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 사천 성도 (7)
성신이 아직 지지 않은 이른 새벽, 당태세는 표일문의 별채에서 나와 안마당에 있는 작은 정원을 거닐고 있었다. 아직 마숙영과 철장타는 일어나지 않은 듯싶었다.
마숙영은 아무리 그래도 자신의 목숨을 노리던 살수와 한 지붕 아래 잠을 잔다는 것이 어처구니없다고 여긴 듯 하였지만 철장타의 한 마디를 듣고서는 그냥 자포자기한 듯 싶었다.
“당문주의 별호 귀린갈은 한 번 노린 표적은 귀신같이 목숨을 끊는다하여 붙은 별명입니다. 지금 뛰어나가 다른 곳에서 구명을 한다한들 길거리에서 죽을 것인데 차라리 편하게 침상에서 자는 것이 낫습니다.”
당태세는 피식 헛웃음을 지으며 서서히 밝아오는 동녘을 바라보았다.
원래 포일문은 순천문과 가장 교류가 많은 문파였다. 서로의 흉허물을 모두 알고 덮어줄 정도였고 모자라는 부분이 있다면 십시일반하여 더 나은 것을 같이 누릴 문파였다.
백룡문의 왕양성이 의협(義俠)에 가까웠다면 마길은 정도군자였다. 그만큼 포일문은 적이 없었다. 철장타 위목손의 저 말도 결국 당태세와 허물없이 지내던 과거사가 투영되었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그런 자네가 왜 이렇게 되었단 말인가. 실로 태중의 마숙영 때문이었을까?”
당태세는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지금까지 오갔던 이야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사건을 다시 한번 복기하자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다. 유독중이 색(色)에 미친 놈도 아니고 포일문의 여식과 연분을 맺을 이유가 없었다. 헌데 지금 버젓이 추문(醜聞)이 날 것을 알면서도 혼약을 강행하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그 놈은 사형문에 득이 되는 일이 아니면 밥도 안 먹을 놈이다.”
당태세는 자기가 한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눈빛을 번득였다.
성도 사방에 살수를 깔아놓고 당태세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작자였다. 지금 이 순간에도 사형문의 제자들이 늙은 절름발이를 찾아 골목을 헤매고 있을 터였다. 무창부터 항주까지 한 번도 자기 문도들을 쉼 없이 부리는 인간이었다.
그런 이가 갑자기 후사의 걱정이 생겨서 안온한 삶을 찾는다? 이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이 일로 오히려 평온을 얻을 사람이라면….”
그때였다. 별채의 문이 열리고 가느다란 선의 여인이 새벽바람에 엷은 옷깃을 나부끼며 바깥으로 나왔다.
잠에서 깬 지 얼마되어 보이지 않은 얼굴에 단장도 거의 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희미한 아침 여명 아래 선 여인은 말 그대로 광채가 나고 있었다. 순진무구함 가운데 감출 수 없는 고혹(蠱惑)이 슬며시 고개를 드니 다 늙은 당태세조차 일순간 경계를 무너뜨릴 지경이었다.
여인은 당태세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이는데, 우아하게 굽혔다 올라가는 머리와 등, 허리의 선은 실로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어리석도다. 당태세-
당태세가 혀를 차는데, 여인은 당태세의 앞에 와서 조용히 말을 걸었다.
“벌써 기침하셨습니까? 자리가 불편하셨나요?”
“풍찬노숙에 익숙한 몸이다. 어찌 지붕 아래 잠이 불편할까.”
“그러시군요.”
마숙영은 슬쩍 고개를 숙여 보이더니 다시 당태세를 보며 말했다.
“어젯밤 경망스러움을 보여 죄송합니다. 제가 처음 들어보는 말에 너무 두려워서 그만….”
“되었다. 내가 너였더라도 그러했을 것이다. 철장타는 깨어났느냐?”
“안채에 들어오는 자가 있는지 담을 보고 있습니다.”
“허, 그 놈은 너와 나를 여기 같이 놓아도 네가 안전하다 여기는 것이냐?”
“만부부당의 고수시라 들었습니다. 어찌 다른 방도가 있으리까.”
생각보다 여인은 대담하였고, 철장타 역시 기묘하게 당태세를 의지하는 분위기였다. 당태세는 다시 여인을 보며 말하였다.
“재차 묻는다만 너는 유독중과의 혼인을 파(破)할 생각이 있다 이것이지?”
마숙영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 아버지께 누가 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무르고 싶습니다.”
“허, 그럴 생각까지 있었다면 어찌 야반도주라도 하지 않았느냐?”
마숙영은 미소를 짓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버지의 면목이 있습니다. 게다가 그럴 생각도 못했지요. 사방에 사형문이 있고 제 얼굴을 모르는 성도 사람이 없으니 금방 들킬 거라 생각했지요…….”
미인(美人)으로 사는 것이 어찌 호사(好事)만 있을까.
평범하게 살아도 불필요한 잡음이 많은 것이 인생사일진대 남들보다 뛰어난 것이 하나라도 있는 이들은 주목을 받거나 질시를 받는 게 태반일 터였다.
당태세는 음전하고 조용하게 삶을 사는 마숙영 역시 속에 숨은 고충은 남들 못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였다.
“혼사는 어디까지 진행되었느냐?”
“이미 예물까지 들어온 상태이고 청기(請期)를 신랑측이 물었지만 아직 화답하지 않았습니다.”
신랑이라는 말이 입에서 흘러나오자 마숙영은 얼굴을 붉히고 고개를 숙였다. 열일곱이면 그리 이른 나이는 아니었다. 하나 여염의 규수가 입에 올리기는 아직 부끄러운 말이었다.
“그럼 네가 날짜를 다시 화답해 보내면 그 놈이 친영(親迎)을 오겠구나. 그 때 그 놈을 포일연 대문 앞에서 목 베어버리면 될 일이니….”
“그것은 아니 됩니다. 제가 사형문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말이 되었어요.”
“뭐야?”
“서문 밖의 장원으로 들어가기로 이미 아버지가 합의를 하였습니다.”
당태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마숙영을 바라보다 한마디를 던졌다.
“친영까지 신랑 측으로 보낸다는 것은 그냥 너를 유독중에게 그날 부로 넘기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대체 마길은 어디 있느냐? 저 안채에 있느냐?”
마숙영은 눈을 깜박이더니 다시 조용히 대답하였다.
“아버지는 그게 우리 포일연의 앞날에 도움이 된다 말하셨습니다. 그리고 지금 아버지는 이곳에 안 계십니다.”
“뭐라?”
“사형문주와 함께 본채에 기거하신다 들었습니다. 여긴 가끔 들르시지요. 한 삼사년 되었습니다.”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기괴하고 기가 차는 이야기였다.
천하절색인 장성한 딸을 텅 빈 집에 호법과 홀로 놔두고 자신은 다른 곳에 기거하는 아버지가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당태세는 가면 갈수록 포일연의 분위기가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네 아버지는 원래 군자(君子)라 불리던 위인이다. 포일문은 북경에서도 알아주던 무문이자 위세가 높으면서도 타인에게 관후한 곳으로 명망이 높았다.”
마숙영은 희미하니 미소를 머금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당태세가 지닌 마길에 대한 원한은 어젯밤으로 접은 것이 아닌가 하고 믿는 표정 같았다.
“네 부친이 거둔 포일사성 역시 그러한 네 아비의 성정을 보인 것이나 다름없지. 하지만 그렇다 치더라도 장성한 너를 이렇게 홀로 둔다는 것이 뭔가 기이하기만 하구나.”
“제가 어찌 아버지의 복심을 다 알겠습니까. 그저 부친의 깊은 뜻을 제가 해량하지 못하니….”
“그건 이제 내가 할 일이니 너는 내가 명하는 것을 따르도록 해라.”
마숙영이 말을 멈추고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오늘 철장타는 어젯밤 내가 명한대로 사람 하나를 찾으면 될 것이고, 너는 오늘 네가 일하는 곳을 내게 보이면 될 것이다.”
“제가 노사를 믿어도 되겠사옵니까?”
여인의 짧은 말에는 밤새도록 잠들지 못한 깊고 긴 고민이 들어있었다.
마숙영의 말에 당태세는 슬쩍 턱을 치켜들고 여인을 바라보았다. 만고풍상을 다 겪은 늙은 무인의 얼굴은 오래된 고목과 같았으니, 그는 조금 전 만개한 듯한 화사한 여인의 자태를 바라보며 짧게 말하였다.
“순천문주의 말은 천하보다 무겁다.”
마숙영은 잠자코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이마까지 올려 공손히 수례를 올렸다. 손을 이마에서 내린 여인의 표정은 한결 가벼워보였다.
“일터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이리 오소서.”
당태세가 말없이 먼저 발걸음을 내밀자 마숙영은 종종걸음으로 따라와 별채의 문을 열고 포일연의 본채로 들어가는 문을 열어주었다.
아직 해가 채 뜨기 전이라 사람들은 모두 들어오지 않았는데 식은 풀무와 커다란 모루가 거대한 마당의 한 가운에 놓여 포일연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오른쪽 벽에는 연장의 손잡이로 쓸 수 있는 깎아놓은 나무가 즐비하고 한 가운데에는 불을 피우는데 쓰는 땔감이 가득하니, 이 곳에 쏟은 사람들의 정성이 가히 어떠한지를 알 수 있었다.
마숙영은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망치와 집게를 다시 만지작대더니 제자리에 걸어두었는데, 당태세가 지금 보니 섬섬옥수 하얀 마숙영의 팔뚝에는 더 하얀 흉터 몇 개가 별을 그려놓은 것처럼 보였다.
“네 팔뚝의 상처는 불똥이 튄 자리냐? 너도 모루에서 망치를 잡았더냐?”
마숙영은 웃으며 슬쩍 팔을 손으로 가리는데, 당태세는 여인의 말보다 행동에서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인은 왼쪽 창고로 가서 문을 살짝 열어보더니 당태세를 보며 슬쩍 고개를 끄덕였다.
당태세는 여인이 가리키는 대로 열린 창고의 문을 통해 안을 슬쩍 둘러보았다. 순간 당태세의 눈이 크게 떠졌다.
그 안에는 수많은 칼과 창과 화살촉이 쌓여 있었는데 개중에는 녹슨 것이 태반이나 아직 날에 빛이 서리고 번득이는 물건들 또한 가득했다. 손잡이가 없이 모여있는 쇠붙이들은 모두 용모가 오직 피를 보기 위해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당태세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 자리에 모여있는 쇳덩이 중 사람의 명을 빼앗은 것이 몇이고 그러기 위해 벼려진 것이 몇인지 알 수 없었지만 주인이 사라진 병기의 첨단에는 여전히 살기가 맺혀 있었다.
“아버지께서는 이들을 모아다 농구(農具)를 만드셨지요. 제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아버지는 이 창고 문을 열어주시고 제게 이 물건들을 보여주셨어요.”
마숙영은 예전 일을 회상하는지 슬쩍 아련한 눈빛이 되어 쇳덩이들을 바라보았다.
“당신께서 이르시길, 날이 선 것을 녹이고 보습을 만들어 사람의 살을 베는 대신 흙을 파고 갈아서 사람을 먹이겠다 하셨지요. 당신은 소싯적에 칼을 잡은 무인이라 하셨지요. 하지만 다시는 칼을 잡지 않겠다고 하셨어요. 남은 평생은 이곳에서 쟁기를 만들 것이라고…다시는 옛길을 되짚어 가지 않겠다고…….”
“그게 포일문이 포일연이 된 연유라 이것이냐.”
마숙영은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당태세는 주름잡힌 이마를 풀 생각 없이 천천히 문을 닫아걸었다. 마길의 그런 다짐이 어디에서 왔는지 굳이 지금 따지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단지 그런 생각을 지니고 사천까지 온 위인이 어찌 사형문주 유독중과 지금 같이 있는지, 둘이 같이 모여 있다면 무슨 일을 하는지 의문스러울 뿐이었다.
“지금 여기서 농구를 만드는 것은 애오라지 네 몫이냐?”
“그러합니다. 이제 슬슬 직공들이 올 시간이지요. 제가 모루를 직접 때리지는 않지만 농구의 모습과 품질은 관리합니다.”
“네가 이곳에서 만든 것을 사형문을 찾아온 장정들에게 나눠주는 것이냐? 서문까지 농구를 수레에 실어 가는 모습을 본 적이 있다만.”
“보셨습니까? 그저 몇 안 되는 일이긴 합니다만.”
마숙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당태세는 마숙영의 말을 듣고 미소를 머금지 않았다.
“그게 네가 만드는 전부란 말이렷다.”
“네?”
“내가 봐도 그 때 사형문의 장원으로 가는 사내들은 숫자가 기백은 되어 보였는데, 그들에게 네가 만든 농구를 다 줄 수는 없을 것이다.”
“부친의 야장에서도 많이 나오겠지요. 그곳은 철광(鐵鑛)이 옆에 있으니 이곳보다는 훨씬 많이 생산이 되옵니다.”
“철광?”
당태세의 찌푸린 이맛살은 아래로 내려올 줄을 몰랐다. 어느새, 햇살은 큰 대문을 넘어 위로 솟구치고 있었다. 직공들이 문 두드리는 소리가 아련하게 멀리서 울려 퍼지는 중이었다.
***
“이제 무슨 일을 하실 것인지요? 그냥 저는 평상시대로 하던 일을 하면 되는 것입니까?”
당태세와 다시 별관으로 돌아온 마숙영은 소매를 걷어올린 것이 아무래도 야장으로 내려가 일을 하려는 듯 보였다. 마치 당태세를 오래된 친지 정도로 여기는 듯한 말투였다. 참으로 희한한 심성인지라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말을 걸었다.
“너는 내가 사형문주 유독중을 참할 것이라 말하는 것을 듣고도 별반 동요가 없구나. 내심 그가 없어지기라도 바라는 것인가?”
마숙영이 히죽 웃음을 짓더니 당태세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여인의 눈동자는 무서울 정도로 검고 흰자는 아무런 티끌 하나 보이지 않게 하얗기 그지없으니, 오히려 철석같은 당태세의 마음이 먼저 불안해질 지경이었다.
“어젯밤에 저희가 한 것처럼 오랫동안 말씀을 나누고 회포를 푸시면 아무리 맺힌 한이 하늘에 닿았어도 풀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며 평생을 살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습니까?”
“네가 왜 이리 담대하면서도 어떤 꿍꿍이도 없는지를 알겠구나.”
당태세는 물끄러미 마숙영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저었다.
“기약없는 희망에 삶을 매 놓지 말거라. 세상은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야박하고 흉흉하다.”
“저도 알 것은 다 아는 나이입니다. 단지 그렇게 매몰차게 살고 싶지 않을 뿐이옵니다.”
“네가 모든 것을 안다 하였느냐. 네 모….”
당태세는 뭔가 말을 꺼내려다 마숙영의 표정을 보더니 다시 입을 다물었다. 대신 당태세는 찻잔을 슬쩍 손가락으로 잡고 돌리며 객쩍은 소리를 중얼거렸다.
“나는 때를 기다리고 사람을 기다리는 것뿐이다. 나의 움직임에 네가 들어온 것일 뿐이며, 너를 도움으로 인해 내가 취할 수 있는 것이 무언지를 볼 뿐이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그때 슬쩍 문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만 긴 쇠지팡이를 집은 곱사등이 노인이 별채로 들어왔다. 위목손은 당태세를 보며 고개를 숙이더니 절도있는 목소리로 보고를 하였다.
“당문주님. 일러주신 귀인을 찾아 모시고 왔습니다. 실로 문주님이 말씀하신 인상 그대로셨으니, 한 시진도 걸리지 않아 귀인을 찾아 올 수 있었습니다.”
“수고했다.”
당태세의 말에 마숙영은 고개를 들어 위목손의 뒤를 따라 들어온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기인(旗人)의 복장에 깔끔한 변발을 하고 콧수염을 날카롭게 기른 매 같은 풍채의 사나이가 별채에 모여있는 사람들을 칼날 같은 눈빛으로 둘러보는 중이었다. 사내의 눈초리는 의자에 앉아 있는 당태세를 향해 있었다.
“문주께서 나를 찾는다기에 이리 왔소이다. 무슨 영문인지 알 수 있겠소이까?”
“기다리고 있었소이다. 종리천호.”
어느새 당태세의 무표정한 얼굴에 슬쩍 미소가 올라오고 있었다.
“내가 수수께끼를 하나 받았는데 혼자 풀기 난망해서 말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