의 참격을 피하고 막았다.
사내들의 참격과 자격은 실로 날카롭고 유장하며 무거우면서도 예리하니 속절없이 사방으로 몰아치는 도격(刀擊)은 사내들의 몸 대신 널려있는 수직의 죽림으로 분별없이 떨어졌다.
아이의 팔뚝만 한 대나무들이 사내들의 칼질에 소리없이 일도양단되며 천천히 아래로 무너져 내렸다. 잘려나간 곳은 모두 새로운 죽순이 되어 하늘로 솟아올랐는데, 그 솟아오른 끝부분은 하늘을 쪼갤만큼 날카로웠다.
두 사람의 칼은 번개처럼 움직이며 어두운 대나무숲 속에서 서로 붙고 떨어지는데 사내들의 그림자가 서로 붙고 떨어질 때 하늘에서는 죽엽(竹葉)이 흩날리며 사내들 머리위로 때아닌 녹우(綠雨)를 뿌려대었다.
두 사람의 간격은 가까우면서도 멀어 두 자루의 칼이 간격을 좁히며 상대의 급소를 노릴 수 있었고 늘 한 치가 모자라 상대의 생명을 취할 수 없었다.
늙은 당태세는 눈살을 찌푸리며 한 발짝을 더 들어가 남궁지천의 구환도 안으로 자신의 몸을 온전히 밀어넣고 박도를 휘두르는데, 남궁지천은 다시 반보를 물러서며 들어오는 당태세의 칼로부터 자신의 요혈을 방어하였다.
순간 당태세의 손이 번득이며 이 빠진 박도가 바람을 휘몰며 요광조의 앞으로 들어가자, 묘광조의 구환도가 번쩍이며 들어오는 박도를 그대로 얽어내며 당태세의 목을 향해 날아갔다. 당태세의 어깨가 들리며 고개가 어깨 아래로 묻혔다.
노인은 그대로 구환도의 도배를 타고 몸을 앞으로 뻗으며 이빠진 박도를 그대로 들이미는데, 박도의 끝은 곧장 앞으로 뻗어 묘광조 남궁지천의 가슴과 목 중 한 곳을 점하고 참(斬)할 곳을 가리는 중이었다.
순간, 묘광조의 몸이 그대로 바깥으로 벗어나며 박도에서 다시 멀어지니 당태세의 박도는 이미 묘광조의 몸을 쫓을 거리를 벗어나 있었다.
몸을 뒤틀며 칼을 뺀 묘광조의 어깨가 위로 들리며 구환도가 당태세의 칼 잡은 어깨를 향해 떨어졌다. 하지만 그 순간 묘광조 남궁지천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미 당태세의 어깨는 구환도가 내려가는 곳에 있지 않았고, 당태세의 칼도 어깨의 연장선에 놓여있지 않았다.
이미 이 빠진 박도는 늙은 당태세의 품 안에 아이처럼 안겨 있었다.
당태세는 구환도가 자신의 목을 향해 날아올 때 박도를 들이미는 척하며 칼을 돌려 손을 가슴 아래로 모은 뒤였다.
묘광조가 본 것은 기세였고, 기세는 허초가 되어 오감을 속이고 그릇된 결정을 만들었으니, 실로 당태세는 한순간의 기략에 목숨을 내걸고 수를 부린 것이었다.
배짱도 아니고 만용도 아닌 생사무별의 움직임이었다.
“맙소사!”
이미 당태세의 몸은 신룡이 구름 위에서 몸을 뒤집듯 뒤로 돌면서 박도를 두 손으로 잡고 남궁지천의 가슴을 치고 있었다.
한 발, 아니, 반보의 간격만 더 벌어졌으면 피할 수 있었을 박도가 고스란히 남궁지천의 가슴에 빨려들 듯 부딪히며 뼈와 내장을 박살내었다.
묘광조의 입에서 선혈이 터져 나왔다.
사내의 손에서 무거운 구환도가 떨어져 수북한 대나무 잎 위에 얹혔다. 허탈한 한숨 같은 숨소리가 묘광조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당태세를 몸을 일으키며 무릎꿇는 사내를 쳐다보았다. 당태세가 입을 열었다.
“들을 말은 다 들었으니 명부로 가거라.”
묘광조의 눈이 당태세를 향하였다.
“귀린갈…속하는…….”
“되었다.”
사형문의 도객이 땅에 쓰러졌고, 나풀대며 하늘에서 내려오던 대나무 잎들이 그의 등 뒤로 떨어져 내렸다.
어느새 종리세리와 섭설평 두 사람은 대숲의 안쪽에서 두 사람의 비무를 바라보고 있었다.
“묘광조가 죽었으니 남은 것은 신도예귀 하나뿐입니다.”
“……앞뒤 꽉 막힌 놈들.”
섭설평의 말에 당태세는 객쩍은 혼잣말을 뿌렸다. 노인은 다시 자신의 이 빠진 박도를 들고 석문에 몸을 기대더니 잠시 허공을 바라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제 묘광조 남궁지천의 몸 위에는 대나무 잎이 고루 흩뿌려져 있는데, 멀리서 보면 마치 깊은 잠에 취해 세상 일을 잊은 사내를 보는 것만 같았다. 당태세는 물끄러미 쓰러진 사내와 서 있는 대나무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몸은 괜찮소이까?”
종리세리의 말에 당태세는 고개를 내저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힘들어 죽겠네. 숨을 쉬는 것도 버겁고 칼을 들기도 버거워.”
“잠시 쉬다 가시오.”
“쉬는 게 더 힘든 일이오.”
당태세는 크게 숨을 들이키고 가슴을 두드리더니 다시 눈을 땅으로 돌렸다. 노인의 눈은 석문 너머 작은 마당과 그 위에 놓여있는 사형문의 본채를 노려보았다.
“이 늙은이는 이렇게 쉬면서 오는 죽음을 맞을 생각은 없소. 달려가서 내 원수에게 죽음을 선사해주고 마무리를 해야지.”
당태세는 숨을 길게 내뿜더니 종리세리를 보며 히죽 미소를 지어보였다.
종리세리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손에 잡힌 박도를 쳐들고는 먼저 앞으로 나서 석문을 빠져나갔다.
“그렇다면 이곳부터는 소관이 길을 열겠소.”
종리세리가 석문을 열고 선봉으로 앞으로 나섰다. 이미 내당에서 빠져나가 본채 앞 작은 마당에 진을 치고 있던 수많은 사형문도들이 죽림을 빠져나오는 세 사람을 보더니 칼을 들었다. 하지만 세 명을 바라보고 있는 뭇 사내들의 표정에는 결의와 두려움이 같이 섞여 있었다.
종리세리가 앞으로 나서 저벅저벅 그들 앞으로 걸어가자 당태세와 섭설평 역시 다시 진을 짜고 종리세리와 발을 맞추었다.
늙은 무인의 우편에는 온 몸이 붉게 물든 북경 출신의 천호요, 노인의 왼쪽에는 백안의 장발 도객이라, 셋은 좌우로 치우치지 않고 곧장 앞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으니, 가히 만부부당 절세고수 셋의 기세가 수십 수백의 도객이 운집한 건너편에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 호호탕탕(浩浩蕩蕩)한 기백은 머릿수를 상회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물러서라. 네 목숨은 부모가 물려준 것이지 사형문주가 준 것이 아니다. 우리 칼은 유독중 한 사람에게 오롯이 갈 것이니 모두 칼을 버리고 집으로 돌아가라.”
당태세의 낮은 목소리에 배분이 높아 보이는 사형문도 하나가 칼을 높이 들더니 아래 늘어선 문도들을 향해 소리 질렀다.
“노괴의 말에 현혹되지 마라! 우리는 일사각오로 사형문을 수호한다!”
“존명!”
섭설평이 혀를 차며 칼을 흔들었다. 당태세 역시 눈살을 찌푸리며 자신의 박도를 다시 움켜쥐었다. 노인의 이가 부드득 갈리며 이가 드러났다.
“유독중, 십칠년 전에 네놈의 명(命)과 율(律)이 오늘처럼 가지런했더라면 명(明)이 그렇게 치욕스럽게 망했겠느냐! 전화(戰火)에 궁궐의 주춧돌까지 녹아 사라졌더라도 송(宋)의 애산(涯山)처럼 사람들 사이에 영영히 남았을 것인데!”
노인의 눈에서 불꽃이 튀었다.
“필요한 곳에서는 발을 빼더니 쓸모없는 곳에서 사람의 생을 값없이 날리는구나! 네 놈은 정녕 무간지옥에 떨어지리라.”
“모두, 쳐라!”
말과 함께 세 사람을 향해 사형문도들이 고함을 지르며 칼을 빼들고 들어왔다.
사내들의 함성은 용기백배하여 내는 것이 아닌 자신을 속이기 위해 내지르는 괴성인 바, 종리세리는 눈살을 찌푸리며 그들 사이로 먼저 뛰어들며 박도를 휘둘렀다.
채 그치지 않았던 함성이 비명이 되어 계속 이어지기 시작했다 섭설평의 박도가 번득이며 앞으로 나가며 칼과 사람을 사방으로 날리는데, 당태세는 그 사이를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며 맨 처음 문도들을 독전(督戰)한 사형문도를 향해 칼을 치켜들었다.
“쓰레기 같은 놈.”
노인의 폭사하는 안광을 받은 사형문도는 조금 전까지의 기개는 어디론가 날려버리고 순식간에 안색이 변하며 칼을 쥔 손이 부들대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리는 뻣뻣하게 굳어 도망을 치고 싶어도 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자신의 주변을 지키고 있던 사형문도들은 이미 종리세리와 섭설평에 의해 근골이 분리되어 사방에서 아비규환이 벌어지는데 사람들을 몰아낸 위인은 정작 아무 짓도 하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기만 할 뿐이었다.
“재주없고 미천한 놈들이 혓바닥만 길더라.”
당태세가 어느새 자신의 눈 앞에 서자 사형문도는 멍하니 노인의 눈을 바라보았다. 마치 독사 앞에 선 개구리처럼 사형문도는 눈물을 흘리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태세는 그를 노려보더니 사내의 손에 들린 박도를 빼앗았다. 사내는 저항 하나 하지 않고 칼을 내주었다.
당태세가 빼앗은 박도는 새하얀 광망이 돌 정도로 깨끗하게 날이 서 있는데 만든 뒤 한 번도 사람이든 물건이든 베어 본 적이 없는 새것 같았다. 당태세의 이가 드러났다.
“넌 죽일 가치도 없다만 살려 둘 이유도 없구나.”
순간 당태세의 손이 번득이자 사내의 머리가 땅으로 떨어졌다. 사형문도의 칼은 자신의 주인을 첫 제물로 삼고 노인의 손에 들렸다.
당태세는 고개를 돌리며 두 사내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두 사내는 울창한 인(人)의 풀숲을 두 갈래로 벌초하듯 길을 내면서 앞으로 다가오는데, 당태세는 그들을 보며 날카로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본채로 돌입한다! 모두 뒤를 따르시오!”
노인의 말을 듣고 섭설평이 앞을 막은 문도 둘을 순식간에 베어버리고 당태세의 앞으로 뛰어들었다.
독전하는 이가 죽고 살아남아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사형문도들은 이제 무공을 익히고 칼질을 하는 이들보다는 동료의 죽음에 눈이 뒤집히거나 살기 위해 마구잡이로 칼을 휘두르는 이들이 태반이었는데, 말 그대로 오합지중(烏合之衆)이 따로 없었다.
“두 분이 먼저 들어가시오.”
종리세리가 차분한 목소리로 박도를 휘두르면서 두 사람의 후미에서 칼을 막아내며 말하였다. 사내는 마치 다관에서 말하듯 조용하고 온화한 목소리로 당태세를 향해 말을 걸고 있었다.
“이들이 모두 본채로 들어가는 것보다 여기에서 요격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종리세리. 그대 혼자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당태세의 말에 종리세리는 보기 힘든 미소를 지어보이며 여전히 칼을 휘둘렀다.
당태세 일행은 본채로 올라가는 좁은 계단을 타고 위로 들어가는데, 종리세리는 계단의 중간참에서 몸을 돌리더니 그 자리에 수문장처럼 멈춰 서서 밀려오는 사형문도들을 보며 말했다.
“지리(地理)의 잇점을 살리면 만부부당이오. 아무쪼록 빨리 해결하고 돌아오십시오. 소관이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으시면.”
당태세는 등을 보이고 있는 종리세리를 지켜보더니 이를 악물었다.
당태세는 섭설평과 함께 문 앞을 막고 있는 시위들을 베며 사형문의 본청 안으로 쇄도했다.
멀어지는 두 사람의 발소리를 듣고 있던 종리세리는 굳은 입에 머금고 있던 분노를 조금씩 드러내며 눈살을 찌푸리고 눈썹을 꼿꼿이 세우며 눈을 크게 부릅뜨더니 온 얼굴에 격노를 드러내었다.
“모두 오너라!”
사내는 아래에서 자신을 향해 몰려드는 사형문도들을 보며 노호성을 질렀다.
“나는 종리세리! 구이도 종리세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