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 사천 성도 (12)
성도 동문에서 일직선으로 서쪽으로 향해 뻗은 대로변에 위치한 청양루(靑陽樓)는 옛 명대부터 아름다운 단청과 탑처럼 높이 솟은 지붕으로 유명한 곳이었다. 건물의 수려한 외형 못지 않게 좋은 술과 안주로도 명성이 높았다.
한 때는 파촉의 문인들이 한 번씩은 거쳐 간다고 말하던 주루는 나라가 바뀌고 들르는 사람들이 바뀌었다.
시부를 읊으며 기울어지는 나라를 걱정하던 유자들의 모습은 이제 찾아볼 수 없게 되었고, 대신 돈 있는 상인들과 부호의 자제들이 모여 떠드는 곳으로 변해 있었다. 그렇지만 그 이야기도 사형문이 성도에 자리를 틀기 전의 이야기였다.
당태세는 목괴를 땅에 짚고 청양루의 현판 앞에 멈춰섰다.
청양루의 안 쪽에서 수많은 이들이 우르르 몰려나오며 당태세를 둘러쌌다. 대로 앞에 위치한 곳이다 보니 누각에서 튀어나온 이들은 칼을 차고 있지는 않았다. 아무리 사형문이라도 팔기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들의 소매 안에는 날카로운 비수와 단도 하나씩은 지니고 있을 터였고, 주루 안으로 들어서서 사방이 벽으로 막힌 곳에 이르면 곳곳에 숨겨놓은 도검을 빼들고 상대를 도륙할 것이었다.
“당태세가 맞느냐?”
젊은 사내가 눈에 쌍심지를 부라리며 노인을 노려보자 목괴를 짚고 있던 노인 역시 사내를 올려다보며 차가운 눈매를 슬쩍 찌푸렸다.
“사형문 치고 예의가 없구나.”
“늙은이, 네놈이 누구기에 예의를 찾는가. 내가 받은 명은 너를 이 자리에서 때려잡으라는 명 하나뿐이었으니.”
“호오.”
당태세가 슬쩍 목괴를 앞으로 빼며 다리를 뒤로 빼는데, 순간 누각의 위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또렷하게 내려왔다.
“거기 서 있는 노사를 위로 모셔라! 편광성의 명이시다!”
순간 젊은이와 그 동료들은 당황하며 당태세를 바라보는데, 당태세는 사내들을 슬쩍 훑어보더니 거리낄 것 없다는 듯 목괴를 짚으며 청양루의 안으로 발길을 옮겼다.
“네 두령이 네 명을 아주 약간 늘려줬구나.”
노인은 젊은이의 반응을 기다리지 않고 누각 안으로 몸을 움직였다. 거대한 주루의 안쪽은 익히 당태세가 기억하고 있던 풍경 그대로였다.
오래된 나무로 짜여진 탁자와 선반들이 사방에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넓은 계단 위로 슬쩍 보이는 이층의 모습 또한 바뀐 것은 없어보였다. 청양루는 그 엄혹했던 전화(戰火)를 용케 피한 듯 싶었다.
한 가지 달라진 것이라고는 탁자마다 앉아있는 사내들이 들어온 당태세의 모습을 빤히 쳐다보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사형문이 청양루를 먹여 살리는가.”
당태세는 헛웃음을 지으며 이층을 지나 삼층 꼭대기로 올라갔다. 일층만은 못해도 꽤나 널찍한 주루의 가운데에는 붉은 색으로 칠해진 탁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앞에 한 사내가 앉아있었다. 당태세는 사내를 보면서 슬쩍 눈썹을 꿈틀거렸다.
붉은 탁자 위에는 술과 함께 조금 전 올라온 것 같은 채소볶음과 고기완자, 탕국이 올라와 있었는데 탁자 앞에 앉은 사내는 막 식사를 하려던 참인 모양이었다.
“내가 때를 잘못 맞춰 온 모양이구나. 네가 새로 들어온 십대제자인가?”
“당문주. 저를 기억하지 못하십니까? 편광성(翩光星) 표종서입니다.”
준수한 중년의 사내는 예열지보다는 나이가 젊어 보였지만 이미 사십 줄은 훌쩍 뛰어넘은 듯한 중후함을 지니고 있었다. 당태세는 그를 한참동안 쳐다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벌렸다.
“편광성 표종서, 기억나는구나. 네가 낭광수의 뒤를 이어 십대제자가 되었느냐?”
“불민한 제가 태산 같은 직책을 맡았습니다.”
“빌어먹을 십대제자 따위가 무슨 태산이냐.”
편광성은 쓴웃음을 짓더니 앞의 자리를 권하였다. 당태세는 저벅저벅 걸어들어와 목괴를 옆에 세우고 붉은 탁자에 앉아 편광성을 마주보았다. 편광성은 술을 한잔 따라 당태세에게 권하였고 당태세는 마다하지 않고 편광성이 준 술을 받아마셨다.
편광성은 젓가락을 들고 고기볶음을 집었다. 당태세 역시 앞의 채소와 고기를 집더니 말없이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주변에 앉아있던 사람들은 모두 아무런 말없이 기묘한 아침식사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당태세의 먹는 모습을 바라보던 편광성이 당태세를 쳐다보더니 한가로운 어조로 말하였다.
“예전에 사형들이 말하길, 검결이나 계투가 있을 때는 식사를 적게 하고 가라고 했었지요. 몸이 굼떠질 뿐 아니라 칼이라도 잘못 맞아 내장이라도 터지면 음식이 튀어나와 그대로 죽는다고…….”
“그랬었지.”
“하지만 나이를 먹으니 그 말도 영 믿을 게 못되더군요. 먹지 못하면 힘을 못 쓰는데 굶고 싸울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젊을 때나 가능한 이야기니라.”
“조반은 드시고 오신 겁니까?”
“지금 먹지 않느냐.”
편광성은 젓가락을 탁자에 내려놓고 당태세를 빤히 쳐다보았다. 당태세는 편광성의 앞에 놓인 술잔을 가져다가 자신의 잔에 따랐다. 그 모습을 보던 편광성이 다시 조용히 말하였다.
“당문주께서 사천으로 온다는 소문은 익히 들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순천문주가 돌아와 혈채를 갚을 것이라는 소문이 장강을 타고 들어왔습니다.”
“동성문의 황병아가 말해주었겠지.”
편광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술잔을 치켜들었다.
“돌이켜 생각하면 순천문의 참극은 심한 노릇이었지요. 하지만 어찌 생이 과거에만 머물러 있단 말입니까?”
당태세의 젓가락질이 멈췄다. 노인의 눈이 편광성을 꿰뚫어버릴 것 같은 예리한 눈으로 노려보는데, 편광성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젊은 시절의 당연한 일은 늙어서도 당연한 것이 되지 않습니다. 십칠 년의 세월이 지나면 사람만 남고 칠정육욕은 퇴색하는 것이지요. 오늘 있을 일을 위해 먹는 술과 밥은 내일의 밑천이 되겠지만 어제의 일을 조상하며 마시는 술은 그저 몸을 축낼 뿐입니다.”
“네놈이 나를 훈계하려 하느냐. 편광성.”
“아니오.”
편광성은 말을 자르고 자신을 노려보는 당태세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시대가 바뀐 것을 말씀드리는 것이오. 귀린갈. 십칠 년 전의 기억과 분노에 의지해 여기서 혈겁을 벌인들 그것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일이외다. 설사 그대가 이기고 나와 사형문이 여기서 죽는다 하여도 내일을 위해 일하던 자는 귀린갈 당태세가 아니라 사형문이었다고 사람들이 말할 것이오.”
“시대는 바뀌었겠지.”
당태세는 의외로 순순히 편광성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편광성이 의외라는 듯 당태세를 바라보는데, 당태세는 술잔의 술을 한 번에 들이킨 뒤에 편광성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시대가 바뀌었다고 신의를 배신하고 망국에 기여를 한 놈들까지 선인이 되는 세상은 아니렷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그래, 바로 그거다.”
“네?”
당태세의 눈이 갑자기 무섭게 번쩍이며 이가 드러났다. 편광성은 채 말을 잇지 못하는데 당태세의 이가 악물리더니 뱃속에서 울리는 으르렁대는 소리가 붉은 식탁을 부르르 진동시켰다.
“그 시절을 똑똑히 보고 가까스로 살아난 내가 그 시절의 죄과를 묻는 게다! 그 빌어먹을 세치 혓바닥을 놀려 과(過)를 공(功)으로 바꾸는 너 같은 놈들을 쓸어버리려고! 사람들의 귀에 더 이상 감언이설을 풀어 넣는 것을 막으려고 말이다!”
편광성의 경악했던 표정이 조금씩 굳어지더니 눈매가 날카롭게 변하기 시작했다. 당태세의 번득이는 눈과 드러난 이는 이제 조금씩 살기를 띄고 있었다.
“비열하게 살아 놓고 성공담을 논하는 짓거리가 명부에서 통하는가 알아보아라! 네놈 눈으로 곧 보게 될 것이니!”
“얘들아!”
편광성의 호통과 함께 당태세의 등 뒤를 포위하고 있던 사내들의 손에 어느새 석자 길이 세도가 들렸다. 당태세가 목괴를 잡고 앉아있던 자리에서 그대로 위로 솟구치며 붉은 탁자 위로 올라가며 목괴를 들어 편광성의 머리를 내리쳤다.
편광성은 의자를 그대로 뒤로 젖히며 숨기고 있던 도를 위로 울려 떨어지는 목괴를 받아내었다. 사방에서 칼을 뽑아든 사내들이 탁자 위의 당태세를 찌르기 위해 몸을 날렸다.
당태세 역시 탁자에서 몸을 비틀어 굴러 떨어지듯 몸을 날린 뒤 목괴를 두 손으로 잡고 바로 앞으로 다가온 사내의 머리를 그대로 아래로 후려갈겼다.
그와 동시에 당태세는 목괴를 둘로 분리해서 단괴와 소도를 나눠쥐고 덤벼드는 사내들을 하나씩 후려치고 베기 시작했다.
“모두 올라와라!”
편광성 표종서가 도를 뽑아들고 구석에 몰린 당태세를 가리켰다. 순간 사방으로 혈흔이 흩뿌려지며 당태세를 포위했던 사내들의 진형이 일순간에 뭉개졌다.
목을 움켜쥐고 비틀대는 사내들의 몸이 갑자기 사방으로 튕겨나가더니 그 사이에서 검은 그림자가 사내들 사이를 뚫고 튀어나왔다. 시뻘건 피칠갑을 한 노인의 얼굴에서 번득이는 두 개의 눈동자만이 하얗게 편광성을 노려보고 있었다.
“잡아라!”
편광성의 째지는 목소리와 함께 이층에서 올라온 사내들이 당태세를 향해 뛰어들었지만 늙은 협객은 검불더미를 삼키는 화롯불처럼 사내들을 먼저 덮쳤다.
왼손에 들린 단괴가 사내들의 칼을 가로막으면 오른손의 소도가 비정하게 사내들의 목과 배를 갈라버리고 다음 희생자를 찾아 앞으로 튀어나갔다.
도객들은 자신의 앞으로 다가오는 붉은 그림자를 채 막기도 전에 손이 부러지고 목이 잘려나갔다. 순식간에 십여 명이 그 자리에 선 채로 참살당하고 계단참에서 올라오던 이들마저 삼층을 밟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목을 움켜쥐고 쓰러졌다.
편광성 표종서는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그가 아직 젊었던 시절 매섭고 중후하던 귀린갈 당태세의 무공을 견식하던 시절이 있었건만, 지금 그의 앞에서 선보이는 당태세의 칼부림은 십칠 년 전보다 더 빠르고 더 독랄해져 있었다.
그러고 보니 편광성 표종서는 당태세가 직접 사람을 베는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음을 기억해내었다.
“빌어먹을…이런 젠장. 모두…뭐하느냐! 모두 어디 있느냐!”
“일층에서 누가 올라옵니다!”
“뭐라고?”
“일층의 문도들이 모두 죽었습니다! 협공당하고 있습니다! 이층으로…온다! 온다!”
아래에서 울려 퍼지던 걸걸한 목소리는 이내 비명과 고함으로 바뀌고 있었다. 편광성 표종서는 뒷머리가 빳빳이 서는 것을 느꼈다.
협공이라니, 당태세는 혼자 사천에 들어온 것이 아니란 말인가? 지금 계략에 빠진 것인가?
표종서가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 치는 순간, 새된 비명을 지르던 사형문도 하나가 그대로 뒤로 나자빠졌다. 사형문도가 쓰러진 그 자리에는 피를 흠뻑 뒤집어 쓴 채 편광성을 노려보는 귀린갈의 귀신같은 형상이 자리하고 있었다.
“다, 당문주…!”
“네놈의 칼이 혀만큼 현란한가 보자. 편광성.”
노인은 다리를 절지 않았다. 오히려 젊은이들보다 더 굳건하게 두 다리를 놀리며 편광성의 명을 끊어버리기 위해 다가오고 있었다.
모든 것이 잘못되었다. 모든 것이 잘못 알려져 있다. 모든 것이 그릇되어 있어. 뭐가 진짜냐. 뭐가 제대로 된 것이냐.
편광성 표종서는 연신 혀로 입술을 핥으며 당태세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피칠갑을 한 노인의 입이 열리며 호령이 떨어졌다.
“표가야! 무인답게 칼을 받아라!”
노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표종서가 칼을 잡고 땅을 박차며 앞으로 튀어나왔다.
사내의 도가 전후좌우로 움직이며 당태세의 단괴와 소도를 향해 달려들었다. 현란하게 움직이는 표종서의 칼날이 당태세의 요혈을 노리고 사방에서 베고 치며 압박을 가했지만 당태세의 표정은 눈썹 하나 꿈틀거리지 않았다. 표종서의 이가 악물렸다.
“죽어!”
편광성 표종서의 도가 당태세의 머리를 향해 올라가다 그대로 낙하하며 당태세의 배를 향해 내리꽂히는 순간, 옆에서 튀어나온 당태세의 소도가 그대로 표종도의 칼을 옆으로 밀어붙이며 가슴을 활짝 열어버렸다.
표종도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순간, 당태세의 왼손에 잡힌 목괴가 그대로 앞으로 빙글 돌아나오며 목괴의 가지가 옆구리를 그대로 긁었다. 두둑 소리와 함께 늑골이 부서지는 소리가 울려퍼지며 지독한 고통이 밀려들었다.
편광성이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입을 벌리는 순간 당태세의 소도가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당태세의 이글대는 눈이 표종서의 바로 앞에 다가와 있었다.
“발설지옥(拔舌地獄)에는 못 가겠구나.”
당태세의 소도가 표종성의 눈 앞에서 번쩍였다.
***
이층에 있던 인원들을 모두 정리한 종리세리는 탁자 위에 있던 물 잔을 들고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아직 팔다리의 힘이 부치지는 않았지만 슬슬 더워지고 있었다. 오늘 하루에 가야 할 길은 아직 채 시작도 안 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종리세리는 자신보다는 늙은 당태세가 제대로 체력을 안배할 수 있는지가 더 걱정스러웠다.
팔기 사내가 그런 걱정을 하고 있을 즈음, 삼층에서 붉은 피를 뒤집어 쓴 당태세가 터덜대며 계단으로 내려오는 모습이 보였다. 종리세리는 물통을 당태세에게 건네며 덤덤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어디서 낯이라도 씻어야 할 것 같습니다만.”
“대충 정리만 하고 나가세. 동문(東門)이라고 하였소?”
당태세의 말에 종리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나저나 몸은 괜찮습니까? 너무 무리하시는 게 아니면 좋겠습니다만.”
종리세리의 말에 당태세는 되었다는 듯 손을 들어 보이며 물통의 물을 머리 위에 부었다.
“걱정마시게. 아침도 먹었으니까.”
“언제 말이오?”
당태세는 대답대신 손가락으로 위를 가리키더니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종리세리는 슬쩍 위를 쳐다보더니 다시 당태세를 따라 계단을 향했다.
어느새 구름 사이로 얼굴을 비춘 아침 해는 아직 동문 위를 채 벗어나지 않은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