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 사천 성도 (8)
포일문의 문을 열고 들어선 얼음조각 같은 사내는 어느 새 별채의 탁자에 앉아 당태세와 심각한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다.
조용하기 그지없던 포일연의 별채에 사내가 셋이나 들어차자 마숙영은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못했다. 여인은 바깥에 나가서 사내를 데리고 온 철장타 위목손을 보며 작은 소리로 말하였다.
“대체 어떤 사람인 줄 알고 포일연에 들이신 거예요, 위호법? 저 사람은 아무리 봐도 범인의 신색이 아니라 관(官)이나 팔기에서 나온 사람 같은데?”
“보신 그대로입니다. 당문주가 찾아오라는 게 바로 저 사람이었습니다.”
위목손을 종리세리를 흘끗 쳐다보더니 마숙영에게 속삭였다.
“검각 금우도를 통해 내려온 사람, 시중을 홀로 돌아다니며 매 같은 눈매에 차가운 안광을 가진 무인, 콧수염이 날카롭게 정리된 기인(旗人)이자 관복도 아니고 평민의 복색도 아닌 자. 사람들 사이에 섞이려고 노력하지만 기름처럼 겉도는 사람. 외톨이.”
철장타는 당태세가 알려준 말을 주문처럼 읊조리면서 앉아있는 종리세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곱사등이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계획에도 없는 혼잣말을 읊조렸다.
“다른 듯하면서 비슷한 사람들입니다.”
마숙영 역시 철장타의 말에 자기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마주 앉은 탁자는 냉기가 감돌다 못해 서리가 맺힐 것 같았는데도 두 사내는 주위의 공기는 개의치 않은 채 두 사람의 대화에 빠져 있었다.
“지금까지 이것이 내가 정리한 내용이오. 종리천호. 둘을 한꺼번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이 되다보니 혼자서는 도저히 정리가 되지 않는구먼.”
“성도를 사형문이 관리하고, 포일문은 사형문에 종속되어 있다 이겁니까.”
“뭔가 그 안에 다른 게 더 있소. 혼사(婚事)라는 말도 안 되는 일을 유독중이 벌이고 있는 것을 감안하면 말이오.”
종리세리는 슬쩍 마숙영을 바라보더니 다시 콧수염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혼사는 두 가문의 인연을 공고히 만드는 도구 아니겠습니까?”
“그럴 수도 있고, 시선을 분산시키려는 용도일 수도 있고, 안심시키려는 계락일 수도 있겠지.”
당태세의 말에 종리세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그렇다면 내가 무슨 일을 하면 되겠소이까. 당문주?”
“그대는 협조해 줄 생각이 있소?”
“마지막 남은 사면부 두 장.”
종리세리는 당태세를 쳐다보며 속삭이듯 중얼거렸다. 마숙영과 철장타에게 발설되면 안 된다는 의사가 분명했다. 당태세가 고개를 끄덕이자 종리세리 역시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이 마무리되면 나와 당문주 모두가 자유로워지는 거요.”
“그렇겠지.”
“그렇다면 말씀하시오. 내가 무엇을 도우면 되는지. 팔기(八旗)의 법을 따지지 않고 말해도 상관없소이다.”
“무슨 소리요?”
당태세가 눈을 둥그렇게 뜨자 종리세리는 손을 내저으며 되었다는 듯 말을 아꼈다. 당태세는 종리세리의 표정을 보더니 어깨를 으쓱대더니 말을 이었다.
“성도 안에 지금 다섯 명의 사형문 십대제자가 있소. 다섯 모두가 있는지 몇은 서문 밖의 장원에 있는지 알지 못하오. 종리천호께서는 성도를 다니며 사형문의 고수들을 찾아주시면 될 것 같소이다.”
“색적(索敵)을 하라는 말이구먼. 그야 간단한 일이오.”
“그들을 없애고 여세를 몰아 사형문과 포일문을 같이 들이칠 것이오. 어떻게 생각하시오?”
종리세리는 슬쩍 당태세를 보더니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손가락 세 개를 펴 보였다.
“포일문에도 제자가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 그렇지. 젠장. 나이를 먹으니 총기가 떨어지는겐가…….”
당태세가 인상을 찌푸리며 투덜대는데 종리세리는 무덤덤한 표정으로 괴로워하는 당태세를 보더니 자신의 찻잔과 당태세의 찻잔을 가져와 거리를 벌려놓은 뒤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성도에 최대 다섯 명의 적. 그리고 본진에는 사형문주와 포일문주, 그리고 포일문의 제자 셋. 그렇게 본다면 오대오요. 각개격파를 하자는 당문주의 병법이 맞소이다. 하지만 시간을 길게 끌면 우리가 오히려 둘러싸이게 됩니다.”
“그렇겠지.”
“십대제자의 무공과 포일사성의 무공, 두 문주의 무공도 비교해 보셔야 하오.”
당태세는 종리세리의 말에 머리를 긁적였다.
지금까지는 당태세 홀로 적진에 들어가 일신의 무공으로 상대방을 농락하며 적의 수급을 받아냈었지만 지금은 구대문파의 수장 둘이 한꺼번에 있는 자리였다.
게다가 십대제자나 포일사성 역시 개인의 무위로는 당태세의 상대가 아닐지라도 문주와 가세하여 당태세를 노린다면 어지간히 성가실 터였다. 아니, 이번에는 자칫하면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몰랐다.
당태세는 종리세리를 가만히 보다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성도 안의 물건들부터 해결하고 본진으로 들어가는 것이 어떻소?”
“성도 내에서는 죽은 듯 조용히, 살수처럼 전광석화로 끝내야 할 것이오. 만성의 팔기들은 자비가 없을 테니.”
당태세를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한 마디를 덧붙였다.
“하지만 유독중이라면 분명 사람들을 점고할 거요. 그냥 놔두지 않을 것이니….”
“그렇다면 다른 쪽으로 본진의 시선을 돌려야지요.”
종리세리의 말에 당태세의 눈이 조금씩 커져갔다.
당태세는 책상을 보며 둥그래진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더니 고개를 짧게 끄덕이고는 고개를 돌려 위목손과 마숙영을 바라보았다. 당태세는 가녀린 미인의 자태를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혼사(婚事)가 꼭 그들만의 계획일 이유는 없지.”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것이 있소이까?”
종리세리의 말에 당태세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전 종리천호의 말에서 뭔가 번득하니 떠오른 게 있소. 실로 생사경(生死境)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있으니 말이오.”
“무슨 말인지 모르겠소이다.”
당태세는 대답대신 허리춤에 차고 있던 전대를 부스럭거리더니 뭔가 시커먼 단약을 하나 꺼내 보였다. 종리세리는 눈살을 찌푸리고 이게 무엇이냐는 듯 당태세를 바라보자 당태세 역시 인상을 쓰며 자신의 손아귀에 들린 단약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 늙은 돌팔이가 제대로 약효를 말했어야 할 텐데 말이지.”
***
“오늘부로 마 소저는 청기(請期)에 대한 응답을 하시게. 기일을 사흘 뒤, 그 동안 나와 종리천호는 따로 움직일 것이네.”
“사흘 뒤에 혼약이라고요? 너무 이르지 않습니까?”
마숙영이 어리둥절하다는 표정으로 그를 보자 당태세는 이를 드러내며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 쪽도 좋아할 것이야. 어차피 무정금 유독중은 격식을 차리는 것보다 혼약이 중할 것이니.”
노인의 눈동자는 철장타 위목손에게 옮겨갔다. 쇠지팡이를 들고 서 있는 곱사등이 노인은 마치 순천문도인 듯 당태세를 우러러보고 있는데, 당태세는 위목손에게 짧게 영을 내렸다.
“네가 청기에 대한 응답을 하러 사형문으로 들어갈 것이다. 나는 너와 함께 변복하고 같이 사형문에 들어가 주변을 둘러볼 것이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용모파기가 되어 계신데….”
“걱정 마라. 설마 자기 밭을 가는 농부까지 조사하지는 않겠지.”
위목손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는데, 당태세는 종리세리를 돌아보며 말했다.
“성도는 대처요. 사흘 안으로 색적이 가능하겠소?”
“더 화급한 일도 해 본 적 있소이다.”
종리세리의 말에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숙영을 보며 말했다.
“마소저는 여기서 직공들을 잘 보고 계시구려. 일은 우리 셋이 할 것이니 기다리시면 될 겁니다.”
마숙영은 세 사람을 보더니만 언짢다는 듯 팔짱을 끼고 세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게 전부인가요? 제가 할 일이 하나도 없다고요?”
“지금은 없는 거지. 사흘 뒤부터는 제일 바빠질 게요.”
당태세의 눈이 슬쩍 찌푸려지며 여인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할이 될 것이고.”
***
“그런 모습으로 따라오실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해봤습니다. 문주님.”
“문주라고 하지 말게나.”
당태세와 위목손은 작은 수레를 타고 성문을 지나 드넓은 흙길을 타고 서쪽을 향하였다. 문의 파수들은 위목손의 용모를 이미 알고 있는 듯 별다른 심문을 하지도 않았다.
당태세는 위목손이 모는 수레 옆에 앉아 흰 저고리에 갈퀴를 어깨에 이고 성한 왼쪽 다리춤을 무릎까지 걷어올린 채 얼굴에 흑칠을 하고 앉아 있었다.
한 눈에 보더라도 아침에 밭일을 하러 나갔다가 성에 들렀다 돌아가는 늙은 농부의 행색이었으니 누구 하나 당태세에게 관심을 갖는 이는 없었다. 위목손은 슬쩍슬쩍 당태세를 바라보더니 어깨를 들썩거렸다.
“못 알아보는 것은 좋은데 그렇게 변장하시고 어떻게 사형문의 본채에 들어가실 생각이십니까?”
“사형문에 들어가지 않는다.”
“네?”
“내가 만날 사람은 따로 있느니라. 너는 이 길로 지나가다가 어디서부터가 사형문이 개간하는 땅인지를 알려주면 되느니라.”
두 사람이 지나가는 수레 양편의 노변에는 부서진 집터와 잡초가 무성한 들판이 지평선까지 이어져 있는데, 한때는 이 모든 곳에 전답과 가옥이 줄지어 서 있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황량한 풍광이었다.
당태세는 슬쩍 풍광을 보더니 혀를 차고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안마당엔 잡곡이 멋대로 자라고 우물가엔 아욱이 무성하구나.”
“네?”
“천하가 이렇지 않았다.”
“옛 사천의 풍광을 지금 찾으시면 곤란합니다. 맹주.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당태세는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철장타 위목손이 자신을 맹주라 칭한 것 때문이었다.
보국구대문파맹의 맹주 당태세는 살아있지만 보국구대문파는 남아있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당태세는 남아있는 두 개의 마지막 문파마저 없애기를 소망하는 중이었다. 철장타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많습니다. 맹주. 그 시절은 이렇지 않았지요.”
“흘러간 세월을 그리워하는 건 아무 의미가 없다. 철장타. 너도 늙고 나도 늙었다.”
“그렇지요.”
“너는 어찌하여 홀로 남아 마숙영을 섬겼느냐? 다른 포일사성은 모두 마길과 함께 하는데…….”
“저는 재주도 빈약하고 무공도 약한데다….”
등이 굽은 노인은 뭔가를 생각하더니 슬며시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웃어 보였다. 이제 머리가 세고 주름이 생긴 곱사등이 사내는 무인이 아니라 사람좋은 아비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가 부연주를 키우다시피 하였는데 어찌 떠나갈 수 있겠습니까.”
“부인이 죽은 것은 사년 전이라 하지 않았느냐.”
“원래 허약하셨습니다. 젖 물리는 거 빼고는 대부분 제가 다 뒤치다꺼리를 했지요. 부연주님도 저를 잘 따랐고요.”
당태세는 사내의 입에서 미소가 사라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利)보다는 정(情)을 택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있는 법 아니던가.
“다른 포일사성들은 왕래가 없느냐?”
곱사등이 사내의 입에서 미소가 지워졌다. 위목손은 고삐를 잡은 채 앞을 보며 혀로 입술을 축이고는 말을 이었다.
“다른 사형 사제들과 함께 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많은 것이 바뀌었지요.”
“마길도 바뀌었느냐?”
흙길에 튀어나온 돌덩이에 수레바퀴가 걸려 마차가 덜컹거렸다. 위목손은 잠시 말이 없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부님은…문주님은 좀 많이 바뀌셨습니다. 사모께서 돌아가신 뒤로 특히 많이…바뀌셨지요.”
“어떻게 바뀌었는데?”
“화가 많아지셨지요. 잠을 못 주무시고….”
당태세는 이마를 문지르며 깊게 패인 주름을 쓰다듬었다.
말로 들어서는 무엇이 문제인지 무엇이 진짜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리고 옆자리에 앉아있는 위목손을 십분 신뢰한다는 것도 위험한 일이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눈으로 보고 들은 뒤에 판단해야 할 노릇이었다.
그 때 위목손이 손을 들어 슬쩍 야드막한 야산 하나를 가리켰다.
“저 곳이 우리 포일문이 새로 만든 야장입니다.”
위목손의 손이 가리킨 곳은 작은 산 옆에 연기가 위로 솟아나오고 있는 누각들이 있었는데 그 크기와 규모는 성도 안에 있는 포일문보다 훨씬 커 보였다.
산에 바싹 붙어있는 누각과 큼지막한 대문, 대문 앞에 대어 놓은 커다란 짐수레들의 모습은 야장이 지금도 바쁘게 돌아가고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었다.
‘저 곳에 철광(鐵鑛)이 같이 있는 모양이구먼.’
당태세는 슬쩍 그 눈을 돌려 야장을 바라보았지만 야장의 안을 수레에 탄 채 확인할 수는 없었다.
어느새 수레는 야장의 산뿌리가 이어진 야트막한 언덕을 넘어 아래로 내려가는데, 그 순간, 당태세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앞에 놓인 풍경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성채 같은 장원 하나가 떡하니 길의 끝에 버티고 서 있는데, 그 장원의 옆으로 오와 열이 맞춰진 네모반듯한 논밭이 사방으로 펼쳐져 있었다.
실로 장엄하고 놀라운 풍경이었다.
“이곳이 사형문의 장원입니다. 곧장 들어가면 사형문주를 뵙게 될 터인데 어찌 하오리까?”
“나는 이곳에서 내린다.”
“네?”
“여기서 나는 만날 사람이 있느니라. 너는 사형문에 들어가 청기의 날짜를 확언받고 돌아오라. 이곳에서 기다리면 날 만날 것이다.”
“존명!”
수레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앞으로 떠나갔다.
포일문에서 마련한 갈퀴를 어깨에 맨 농투성이 늙은이는 멀어져가는 수레를 잔뜩 찌푸린 얼굴로 쳐다보더니만 이내 갈퀴를 땅에 짚고는 허리를 툭툭 치며 투덜거렸다. 아무리 봐도 영락없는 늙은 시골 농부의 모습이었다.
“섬서에서 온 민삼아. 그 놈을 찾아야 하는데.”
노인은 다시 쟁기를 끙 소리를 내며 어깨에 올리더니 밭을 향해 저벅저벅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