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 사천 성도 (9)
여름의 위세가 한풀 꺾였다 하지만 사천의 여름은 아직 근기가 남아 있었다.
습하고 더운 여름의 햇살 아래 아룡은 땀을 뻘뻘 흘리며 밭둑에 주저앉아 있었다. 오늘 하루 그가 다니며 뽑고 솎아낼 잡초는 까마득하게 많았다.
아룡은 자신의 발 앞에 가지런히 늘어선 논을 보며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돌리며 넌더리를 내었다. 아무리 농사가 천하의 근본이라고 하지만 아룡은 근본이 농사꾼이 아니었고, 오히려 도회의 삶이 어울리는 이였다.
그는 머리위에 둘러쓴 수건으로 다시 얼굴을 닦고 짜증나는 얼굴로 해를 쳐다보았다. 여전히 하늘에는 지나가는 구름 하나 없었다.
“젠장맞을. 이러다가 벼가 익는 게 아니라 내 머리가 먼저 익어버리겠네.”
멀리서 감독관의 호령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왔다.
아룡은 다시 인상을 굳히며 일어서서 논둑을 걸으며 사방을 둘러보았다. 여기저기 흰 옷을 입은 사내들이 돌아다니며 다시 논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하아,
젊은 헌헌장부의 입에서 한소리가 흘러나왔다.
“숙부님의 명이 없고, 내가 하는 일이 우리 대청국의 대사가 아니었더라면 이런 짓은 예전에 때려쳤을 것이다. 진심이다!”
“허, 무두리. 그래도 네가 받은 명은 제대로 지킬 줄 아는구나. 암, 그래야 내 조카 아니냐.”
순간, 아룡은 화들짝 놀라며 등 뒤를 돌아보았다.
사내는 멍하니 서 있다가 이내 입이 화들짝 벌어지며 흰 저고리에 흰 바지를 대충 여미고 서 있는 늙은이를 바라보았다.
아룡은 후다닥 달려들어 당태세를 왈칵 껴안고 싶다는 충동도 들었지만 햇살이 너무 따갑고 습하여 사람 옆에 다가가고 싶지는 않았다.
당태세는 히죽 웃으며 논둑을 걸으며 아룡의 일을 돕는척 논 안으로 들어갔다. 어느새 벼는 쑥쑥 자라 사람의 허리춤까지 올라왔고 파랗던 낱알에 조금씩 누런 기운이 맺히는 중이었다.
“그래도 조금 뒤면 추수를 하겠구나. 희한하구먼. 나는 유독중이 진짜 곡식을 재배할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는데.”
“숙부님, 저는 어떻게 찾았습니까?”
“감독관에게 말하고 들어왔지.”
“네?”
“섬서에서 먼저 들어온 조카 민삼아를 찾는다고 하였더니 금세 알려주더구먼. 물론 돈 몇푼 얹어준 것은 기본이고.”
당태세는 허리춤에서 슬쩍 조롱박 하나를 아룡에게 건넸다.
아룡이 조롱박병의 마개를 뽑아내자 향기로운 술 냄새가 논 사이에서 진동을 하였다. 아룡은 눈이 휘둥그레지며 조롱박을 입으로 가져가 정신없이 들이켜는데, 그 모습을 보던 당태세는 혀를 끌끌 차면서 사방을 둘러보았다.
“이렇게 드넓은 벌판을 개간하였으니 사람이 많이 필요한 것은 맞겠구먼. 그나저나 밥은 제대로 나오느냐? 술 마시는 꼴을 보니 변변히 얻어먹지도 못하는 모양이로세?
“밥은 줍니다요!”
어린애가 엄마 젖에서 겨우 떨어지듯 조롱박을 입에 물고 있다가 간신히 떼어낸 아룡이 입맛을 다시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내 젊은 사내는 짜증난다는 듯 인상을 구기며 중얼거렸다.
“삶은 채소에 밥 한 덩이, 소금 조금이 전부지요. 밥을 더 달라면 더 주긴 하는데…고기하고 술도 없이 무슨 낙인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진짜 땅 받으러 들어온 것도 아니고.”
“다른 이들은 감내하며 잘 먹는단 말이렷다.”
“아무래도 자기 땅을 준다니까요.”
아룡이 눈살을 찌푸리며 햇살아래 펼쳐진 논과 그 위에서 자라는 벼들을 보며 중얼거렸다.
“제가 여기 들어온 지 채 사흘도 안 됩니다만 대충 돌아가는 건 바로 알 수 있겠더라구요. 저 앞에 보이는 숙소에서 일단 다 묵으면서 논밭을 갈고…여기서 한 한두 달 일한 다음에는 자기 땅을 불하받아서 나가는 겁니다.”
“한두 달? 한두 달 있다가 다른 곳으로 간다고?”
아룡은 조롱박 끝을 핥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농사짓는 법 대충 익히면 나가는 것 같습니다. 태반은 농민이라 가르칠 것도 없어요. 제 옆자리에 있는 고씨 성 가진 형씨도 어제 나갔습니다. 한꺼번에 비슷한 시기에 들어온 사람이 다 빠져나갑니다. 아마 그 사람들이 빠져나간 자리를 제가 메우는 모양이지요.”
“그들은 어느 쪽에서 토지를 불하 받는다더냐?”
당태세의 말에 아룡이 슬쩍 손가락을 들어 한참동안 허공을 헤매더니 서남을 향하였다.
“아마 저쪽으로 간다고 했던 것 같습니다. 큰 수레가 와서 사람들을 태워갔거든요. 다들 엄청나게 좋아하더라고요. 하긴 공짜로 땅이 생기는데….”
“땅이 생겨도 잠은 여기서 자야 할 것 아니냐. 집도 지어준다더냐?”
순간, 아룡은 멍하니 당태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눈을 껌벅거리고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글쎄요. 집도 불하해주는 것 아닐까요?”
“땅하고 집하고 같으냐. 그렇게 수지타산 안 맞는 짓을…….”
순간, 당태세는 말을 멈추었다.
당태세는 아룡이 들고 있는 호미를 한참동안 쳐다보더니만 턱을 쓰다듬었다. 아룡이 쓰고 있는 호미는 날이 빠지고 손잡이도 손때가 시커멓게 껴 있는 오래된 물건이었다.
“농구를 새로 지급받지 못했느냐?”
“네? 새 농구가 어디 있습니까? 여기 있는 농구들은 다 오래된 것 뿐인데요.”
“새로 만든 농구를 하나도 얻어쓰지 못한다고? 창고에도 없어?”
“없습니다요. 자루 멀쩡한 거 찾기가 힘든 판인데 언감생심 새 농구라니요.”
아룡의 대답에 당태세는 한참동안 말없이 논을 바라보며 앉아있었다.
사방을 반듯하게 깎은 논들이 줄을 지어 지평선을 이루며 햇살 아래 초록색 바다를 만들며 작은 바람에 파도를 만드는데, 노인과 아룡은 그 바다 위에 상체를 내놓고 들어앉아 있는 듯 보였다.
아룡은 당태세가 말없이 경치를 바라보자 불안한 표정이 되어 노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한참 뒤, 노인은 초록 바다를 바라보며 뜬금없는 말로 침묵을 깼다.
“아룡, 여기 식당 사람들하고는 친하냐?”
“네? 그냥 대면대면 합니다만 갑자기 무슨 말씀이십니까?”
“마른풀과 기름을 좀 마련해두고 있거라. 그리고 때가 오면 내가 네게 신호를 할 것이니…….”
노인의 눈이 사방을 빠르게 훑어보더니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옆에 서 있던 아룡의 눈이 커지며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사방 푸르른 논 위에서 백색 옷의 두 사내가 들리지 않는 소리로 중얼대는데 저 멀리서 알 수 없는 곤충의 울음소리가 짧게 바닥을 타고 들려왔다.
***
철장타 위목손의 수레는 한식경이 다 되어서야 당태세를 내려 준 장소에 다시 모습을 나타내었다.
농구를 들고 있는 노인을 본 수레가 앞에 멈춰서자 노인은 가타부타 말없이 곱사등이 노인이 모는 수레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수레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당태세가 고삐잡은 철장타를 향해 말을 걸었다.
“유독중의 반응을 보았느냐?”
“덤덤하기 그지없어 보였습니다. 오히려 반색을 하신 것은 옆에 있던 문주님이었지요.”
“마길이 유독중과 함께 있단 말이냐?”
“네. 문주님은 오랜만에 좋은 일이라며, 부연주님이 이제야 정신을 차렸다면서 좋아하는데 정작 사형문주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별 다른 말이 없었습니다. 예복을 보낼 테니 잘 준비하라면서….”
철장타는 말을 하다가 이를 악물더니 신음소리를 내었다.
“도대체 그런 위인하고 혼약 운운한다는 것이 맘에 안 들 뿐입니다.”
“철장타 자네가 그런 생각인데 어찌하여 다른 포일문의 사내들은 일언반구 언급도 안 하는가. 포일문주 마길은 아예 희희낙락이라고?”
철장타는 길바닥에 침을 뱉더니만 이를 드러내고 고개를 돌렸다.
“북경에서 사천으로 온 뒤에 다른 형제들은 예전같지 않습니다. 뭔가 씌인 사람들 같지요. 우리 문주님 역시 모든 일을 사형문주의 뜻에 따를 뿐이시니….”
한참동안 투덜대는 철장타의 모습이 오히려 마길보다 훨씬 마숙영을 아끼는 듯 보였다. 당태세는 주의를 돌리려는 듯 다른 질문을 꺼내들었다.
“사형문의 다른 제자들도 본청에 있던가?”
“신도예귀(神到銳晷)와 묘광조(妙光鳥)는 보았습니다.”
“십대제자중 둘은 본채에 있다는 말이구나. 그렇다면 사천 성도에는 둘이나 셋 정도겠군.”
“이제 방책은 다 세우신 겁니까?”
당태세는 대답대신 철장타에게 다른 명을 내렸다.
“철장타. 여기서 잠시 말머리를 돌려라.”
“네?”
“내가 가자는 곳으로 가보자.”
두 사람을 태운 마차는 곧 성도를 향하는 길을 벗어나 남서를 향해 수레를 돌렸다.
한참동안 수레를 타고 가던 당태세는 사형문의 본채가 안 보일 즈음까지 가서야 뒤를 쳐다보더니 슬쩍 주변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좁은 길은 이제 넓은 관도와 이어지며 남서로 계속 이어지는데, 이 길을 따라가게 되면 운남(雲南)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수레를 멈춰라.”
당태세는 수레에서 내려와 천천히 주위를 걸어 다녔다.
수레를 세운 철장타 역시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당태세를 따르며 사방을 쳐다보았다. 당태세는 남쪽으로 이어진 길과 지세를 바라보더니 자신의 발아래 놓인 흙바닥을 살피며 신중하게 발걸음을 옮겼다.
“뭘 보시는 겁니까? 맹주님?”
“이 수레바퀴 자국은 오래된 것이 아니구나.”
“그렇군요. 길어야 이틀 정도 되어 보입니다. 아직 진흙이 마르지 않았으니…….”
“곧장 남으로 내려갔어.”
“네.”
철장타가 고개를 갸웃대며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뭐가 이상합니까? 뭔가 이상한 게 보이시는 겁니까?”
“이 근처에 민가가 있더냐?”
“민가는 없습니다. 그저 관도로 이어지는 골목인데 여기까지 이어진 민가가 있겠습니까? 전답도 훼파되어 있는 판국인데…….”
“내리지 않았다.”
“네?”
“아무도 내리지 않은 게다.”
철장타는 이제 당태세가 하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알아듣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지만, 당태세는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굳은 표정이 되어 있었다.
“여긴 되었다. 위목손. 이제는 철광으로 가보자.”
“네? 저희 야장(冶場)으로 가자는 말씀이십니까?”
“그래. 그곳에서 네가 시간을 좀 끌어줘야겠다.”
철장타는 영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지만 당태세의 명을 따라 수레를 몰고 다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희끗희끗 금전서미가 옆으로 회백색의 머리가 자라 올라오는 중늙은이 철장타의 뒷머리를 살펴보며 당태세는 쓴웃음을 지으며 중늙은이가 된 포일문의 사내를 보았다.
“그 나이가 되도록 사형들이 버거우냐?”
“……나이를 먹어도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하냐.”
수레는 어느새 거대한 철문 앞에 멈춰섰다.
쇠지팡이를 짚은 철장타가 문 앞을 향해 고개를 들고 뚜벅뚜벅 걸어가자 문을 지키고 있던 번수 두 명이 당황한 표정을 지으며 문 안으로 들어섰다.
철장타가 뒤를 돌아보는 순간, 당태세는 몸을 낮추고 문 옆으로 재빠르게 담 옆으로 붙어 다른 쪽문을 향해 움직였다.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았다고 하지만 이곳 야장의 열기는 다른 곳에 비할 바가 못 되었다. 사방이 뚫려 있는 마당까지도 윗마당에서 불어오는 열기가 밀어닥칠 지경이었다.
당태세는 누각 위에 누각을 올린 듯 산 전체를 계단으로 덮은 채 산허리를 뚫어 대장간을 만들어 놓은 포일문의 야장을 올려다보았다.
이곳은 성도 내에 있는 포일문과는 비교도 안 될만큼 바빠 보였고, 지금도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 때, 벽의 뒤쪽에서 누군가와 입씨름을 하고있는 철장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 위사제. 이곳에 들어오려면 사형문주의 허락이 있어야 함인데?”
“부연주의 혼약일자가 잡혀서 이리 왔소. 사형들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우리는 사형문의 명만을 받는 것인데.”
당태세가 슬쩍 눈살을 찌푸리는데 철장타의 볼멘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아무리 그래도 문주의 따님이시오! 어찌 그런 말씀들을 하십니까!”
“철장타, 네 놈은 그 나이가 먹도록 여전히 철이 없고 세상도 모르는구나. 지금이 마숙영의 혼사를 논할 처지냐? 문주도 예전의 문주가 아니지 않는가?”
“사형!”
당태세의 입이 일자로 굳게 다물리고 턱에 주름이 잡혔다. 어처구니없는 말이었다.
‘사문(師門)도 없고 정리(情理)도 없는 파렴치한 말이구나.’
생각 같아서는 지금이라도 달려나가 포일사성들을 단칼에 없애고 싶었지만 대사(大事)를 앞두고 목부터 잘랐다가는 일이 어그러질 것 같았다. 차라리 귀를 막고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기는 게 나을성 싶었다.
“나중에 꼭 들를 테니 조바심을 가질 필요는 없다.”
노인은 좁은 통로와 길을 따라 열기 가득한 야장이 아니라 계단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길을 택하였다.
아래로 갈수록 점점 넓어지는 계단과 함께 담으로 둘러싸인 넓은 공터가 당태세의 눈앞에 나타나는데, 그 아래에는 예전 사천에 들어올 때 당태세가 탔던 것과 비슷한 크기의 수레들이 십여 개 놓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대장간에서 만들어낸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당태세는 계단참에 몸을 숙인 채 빤히 수레와 그 위에 실린 쇳덩이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노인의 눈동자가 번득이며 자기도 모르게 천천히 고개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이제야 대충 그림이 뭔지 알겠구먼.”
노인은 다시 몸을 돌려 위로 재빠르게 올라가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계단을 타고 오르다 가장 낮은 곳의 담 위로 몸을 띄우고 바깥쪽 담 아래 깊은 그림자 사이로 숨어 들어갔다. 노인은 들어올 때처럼 밖으로 나갈 때에도 발소리 하나 내지 않았다.
“원하는 것은 보셨습니까?”
당태세가 다시 수레로 돌아왔을 때, 철장타는 심호흡을 하며 하늘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먹먹한 표정으로 눈을 깜박이고 있는 철장타를 빤히 쳐다보던 당태세는 입맛을 다시더니 뒷자리로 들어가 자리에 앉았다.
“가자. 너도 영 기분이 좋지 않을 터인데.”
“사형들과 제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철장타의 말에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듣지 말아야 할 것을 듣고,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았다.”
흔들리는 수레 안에서 노인의 눈동자는 멀어져가는 흙길에 고정된 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