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 사천 성도 (10)
포일연의 별채에는 늦은 밤까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방 안에 모인 사람은 사내 셋에 여인이 하나인데 네 사람을 탁자 위에 펼쳐진 물건을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탁자 위에 놓은 물건은 다름 아닌 여인의 혼례복이었다. 현란하게 장식된 봉관(鳳冠)과 다채로운 색의 하피(霞帔)가 놓여있었고 꽃무늬가 현란하게 새겨진 다홍색의 치마와 붉은 저고리가 준비되어 있었다.
꽤나 공이 들어간 물건에 격(格)을 맞춰 보낸 신경 쓴 예복임에 틀림없었지만 옷을 보며 기꺼워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마숙영은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탁자위에 놓은 옷을 마치 동티난 물건 보듯 쳐다보고 있었다.
“지금부터 여기 모인 사람들은 내가 하는 말을 주의깊게 들으시게.”
당태세가 나직하지만 힘 있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시작했다.
“우리는 마소저가 혼례를 하게 되는 이틀 뒤에 거사를 시작하는 게 아니라, 그 다음날 움직이게 될 것이네. 그 다음날 성도에 잔류한 사형문도를 해치우고, 노중에 있는 야장을 접수한 뒤에 본채를 쳐부수는 것으로 하세.”
“이해가 안 됩니다.”
철장타가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당태세를 바라보며 물었다.
“혼례식이 있을 때가 가장 성대하고 즐거운 기분에 사람들의 주위가 풀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때를 노리고 들이치는 것이 더 적합하지 않겠습니까?”
마숙영도 철장타의 말을 듣자 이해가 안 가는 표정으로 당태세를 쳐다보았지만 당태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나는 성도에서 사형문과 한번 검을 섞었다. 게다가 사형문주 유독중은 자기 제삿날에도 문도들에게 번을 돌릴 놈이다. 결코 그가 어떤 행사를 한다고 경계를 게을리 하거나 문도들에게 휴식을 줄 것이라 기대하면 안 된다. 그들이 우왕좌왕할 때는 단 하나, 예기치 못한 일이 터졌을 때뿐이다.”
“혼례가 예기치 못한 일이 되는 것입니까?”
마숙영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대답하자 당태세는 그녀를 보며 진지하게 물었다.
“마소저, 너는 유독중과 혼례를 아무 일 없이 치루고 신방에 들어가고 싶은가?”
순간 마숙영이 고운 아미를 슬쩍 구부리더니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내젓다가 깜짝 놀라 얼굴을 손을 감쌌다. 모깃소리처럼 작은 목소리가 여인의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왔다.
“그러고 싶지는 않사온데…”
당태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품 안에서 작은 물건 하나를 꺼내 보였다.
“내가 너에게 이것을 줄 것이다. 너는 이것을 혼례가 끝나자마자 씹어 먹도록 하여라.”
좌중의 모든 사람이 당태세가 꺼내어 탁자 위에 놓은 물건을 쳐다보았다. 사내가 꺼내놓은 물건은 붉은 종이에 싸여 있는 새까만 단약이었는데, 그 크기가 사내 엄지손가락만한 크기였다. 철장타와 종리세리가 고개를 쳐들고 이게 무엇이냐는 듯 당태세를 바라보자, 당태세는 마숙영을 보며 조용히 말하였다.
“무창의 명의였던 해도침옹 양중일 노사가 내게 준 구식환혼단(龜息還魂丹)이라는 단약이다. 호흡과 단전을 정지시키지만 심맥은 붙여놓는다. 이 약을 먹으면 죽은 사람처럼 기식(氣息)이 없어지고 온 몸이 굳지만 심맥은 살아있으니, 살지도 죽지도 않는 상황이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흘간을 보내고 일어나면 손발이 풀리고 맥이 돌아오니……”
“맙소사.”
철장타가 신음소리를 내며 환약을 살펴보는데, 마숙영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 시커먼 환약을 두려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천하의 유독중이라도 네가 살아있음을 확인할 수 없을 것이다. 단전이 멎고 호흡이 잡히지 않으니 죽었다고 여길 밖에.”
“신혼 첫날밤에 죽어버리는 겁니까요? 우리 부연주가?”
철장타가 경망스레 말하자 당태세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마숙영은 아예 얼굴에 핏기를 찾아볼 수도 없을 지경이었다.
“우리는 결혼식 다음날 일을 시작할 것이다. 새신부가 예기치 않게 죽었으니 본채는 당연히 경황이 없겠지. 그렇다고 성도에 있는 인원을 다 빼 낼 리는 없다. 나는 다음 날 일찍 성도를 돌면서 종리천호가 파악한 곳으로 가서 십대제자들을 요격할 것이다.”
당태세의 말이 끝나자 종리세리의 차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돌아다니는 사형문의 종적들을 찾아보니 크게 세 곳의 거점이 나왔습니다. 하나는 시장의 동쪽에 있는 커다란 미곡창이고, 또 하나는 동문 근처의 주루요. 마지막의 하나는 서문의 앞인데 이곳은 수가 적은 대신 모두 기병(騎兵)입니다.”
“다른 곳은 없었소?”
“작은 소초들도 있었지만 그들 모두 세 곳 중 한 곳의 명을 받아 움직였소.”
종리세리의 말엔 감정이라고는 찾아볼 수도 없었고 무척이나 담백하게 말을 이어갔지만 묘하게 사람을 안심시키고 언변에 대한 신용을 갖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미곡창과 주루, 성문 모두 무장을 하고 상당한 실력을 갖춘 고수가 있었소. 아마 당문주가 말하는 십대 제자들이겠지. 내가 파악하기로는 셋이오.”
“본채에 둘, 성도 성내에 셋이라.”
당태세는 종리세리의 말을 정리하더니 철장타와 마숙영을 돌아보았다.
“철장타 너는 먼저 본채로 향하여라. 부연주를 모시라는 말이다. 우리는 중도의 야장까지 모두 세력을 일소한 뒤에 본채로 들어갈 것이다.”
“저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너는 혼례가 끝난 뒤에도 무슨 핑계를 쓰던 그곳에 남아 부연주의 신변을 지켜라. 죽었다 한들 아직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으니 시신을 안치해 둘 것이다. 너는 그 옆을 지키며 혹여 있을 사태에 대비하는 것이다.”
당태세의 눈빛이 번득였다.
“그리고 우리가 차후에 도착하여 유독중을 없애면 너는 부연주를 모시고 나와 달아나면 되는 것이다. 나머지는 우리에게 맡기면 된다. 할 수 있겠느냐?”
철장타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태세의 말에 의하면 지금부터 벌어질 일은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이루어질 상황이었다. 만약 성공만 한다면 마숙영은 영원히 유독중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여의치 않다 해도 사천을 빠져나가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도 될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마숙영의 표정은 편해 보이지 않았다. 당태세가 여인의 안색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러느냐? 구식환혼단이 영 미덥지 못하느냐?”
“그게 아니오라……”
마숙영은 당태세와 종리세리의 눈치를 보더니 어렵게 말을 이었다.
“꼭 사형문을 쳐야 하는 건가요. 그 친다는 것이 혹시…”
“그래, 인명을 빼앗는 것이다. 왜, 너는 그 방식이 맘에 들지 않는 게냐?”
마숙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사람이 사람의 목숨을 좌우한다는 것이 너무 소름끼치네요. 제 혼사가 그렇게 중요한 것도 아니고 당문주님의 포한이 그렇게 무거운 것인지도……”
“너는 네 남은 일생을 걸고 남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산 적이 있느냐?”
“네?”
마숙영을 입을 벌렸다가 당태세의 눈동자를 보고 입을 다물었다. 노인의 눈매는 매섭고 독기 가득하고 세상 모든 것을 불살라 버릴만큼 증오에 가득한 눈이 아니었다. 오히려 침착하고 조용하며 인간사 칠정육욕이 심연 깊숙이 침잠한 듯 보이는 잔잔한 눈매였다. 노인은 묵묵히 마숙영을 바라보더니 눈을 지그시 감고 덤덤하게 말하였다.
“본다고 알 것이며, 말한다고 이해할 것이냐.”
“저……저는……”
“천하가 무너져도 나는 내 업을 모두 갚는다.”
당태세의 매몰찬 말이 마숙영의 귓가에 들어갔다.
“내가 애초에 하려던 일은 두 문파의 궤멸이지 너를 유독중에게서 구해주는 것이 아니다. 일의 선후관계를 잘 보아라. 마숙영. 내 방침이 맘에 들지 않는다면 내 결혼식과는 관계없이 살업을 이어가면 그만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는 없소이다. 소저. 부모와 가문에 누를 끼치고 싶소이까?”
차갑고 차분한 종리세리의 목소리가 마숙영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 종리세리의 얼굴을 마주보던 마숙영이 천천히 고개를 젓자 당태세는 못을 박듯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네 안의 선함을 어리석음으로 바꾸지 마라. 마숙영.”
“……제 부친의 구명은 꼭 지켜 주옵소서.”
당태세는 마숙영의 말에 눈을 아래로 돌린 채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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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기를 받은 지 사흘 째 되는 날 아침, 포일연의 집 앞에는 붉은 가마가 시종들과 함께 마련되어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혼례에 인근 골목의 사람들이 모두 모여 떠들며 왁자지껄 아리따운 신부와 알지 못하는 신랑에 대해 새들이 지저귀듯 떠들며 골목 앞뒤를 가득 메우며 서 있었다.
그러나 붉은 예복으로 단장한 아리따운 신부는 가마에 올라 포일연의 앞을 떠날 때가지 아무런 말이 없었고, 그 뒤를 따르는 구부정한 곱사등이 노인의 표정 또한 딱딱하게 굳어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들의 환호성과 고함과 혼례의 주인공은 서로 다른 것을 보고 듣는 것 같았다.
혼례는 떠들썩하게 시작되었지만 가마가 떠나고 나자 골목 안에 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고, 문을 걸어 잠근 포일연 역시 잠잠하기가 산사(山寺)의 선방(禪房)과 같았다.
그렇게 조용하던 포일연의 내부는 서산 너머로 해가 지고 사람들이 자신의 보금자리로 넘어간 뒤에야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고 있었다. 주인이 떠난 대장간을 지키고 있던 두 명의 객(客)이 슬쩍 밤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온 것이었다.
“유독중은 본채에 대한 대비를 할 겁니다.”
성신(星辰)이 해와 구름 대신 하늘을 차지하고 가냘픈 빛을 땅에 뿌리고 있었다. 종리세리와 당태세는 포일연의 어두운 정원에 나와 의자에 앉은 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당태세는 종리세리의 말에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천하의 지도 위에 자기 문파의 선을 긋고 이문을 획책한 사람이오. 신부가 죽는다고 눈 하나 깜짝할 것 같소이까?”
“종리천호의 말이 맞을 거요. 그 놈이 그런 일을 할 리가 없지.”
“그런데 왜 그런 계책을 낸 거요? 마숙영은 그냥 이곳에 놔두고 우리끼리 들이쳐도 아무런 문제가 될 것 없습니다. 계략은 복잡하고 해법은 너무 조악하오.”
“……어쩌다 내가 저 아이를 먼저 만나서 그 사연을 들었소.”
“뭐요?”
“……그 말을 듣지 말았어야 하는 건데. 이미 가마는 떠나지 않았는가.”
당태세는 입맛을 다시더니 다시 찻잔을 입에 가져갔다. 종리세리는 뻔히 당태세를 바라보더니 자신도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하늘을 보더니 한마디를 던졌다.
“이제 녹영과 팔기는 부르지 못합니다. 문주. 나는 이미 장군부의 직위를 버렸소.”
“그랬소이까. 아쉽구먼.”
“단지 아쉬운 상황으로 끝날 일이 아니오. 우리가 짠 계략은 달걀껍질만큼이나 얇고 부서지기 쉽습니다. 그 많은 전답을 개간할 정도의 사내들이 있다면, 그들을 감독한 사형문도 또한 규모가 있다고 봐야 합니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싸움이오.”
당태세는 종리세리의 표정을 보더니 다시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을 익히 생각하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녹영과 팔기가 오지 않으면 더 발분하는 수밖에 없지 않겠나.”
“당문주. 왜 어려운 싸움을 더 어렵게 자처하는 거요?”
“마지막이니까.”
당태세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땅은 수많은 것들이 바뀌었건만, 천하의 위에 놓인 해와 별은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모든 것을 잃고 모든 것을 빼앗으러 온 노인은 주름과 흉터가 가득한 얼굴을 하늘 위로 향하고는 탄식을 내뱉었다.
“미련도 없고, 억울함도 없이 깨끗하게 모든 것을 끝내고 싶을 뿐이오. 억울한 자를 더 만들기 싫고, 내가 그 죄를 다시 뒤집어쓰고 죽고 싶지도 않은 게지. 늙은이의 망녕이자 집착이오.”
“이 일이 문주의 마지막입니까?”
“내 생각에는 그렇소.”
“이 일을 마치고 살아있다면 무엇을 할 겁니까?”
종리세리의 물음을 들은 당태세는 허공을 바라보더니 허탈한 웃음을 내보였다.
“더 할 일이 남아있겠나? 이 썩은 육신으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빚을 청산하면 모든 것이 다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 아니겠소?”
“다시 제자를 키울 생각은 없으시오?”
당태세는 대답 대신 코웃음을 치며 종리세리를 바라보았다. 종리세리는 예나 지금이나 진지한 표정을 바꾸지 않은 채로 당태세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당태세는 이런 사내를 익히 알고 있었다. 예전 강호에 편만하던 협객들은 모두 저런 눈을 지니고 있었다. 사내는 당태세를 늦게 만났고, 당태세 역시 사내를 늦게 만났다. 하늘은 천시(天時)를 아무에게도 후하게 주지 않았다.
“종리천호. 그대는 무엇을 할 것이오? 사면부 여덟 장을 다 모은다면 말이오.”
“나도 그것으로 끝입니다.”
“더 할 일이 없는가?”
종리세리 역시 하늘을 쳐다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당태세는 그를 보며 히죽 미소를 지어보였다.
“종리천호, 만주의 복색을 벗고 대장장이가 되는 것은 어떤가? 모든 것이 준비되어 있는 것 같은데.”
이번에는 중년사내가 코웃음을 치며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은 해 보겠소이다. 그리고…..”
“그리고?”
“이제부터는 그냥 종리세리라 부르십시오.”
두 사내는 말을 맺고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하늘을 쳐다보았다. 맑은 하늘 아래 숱하게 박혀있는 수많은 별들이 깜박이며 두 사내를 쳐다보는데, 오랜만에 하늘과 땅의 모든 이들이 움직이지 않고 제 자리에 남아 서로를 쳐다보았다. 늦은 밤에도 바람 한 점 불지 않았다. 바람은 조만간 땅의 사내들이 만들어 사방으로 불어 올릴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