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 사천 포일문 (1)
“포일문주 마길은 내 벗이었소. 막역지우까지는 가지 못해도 흉금을 터놓는 사이였지.”
두 사람은 말을 야장이 보이는 언덕 아래 나무에 매어두고 천천히 걸음을 걷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종리세리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먼저 자신의 과거사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종리세리는 슬쩍 당태세를 봤을 뿐 이야기를 막거나 목소리를 낮추라는 충고를 하지 않았다.
“싸움을 좋아하는 친구가 아니었지. 무문치고는 희한한 사내였어. 대신 이러저러한 잔재주가 많았소. 야장의 재주도 그 중 하나였소. 그리고 잔재주만큼이나 잔정도 많았어.”
두 사람은 돌투성이의 언덕을 지나 언덕 아래로 내려가는 길에 접어들었다.
길은 가팔랐지만 긴 대로에서 이어진 갈래길이 야장으로 이어져 있었다. 보아하니 새롭게 뚫은 길 같았다. 사람이 만든 길은 하늘이 낸 길과 달리 좌우가 가지런하였고 곧고 반듯하게 닦여 있었다.
“그는 젊은 시절, 갈 곳 없고 부모가 내다버린 몸 성치 않은 아이 넷을 데려다가 무공과 학문을 가르쳤지. 그들을 애써 키우고 포일문의 정수를 가르쳤소. 그들이 바로 포일사성(抱日四誠)이오. 철장타 위목손은 종리세리 그대도 보았을 것이고.”
“이 자리에 나머지 셋이 있다고 보시는 겁니까?”
당태세는 종리세리의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들어 연기가 올라오는 언덕 안의 굴을 살펴보았다.
작은 언덕은 기슭의 마지막을 성벽으로 둘러놓아 마치 작은 산성처럼 보였다. 흘러가는 바람을 타고 검은 연기가 흩날리며 푸른 하늘 위로 올라갔다.
“나는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거요. 포일문주가 변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들이 변한 것인지. 혹은 둘 다 인지를.”
“변한 것은 맞습니까?”
“나는 저 안에서 물건들을 보았소이다.”
종리세리가 슬쩍 눈썹을 찌푸리더니 저벅저벅 앞장서서 포일연의 굳게 닫힌 성문 앞을 향하였다. 다행스럽게도 야장은 망루와 돈대를 갖추고 있지는 않았다. 순찰하는 팔기를 의식한 때문인지도 몰랐다.
대신 문 앞에는 살집 좋은 두 명의 사내가 굵은 곤봉을 들고 야장에 접근하는 이들을 경계하는 중이었다.
두 사람의 눈이 무심한 눈빛으로 만주족의 기병도를 차고 다가오는 종리세리를 동시에 바라보았다. 몽둥이가 같이 내려오며 수평으로 뻗어 종리세리의 가슴 앞에서 멈추었다.
“누구냐!”
“종리세리라고 한다.”
“그게 누군데?”
“북경 장군부의 선무사 천호다.”
두 사람이 종리세리의 말을 듣자 화들짝 놀라며 뻗었던 봉을 다시 하늘로 추켜세웠다. 종리세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질문을 던졌다.
“너희들은 포일문의 사내냐 아니면 사형문의 사내냐?”
포일문과 사형문이라는 이름까지 나오자 사내는 바싹 군기가 든 모습으로 발을 딱 붙이고 허공을 보며 절도있게 대답하였다.
“우리는 그저 고용된 사람입니다. 사형문과 포일문의 사람들은 안에 있습니다.”
“문을 열어라.”
종리세리의 말에 두 사내는 서로를 바라보더니 실눈을 뜨며 중년의 사내를 바라보았다. 만주족인지 한족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 사내의 눈빛은 심상하면서도 예리하였고, 두 명의 보초는 입맛을 다시며 말을 고르고 있었다.
“누가 되지 않으시다면 증표나 신분을 증명할 것이 있으셔야…….”
종리세리는 슬쩍 자신의 도를 어루만지더니 이마에 살짝 주름을 만들었다.
“유독중과 마길에게 혼례에 참여해달라는 소식을 듣고 온 것이다. 그 전에 마길을 만나러 온 것인 것 내가 무슨 신분을 증명해야 하느냐? 팔기는 오직 칼로 이름을 대신하니…….”
“저, 마 문주는 이곳에 없으신데…….”
“어쨌건 문을 열어라. 온 김에 이 야장터를 보아야겠다. 물건들도 점고하고.”
“실례가 많았습니다! 문을 열어라! 선무사 천호시다!”
우렁찬 목소리가 안으로 들어가자 빗장이 벗겨지는 소리가 들렸다. 보초 중에 서 있던 사내 하나가 슬며시 인상을 쓰며 종리세리를 보고 말하였다.
“천호나으리, 안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송구하옵니다만 지금 사형문의 본채로 들어가시는 것은 그리 좋은 생각이 아닙니다.”
“뭐라고?”
“사형문주의 신부가 어젯밤에 급서(急逝)하였다는 소문이 들려왔습니다. 저희도 긴가민가하고 있습니다만….”
종리세리의 무표정한 얼굴이 순간 변하더니 눈을 크게 뜨고 입을 벌렸다. 두 보초의 표정이 종리세리를 보며 입을 다물고 눈치를 보고 있자 종리세리가 멍한 표정으로 말을 걸었다.
“이럴 수가 있는가. 나도 사실은 안 좋은 소식을 가지고 왔는데 말일세.”
“네?”
순간, 종리세리의 칼집에서 안모도가 바람처럼 빠지더니 순식간에 두 사내의 태양혈을 번갈아 강타하였다. 도배(刀背)에 얻어맞은 두 사내는 그대로 눈이 돌아가더니만 그 자리에 무릎을 풀썩 꿇는데, 그 모습을 보던 종리세리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내가 선무사 천호에서 파직 당했거든.”
빗장이 벗겨진 문이 천천히 안으로 열리는 순간, 지금까지 보초의 시야 밖에 있던 당태세가 뛰어들며 문을 열고 있는 번수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뒤에서 종리세리의 낮은 목소리가 당태세에게 들렸다.
“이들은 고용된 자들이오. 죽이지 마십시오.”
순간 당태세의 앞으로 뻗었던 목괴가 휘돌더니 오른쪽 사내의 태양혈을 후려치고 바로 회전하는 몸과 같이 움직이며 왼쪽 사내의 가슴과 어깨 머리를 연달아 후려쳤다.
순식간에 두 사람이 소리도 못 지르고 그대로 넘어지는데, 어느새 종리세리는 밖에 서있던 이 둘을 문 뒤쪽으로 옮기는 중이었다. 당태세는 종리세리를 보면서 혼잣말을 하며 투덜거렸다.
“잔꾀는 평생 쓸 줄 모르는 인간 같더니만 어처구니없는 일도 하는군.”
“다 문주를 추적하다가 배운 일입니다.”
머리를 내젓던 당태세는 열린 문으로 포일연의 위아래를 살펴보았다.
문의 위쪽으로 돌을 쪼아 만든 계단이 하늘까지 뻗을 기세로 산꼭대기까지 올라가 있었는데, 각 계단은 뚫린 굴과 연결이 되어 있었고 굴 안에서는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작지만 규칙적으로 울리는 망치소리도 산새소리처럼 아늑하게 울려 퍼졌다.
당태세의 생각에 각각의 굴 안에는 풀무와 작업장이 따로 있을 것이었고, 철광도 그 안에 이어져 있는 듯 보였다.
“모두 삼층으로 되어 있소이다. 일층부터 치는 것이 어떻습니까?”
당태세는 종리세리의 말에 고개를 짧게 젓더니만 손가락으로 계단의 반대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산 위가 아니라 산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이 또 하나 있었는데, 널찍한 계단은 죽 이어져 휑하니 뚫린 지하의 광장 같은 곳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저곳부터 들어가야 하오. 저곳이 물건들의 집하장인듯 보였소.”
“저 안에 뭐가 있습니까?”
“그대가 가장 찾고 싶어 하던 것일 수도 있지.”
말은 남기고 아래로 내려가는 당태세를 보던 종리세리는 슬쩍 인상을 찌푸린 채 노인의 뒤를 쫓았다.
두 사람은 넓은 계단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고 또 내려갔는데, 평범한 산처럼 보이는 야장의 밑둥은 반 정도 갈려나간 상태였고, 마치 수직으로 뚫린 동굴처럼 아래에도 큼지막한 공간이 펼쳐져 있었다.
어둡게 그늘진 곳에는 어김없이 횃불이 올라가 있었는데 그 앞에 늘어선 수레에는 번쩍이는 짐들이 가득 실려 있었다. 종리세리는 그것들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자기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전쟁이라도 할 작정인가?”
수레에 실려 있는 것들은 다름 아닌 병기(兵器)들이었다.
박도와 단도, 철편과 판부 같은 단병(短兵)과 창, 구겸창, 대도와 같은 장병(長兵)이 나뉘어 질서정연하게 수레에 실렸는데, 어림잡아 무기들이 실린 수레는 오십여기는 되는 듯싶었다.
그것도 앞에 있는 수레들에만 실려 있는 숫자였다. 지하의 광장은 또 다른 거대한 철문을 출입문으로 삼는 듯 보였고 그곳은 아마 무너진 산 아래로 이어져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가 연결되어 있는 듯 보였다.
당태세는 종리세리에게 몸을 낮추라는 시늉을 하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이것이 실제로 사형문이 원하는 것일 테지.”
“대체 이 많은 병기들을 어디에 쓴단 말인가? 그리고 누구에게 쓴단 말이오?”
“무슨 소리요. 사람들은 많이 있지 않소.”
당태세의 말에 종리세리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뿌드득 이를 갈았다.
“동성문의 일이 이곳과 연결되는 거로구먼.”
“금오도를 통해 내려오는 한중의 사람들도 마찬가지고.”
그때였다. 수레 근처의 문이 열리더니 칼을 찬 일단의 사내들이 안에서 쏟아져 나왔다.
사내들은 모두 하나같이 건장하고 무공을 익힌 듯 보법이 예사롭지 않았는데, 두 사람이 하나씩 짝을 지으며 수레를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필시 수레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을 하려는 모양새가 분명하였다.
“멈춰야 하오. 밖으로 나가서는 안 될 물건이오.”
종리세리의 냉정한 목소리가 빨라졌다. 당태세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유독중이 좋을 짓을 해 줄 수야 있는가.”
“저들이 포일문도요? 포일문이 사형문에 먹힌 것이 틀림없군.”
“아니. 저들은 포일문도가 아니오.”
노인은 무장한 사내들이 나오는 문을 유심히 살펴보다가 마치 웃는 것처럼 이를 드러내었다. 노인은 조금 전 문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을 보면서 눈에서 광망(光芒)을 뿜어내었다.
“사형문의 졸개들이야. 그나저나 이렇게 만나다니 감격스럽기 그지없구나.”
노인은 고개를 불쑥 들더니 저벅저벅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종리세리가 뒤에서 낮은 목소리로 소리쳤다.
“문주!”
“종리세리. 뒤에서 움직이며 나가려는 수레들을 요격하시오. 나머지는 내가 다 맡을 테니.”
노인은 말을 마치고 입을 굳게 다문 뒤 목괴로 계단을 또각또각 찍으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내들의 시선이 하나둘 당태세에게로 쏠리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자신을 보는 사형문도의 안색이 변하는 것과 그들이 칼을 빼드는 것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오매불망 찾아 헤맨 벗의 딸이 여기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으니!”
노인의 눈은 수레 뒤의 광장에 나타난 긴 머리의 여인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인 역시 당태세의 용모를 보더니만 낯 색이 급변하며 품에 차고 있던 긴 검을 잡아 뺐다. 여인의 입에서 귀신이 내지르는 것 같은 고함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태세!”
“오늘 다시 만났으니 우리 헤어지지 말자꾸나! 천하의 동성문주가 사형문의 주구 노릇으로 연명하고 있었느냐?”
당태세가 소름끼치게 웃으며 여인을 향해 다가가는데 그 귀기어린 모습에 칼을 빼든 사형문도들은 자기도 모르게 주춤대며 뒤로 한 발짝씩 물러섰다.
오직 여인만이 독기어린 눈을 홉뜨고 다가오는 노인을 노려보았다.
“누구 때문에 내가 이렇게 되었는데! 내 인생을 망친 것이 누군데!”
“네 인생은 네 스스로 망쳤다. 다른 이의 목숨 값으로 쌓아올린 인생 주제에.”
당태세는 동성문의 가주, 황병아를 노려보았다. 황병아는 이글대는 눈으로 당태세를 바라보며 이를 부드득 갈고 있었다. 그의 옆을 지키고 있던 흑의의 사내 절영자도 칼을 뽑아들고는 다가오는 당태세를 노려보는 중이었다.
황병아의 입이 다시 열리며 앙칼진 목소리가 동굴 천정이 무너지라 울려 퍼졌다.
“내 아비의 원수! 동성문의 원수! 오늘 내가 네 몸을 갈가리 찢어 젓을 담을 것이다!”
“늙은이의 고기가 필요하다면 와서 가져가라.”
당태세가 이를 드러내며 외치자 황병아는 주변에 서 있던 사형문도들을 바라보며 칼을 앞으로 내뻗었다.
“저 자를 잡아라! 문주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던 순천문주 당태세가 저기에 있다! 저 목에 만금의 보화가 걸려 있으니 모두가 발분하여 전공을 세워라!”
“존명!”
황병아의 말을 들은 사내들이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칼을 빼들고 당태세를 향해 달려들었다.
당태세가 슬쩍 목괴를 앞으로 뻗는가 싶더니만 그대로 오른발로 땅을 밀며 긴 목괴를 창처럼 휘두르며 앞장서 들어온 도객들을 마주보았다.
노인의 목괴가 도객들의 칼과 맞부딪혔다고 생각하던 찰나, 세 자루의 박도가 하늘로 날아오르며 칼을 쥐었던 사내 셋이 동시에 같은 자세로 머리부터 땅바닥에 처박혔다.
당태세의 눈빛은 어느새 시퍼런 안광을 띈 채 자신의 앞에서 달려드는 도객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아니, 도객들 너머로 검을 뽑아들고 있는 동성문의 여식, 황병아를 노려보고 있다고 함이 옳을 것이었다.
“오늘 하루 내 죄가 만장(萬丈) 업을 쌓겠구나!”
으르렁대던 당태세의 몸이 앞으로 튀어나가며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