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 사천 성도 (3)
파영만월 이해제는 원래 십대제자 중에서도 무공 수위가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갈 만한 무위를 지닌 이였다.
성품이 관후하여 군자의 용모가 있었고, 시부를 잘 써서 문자향과 서권기가 풍기던 문무겸전의 장부였다.
그런 자가 우아하게 다가와 점잖게 검결을 청하는데 그것을 거절할 당태세가 아니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당태세는 이해제의 노림수에 얽힌 것이나 다름 없었다.
“빌어먹을 놈, 제 몸을 미끼로 쓸 줄이야. 뼛속까지 사형문이라는 말을 할 때 알아챘어야 하는데.”
이해제는 당태세와 다관에 앉아 한담을 나누면서 주변의 사형문도에게 당태세의 용모파기를 명한 것이 틀림없었다. 계략은 중첩되어 있었을 것이다.
당태세가 만의 하나 이해제의 말을 듣고 검각에서 물러나든가.
이해제가 당태세를 이기든가.
둘 다 어그러지면 성도에서 용모파기된 당태세를 가둬놓고 사냥하든가.
셋 중 하나에는 걸릴 수밖에 없는 심계였다.
“자기 제자를 사석(死石)으로 쓰다니…….”
당태세는 골목을 벗어난 동쪽의 허름한 다관에서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걱정되는 것은 아룡이었다.
그래도 파영만월 이해제와 대화를 나눌 때 아룡은 그 자리에 없었고, 성도에 도착한 뒤에도 수레안에서 이별을 했으니 아룡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이는 없을 터였다.
“그나마 농사나 지으러 보낸 게 상책이었을지도 모르겠군.”
당태세는 슬쩍 이마를 만지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이럴 때는 혼자 있는 것이 차라리 나았다.
당태세 혼자라면 어찌어찌 쉴 곳을 마련하고 어둠 속에 은거하며 계책을 세울 수 있을 터였다. 그 뒤에 하나씩 사형문의 제자들을 정리하다보면 결국 칼날은 사형문주 유독중의 목 언저리에 닿아있을 터였다.
할 일이 정리되자 당태세는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일단은 은거할 곳을 찾아야겠군.”
당태세가 천장을 보며 짧게 한숨을 쉴 때, 다관 주인이 차를 내왔다. 생각보다 젊은 주인은 찻잔을 내려놓고 천천히 뜨거운 물이 담긴 주전자를 당태세의 앞에 내려놓았다.
당태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물이 담긴 주전자를 잡은 주인을 슬쩍 바라보았다.
“고맙소이다.”
“즐겁게 드십시오.”
“그나저나 다관이 오래된 것 같은데 주인장은 젊구려.”
객잔주인이 물끄러미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가업을 이어받았으니까요. 얼마되지 않았습니다.”
어느새 작은 다관 안에는 손님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네 개 밖에 없는 탁자에 사내들이 둘 씩 마주보고 앉아 있었다. 당태세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그렇구먼. 손만 봐서는 한 십년은 주전자를 쥔 것 같은데.”
“네?”
“엄지와 검지 둘레로 박힌 굳은살 말이오. 이게 주전자를 든다고 박히는 굳은살인가?”
다관 주인의 눈이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당태세 역시 다관 주인을 심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이미 입 밖으로 나올 말은 다 나온 뒤였고, 그 다음 나올 행동이 무엇인지 둘 다 알고 있었다.
순간, 다관주인의 오른손이 앞으로 뻗으며 주전자의 뜨거운 물을 그대로 당태세에게서 쏟아부었다. 당태세의 무릎이 탁자를 쳐올리며 뜨거운 물이 탁자에 맞고 허공으로 튀었다.
뒤에 앉아있던 사내 둘이 손을 뻗어 당태세가 아니라 당태세의 목괴를 움켜쥐었다. 맞은편에 앉아있던 사내들이 품 안에서 단도를 뽑으며 당태세를 향해 뛰어들었다.
목괴가 움직이지 않자 당태세는 재빨리 몸을 틀며 오른다리로 의자를 걷어찼다.
의자가 아래로 주르륵 미끌어지며 단도 든 사내의 발에 걸렸다. 사내가 중심을 잃는 순간, 당태세가 오른발을 축으로 빙글 돌며 왼발을 그대로 뻗어 사내의 턱을 후려쳤다.
살수 하나가 공중제비를 하며 그대로 탁자에 머리를 처박았다.
전후좌우에서 단도를 쥔 도수들이 땅을 박차고 뛰어들었다. 목괴는 이미 저 멀리 다관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었다.
당태세는 왼발로 의자 하나를 퉁겨 올려 자신의 두 손으로 잡고는 들어오는 살수의 단도를 막아내고 그대로 두 손으로 의자를 밀어 살수의 턱을 후려갈겼다.
네 가닥 의자의 다리가 살수의 얼굴을 강타하며 살수를 바닥에 처박아 버렸다. 뒤와 양 옆에서 숨 돌릴 틈도 없이 단도의 자격이 들어왔다.
당태세는 손에 쥔 의자를 돌려 의자다리로 단도 두 자루를 한꺼번에 걸어버리고는 몸을 돌리며 의자를 휘감았다. 의자 다리 사이에서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나는 것과 동시에 살수 두 명이 비명을 질렀다.
노인의 손이 의자 등받이를 잡고 몸을 회전하며 철퇴처럼 의자를 돌렸다.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살수 둘이 머리에서 피를 뿌리며 그대로 뒤로 처박히니 다관에 앉아있던 살수 여덟 중 반이 눈 한 번 깜박이는 새에 바닥에 쓰러져 버린 뒤였다.
“오합지중(烏合之衆)도 이런 오합지중이 없구먼.”
당태세는 의자를 손에서 떨어뜨리더니 두 손을 펼치고는 네 명의 살수와 다관주인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너라! 사형문의 이름을 더럽힐 셈이냐?”
살수들의 눈빛이 변하였다.
당태세의 정면에 있던 사내부터 단도를 역수로 틀어쥐더니 그대로 당태세를 향해 일도를 전광석화처럼 날렸다. 하지만 사내의 모습을 보고 있던 당태세의 일권이 더 빨랐다.
뼈 부러지는 소리가 살수의 턱에서 울리며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는데 이를 보고 있던 세 명의 사내역시 소리를 지르며 그대로 앞으로 튀어 들어갔다.
당태세는 슬쩍 뒤로 물러서며 맨 처음 다가온 사내의 단도를 가볍게 오른팔로 빗겨내고는 좌장을 그대로 밀어올려 사내의 복부를 뚫어 올리듯 쳐버렸다.
살수가 그대로 피를 토하며 주저앉는 순간 두 명의 살수도 기합을 지르며 당태세를 향해 단도를 치켜들었다.
멍하니 이 광경을 보고 있던 객잔주인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는 두 사내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멈춰라! 격장지계다! 돌아와라! 협격을 해야 겨우 이길 수 있는 상대다!”
하지만 객잔주인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두 살수의 몸이 부서지듯 그대로 객잔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내들은 채 몇 번 단도를 휘둘러보지도 못하였고, 그들을 내버려 두고 터덜터덜 걸어오는 노인은 옷자락 하나 잘린 곳이 없었다.
“네놈들을 보낸 놈은 사형문의 누구냐? 유독중이 보냈느냐. 빌어먹을 십대제자냐?”
객잔주인이 주전자를 내던지고 소매에서 기다란 송곳 두 가닥을 꺼내더니 양 손에 거머쥐었다. 다름 아닌 아미자(峨嵋刺)였다.
당태세가 객잔주인의 두 손에 들린 암기를 보더니 씩 하니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바늘로 범을 잡겠다고?”
순간, 객잔주인이 엎어진 탁자를 뛰어넘으며 당태세를 향해 뛰어들었다.
사내의 두 손에 들린 아미자가 빛을 발하며 당태세의 눈과 목을 향해 번개처럼 파고들었다. 손속이 거침없고 빠른 출수였다.
당태세는 두 손을 뻗지도 않은 채 고개만을 슬쩍슬쩍 돌리며 날카로운 송곳이 좌우로 파고드는 것을 피하였다. 객잔주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태세! 제대로 붙어보지 못할까!”
당태세의 눈이 번쩍이더니 훌쩍 뒤로 한 걸음 물러서서 탁자 옆으로 다가갔다. 객잔주인이 이를 드러낸 채 아미자를 뻗으며 당태세의 눈과 목을 뚫을 기세로 달려들었다.
당태세의 손이 탁자를 더듬다가 찻잔이 놓여있던 접시를 가만히 들었다.
객잔주인의 입이 벌어지며 송곳니가 드러났다.
순간, 당태세의 접시 잡은 손이 탁자를 한차례 내리치고는 그대로 바람을 가르며 객잔주인의 목을 후려치고 훌쩍 탁자와 객잔주인의 옆에서 한 발짝 멀어진 채 우뚝 제자리에 섰다.
객잔주인은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더니 두 손으로 목을 움켜쥐고는 비틀대더니 탁자 위로 쓰러졌다가 그대로 다관의 바닥으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굴러 떨어졌다.
당태세는 깨진 접시를 손에서 떨구고는 쓰러진 채 미동도 없는 객잔주인, 살수의 두령을 보며 차갑게 말을 내뱉었다.
“위(位)도 없고 능(能)도 없고 권(權)도 없는 것이 어디서 명령이냐.”
당태세는 땅바닥에 떨어진 목괴를 주워들고는 몸을 돌려 다관을 나섰다. 전광석화와 같은 무공을 뽐낼 때와는 달리 당태세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싸움의 열기가 빠져나간 뒤 냉정해진 당태세는 주변을 돌아보고는 난처하다는 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그물 안에 들어온 것이 맞긴 하구나.”
***
어느덧 해는 지고 서서히 어둠이 성도의 사방을 묵빛으로 물들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태세는 여전히 발품을 팔고 있었고 몸을 눕혀 휴식을 취할 곳을 찾는 중이었다.
결국 돌고 돌아 다시 당태세가 발걸음을 옮긴 곳은 맨 처음 여장을 풀었던 객잔이 멀리 보이는 포일연 앞의 골목이었다.
“집 나온 개도 아니고 이게 뭐하는 짓인가.”
당태세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대로변 골목의 그림자 사이에 고개를 숙이고 앉아 다시 이전의 객잔으로 돌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사형문은 그들이 한 번 습격했던 곳으로 다시 당태세가 찾아 들어갈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을 터였다. 객잔 주인에게 돈을 넉넉히 쥐여주면 다시 그곳에 은거하는 것도 나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태세는 잠시 고개를 갸웃대더니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천 토박이를 신뢰하지 행객(行客)을 신뢰할 장사꾼은 없겠지.”
만에 하나 주인이 당태세를 밀고라도 한다면 모든 것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었다. 당태세는 답답한 마음에 인상을 쓰며 신경질적으로 짧은 흰머리가 올라오는 머리를 벅벅 긁어댔다.
“빌어먹을 사형문 놈들.”
이제 변발을 다시 치지 않으면 덥수룩한 백발이 머리를 뒤엎을 지경이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로 투덜거렸다.
“언제부터 머리 깎는 게 일상이 되었단 말인가. 삭도(削刀)라도 가지고 다녀야 하나….”
그 순간, 당태세의 눈에 가게 하나가 들어왔다.
채도와 쟁기, 호미들을 늘어놓고 농구를 팔고 있는 철점(鐵店)이 바로 길 건너편에 있었다. 당태세는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포일연의 철점…….”
객잔주인이 말한 철점이 당태세의 바로 앞에 있었다.
어느새 뉘엿뉘엿 해는 서문위에 걸리고 사람들의 발걸음은 이제 집을 향하는데, 하나둘 밤장사를 하지 않는 점포들은 자신의 가게를 닫고 판자로 문을 막으며 내일을 기약하고 있었다.
포일연이 열어놓은 철점 역시 문을 닫고 안에 벌려놓은 농구와 물건들을 수레에 싣고 있었다. 꽤 커다란 수레에 한가득 들어가는 물건을 보아하니 도적이 드는 것을 대비해 모든 물건을 다시 꾸려가는 듯싶었다.
당태세는 그를 보더니 다시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궁하면 통한다 하였다.”
당태세는 천천히 그림자 사이에서 몸을 일으키며 도로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 하나를 주워 천천히 철점 가까이 다가갔다. 장정 셋이 열심히 안에 널려 있는 물건들을 수레 안으로 밀어넣는 중이었다.
순간, 길을 지나가던 노인의 손에서 돌멩이가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빠르게 쏘아져 나갔고, 마치 물건을 짊어지던 사내의 정강이를 보기좋게 맞추었다.
“아이구야!”
순간 사내가 그대로 넘어지며 들고있던 호미와 갈퀴가 우르르 쏟아지며 나뒹구니, 주변에 있던 동료들이 하던 일을 내팽개치고 그들 부축하러 뛰어들었다. 수레 위에서 물건을 받아주던 사내 역시 훌쩍 뛰어내려 친구를 부축하였다.
“아니, 이게 무슨 일인가?”
“돌이 튀었어. 갈퀴에 맞고 튄 모양이야!”
“호되게 맞았구먼. 어이구. 시커멓게 멍들었네. 뭐가 어떻게 되었길래 이런가?”
네 사람이 철점 앞에서 부산을 떨고 있는 동안 그림자 하나가 수레 위로 사뿐히 올라간 것을 눈치 채지 못하였다.
한참동안 정리를 하고 철점의 문을 닫은 뒤 수레를 끌고 포일연의 문 안으로 수레를 넣은 뒤에도, 사내들은 자신들이 끌고 오고 타고 있는 수레 한쪽에 불청객이 쇳덩이 사이에서 눈을 부릅뜨고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는 것을 꿈에도 알지 못하였다.
사내들이 창고 안에 수레를 밀어넣고 다시 수레 안의 짐을 밖으로 정리하는 순간에도 그들은 한 사내가 수레 앞을 미끄러지듯 내려와 창고 벽의 그늘에 붙는 것을 인지하지 못하였다.
이미 해는 떨어지고 사방에 어둠이 밀려와 벽과 담이 만드는 그림자는 점점 짙어지는데, 목괴를 짊어진 노인의 몸은 어둠 속에 침잠하여 담과 하나가 된 듯 보였다.
노인의 손에는 목괴가 단단히 쥐여진 채였다.
“마길. 오늘 밤이 네 마지막 밤이로구나.”
당태세는 창고를 정리하고 있는 사내 네 명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당태세의 눈빛이 조금씩 예리하게 벼려지는 중이었다.
오늘부로 포일문은 멸문이로다.
당태세의 왼발이 슬쩍 그림자 밖으로 삐져나왔다.
“수고하셨어요. 나머지는 제가 하겠어요.”
그 순간, 당태세는 눈을 껌벅이며 창고 안으로 들어온 여인과, 그 뒤에 서 있는 곱사등이 사내를 쳐다보았다. 다음 아닌 마길의 여식이라는 미인과 철장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