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86화 (186/226)

186.  사천 성도 (4)

“소저! 소저! 이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 일은 사내들이 할 일이예요!”

“매번 하실 필요 없는 일이지요! 이젠 안 하셔도 된다니까요!”

짐을 싣고 온 사내들이 부산스럽게 여인 앞에서 손사래를 치지만 아직 앳된 티가 나는 미녀는 괜찮다는 듯 웃으며 소매를 걷어부치며 사내들 사이에 섞여 들었다.

“별소리 다하시네요. 칠숙, 어차피 포일연의 일은 나중에 제가 다 감당할 일인데 무슨 말씀이세요.”

“아닙니다. 잘못하면 손발을 다칩니다! 행여 그 꽃 같은 얼굴이라도 다치시면….”

“또 이상한 말씀 하시네. 대장장이에게 얼굴이 무슨 소용이라고.”

소녀는 그렇게 말하며 갈퀴를 한 다발 수레에서 끌어내어 창고 안으로 가져갔다.

소녀는 장정들에 비해 힘이 부치는 듯 갈퀴다발을 들고 비틀대면서도 용케 창고안의 상자에 물건을 넣고 세세하게 정리하는데, 지금 하는 일이 재미있는 것인지 원래 천성이 그런 것인지 환한 미소를 계속 머금고 있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수십년 강호를 종횡하며 수많은 미인을 보았고 그들과 술잔 아니면 칼을 섞었지만 지금 어두운 창고 안에서 바라보는 마씨 여인 같은 천하절색은 본 적이 없었다.

공경대부의 자식은 아니지만 고아함과 기품이 보이고, 요염하거나 색기가 흐르는 것도 아닌데 눈을 떼지 못할 매력이 있으며, 청초하며 순진하여 세상물정 모를 것 같은 얼굴에 슬쩍 보이는 교염(嬌艶)한 표정 또한 보이니 실로 경국지색(傾國之色)이라는 말이 오직 저 여인을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당태세는 그런 여인의 표정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문득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이를 악물었다.

“마길, 네 놈이 딸 하나는 잘 낳았구나. 네놈 딸인지 아닌지는 모르겠다만.”

철장타 위목손의 손에 들렸던 호롱이 빛을 발하였다. 당태세는 슬쩍 수레 뒤의 그늘로 몸을 숨겼다.

들킨다 한들 철장타의 쇠몽둥이가 두려울 리는 없었고, 모여 있는 사내 넷 정도야 세합 안에 끝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당태세는 그들에게 출수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 고민을 하는 중이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내 넷을 모두 없애고 창고를 나갈 생각이었지만 여인의 얼굴을 바라본 뒤에 생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칼을 만들고 무장을 하거나 성민들을 핍박하는 패거리도 아니고 그저 순진하게 농구만 만들어 팔아먹는 이들이라면 그저 백성 아닌가. 만약 저들이 그런 이들이라면 포일문이 아닌 포일연(抱日淵)에 있다는 이유로 죽일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고 보니 사내들에게서는 어떤 무인의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직 흉흉한 기세로 사방을 관조하는 것은 등불을 들고 있는 철장타 위목손 하나뿐이었다.

당태세는 지금 이 상황을 고민하는 자기 자신에게 스멀스멀 화가 나기 시작했다.

‘지금 뭐하는 짓이냐 당태세, 앞을 가로막는 건 부처든 악마든 무조건 베는 거다. 네가 대의를 위해 칼을 들었더냐? 너는 그저 네 멸문한 순천문과 서럽게 죽은 네 아들의 복수를 하러 여기 온 것이다. 저 마길의 여식부터 갈가리 찢어 죽인 뒤에 일을 시작하는 거다!’

흔들리던 심중(心中)에 바람이 잦아들었다. 당태세의 이가 드러났다.

노인은 숨을 고르고 기척을 숨긴 뒤 목괴를 두 손으로 잡고 천천히 앞으로 나서기 시작했다.  당태세의 눈빛이 어둠 속에 조금씩 이채를 띄었다. 당태세의 두 손이 목괴의 가운데를 잡았다.

한 번에 발도하여 칼로 철장타의 심장을 찌르고 단괴로 여인의 머리를 부술 것이다. 철장타 정도라면 한손으로 어린아이 손목을 비트는 것보다 쉬울 터였다.

“수고하셨어요. 마무리는 제가 할 테니 자물쇠는 주시고요.”

그때였다. 시원시원한 여인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고 사내들은 껄껄 웃으며 알았다는 듯 소녀의 말에 화답하였다.

“알겠소! 알겠소! 우리 먼저 집으로 갈 터이니 소저께서 정리하십시오! 못 말리겠구먼.”

“하하, 이 사람아! 다음 포일연주의 말씀이시다. 예를 갖추어라!”

“먼저 가겠습니다!”

사내들이 두런대며 창고에서 멀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순식간에 창고 안이 고즈넉해지고 딸그락대는 소리만이 조그맣게 들려왔다.

당태세의 몸이 다시 움직였다. 여섯을 없애는 것보다는 둘이 더 나았다. 그 순간, 등불을 들고 있는 곱사등이 늙은이의 입에서 어눌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제…창고 정리는 그만 하셔도…됩니다. 부연주.”

“또 그 이야기시네요. 어차피 나중에는 제 일이 될 거예요. 아버지는 이제 풀무 앞에 안 서시는 게 낫다고 보거든요.”

“…부연주께서도 포일연의 일은 정리하셔야 합니다. 혼인을 하시면 이곳으로 다시 오실 일이 있겠습니까?”

“결혼을 하더라도 저는 포일연 사람이예요. 아무리 지아비의 일이 많고 부덕(婦德)을 지켜야 한다지만 그 분이 제가 대장간에서 일하는 것까지 막겠어요?”

순간 입속에서 웅얼대는 것 같은 철장타의 목소리가 슬쩍 높아졌다. 늙은 호법의 목소리엔 누구나 알 수 있는 노여움이 섞여 있었다.

“……늘 말씀드리지만 소인은 그 혼담이 싫습니다. 어찌 사람이…그런…짓을 합니까?”

“위호법. 그런 말씀은 마세요. 아무리 그래도 제 지아비가 될 분이고, 사적으로는 제 아버지의 막역지우시잖아요.”

“그러니까 더더욱 안 된다는 것! 사람의…사람이 짐승과 다른 것은 예(禮)가 있기 때문인데……유독중 그 인간은 예가 없습니다.”

“위호법!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더 이상 말씀하시면 저도 화를 낼 거예요!”

슬쩍 여인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철장타 역시 지고 있지 않았다.

“부연주께서는……잘…모르시는 것이지요…그 유독중은 예가 없을 뿐 아니라….”

“인의신(仁義信)이 다 없는 놈이지.”

순간 철장타와 여인의 눈이 화등잔처럼 커지며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의 뒤에는 겨드랑이에 긴 목괴를 끼고 변발을 친 흰 콧수염의 노인이 서 있었는데 비록 지팡이를 짚었지만 그 풍모가 당당하고 눈빛이 서릿발 같은 것이 마치 한 나라의 군왕과도 같은 패기가 진동하고 있었다.

노인은 소녀와 곱사등이 노인을 보자 못다한 말을 내뱉었다.

“지(智)는 있다고 치자. 그 지혜라는 것이 사람을 잔해하고 자신의 배만 불릴 간교함이지만.”

“네 놈은 누구냐!”

철장타 위목손이 등불을 아래 내려놓고 자신의 손에 잡힌 큼지막한 쇠몽둥이를 두 손으로 잡으며 눈을 부라렸다. 하지만 노인은 위목손의 지팡이를 슬쩍 보더니 코웃음을 치며 소녀를 바라보았다.

“네 너희 목을 따러 왔다가 어처구니없는 말을 듣고 이렇게 그늘 속에서 나온 것이다. 아이야. 네가 그 독물(毒物) 유독중과 혼인을 하겠다는 게냐? 내가 잘못 들은 게지?”

“누구냐고 물었다!”

철장타 위목손은 말보다 손이 더 빨랐다.

말을 하는 순간 이미 두 손은 쇠지팡이를 짚고 훌쩍 허공으로 원숭이처럼 도약하더니만 천지를 부숴버릴 기세로 쇠지팡이를 뿌리며 노인의 어깨를 강타하였다.

하지만 정작 겨드랑이에 목괴를 끼고 있던 노인은 슬쩍 왼발을 옆으로 돌리며 어깨로 떨어지는 쇠몽둥이를 피하였고, 어느새 뻗은 우수로 쇠지팡이의 가운데를 잡더니만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그대로 쇠몽둥이를 허공에서 한 바퀴 돌려버렸다.

순간 철장타의 몸이 빙그르 제자리에서 맴돌더니 그대로 풀썩 바닥에 내동댕이 쳐지는데 등부터 떨어진 철장타는 무척이나 고통스러운지 소리도 못 지르고 입을 크게 벌린 채 있는 대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당태세는 힐끗 여인을 보더니 놀랍다는 듯 입을 열었다.

“대단할세. 사람이 몽둥이로 치고 박는데 비명 하나 안 지르다니.”

당태세의 앞에서 여인은 양손을 모으고 사시나무 떨듯이 어깨를 떨고 있었지만 당태세를 바라보고 있는 눈빛은 당차기 그지없었다.

“위호법은 선한 분이시니 사람을 죽이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쉽게 당할 분도 아니시니까요.”

“하나는 맞고 하나는 틀렸구먼.”

당태세는 신음을 내며 누워있는 위목손을 보며 말했다.

“꼬마낙타야. 네 놈은 나이를 먹었어도 출수할 때 호흡을 고르지 않는구나. 그래서 사람을 제대로 패기나 하겠느냐?”

“네…네 놈은…누구….”

“나를 기억하지 못하겠느냐? 네 너에게 네 발에 맞는 신을 사라고 돈까지 줬건만.”

누운 채로 이를 악물고 신음하던 위목손의 눈이 천천히 깜박이며 노인을 바라보았다. 여인 역시 노인의 말을 듣더니 당태세의 얼굴을 한참동안 쳐다보았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순간, 위목손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더니 후다닥 손발을 버둥대다 몸을 일으키고는 굽은 둥을 더욱 구부리며 두 손과 무릎을 흙바닥에 대고 고개를 땅바닥에 찧었다.

“사…사 삼가……불초….소생…위목손이…수….순천문주…귀……귀린갈을…뵈…뵈옵니다.”

위목손의 목소리가 심하게 더듬댔다. 순간 당태세의 오른발이 앞으로 튀어나오며 앞에 놓인 위목손의 손을 세차게 짓밟았다.

위목손이 입에서 신음을 내뱉는데 그 모습을 보던 여인이 입을 막더니 화급하게 당태세에게 뛰어왔다.

“지금 뭐 하시는 짓입니까!”

“철장타 위목손. 내가 여기 빚을 받으러 왔다. 네놈은 목을 내밀어라.”

“소생 위목손…각오한 지 오래입니다.”

의외로 위목손은 신음을 내면서도 자세를 바꾸지 않고 있었다. 당태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목괴에서 소도를 뽑아들었다. 순간 여인의 눈이 동그래지며 자기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당태세의 눈은 여인이 아닌 위목손을 노려보고 있었다.

“잘 가거라. 명부에서 당태세를 보았다 전하면 될 것이니.”

“잠깐만! 이게 무슨 짓입니까!”

순간, 가느다란 여인의 몸이 위목손의 위로 덮쳐 들어오며 당태세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태세의 눈이 여인이 커다란 눈망울을 바라보았다. 여인의 맑디맑은 눈이 붉은 입술 위에서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다.

무공의 기운 자체가 느껴지지 않는 그저 평범한 여인이었다. 하지만 여인은 가느다란 두 팔로 곱사등이 노인을 굳게 붙든 채 당태세의 칼을 보면서도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무슨 원한이시오! 우리 위호법과 구면이신 듯한데 어찌 도적처럼 어둠속에서 나타나 함부로 사람의 생명을 달라 하시는 겁니까!”

당태세를 슬쩍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주변에는 다른 이들의 기운을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여인은 아무 도움도 바라지 않고 혈혈단신으로 당태세에 맞서고 있는 것이었다.

“비키거라. 아이야. 나는 이 놈의 목숨을 거둘 권한이 있다.”

“천자라도 되시오? 세상에 사람 목숨을 좌우할 권한 있는 이가 몇이나 된다고!”

그러자 여인의 손 아래에서 위목손의 목소리가 자그맣게 올라왔다. 노인의 목소리는 이제 침착함을 되찾고 있었다.

“부연주님. 제게서 떨어지십시오. 저 분은 제 목숨을 가져가실 명분이 있는 분입니다.”

“위호법? 무슨 말이예요? 대체 이게 무슨 일이죠?”

“물러서라. 여인아.”

당태세의 냉담한 어조에 여인은 오히려 독이 오른 듯 위목손을 타고 오르듯 누르며 고개를 들고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여인의 분노한 얼굴 아래로 흐트러진 머리가 어깨를 타고 내려오는데 그 모습은 당당하여 오히려 아름답기까지 하였다.

“그대는 뉘시오! 누구인지 당장 말씀하시오!”

당태세는 여인을 한참동안 노려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순천문주 귀린갈 당태세.”

당태세의 손에 들린 칼이 천천히 위목손에게서 여인의 목을 향해 움직였다.

“포일문과 사형문을 없애기 위해 온 사람이다.”

여인의 눈동자에 가득하던 분노가 조금씩 경악으로 바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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