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 사천 성도 (13)
흐린 하늘 아래 구름이 조각나며 조금씩 밝은 빛살이 한 줄기씩 구멍 난 구름 사이를 뚫고 내려오며 구릉과 초원에 불규칙한 양지를 만들어 내었다.
구름들은 빠르게 움직이며 구멍을 메꾸고 다시 열기를 반복하니, 땅에 펼쳐지는 빛줄기의 연못 역시 사라졌다 나타났다를 반복하며 움직였다.
두 사내는 어깨 위로 떨어지는 빛줄기를 받으며 곧장 성문을 빠져나가 구릉의 앞으로 향하였다.
구릉 너머 지평선너머까지 이어진 분지에는 작은 소초와 마구간이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주변으로 이십 여기의 말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짧고 단단한 다리와 튼실한 허리를 지닌 군마였는데, 모든 말 위에는 등자가 올려져 있어 언제든지 출정이 가능한 상황이었다.
“저들이 사형문이란 말인가.”
당태세의 나직한 말에 종리세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팔기도 아니고 그렇다고 표사들도 아니오. 저들은 금우도를 타고 들어오는 한중의 사내들을 서문으로 감독하고 나가오. 몇 번을 반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어떻게 세 곳의 사형문을 다 파악했는가?”
당태세의 감탄섞인 말에 종리세리는 별 것 아니라는 투로 노인을 슬쩍 보더니 다시 앞에 자리한 소초의 기병들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별거 아니오. 저들을 처음 본 곳과 시간과 용모를 기억하고 각각의 움직임을 따르며 시간을 나누면 일정하게 움직이는 사람의 습벽을 파악할 수 있소. 조금만 연마하면 누구나 따라할 수 있는 일이외다.”
“놀랍구먼.”
“편광성은 동문의 주루부터 그 아래 거리를 감독하고, 예열지는 창고부터 포일연에 이르는 길을 감독했소.”
“그럼 저들은 이곳에서 어디까지 가겠는가?”
“성문 밖으로 나간 이후는 내가 알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동문에서 서문으로 나갔으니 사형문의 본진 앞까지는 가지 않았겠습니까?”
당태세는 슬쩍 구릉 위에서 몸을 낮추고 마구간 주변의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하나같이 긴 창과 대도를 말 안장에 얹거나 어깨에 매고 있는데, 개중 한 사내는 특별히 체구가 장대하고 장포의 어깨가 부푼 것이 마치 안에 갑옷이라도 겹쳐 입은 듯 보였다.
사내는 거대한 골타(骨朶)를 짚고 마구를 정리하는 다른 이들을 감독하고 있었으니, 한 눈에도 저 골타의 거한이 이 곳의 장(長)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처음 보는 자로구먼. 무기와 체형으로 봤을 때는 패둔성의 후임인 모양인데.”
“저들을 어찌 요격하느냐가 문제입니다.”
종리세리는 엎드린 채로 자신이 가져온 활과 화살을 들어보였다.
“이 거리라면 저격이 가능합니다. 스무 명이라면 좀 많긴 해도 일고여덟 정도라면 가능하지요.”
“그 다음은 생각해보지 않았소?”
“그 다음은 당문주께서 생각하셔야지요.”
당태세는 눈살을 찌푸리고 말과 기병들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인원을 줄이는 게 급선무겠지. 서로 협격하지 못하도록 없애는 거요.”
“그렇지요.”
“저들 중 기승(騎乘)하여 번을 서는 이들이 빠져나가면 그 때 습격을 합시다. 남은 자들이 대처하기 전에 궁시로 선수를 치며 내가 내려가서 저들을 치겠소.”
“그럼 말을 타고 나간 사내들은 어찌할 거요?”
당태세는 종리세리를 보더니 쓴웃음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그건 팔기(八旗)가 생각하셔야지.”
차 한잔 마실 정도의 시간이 되자 조반을 마친 이들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골타를 어깨에 지고 있던 무장을 위시한 열 필의 말이 소초를 떠나 천천히 성문을 향해 이동하기 시작했다.
쪼개진 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빛살을 받아 스스로 빛나는 듯 눈부신 모습으로 성을 향해 전진하는 마병들은 그야말로 천병(天兵)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기병들은 속보로 말을 몰면서도 오와 열을 맞출 줄 알았다. 생각 외로 마술(馬術)의 격이 쳐지지 않는 이들이었다. 어쩌면 마상의 접전도 능할 지 모를 일이었다.
당태세와 종리세리는 구릉 옆의 풀숲에 몸을 숨기고 있다가 사내들이 성문 안으로 자리를 감추는 것과 동시에 몸을 일으켰다. 종리세리의 눈이 빛나며 화살을 얹은 시위가 순식간에 만곡을 이루며 휘어졌다.
소초에서 모여 한가롭게 풍경을 보고 있던 사내들의 시선은 아직 전직 팔기 사내가 활의 시위를 팽팽하게 당기고 있는 모습을 알아채지 못하였다. 종리세리의 이 악문 소리가 당태세의 귀로 빨려 들어갔다.
“지금이오!”
종리세리의 손이 시위를 놓는 것과 동시에 노인의 몸이 구릉을 박차고 튀어 나갔다.
일시에 인기척을 느끼고 기병들의 고개가 한쪽으로 돌아가는 순간, 한 사내의 가슴으로 검은 깃털이 빨려 들어가며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조용하던 소초의 사내들의 입이 벌어지며 허리에 찬 칼을 뽑아 들었다. 노인의 몸은 가파른 구릉을 달리며 손에 든 목괴를 뽑아들어 단괴와 소도로 분리시켰다.
어깨 너머에서 공기가 찢어지며 살이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과 함께 한 발의 화살이 노인의 옆으로 날아가며 눈을 부라리는 병사의 가슴팍으로 정확하게 박혔다.
남아있던 병사들은 달려드는 노인과 날아드는 화살 둘 중 하나를 받아야 하였다. 칼을 뽑으며 숨을 곳을 동시에 찾던 사내들을 향해 화살과 소도가 무정하게 날아들었다.
화살 한 대가 또 다른 사내의 가슴에 박히며 사내의 명을 끊어놓는데, 언덕을 짓치며 내려온 노인의 매서운 칼날이 칼을 뽑아들고 덤벼들던 기병의 공격을 한 합에 내치고 그대로 목을 그어버렸다.
연이어 소초 안으로 뛰어든 노인이 단괴를 앞으로 밀어내며 칼을 뻗은 기병의 손목을 돌리고 소도를 가슴팍에 찌른 뒤 사내를 발로 차버렸고, 소초 안으로 피신 온 병사들이 채 노인의 움직임을 파악하기도 전에 노인은 몸을 날려 다음 병사의 앞으로 달려가 있었다.
어두운 소초 안에서 작은 칼날이 번득이며 또 다른 병사가 비명도 못 지르고 그대로 고꾸라지는데, 노인은 사람의 탈을 뒤집어쓴 들짐승처럼 재빠르고 잔혹하기 그지없었다.
소초 안으로 몸을 피했던 병사들은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일제히 다시 소초 밖으로 몸을 내던졌다.
순간 사각에서 날아오는 화살에 한 명이 목을 맞고 몸을 뒤집는데, 이제는 어찌할 바를 모르는 병사 두서넛이 칼을 뽑아든 채 소초 밖에서 안의 노인과 밖의 궁사를 연달아 보며 어느 쪽에서 죽음이 달려들지 가늠하고 있었다.
노인의 몸이 소초 밖으로 튀어나오는 순간, 한 사내는 눈을 질끈 감고 소초 밖으로 내달렸다.
이내 화살깃이 사내를 따라 날아와 사내를 땅바닥에 잠재웠고, 남아있는 병사 둘은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노인을 향해 뛰어들었다.
노인의 양손은 정확하게 두 번을 허공에서 움직였고 더 이상의 움직임이 필요하지 않았다. 당태세를 향해 뛰어들던 병사 둘은 같은 형상으로 칼을 떨구며 둘 다 목을 잡고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타시오!”
이미 종리세리는 두 필의 말을 끌고 당태세의 앞으로 다가오는 중이었다. 당태세는 가타부타 말없이 목괴를 다시 하나로 만든 뒤 팔기 사내가 끌고 온 말 위에 올라탔다.
두 사람은 고삐를 잡자마자 박차를 가하며 성문 안을 향해 말을 달렸다.
“성내에서는 칼을 들어선 안 되오. 문주. 만성의 팔기들이 여기저기에서 보고 있을 거요.”
“알고 있네.”
“그들을 치는 것은 그들이 서문을 벗어난 다음입니다.”
“물론일세.”
두 사람은 상승장군의 개선식을 하듯 말을 타고 성문 안으로 들어섰다. 사내들의 등 뒤에서 햇살이 빛나며 그림자를 앞으로 내몰았다.
아침 일찍 거리에 나온 이들은 햇살을 등에 지고 번쩍이는 장식이 달린 말 두 필을 몰고 나타난 사내 둘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할 수 없을 터였다.
당태세의 양 옆으로 가게와 사람과 현판이 지나갔다. 두 사람은 말의 속도를 줄이고는 속보로 성도의 대로를 관통하며 걸어갔다.
저 멀리 성 위에서 이 광경을 바라보던 팔기의 보초 하나가 슬쩍 투구를 치켜들자 종리세리가 손을 들어 그에게 화답하였다.
두 사람의 앞길을 막는 한족은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도 종리세리와 같이 가는 한족 늙은이를 앞에서 쳐다보는 이는 없었고, 본다한들 그들이 지나간 뒤의 등을 바라볼 뿐이었다.
“사천 성도의 백성들 중 용사는 사라지고 오직 칼든 이를 두려워하는 자들만 남았구나.”
당태세는 혼잣말을 중얼대며 말머리를 곧장 앞으로 내몰며 대로를 직행하는데, 한참 뒤 옆을 달리던 종리세리의 입에서 예의 냉랭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마필의 형체가 보이지 않습니다. 이미 서문을 통과한 듯 보입니다.”
“앞이 보이는가? 종리세리?”
눈을 게슴츠레 뜬 당태세의 옆에서 종리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문 앞에는 아무것도 없소이다.”
“그럼 달리세!”
“좋은 생각이오!”
당태세의 발이 박차를 질렀다. 말이 짧은 울음소리와 함께 발걸음을 벌리고 고개를 숙였다.
바람이 앞으로 쏟아지며 거리와 가게와 사람들이 일시에 뒤로 날아가며 길이 앞으로 당겨졌다. 말굽이 땅을 울리며 사내의 몸이 진동에 맞춰 위아래로 빠르게 움직였다.
작게 보이던 서문의 처마가 순식간에 앞으로 다가왔다. 두 필의 말이 기세좋게 서문을 빠져나가며 흙먼지를 남기고 자취를 감추니, 대로 앞을 지나던 사람들은 갑자기 무슨 일인지 몰라 제자리에 서서 두 사람의 자취를 멍하니 바라볼 뿐이었다.
“이미 멀리 떠난 것인가?”
“저기 흙먼지가 보입니다.”
종리세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당태세의 눈에도 말발굽이 일으키는 흙먼지가 눈에 들어왔다. 노인은 이를 악물고 다시 한번 박차를 가했다.
앞에 달려가는 마필들은 도합 열기 남짓, 두 필의 말이 따라잡는다 해도 그 다음에는 그들이 사형문의 본진에 도착하기 전에 요격해야만 하였다. 아니, 그전에 포일문의 야장 앞에도 도착하지 못하도록 막아야만 하였다.
노인의 말이 울음소리를 내며 앞으로 달려가자 그 옆을 종리세리가 바짝 붙으며 달려왔다.
“이제 곧 나타날 거요!”
“준비하세! 활? 도?”
종리세리는 당태세의 말에 안장에 걸어두었던 안모도를 천천히 빼들었다. 당태세 역시 안장에 걸어두었던 목괴를 거꾸로 잡았다.
노인의 긴 목괴는 마치 날없는 극(戟)과 같은 형상이 되어 말머리 앞으로 뻗어 나왔는데, 좌고우면하지 않고 오직 앞에 달려가는 말과 기수를 노려보고 있는 노인의 눈동자는 투지가 가득했다.
이윽고 달려가는 말들의 행렬이 당태세의 눈에 들어왔고 종리세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당태세의 옆으로 빠져나가 떨어져 달리기 시작했다.
당태세 역시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는 있는 힘껏 박차를 내질렀다. 바람이 세차게 얼굴을 때리며 숨쉬기 버겁게 만들었다. 노인의 엉덩이가 안장에서 떨어지며 두 발로 몸을 지탱한 채 말과 함께 한 몸이 되어 전력으로 앞으로 튀어나갔다.
일순간 떨어져있던 마필의 거리가 단순에 좁혀지며 당태세는 또 다른 일행이 된 듯 마필의 최후미에 바싹 다가가 붙었다.
그와 함께 당태세의 눈이 번득이며 오른손에 들린 목괴가 옆으로 움직이며 후미의 기병 목을 잡아채어 뒤로 당겼다.
순식간에 말 위의 사내가 뒤로 굴러 떨어지며 흙바닥 위로 사람이 튕기며 나동그라졌다. 오와 열을 맞춰가던 기병의 대오가 순식간에 어그러지며 새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기습이다!”
당태세의 번득이는 눈빛과 함께 목괴가 허공에서 아래로 떨어졌다. 순간 중앙에 있던 거한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지며 오른손에 쥐고 있던 골타를 어깨 위로 들어 올렸다.
날카로운 금속의 충돌음과 함께 두 필의 말이 가깝게 붙으며 목괴와 골타가 서로 얽혀 들어갔다. 장한의 이가 드러나며 눈을 번득이는 노인을 바라보았다.
“네놈은 누구냐!”
“명부(冥府)의 사자(使者)로다!”
당태세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사내를 향해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