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사천 포일문 (4)
구름들은 이제 산산이 흩어지고 틀어지더니 낮은 곳을 흐르던 조각구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푸른 하늘 위에 길고 가느다란 백(白)의 궤적을 만들며 천녀의 머리카락처럼 천공 위에서 나부끼고 있었다.
계단을 너머 올라간 곳에서는 흙냄새와 쇠냄새가 같이 풍겨왔다. 지키고 있는 사람은 없으되, 흙투성이의 괭이 든 사내들이 모여 올라오는 당태세와 종리세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당태세를 보고 그의 손에 들린 목괴와 종리세리의 칼을 유심히 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무릎을 꿇었다.
“저희의 업을 계속 이어가게 해주소서.”
“너희는 광부들이냐.”
당태세의 말에 그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이곳의 철맥(鐵脈)은 깊이가 얕고 쇠가 찰지고 끈기 있습니다. 이런 철맥은 귀하여 평생 보기 힘든 곳입니다. 광부들에게 이곳의 쇠를 캐는 것만큼 훌륭한 일은 없사옵니다.”
당태세는 무공의 도(道)를 모르고 채굴의 묘(妙)를 아는 이들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의 쇠가 아래로 내려가 야장들의 공으로 도구가 되는구나.”
“그러하옵니다.”
“너희의 끈질기고 찰진 쇠가 날 선 검과 창이 되어 사람의 근골(筋骨)을 쉽게 자르고 생명을 빠르게 앗아간다. 그것이 너희에게 훌륭한 일이더냐.”
“그것은 저희의 소관이 아니라…….”
“너희는 그것을 알았느냐 몰랐느냐.”
당태세의 말에 사내들은 고개를 숙였다. 당태세는 목괴를 땅에 짚고 그들을 노려보았다. 어디까지를 용인하고 어디까지를 참아야 하는가.
노인은 눈을 질끈 감고 푸른 하늘 아래 검은 철광을 바라보는데, 하나둘 몸을 일으킨 사내들은 고개를 떨구고 당태세 옆을 지나가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노인은 다시 눈을 뜨고는 위로 펼쳐진 계단을 바라보았다.
이제 이 언덕 아래 숨을 쉬는 생령은 당태세와 종리세리, 그리고 저 위에 홀로 기거한다는 포일사성의 대사형 하나뿐이었다. 노인이 계단을 다시 오르자 종리세리 역시 그의 뒤를 따라 계단을 타고 올라갔다.
잘고 낮은 계단은 끝없이 이어져 하늘로 올라갔고 그 하늘과 땅이 맞닿는 곳에 평평한 작은 마당이 놓여있는데, 그 마당의 귀퉁이에 작은 초옥하나가 지어져 있었다.
사방 천하의 녹색 들판이 한눈에 조망되는 선경(仙境)과 다름없는 곳이었으나, 당태세는 위에서 보이는 풍경을 보면서 혀를 차고 있었다.
“이게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종리세리가 당태세의 말을 듣고 무슨 뜻인지 알지 못해 노인을 쳐다보자, 노인은 초옥을 향해 굵고 낮은 소리로 호명하였다.
“무경학은 나오너라. 순천문주 당태세가 왔느니라.”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의관을 정제하는 중입니다.”
맑고 또렷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잠시 뒤, 초옥의 문을 열고 나타난 사내를 바라보던 종리세리는 눈을 슬쩍 크게 떴다.
변발을 치지 않은 회색머리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미장부였다.
사내는 옛 명(明)의 복식을 그대로 따르며 허리에는 은이 상감되어 있는 화려한 허리띠에 그에 걸맞은 화려한 검을 차고 있었는데, 훤칠한 키에 관옥(冠玉)같은 얼굴은 그야말로 신선이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종리세리가 놀란 것은 그 때문이 아니었다. 사내의 눈은 말 그대로 백안(白眼)이었다.
사내는 분명 천지와 사방을 분간하지 못하는 장님이었는데, 좁은 산꼭대기의 마당 위를 거침없이 걸어서 당태세에게 다가오는 중이었다.
“당문주님의 기운과 체취는 이미 아래에서부터 느끼고 있던 참입니다. 한 분이 더 계시는군요.”
“종리세리라 합니다.”
“강하고 곧은 기운이오. 절세의 고수시구려.”
어느새 무경학이라 불린 사내는 종리세리와 당태세의 앞까지 다가와 서더니 두 팔을 모으고 이마 위로 올려 당태세에게 공손한 수례를 올렸다.
“무경학(無耿鶴) 섭설평. 순천문주께 문안을 드리옵니다. 그간 강녕하셨사옵니까?”
“너는 내가 살아있는데도 놀라지 않는구나.”
“사람의 외형은 속여도 기운과 체취를 같이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귀신도 못할 일이니 어찌 제가 문주가 살아계심을 모르겠습니까?”
“너는 변발을 하지 않았으니 이 산 바깥으로 나가지 않은 것이로구나. 언제부터 머리를 기른 것이냐?”
“삼 년 되었습니다. 독비응도 철광에 갇혀 나오지 않았지요.”
기운으로 사람의 흔적을 느끼는 무경학이 두 명의 사제가 죽은 것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무경학은 당태세 앞에서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다.
당태세는 오랜만에 만나는 무경학의 모습이 십칠년 전과 변하지 않았음을 보며 안도감와 처연함을 동시에 느꼈다. 이 사내는 자신의 사제들과 달리 무공연마를 게을리 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포일문에서 가장 오성이 뛰어나고, 어쩌면 다음 포일문의 문주가 되었을지도 모를 사내는 지금 산꼭대기에서 보이지 않는 풍경을 보며 지내는 중이었다.
“마길에 대해 말하여라.”
“사모께서 돌아가신 뒤, 문주께서는 문도들을 내보내고 사형문의 유독중에게 의지하며 모든 것을 그의 의지대로 하였습니다. 이 야장은 유독중이 문주에게 명하여 만들어진 곳이고, 이곳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모두 사형문의 무기입니다.”
“그것은 보고 왔느니라.”
“그것이 전부입니다. 성도의 대장간은 철장타와 문주의 독녀가 지키고 있습니다만…그쪽은 이곳과 교류가 없습니다.”
이미 알고 있거나 보면서 확인한 내용들이었다. 더 물어볼 것은 없어 보였다. 당태세는 예를 지키며 서 있는 무경학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을 건넸다.
“왜 너희는 포일문을 버린 것이냐?”
“저희가 아니라 포일문주께서 저희를 버린 것입니다.”
무경학은 나이를 먹었지만 여전히 청수한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포일문주 마길에 대한 것을 말하게 되자 슬쩍 입술 근처에 주름이 잡히고 눈가에 주름이 잡히는 것이, 사내의 심중에는 여전히 단단한 매듭이 맺혀 있었다.
“포일문주는 캄캄했던 제 삶에 새 빛을 주셨습니다. 하지만 이것을 갑자기 놓으라 하였습니다. 그것도 아무런 통찰없는 멍한 어조로 명을 내리셨지요. 저는 그것을 지키는 것이 도리인가 미욱한 짓인가를 생각하며 지금까지 이곳에 머물러 왔습니다.”
“평생 그리 고민만 하였겠구나. 너는 네 스승을 잔해하지 못할 위인이로다.”
당태세의 말에 무경학은 고개를 숙이고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번민이 억겁(億劫)에 달하였으나 견성(見性)을 하는 것이 두려웠나이다. 살부살조(殺佛殺祖)가 해탈을 가져올 것인지 죄과와 후회만을 가져올 것인지 저 같은 범인(凡人)이 어찌 알겠나이까?”
당태세는 한숨을 쉬더니 목괴를 내려놓고 무경학 섭설평을 보며 말하였다.
“나는 이제 사형문주 유독중을 없애고 포일문주 마길에게 십칠년 전의 죄과를 묻고 그 혈채를 받으려 한다.”
“그러시겠지요.”
무경학의 대답에 당태세의 눈빛이 다시 서늘하게 변하였다.
“내가 진 빚은 목숨의 빚이니 응당 목숨으로 받으려니와, 그들을 비호하고 지키려는 자 역시 그냥 돌려보내지 아니할 것이다. 무경학 섭설평. 너에게 내가 하나를 묻겠노라.”
“말하옵소서.”
“너는 포일문의 사람으로 죽겠느냐, 자유롭게 날아가겠느냐? 나는 네가 십칠년 전 팔대문파가 나를 습격할 때 보이지 않았음을 알고 있다.”
당태세의 말이 떨어지자 무경학은 짧게 고개를 숙이더니 슬쩍 뒤로 한 발을 물러섰다. 사내의 손은 어느 새 검대에 올라가 있었다.
그를 본 종리세리가 안모도에 손을 올리는데, 당태세가 조용히 손을 뻗어 종리세리의 움직임을 저지하였다.
“내가 오매불망 오늘 같은 날을 기다려왔구나! 이 말을 들으니 내 눈이 열리는 것 같도다!”
무경학 섭설평은 탄식인지 기쁨인지 모를 말을 허공에 던지더니 하얀 눈을 들어 당태세를 또렷하게 바라보며 대답하였다.
“나는 포일문주 마길을 만나 우리가 그에게 무엇이었으며 무슨 의미였는지를 목전에서 묻고 싶습니다. 만약 그 대답이 성에 차지 않으면 나는 스스로 탈문하고 다시는 미련을 두지 않을 것입니다.”
무경학 섭설평은 천천히 자신의 검을 검집에서 뽑아내었다.
화려한 은상감이 입혀진 보검(寶劍)이 햇살을 받아 찬란하게 빛을 뿜으며 당태세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마치 어제 벼려낸 듯 찬연한 검광을 뿜어내는 칼을 한 손에 쥔 섭설평의 표정이 엄숙하게 변하였다.
“하지만 그 전까지 나는 포일문의 포일사성이니! 당문주께서 포일문을 침노한다면 나는 그에 맞서 싸울 수밖에 없습니다!”
당태세의 굳어진 얼굴에서 입꼬리가 슬쩍 위로 올라갔다. 노인이 목괴를 두 손으로 잡더니만 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목괴의 끝을 들어 섭설평을 가리켰다.
“네 놈이 드디어 갈 길을 정하였다니 기쁘도다. 그럼 오너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섭설평이 검을 앞으로 뻗은 선인지로의 자세에서 순식간에 방향을 바꾸며 검을 옆으로 누인 채 당태세의 요혈을 찔러 들어갔다.
사내의 자격을 바라보던 종리세리의 표정이 변하였다.
평범하게 들어오던 섭설평의 자격(刺擊)은 당태세의 코앞에서 순식간에 위아래로 파도치며 가슴과 목의 요혈을 거의 동시에 찔러 들어갔다.
당태세의 몸이 반보 뒤로 물러나며 목괴로 가슴을 찌르는 칼을 막아내고 상체를 뒤로 젖혀 들어오는 칼날을 가까스로 피해냈다.
당태세의 목괴가 옆으로 움직이며 섭설평의 목을 벨 기세로 떨어졌다. 하지만 섭설평의 보검이 들어오는 목괴를 가볍게 검날로 튕기더니 검의 반동을 이용하여 그대로 앞으로 뻗으며 당태세의 목을 재차 노려왔다.
검을 세워 지르는 자격의 모양새는 똑같았지만 이번에는 기세가 아까와는 천양지차로 그 패도적인 기세는 청석이라도 뚫어버릴 것 같았다.
당태세는 발을 빼며 방위를 바꿔 목괴로 들어오는 검을 막아내며 히죽 입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당태세의 목괴가 바닥을 스치듯이 휩쓸며 섭설평의 좌우 허리를 연달아치고 머리를 향해 일격을 가했다.
섭설평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한손으로 칼날을 전후좌우 바람개비처럼 휘두르며 들어오는 당태세의 타격을 모두 막아 대더니,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목괴의 기세를 검격 하나로 흘려보내고 바로 앞으로 팔을 뻗으며 당태세의 목을 찔러 들어갔다.
“절초로다!”
당태세의 목괴가 현란하게 움직이며 들어오는 검을 막고 섭설평의 몸을 신나게 난타하였다. 하지만 섭설평의 검도 목괴 못지않게 빠르게 움직이며 들어오는 공격을 모두 막아내며 예리한 자격을 사이사이에 찔러 넣었다.
백안(白眼)의 사내는 천하사방의 모든 것을 다 보고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까지 예견하는 듯 보였다.
종리세리는 자기도 모르게 팔짱을 끼고 두 사람의 신묘한 검결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당태세의 목괴는 천하 사방의 바람을 몰고 오는 태풍과 같다면 섭설평의 검은 그 태풍 사이를 뚫고 지나가는 날렵한 백학(白鶴)이었다. 웅혼한 기세의 타격을 당태세가 퍼붓는 와중에도 자신의 검을 들고 몸 하나를 지키는 것에는 어려움이 없어보였다.
종리세리는 그제야 당태세가 올라오면서 왜 무경학은 다른 이들과 다르다고 하였는지를 알 법하였다.
저 정도의 무위라면 종리세리가 사력을 다하여 싸움을 벌여도 승부를 확신하지 못할 듯싶었다. 하잘것 없어보이던 포일문의 무공 자체가 새롭게 보일 지경이었다.
순간 두 사람이 한곳으로 모여서 칼과 목괴를 부딪혔다가 다시 떨어지며 타격과 자격을 교환하였다. 창졸간에 빛살과 그림자가 상대편의 앞에서 움직였지만 누구 하나 상처를 입은 자는 없었다.
섭설평이 숨을 고르고 다시 검을 앞으로 가져가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몸을 퉁겨 당태세에게 보이지도 않는 속도의 자격을 찔러 넣었다.
순간 당태세의 목괴가 검날을 감으려고 살아있는 뱀처럼 앞으로 꿈틀대며 나왔다. 그러자 마치 눈에 보이기라도 하듯 섭설평이 목괴의 출수에 맞춰 칼을 거두었다. 장발의 사내는 몸을 돌려 검을 감싸듯 뒷춤으로 감추더니 당태세의 앞에서 보법을 바꾸었다.
순식간에 무경학 섭설평의 몸이 회전하며 당태세의 등을 잡았다. 종리세리의 눈이 화들짝 커지며 번개처럼 안모도를 빼들었다.
무경학의 검이 앞으로 뻗으며 당태세의 등을 야멸차게 찍어버렸다.
순간, 무경학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허공을 뻗으며 날아가던 검이 어느새 등 뒤로 내민 당태세의 단괴 가지에 걸려 옆으로 튕겨나갔고, 오른발을 축으로 슬쩍 돌린 당태세의 상체에서 오른손이 죽 뻗어 나와 무경학의 목에 소도를 들이대고 있었다.
소도의 예리한 날은 이미 무경학 섭설평의 목울대를 깊이 누르고 있었다.
당태세의 입이 열렸다.
“포일문의 제자로 할 일은 완수하였으니, 이제 마길을 만나러 가겠느냐?”
“당문주.”
“전력(戰力)이 부족하다. 사형문과 개처럼 붙어서 싸워라. 네가 싸우다 끝까지 살아남으면 마길을 볼 것이요, 설사 네가 싸우다 죽더라도 이 몸이 유독중의 목을 끊는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백안의 사내가 당태세의 말을 어처구니없다는 듯 멍하니 듣고 있더니만 이내 쓴웃음을 지었다.
“저더러 죽을 길을 찾으란 말씀입니까?”
“평생 이곳에서 비몽사몽하며 삶을 마무리 짓겠느냐?”
하얀 섭설평의 눈이 당태세를 마주보았다. 장발의 사내의 표정에 걸려있던 가벼운 웃음은 이미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짧은 말이 사내의 결심을 대신하였다.
“포일문의 무경학이 순천문주의 명을 받들겠나이다.”
당태세가 소도를 목괴에 끼우고 종리세리를 보며 계단을 가리켰다. 종리세리는 어깨를 으쓱거리더니 칼을 칼집에 집어넣고는 다가오는 당태세의 뒤를 따랐다.
순간, 당태세가 다리를 휘청거리며 계단에서 중심을 잃는데 종리세리는 재빨리 손을 뻗어 노인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안되겠소. 진정으로 쉬었다 갑시다. 당문주.”
“아닐세.”
“네?”
당태세의 이마에는 어느새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몸에 남은 것이 있으면 안 되네.”
“무슨 소리요?”
“모든 것을 다 쏟아부을 것이다. 모든 것을 다 내쏟고 끝낼 것이네.”
당태세는 이를 악물더니 목괴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고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늘의 구름은 점점 길게 늘어나며 점점 색이 옅어지며 몸통이 꼬리를 무니 그 시종(始終)을 알 수 없었다. 바야흐로 회천(回天)의 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