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88화 (188/226)

188.  사천 성도 (6)

“차 한 잔 받으소서.”

여인이 짧고 공손한 목소리로 말하며 차를 내어 당태세의 앞 탁자에 가져다 놓았다.

당태세는 마숙영이 올린 차를 받아 들고 실로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지금 당태세가 있는 곳은 마숙영이 기거하는 포일연의 별채였다.

포일문의 모든 식솔 목을 끊으러 들어와서 한 번도 본 적 없는 포일문주의 딸에게 차를 받으며 예전부터 알고 있던 늙은 포일문도의 간청을 받아 지금 이 자리에 앉아있는 것이었다.

“그리 좋은 차는 아닙니다만 속을 보하고 따듯하게 해주기는 할 것입니다. 입에는 맞으시나요?”

“괜찮구나.”

모진 생각을 하고 있던 당태세의 입에서 오히려 정중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당태세의 말을 들은 마숙영은 슬쩍 미소까지 지어보였다. 그런 소녀를 보던 당태세는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제 목이 날아갈지 말지 모르는 상황인데 이 아이는 대체 무슨 생각인가? 속이 없는 계집인가 머리가 나쁜 계집인가. 아니면 천품이 그냥 선한 것인가.

당태세는 슬쩍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마씨 소녀의 앞에서는 말을 가려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순간 당태세는 뒷목에서 서늘하니 소름까지 돌았다.

‘설마 이 계집이 섭혼(攝魂)이라도 하는 것인가? 어디 사술(邪術)이라도 배워 온 것인가?’

순간 벽 옆에서 사방을 살피던 철장타 위목손이 히죽 긴 수염 사이로 웃음을 지으며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문주님, 원래 우리 부연주께서는 모든 이를 선함으로 대하는 분입니다. 괜한 의심은 하지 않으셔도 되옵니다.”

“꼬마낙타 네 놈은 각설하고 내게 하려던 말이나 제대로 해 보거라.”

철장타는 당태세가 눈을 부라리자 바로 눈을 아래로 깔며 말을 더듬는데 실로 당태세를 두려워하는게 한눈에 보일 지경이었다. 철장타 위목손은 당태세의 눈길이 자신을 쳐다보자마자 지금까지 기회를 보고 있었다는 듯 고개를 쳐들고는 절박하게 입을 열기 시작했다.

“여기 계신 마숙영 부연주께서는 당금 나이 열일곱이시고 우리 포일연 연주이신 포일문주 마길의 금지옥엽이십니다! 내주(內主)였던 한난화 부인께서 사 년 전 지병으로 돌아가신 뒤에….”

“위호법! 지금 어찌 제 허락도 없이 제 이야기를 하시는 겁니까!”

마숙영이 청아한 목소리를 슬쩍 높이며 아미를 살짝 찌푸리는데, 어처구니없게도 화를 내는 모습까지 고아하며 사랑스럽기 그지없었다. 철장타 위목손은 마숙영의 질책에 고개를 숙이면서도 당태세를 슬쩍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

“우리 포일연의 내사(內事)를 맡아 하셨습니다! 철점의 운영에 관여하신 것은 이년 전이고….”

“위호법!”

“죄송합니다. 부연주님! 부연주님은 여기 서 계신 순천문주 귀린갈 당태세가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셔서 그러시는 것입니다. 한때 북경 사방 천 리 안에 대적할 자가 없었던 천하고절이시며…….”

마숙영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당태세를 쳐다보는데, 철장타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성품이 강직하고 공명정대 하시지만 한 번 출수하면 반드시 명(命)을 거두는 비정(非情)무비(無比)한 분이십니다. 저는 저 분께 대항할 능력이 없을 뿐더러! 지금 우리가 처한 이 절체절명의 상황을 타개해 주실 유일무이한 분이십니다!”

“꼬마낙타놈, 말을 괴상하게 하는구먼. 비정무비, 절체절명은 무엇이고 유일무이는 또 무엇인가?”

당태세는 투덜대며 차를 홀짝거렸다. 마숙영은 당태세는 바라보며 자세를 가다듬더니 다시 조신한 목소리로 말을 걸었다.

“당문주님. 지금 위호법이 하는 말은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만….”

“위목손. 하던 말을 이어라.”

마숙영은 당태세의 말이 나오자 잠시 눈을 깜박이더니만 손을 들어 위목손의 입을 막았다. 당태세가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마숙영을 바라보는데, 마숙영은 자신이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는 사천 성도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자랐습니다. 아버지가 이곳에 정착하러 오신 해에 태어났지요. 아버지는 이곳에서 고생하시며 이 포일연을 여셨다고 들었습니다. 원래는 문주께서도 아시다시피 포일연은 무문(武門)이었지요. 하지만 아버지는 제게 이곳에서는 결코 칼을 잡지 않겠다고 맹세하셨어요.”

마숙영이 위목손을 대신해 자신의 처지를 말하기 시작하자 당태세는 여인을 새삼스레 쳐다보았다. 생각보다 강단이 있는 아이 같았다. 마숙영의 고운 목소리가 다시 꿈결처럼 울려 퍼졌다.

“아버지는 계속 대장간일을 하시면서 점점 세를 늘리셨지요. 나중에는 팔기와 녹영도 저희 집을 알아줄 정도가 되었어요. 그게 제가 열 살쯤 되던 때의 일이었지요. 어머니가 아프기 시작한 것도 그때 부터였어요. 어머니의 병이 깊어지자 그때부터 아버지는 저를 친구 분에게 시집보내시겠다고 하셨지요.”

“그게 사형문주 유독중이라?”

마숙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도 밖에서 농지를 개간하며 사람들에게 땅을 주는 군자라 하였지요.”

“군자?”

당태세가 찻잔을 받아들고 입이 일그러지는데, 그 모습을 지켜보던 마숙영은 계속 말을 이었다.

“나이는 많지만 사려 깊고 포일연을 유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거라면서요. 그리되면 제가 나중에 포일연을 물려받더라도 어려움이 없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마숙영은 말하다가 고개를 숙이더니 피식 미소를 지어 보였다.

“처음에는 저도 싫다고 하였지요. 아무리 아버지의 말씀이지만 어찌 부친의 친구와 혼약을 맺는 것이 상궤에 맞다 하겠어요. 병중의 어머니도 반대하셨고요.”

“부친의 친구가 유독중이라고? 그 놈이 네 아비의 친구를 군자라 하였다고? 마길이 제정신인가?”

당태세가 어이없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리는데, 마숙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맨 처음 말씀을 꺼낸 뒤부터 그분께서는 오 년을 기다렸지요. 정말 시간을 끌만큼 끌었지만 이미 계례(筓禮)가 지난 지 이년이나 지났고…….”

당태세가 더는 못 듣겠다는 듯 말 가운데를 자르고 들어왔다.

“잠깐, 그 놈이 네게 청혼을 넣은 건 그러니까 네 나이 열둘에 넣은 거 아니냐? 대체 무슨 생각으로 다 늙은 것이….”

“그 분의 뜻도 있겠지만 더 기다리게 할 수도 없지요. 혼약이 어찌 개인의 결정이겠어요. 집안과 집안의 연결 아니겠습니까?”

“얘야.”

“하여간 그렇게 된 것이 제 이야기입니다.”

순간 철장타 위목손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

“이리된 연유입니다. 문주님! 제발 우리 부연주님을 그 사악한 유독중에게서 구해주옵소서! 저 혼자 길길이 뛰고 반대하였지만 이 사천 사방에 저에게 동조하는 이는 하나 없고….”

“조용히 해주세요. 위호법.”

“조금 뒤면 친영(親迎)입니다! 시간이 별로 없는데 이렇게 당문주께서 와 주심은 그야말로 하늘이 내리신 기회입니다! 이 기회를 놓치면 아무것도 해결이 안됩니다! 아가씨!”

“죄송합니다. 당문주님. 원래 철장타 위호법은 저를 어려서부터 안아 키우다시피 하신 분이시죠. 제가 시집가는 것에 대해서 제 아버지보다 예민합니다. 그 점은 해량해 주세요.”

마숙영은 웃으며 말을 거기서 맺어버렸다. 부드럽게 마무리를 지었지만 혼례에 대한 것은 더 말을 하고 싶지 않다는 분위기였다. 당태세는 철장타에게 다시 질문을 던졌다.

“사형문이 성도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것이 언제냐?”

“사형문이 장원을 세우고 알음알음 성도의 물산을 자기 것으로 만든 것은 채 오년이 되지 않았습니다. 우리 부연주님에게 유독중이 통혼을 한 것과 비슷한 시기의 일이지요.”

아직 얼얼한 턱을 만지면서도 위목손은 당태세의 말에 꼬박꼬박 공손히 답하였다. 당태세는 이제 냉철한 표정이 되어 위목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는데, 조금 전까지 두 사람을 죽이겠다고 날뛰던 살심 가득한 광기서린 노인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마숙영이 봤을 때 지금 당태세의 표정은 장부를 펴 놓고 손익을 계상하는 늙은 상인의 모습과 흡사하였다.

“지금 성도 사방에 사형문이 퍼져 있다. 거대한 장원은 그렇다 치더라도 다른 곳도 사형문의 손길이 닿을 것이다.”

“그러하옵니다.”

“그렇다면 결국 오년 전에 장원을 세우자마자 마숙영과 통혼을 이야기했다는 것이구나. 그리고 네 모친은 앓다가 돌아가셨다고?”

철장타가 당태세의 말을 듣더니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마숙영을 바라보고는 입을 벌렸다. 마숙영 역시 당태세의 말을 듣더니 뭔가 기이하다는 듯 눈썹을 찡그렸다. 당태세는 두 사람의 표정을 보다가 슬쩍 혀를 차고는 다시 철장타를 불렀다.

“그건 그렇고, 어찌하여 너와 마숙영 두 사람이 포일연 철점을 관리하느냐? 네놈의 사형 셋은 어디 있느냐. 너희 포일사성(抱日四誠)은 모두 살아 있느냐?”

철장타는 당태세의 말에 고개를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는데 늙은 곱사등이 중늙은이는 긴 수염을 만지작거리며 겸연쩍게 입을 떼었다.

“저는 무공도 아무래도 떨어지고 몸도 허약하니….”

“네 놈이 제일 순하고 멍청하니 그런 것이다.”

“말씀 좀 가려서 해주시면 안 되실까요….”

마숙영이 뒤에서 중얼대는 말을 듣더니 당태세는 슬쩍 눈을 흘겼다. 이제 마숙영은 한시름 놓았다는 듯 당태세를 보면서도 그리 놀라는 표정은 아니었다.

아무래도 마길을 맨 마지막에 처리하겠다고 말한 당태세의 말을 마길을 살려주겠다고 알아들은 것 같았다. 당태세는 혼자 알아듣지 못할 말을 투덜대더니 다시 물음을 던졌다.

“왜대호, 독비응, 무경학 이 놈들은 어디에 갔느냐? 마길과 함께 있느냐?”

“……나머지 삼성 분들은 아버지와 함께 사형문주의 일을 봐 주고 계십니다. 사형문이 저희에게 요청을 한 물건이 많아 그분들은 사형문의 일을 전담해서 일하십니다. 이 장원은 온전히 제게 맡기셨지요.”

“포일연이 사형문의 일을 전담한다고? 너는 철점의 일만을 하고?”

마숙영이 고개를 끄덕이자 당태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이마를 만지작거렸다.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뭔가 기묘한 느낌이 스멀대며 올라왔다. 당태세가 말없이 입맛을 다시자 오히려 기묘한 표정이 된 것은 철장타와 마숙영이었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황당한 장면이 있을 수가 없었다.

불문곡직 야밤에 규수의 처소에 침입하여 호법과 여인을 둘 다 죽이겠다고 호통을 치던 노인 앞에서 정작 여인과 호법은 목소리를 죽이고 자신을 죽이겠다는 노인과 문답을 나누는 것이었다.

“그래서 지금 마길과 삼성은 이곳에 없다는 것이냐?”

“부친께서는 보름에 한 번 정도 들려서 재고를 맞추고 가십니다만…잠시 얼굴만 뵐뿐이지요.”

“어디에 있는지는 알고?”

“사형문과 멀지 않은 곳에 야장(冶場)을 다시 열었지요.”

당태세는 다시 입을 다물고 한참동안 말이 없더니 눈을 번득이며 마숙영을 바라보았다. 한참 장부의 틀린 부분을 검토하듯 책상을 뚫어지라 바라보던 당태세의 입이 무겁게 열렸다.

“지금부터 묻는 말에 진심으로 답하거라. 아이야. 너는 유독중과의 혼약을 원하느냐?”

순간 철장타 위목손과 마숙영의 눈이 일시에 반짝이며 당태세를 쳐다보았다.

마숙영은 허를 찔린 듯 멍하니 위목손과 당태세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모기소리만큼 작은 소리로 속삭이듯 대답했다.

“그것은 제 뜻이 아니오라 포일연을 위한…….”

“포일연이 시집을 가느냐? 지금 내가 네 의향을 묻지 않느냐? 혼약을 하고 싶냐고 물었다.”

“그렇게 즐겁게 가고 싶은 것은 아닙니다만….”

“가고 싶다 아니다! 그것만 말해라!”

“가기 싫습니다!”

마숙영은 마치 얹힌 속이 내려가는 것처럼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만 아리따운 아미에 슬쩍 주름을 잡더니 뭔가 자기가 한 말이 창피한 듯 고개를 숙이고 다시 중얼거렸다.

“하지만 홀로 남은 아버지를 생각하면 어찌 다른 경우를 생각해 보겠어요. 저도 포일연을 버릴 수가 없고…여기 딸린 식구만 해도”

“되었다.”

당태세는 손을 슬쩍 들고 마숙영의 입을 막았다. 사내의 표정은 냉엄하고 차분하기 그지없었는데 노인이 쉽사리 기분에 들떠 말한 것이 아님을 알자 마숙영 역시 입을 다물었다. 당태세의 날카로운 안광이 두 사람을 같이 노려보았다.

“짧은 사정을 들은 것에 불과하지만 내 견해를 말하자면, 너희 둘은 지금 유독중의 심계(深計)에 이용되는 것뿐이로다.”

순간, 마숙영과 철장타 위목손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당태세의 나직한 목소리가 다시 울렸다.

“마숙영, 네 혼약은 내가 책임지고 아비 대신 파혼시켜 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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