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 사형문 (3)
“대문에서 수문장이 이르시길, 귀인이 문상을 오셨다고 들었소이다. 듣기로 포일문의 지인들과 함께 오셨다고 하던데 어디 계십니까.”
내당에 들어온 두 명의 사내는 지극하게 공손한 어조로 말하였지만 마숙영 앞에 앉아있는 네 명의 사내를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종리세리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그들을 마주보았다.
“그대들은 누구인가?”
그러자 내당에 들어온 사내 둘이 종리세리를 보면서 날카로운 눈빛을 발하였다.
“우리는 사형문의 규율을 관할하는 사내들이오. 저는 신도예귀(神到銳晷) 한제경이라 하고 이 친구는 묘광조(妙光鳥) 남궁지천입니다.”
“선무사 천호 종리세리라 하네.”
종리세리의 대답에 두 사내는 동시에 고개를 슬쩍 숙였다.
긴 수염을 아래로 늘어뜨리고 검게 물든 피곤한 눈매를 지닌 신도예귀는 머리에 검은 소모를 눌러쓰고 있었는데 나이 지긋한 사내의 모습은 무인이라기보다는 궁벽한 산촌의 도필리(刀筆吏) 같은 모습이었다.
그에 비해 옆에 서 있는 묘광조 남궁지천은 전형적인 무인으로 양 볼이 움푹 들어가고 광대뼈가 툭 튀어나와 있는데, 그 날카롭고 예리한 눈매가 종리세리와 매일반이었다.
“문주께서 먼저 저희들을 보내 귀인(貴人)을 확인하라 말씀하셨습니다. 원로장도에서 기인(旗人)이 오셨으니 문주께서 직접 나오시는 것이 예의일진대, 지금 너무나도 황망하고 원통하시어 몸소 나오시기 곤란하다 하셨습니다. 아무쪼록 기인께서는 이 점을 해량하셔서…….”
“잠시라도 뵐 수가 없겠는가?”
청산유수 같은 신도예귀의 장광설을 듣던 종리세리가 단칼에 말을 잘라버렸다. 하지만 신도예귀 한제경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도 자신의 말에 물러섬이 없었다.
“오늘 이 은혜를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허나 만남은 어려우실 것 같습니다.”
능청스럽게 대꾸하는 신도예귀를 보며 당태세는 얼굴을 숙인 채 눈을 돌려 그들의 용모를 확인하는 중이었다.
신도예귀와 묘광조 두 사내는 나이를 먹어 불혹(不惑)을 넘어 지천명을 넘어가고 있었으니 젊은 시절의 용맹함보다는 관록으로 사람들을 부리는 모양새였지만 당태세가 기억하는 한 저 두 사람의 무위(武威)는 나이를 먹었다 얕잡아 볼 수 없는 종류였다.
그리고 저들은 누구보다 당태세의 눈매를 잘 기억할 이들이었다. 북경의 황도가 무너지던 그 날, 앞장서서 자신을 향해 칼을 들이댄 이들이 바로 저 두 사람이었다.
당태세는 그 날의 기억이 불현듯 떠오르자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고 눈매에 살기가 흘러들었다. 그 순간, 묘광조 남궁지천이 심드렁하니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끝을 얼버무리며 고개를 슬쩍 옆으로 돌렸다.
“기인(旗人)께서는 약조가 있으시니 그렇다 하여도…저 뒤의 포일문과 그 종복들은 무슨 용무가 있는 것인가?”
“나도 오랜만에 우리 문주님을 뵈러 왔소이다. 그 동안 너무 격조하였소.”
“아, 섭설평이로구먼. 그대는 그렇다 치세. 그 뒤의 두 사내도 문주님을 뵈러 갈 것인가.”
한가롭고 느릿느릿한 묘광조의 말투와는 달리 사내의 예리한 눈매는 섭설평 너머에 있는 아룡과 당태세의 등을 노려보고 있었다. 철장타가 남궁지천을 보며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인사만 드리고 나갈 것이오. 여기까지 왔는데 어찌….”
“내가 그대에게 물음을 던졌는가. 철장타? 섭설평과 그 두 사람에 말을 물었지.”
묘광조 남궁지천의 눈은 두 사람에게서 떠나지 않았다. 종리세리가 눈살을 찌푸리며 묘광조를 쳐다보았다.
“지금 무엇을 하자는 것이냐. 당장 문주께 우리를 모두 안내하여라. 내가 저들과 동행하자 하였으니 나도 같이 움직일 것이다.”
“기인께 죄송하옵니다. 저는 등을 구부린 사내아이가 아니라 저 늙은이에게 신경이 쓰여서 말이지요.”
“이 놈이 지금 나와 같이 온 사람을 욕보이는 것이냐!”
“그것이 아니오라 예전부터 면식이 있던 이 같아서 말입니다.”
“면식이라니, 네가 사천에 살고 있는 모든 이를 다 알고 있다더냐?”
그러자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신도예귀 한제경이 입을 떼었다.
“어서 일어나시오. 순천문주 당태세. 그대가 복색을 바꾸고 머리를 밀었다고 우리가 몰라볼 것이라 생각하였는가?”
종리세리가 입을 다물었다. 섭설평 역시 멍하니 사람없는 곳을 쳐다보았다. 일순간 내당 안에 침묵이 들어왔다. 보이지 않는 살기가 무럭무럭 자라나 내당 안을 가득 채웠다.
당태세의 눈동자는 마숙영의 시신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묘광조의 흐르는 듯한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귀린갈. 다른 이들은 몰라도 우리는 그대의 용모를 잊지 않소이다.”
“당태세! 일어나라! 일어나서 사내답게 마주서지 못할까!”
신도예귀 한제경의 목소리가 천둥처럼 내당을 쩌렁쩌렁 울렸다. 아룡이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한제경의 호령을 신호로 기둥과 벽 뒤에 숨어있던 사형문의 사내들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모두 검은 옷에 머리에 끈을 묶고 허리에 길고 예리한 박도를 하나씩 차고 있었는데 도신이 얇고 반듯하여 찌르고 베기 좋게 만들어져 있었다.
그에 반면 지금 마숙영의 시신 앞에 있는 당숙군 일행은 모두 무기를 해검하고 들어온 상황이었고, 수중에 남은 것이라고는 주먹밖에 없었다.
철장타 위목손조차 쇠지팡이를 다른 곳에 두고 온 듯 두 손을 불끈 쥐고 주변으로 다가오는 사형문들을 노려볼 뿐이었다. 아룡이 눈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겁먹은 눈으로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당태세는 여전히 붉은 비단으로 얼굴을 감싼 채 누워있는 마숙영의 시신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사형문도가 사내들을 향해 다가왔다. 종리세리가 천천히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백안의 섭설평 역시 눈살을 찌푸리고 주변으로 다가오는 사형문도들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그 순간, 묘광조 남궁지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모두 참(斬)하여라!”
그때였다. 당태세의 눈이 크게 떠지며 입이 벌어졌다.
“무두리!”
당태세의 입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노인의 두 손이 시신이 올라가 있는 문짝 위로 올라갔다.
노인의 두 손에 문짝 위 밥그릇에 올라가 있던 젓가락 두 자루가 잡혔고, 그와 동시에 노인의 손이 옆으로 뻗었다. 순간 노인의 손에서 뻗어나간 검은 그림자가 그대로 종리세리와 섭설평의 앞에 있던 사형문도 두 사람의 목에 박혔다.
두 사내가 칼을 떨어뜨리며 목을 움켜쥐는 것과 동시에 종리세리와 섭설평의 손으로 박도가 넘어갔다.
신도예귀 한제경의 눈이 휘둥그레 커지며 칼집에서 시퍼런 요기가 도는 칼날을 뽑아내었다. 기둥 뒤에 있던 사형문도들이 소리를 지르며 철장타와 당태세를 향해 칼을 내밀었다.
그 순간 당태세의 손이 다시 한 번 번쩍였다. 어느새 당태세의 손아귀에는 문짝위에 저승길 노잣돈으로 올려놓았던 엽전들이 들려 있었다.
당태세의 손이 허공에 한 번씩 손질을 할 때마다 사내들이 목과 눈을 움켜쥐고 그 자리에 쓰러지자 아룡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노인은 아룡을 보며 다급하게 한 번 더 소리쳤다.
“철장타! 저 아이를 맡아주게!”
무두리, 아룡은 있는 인상 없는 인상을 다 쓰며 죽어 넘어간 마숙영의 시신을 어깨 위에 들쳐 업고 있었다. 사형문도들이 시신을 탈취해가려는 아룡을 향해 일제히 몰려갔다.
그 순간, 갑자기 옆에서 거대한 바람과 함께 시커먼 그림자가 들어오는 사형문도들을 일순간에 덮치며 사내들을 바닥으로 굴려버렸다. 쓰러진 사내들은 모두 얼굴에서 피를 흘리며 팔이 부러진 채 비명을 질러댔다.
아룡의 앞에는 어느 새 철장타 위목손이 서 있었는데 노인은 두 손으로 마숙영이 누워있던 문짝을 두 손으로 들고 마치 방패처럼 휘두르며 자신의 주인을 향해 다가오는 이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 앞의 샛문으로 나가시오. 공자! 내가 뒤를 맡을 것이니!”
아룡은 철장타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마숙영을 업고 뛰기 시작했다. 철장타 역시 그를 힐끗 보면서 아룡이 나간 길을 막고 문짝을 좌우로 휘두르며 사형문도들의 길을 막아냈다.
그 순간 당태세가 그들의 뒤로 들어오더니 사형문도들의 가슴팍을 권과 장으로 가격하고 옆으로 휘돌며 팔꿈치로 태양혈을 찍어 넘겼다.
순식간에 세 명의 사내가 그대로 나무토막처럼 떨어지는데, 당태세가 철장타를 보며 소리 질렀다.
“너도 나가라! 네가 살아야 나머지도 산다!”
“존명!”
순간 한 명의 장창수가 창을 휘두르며 당태세를 뒤에서부터 찔러 들어왔다.
당태세의 눈이 번득이더니 두꺼비처럼 몸을 바싹 붙이더니만 창날을 머리 위로 피하고 그대로 일어서며 창수를 향해 돌격했다. 하지만 창수 역시 이미 반격을 예상한 듯 그대로 창날을 뒤로 빼며 허공에서 한 바퀴 창을 돌리고 번개처럼 당태세의 허벅지를 향해 창날을 내리쳤다.
그 순간 당태세가 오른발을 들어 들어오는 창날을 그대로 다리로 받았다. 쇳덩이와 쇳덩이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려퍼지자 창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당태세의 오른발이 어느새 창날을 밟고 두 손을 교차시키자 우직 소리와 함께 창대와 창날이 박살나버렸다.
창대를 맨손으로 박살내는 공부에 창잡이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지만 이내 창대를 버리더니 두 손을 불끈 쥐고 당태세를 향해 백타(百打)로 덤벼들었다. 당태세가 흠칫 놀라더니만 혀를 찼다.
“만용(蠻勇)이구나.”
당태세의 손에는 이미 창날이 잡혀있었다. 두 손을 휘저으며 당태세를 때려잡겠다는 기세로 들어오는 창수를 물끄러미 보던 당태세의 오른손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갔다.
사내의 두 손이 당태세의 얼굴에 닿기 전에 당태세가 쥔 창날이 먼저 창수의 가슴을 찌르고 빠졌다.
사내의 입에서 김이 새어나오는 소리가 들리며 그대로 무릎을 꿇는 순간, 그의 뒤에서 도수 두 명이 재빠르게 양옆에서 당태세를 향해 달려왔다.
당태세가 사내들을 보더니 창날로 죽은 창수의 가슴팍을 한 번에 위로 그어 올렸다. 단추들이 일순간에 날아가며 사내의 저고리 앞섶이 풀렸다.
당태세의 손에 사내의 저고리가 들리는 순간 앞장서 들어오던 사내의 박도가 머리 위에서 떨어졌다.
당태세의 두 손이 위로 들리자 잡고 있던 저고리의 양팔이 활짝 펴지며 박도를 감쌌다. 순식간에 천에 휩싸인 박도는 노인의 손에 잡혀 한 치도 움직이지 않았다.
눈이 휘둥그레진 도수의 다리 사이로 당태세의 무릎이 날아가고 연이어 팔꿈치가 머리에 떨어졌다.
동료가 쓰러지는 꼴을 본 다른 도수가 예리한 파공성을 내며 박도를 곧게 앞으로 내질렀다. 당태세는 들어오는 박도를 피해 옆으로 나서며 사형문도의 팔목을 잡고 그대로 아래로 비틀려 돌렸다. 건장한 사형문도의 두 발이 솟구치며 머리부터 땅바닥에 떨어졌다.
순식간에 두 명의 도수가 땅바닥에 구르며 두 자루의 박도가 당태세의 손아귀에 잡혔다.
노인은 칼을 손에 넣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히죽 미소를 지으며 자신들을 둘러싼 사형문도와 그들을 지휘하는 두 명의 십대제자를 바라보았다. 노인은 그들을 바라보며 심중 한 곳에 담아두었던 말을 내뱉았다.
“죽기 싫은 놈은 모두 칼을 버리고 달아나라. 두 번 말하지 않겠노라!”
“모두 쳐라!”
묘광조 남궁지천의 느리지만 힘있는 목소리가 내당 안에 울려 퍼지는 순간,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형문도들이 일제히 장님과 기인(旗人)과 노인을 향해 뛰어들었다. 노인이 그들을 바라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오랜만에 노인의 눈빛이 어두운 방 안에서 번득였다.
“발 디디는 곳마다 아비지옥이로다!”
노인의 두 팔이 움직이며 동시에 두 자루의 박도가 춤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