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 사천 포일문 (2)
원래 순천문의 무공은 일대일에 특화되어 검결에서 승기를 잡는 것을 제일의 목표로 삼는 문파였다.
다양한 병기와 백타를 조합하여 꺾고 누르고 막고 지르는 행동으로 세 합을 펴기 전에 결판을 내는 것이 순천문의 지향점이었다.
만약 세 합안에 초식이 통하지 않으면 바로 변초를 풀어 살초로 끝을 내는 것이 보통이었다. 순천문의 무공은 단순하고 독랄하기로 유명하였다.
그 중에서도 순천문주 당태세는 지금까지 이어온 모든 순천문의 정수를 체득한 위인으로 이름 높았다. 젊은 시절 강호를 주유하며 순천문의 무공으로 타 문파의 무공과 맞서 타 무공의 장점을 체화하여 순천문의 무공에 접붙여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낸 무인이었다.
무엇보다도 그는 수많은 박투와 난전에 뛰어들며 오직 전장에서 체득 가능한 묘리를 스스로 얻어내었으니, 당태세의 진가는 다름 아닌 난투(亂鬪)였다.
일대일의 검결에 모든 것을 밀어넣은 순천문의 검리와는 정반대의 소질을 얻었으나, 어렸을 적부터 익힌 정순한 무공은 두 가지 이질 된 성향을 하나로 만드는 역할을 해주었다.
젊은 시절 사방 천리에 적이 없다고 일컬어짐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었다.
지금 그 당태세가 탈색된 머리를 휘날리며 한 자루 긴 목괴를 장창처럼 휘두르며 칼의 숲을 향해 뛰어들었다.
노인의 몸은 젊은 적수들의 가운데를 신행귀섬(神行鬼閃)으로 나고 들며 단순한 초식으로 상대에게 살초를 퍼붓고 다음 희생자를 찾아가기를 반복하는 중이었다.
목괴가 하늘에서 땅으로 떨어지면 혈무(血霧)가 불며 사내의 머리가 땅으로 떨어지고 목괴가 바람을 일으키며 앞으로 나아가면 두터운 몸뚱이가 그대로 솟구치며 뒤로 날아갔다.
곤법으로는 제천대성이요 창법으로는 상산의 조자룡인데 한 자루 목괴를 들고 움직이는 사내의 모습은 조나라의 염파요 촉한의 황한승이라, 늙은이의 무용에 새파란 도를 든 젊은이들이 속절없이 깨지고 찢어지며 두터운 진이 그대로 쪼개져 사람 하나 들어가는 길이 절로 생겨났다.
“뭐하는 게냐! 모두 덤벼! 덤비라고!”
황병아는 검을 뽑아들고 도객들의 뒤에서 독전하였지만 칼을 들고 호령하는 것과 짐승과 칼을 맞대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는 법이었다.
무시무시한 인상의 노인이 광기서린 눈을 번득이며 예리한 칼의 숲을 개의치 않고 뛰어들어 바로 앞에서 보이지도 않게 목괴를 휘둘러 옆 사람 머리를 터뜨리는 것을 보면 누구라도 겁이 나기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칼을 거꾸로 쥐고 등을 돌리면 속절없이 목괴가 날아들어 등뼈를 부숴버렸다. 닭 우리에 담비 하나를 풀어놓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칼은 있으나 마나 한 물건이었다.
“모두 비켜라!”
순간 황병아의 옆에 서 있던 절영자가 도를 뽑아들고 앞으로 나섰다.
묵의의 사내는 도객들을 제치고 연기처럼 사내들의 사이를 빠져나가더니 진열을 흩으며 다가오는 당태세를 향해 섬전같은 일격을 날렸다. 난투 중에 보기 힘든 쾌도와 살기가 당태세의 발을 일시에 묶어버렸다.
당태세는 자신에게 칼을 날린 이가 누구인지 바라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목괴를 뻗었다.
“절영자냐. 영(影)자 배분이 어울리는지 한 번 보자.”
“네 몸으로 느껴보아라!”
절영자가 몸을 돌리며 땅을 박차고 위로 솟구치는가 싶더니 그대로 땅으로 낙하하며 도를 당태세의 머리 위로 날렸다. 준수한 사내의 몸이 떨어지며 매서운 도기가 당태세의 어깨 위로 떨어졌다.
노인은 목괴로 떨어지는 도를 가볍게 막으며 목괴의 끝을 뻗어 절영자의 목을 노렸다.
하지만 절영자는 그 자리에 남아있지 않았다. 사내의 신법은 실로 전광석화 같았는데, 당태세의 목괴가 앞으로 뻗는 순간 이미 왼쪽으로 몸을 날리며 당태세의 우측허리를 점하고 있었다.
당태세의 눈이 돌아가는 순간, 당태세의 옆구리를 향해 도가 찔러 들어왔다.
“제법이군!”
노인의 몸이 회전하며 오른발로 땅을 박차고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절영자의 도가 당태세의 배 위를 스치고 다시 옆으로 빠져나갔다. 사내의 몸은 다시 옆으로 빠지더니 당태세의 왼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눈이 돌아갈 만큼 현란한 신법이었다. 당태세의 눈이 가늘어졌다. 공격은 어쩔지 몰라도 신법은 당태세가 지금까지 맞섰던 이들 중에 세 손가락 안에 뽑을 지경이었다.
몸놀림 하나만큼은 구봉방의 팔익이었던 백포인을 능가하는 것 같았다. 당태세의 눈사위가 슬쩍 올라가며 이글이글 타오르던 눈동자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노인의 전진이 멈추자 지금까지 그를 둘러싸고 있던 도객들의 움직임도 바뀌기 시작했다.
“모두 쳐라! 같이 치는 거다!”
황병아가 검을 뽑아 들고 인파를 헤치며 당태세를 향해 움직였다. 상관이 움직이자 지금까지 몸을 사리던 이들도 다시 사기 백배하며 당태세를 향해 덤벼들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눈살을 찌푸렸다. 작은 불똥 하나가 죽어가던 불씨를 되살리려 하고 있었다. 그렇게 놔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당태세의 몸이 반보 뒤로 빠지며 절영자에게서 멀어지더니 순식간에 도객들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절영자와 당태세의 검투를 관전하던 도객들이 순식간에 주인공으로 변하였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순간, 당태세의 목괴가 팔방의 적을 향해 바람소리를 내며 휘몰아쳤다.
순식간에 비명과 칼이 부딪히고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진동하더니 사람들의 벽 일각이 무너졌다. 당태세는 쉬지 않고 다른 도객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목괴는 도끼가 되고 창이 되고 철편이 되어 도객들의 칼을 날리고 머리를 부수고 어깨를 주저앉히더니 급기야는 명을 끊어버렸다.
사람들이 우수수 낙엽처럼 땅으로 떨어지며 차가운 지하 창고에서 마지막을 맞이하는데, 남아있던 이들은 이제 달려드는 노인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지는 중이었다.
“멈춰라! 늙은이를 포위해!”
명(命)이 경각에 달렸는데 명(命)을 들을 계제가 아니었다. 순식간에 독수리를 만난 병아리떼처럼 퍼지기 시작한 도객들은 이제 분수와 체면은 다 집어 던지고 각자 계단을 향해 내달렸다.
그를 바라보던 황병아의 얼굴이 일그러지며 입술을 부들부들 떨었다.
순간 당태세가 그를 막아서는 도객의 머리를 한 방에 날려버리고는 그대로 황병아를 향해 달려왔다. 황병아가 눈을 돌렸을 때는 이미 노인의 번득이는 눈동자가 바로 앞까지 도달한 뒤였다.
황병아가 반사적으로 검을 뽑아들고 당태세의 목괴를 막아서는 순간, 당태세의 눈이 황병아의 어깨를 노려보았다. 목괴가 옆으로 움직이고 황병아의 검이 목괴를 쫓아 검신을 옮겼다.
순간, 노인의 목괴는 어깨가 아닌 반대편의 허벅지를 그대로 내리쳤다. 황병아의 입에서 비명이 흘러나오자 뒤에서 검은 그림자가 튀어나오더니 당태세의 등 뒤를 향해 도를 내뻗었다.
다름 아닌 절영자였다.
그 순간, 당태세는 황병아에게서 손을 거두고는 동시에 목괴의 주둥이를 부여잡고 뒤로 돌며 소도를 흩뿌렸다. 귓가에 스치는 바람소리에 짧은 신음이 묻어나왔다. 황병아의 비명이 터져나왔다.
“소종!”
절영자의 몸에서 날붙이와 피가 같이 땅바닥에 떨어졌다. 황병아는 목을 움켜쥐고 쓰러지는 절영자의 몸을 그대로 감싸안더니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여인의 몸은 사내의 피로 붉게 물들어갔다. 묵의의 사내는 눈을 잠시 깜박이며 황병아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소종! 안돼요! 소종! 일어나. 이렇게 가면 안 돼요! 나는 어쩌란 말인가요!”
얼음 같은 여인의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이내 숨이 끊긴 사내의 얼굴 위로 후두둑 떨어졌다. 여인의 입술이 바르르 떨리더니 숨이 넘어갈 듯 몸을 떨더니 이내 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안돼! 내게 남은 건 당신뿐인데…이제 당신만 남았는데! 같이 하기로 했으면서! 왜 여기서!”
당태세는 소도에 묻은 피를 털고 통곡하고 있는 황병아와 죽은 절영자를 무심하게 바라보았다.
노인의 등 뒤에서 구슬픈 비명들이 연이어 울려 퍼졌다. 종리세리가 남은 잔당들을 착실하게 처리하는 소리였다.
앞에서는 여인의 흐느낌이, 뒤에서는 사내들의 비명이 어두운 지하의 창고 안을 맴돌았다.
당태세는 여인을 바라보며 뭔가 말을 꺼내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잠시 땅을 바라보던 당태세는 다시 크게 숨을 들이키고는 황병아를 바라보았다.
“동성문의 가주 황병아. 보국구대문파맹의 궤멸과 순천문 소문주 당운천, 그리고 명의 황제를 배반한 죄를 묻겠다. 네놈의 아비가 한 죄를 알고도 그 죄과와 유산을 네가 답습하였으니, 너 역시 그 여죄를 면치 못하리라.”
황병아가 부들부들 떨리는 고개를 들어 눈물이 질펀한 눈으로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여인의 얼굴에는 독기와 증오가 가득하였다. 당태세에게 낯설지 않은 얼굴이었다.
목전의 일그러진 얼굴은 오매불망 원수를 찾아다니며 이제는 굳어져버린 자신의 낯과 다를 바가 없을 터였다.
“네 원한이 무엇이관데 십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 우리에게 이런 일을 행하느냐. 내 모든 것을 가져가야 속이 시원할 테냐! 내 부친과 내 친족과 내 가업과! 종당에는 사랑하는 이까지 모두 내 손에서 빼앗아 가느냐!”
“일찍이 네 부친과 네 일족이 이 나라와 순천문에 한 짓이다. 네가 그를 알면서도 내게 그런 말을 하는구나.”
“웃기지 마라! 너는 그저 네 원한 하나를 풀려고 거창한 대의명분을 붙이는 것 아니냐!”
황병아가 악을 쓰며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내가 이런 일에서 손을 떼고 평범한 여염에서 살아갔더라도 너는 나를 노렸을 것이야!”
당태세는 황병아의 말을 듣고 잠시 눈살을 찌푸리더니만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소도를 휘둘렀다. 순간 멍하니 앉아 있던 황병아의 몸이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로 그대로 고꾸라지듯 쓰러졌다.
가슴에서 번져 나온 붉은 피가 여인의 옷에 묻어있던 사내의 피와 섞이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황병아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더니만 이미 숨이 끊긴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 노인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다.
“……그렇게 살았더라면 너를 여기서 만났겠느냐.”
여인의 목소리가 잦아들자 울려 퍼지던 사내들의 비명소리도 잦아들었다. 당태세는 단괴와 소도를 들어 터덜터덜 계단을 향하였다. 계단위에서 칼을 닦던 종리세리가 당태세를 바라보며 물었다.
“어디 상한 곳이 있으시오?”
“멀쩡하네.”
“심신이 탈력(脫力)한 모습입니다. 잠시 쉬는 게 어떻습니까?”
“이미 비명이 지천으로 퍼져 산꼭대기까지 도달했을 터인데 어찌 쉴 수 있겠는가?”
종리세리는 도를 들고 산 위로 뻗어 있는 계단과 굴에서 퍼져 나오는 연기를 바라보며 덤덤하게 말을 받았다.
“소리가 들렸을 터인데 아무런 반응이 없는 게 오히려 이상하긴 합니다.”
“올라가세.”
당태세는 목괴를 지팡이처럼 짚으며 계단을 올라섰다. 계단을 오르던 당태세가 슬쩍 발이 미끄러지며 계단에서 발이 떨어졌다.
순간, 종리세리의 강철 같은 손이 당태세의 손을 잡았다. 사내의 무심한 눈동자가 당태세를 마주보았다. 하지만 종리세리의 입에서 나온 소리는 눈빛과는 다른 것이었다.
“많이 지치셨소. 이대로 올라가면 승기를 놓칠 수도 있소이다.”
“허, 아직 남의 부축을 받은 나이는 아니라네.”
다시 몸을 꼿꼿이 세운 당태세가 발을 성큼 앞으로 올리며 계단 위로 올라섰다.
“승기를 놓칠만큼 지치지도 않았어.”
노인은 성큼성큼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종리세리는 작게 한숨을 쉬며 다시 노인을 따라 계단 위를 타고 올라갔다.
어느새 풀무 옆에서 들려오는 망치소리는 멎은 지 오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