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 사천 성도 (1)
아닌게아니라, 지금 장정들을 실은 수레 뒤를 따르는 농구를 잔뜩 실은 수레는 사람들의 시선을 잡기에 충분하였다.
커다란 수레 몇 대에 농구를 가득 실은 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받기 충분하였지만 사람들의 눈은 수레가 아니라 수레를 맨 앞에서 인솔하고 있는 사람에게 몰려 있었다.
수레의 인솔자는 다름아닌 여인이었는데, 한 눈에 보더라도 나이가 많지 않은 젊은 여염의 소저였다.
여인은 유행하는 만주족의 복식을 따르지 않고 하얀 배자에 청홍의 비갑을 껴입은 전형적인 한족 처자의 복색에 머리를 양갈래로 따 내리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실로 고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뭇 사내들은 여인의 복색이나 머릿모양에 주목을 한 것이 아니었으니 오똑솟은 콧날과 붉은 입술, 반짝이는 눈동자와 그 위의 봉황미가 어우러진 얼굴은 그야말로 천상의 항아가 사천 성도에 강림한 것만 같았다.
실로 눈이 부셔 볼 수 없으되 자기도 모르게 눈은 그쪽으로 쏠리는 미녀중의 미녀였다.
“앞을 막지 마시오.”
또한 그 여인의 옆에는 더할 나위 없이 흉측한 몰골의 노인이 사내들을 옆으로 밀어내고 있었으니, 등 뒤에 커다란 혹이 튀어나오고 다리는 절뚝거리는데 손아귀는 보통 사내의 두 배는 됨직하고 둥그렇게 구부린 키가 허리를 편 보통 장정에 맞먹는 수준의 괴인이었다.
슬쩍 옆을 둘러보는 얼굴엔 하얀 수염이 길게 늘어져 땅까지 끌릴 지경이었는데 곱사등이 사내는 손에 들고 있는 기다란 지팡이로 쇠판을 긁어대는 목소리와 함께 사람들을 이리저리 치우고 있었다.
그렇다고 곱사등이 사내가 마구잡이로 사람들을 대하는 것은 결코 아니었고, 마치 고운 여인의 섬섬옥수에 무슨 더러운 것이 묻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이었다.
미추(美醜)의 극(極)을 달리는 듯한 두 사람의 용모가 같은 자리 같은 곳에 있는데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는 것이 오히려 이상할 지경이었다.
당태세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보다가 신음하듯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철장타(鐵壯駝) 위목손. 네 놈이 모습을 바로 나타낼 줄이야. 포일문이 실로 사형문과 같이 있는게냐?”
당태세는 가게를 빠져나와 발길을 옮겼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사람들을 실은 수레와 농구를 실은 수레가 천천히 성도의 대로를 건너 남으로 향하는데, 그 기묘한 행렬은 장구히 이어지다 서문 앞으로 빠져나갔다. 하지만 길거리의 누구도 그에 관심을 주지 않았고, 심지어는 만성의 팔기도, 성문 앞의 녹영병도 아무런 흥미를 갖고 있지 않았다.
이젠 일상이 되어버린 일 같았다.
당태세는 사람들이 서문으로 빠져나가는 것과 농구를 실은 수레가 같이 움직이는 것을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지켜보는 중이었다.
다행스럽게도 비갑을 입은 미녀와 곱사등이 거한은 농구를 실은 수레를 따라 성 밖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었고, 수레가 성문 밖으로 나서자 몸을 돌려 다른 곳으로 발길을 돌렸다.
당태세는 천천히 그들을 따라 발길을 옮겼다.
노인은 행여 두 사람이 눈치를 챌까 두려워 전신의 기운을 빼고 단전의 내공도 최대한 풀어버린 채 두 사람의 발길을 따라 그림자 속에서 몸을 움직이는 중이었다.
구불구불한 골목과 대로를 타고 미행을 한 지 거의 반 시진이 지나서야 당태세는 두 사람이 거대한 대문 옆에 있는 쪽문으로 몸을 넣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의외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대로변이 아닌 대로에서 슬쩍 한 길 들어간 곳에 있는 큰 집이었다.
당태세는 그들이 들어간 집 근처로 발걸음을 옮기다 표정을 바꾸고는 킁킁대며 주변 공기의 냄새를 맡았다.
여느 곳과 달리 탁한 바람 사이로 쇠냄새와 매탄(煤炭)의 훈향(燻香)이 짙게 올라왔다. 당태세는 슬쩍 눈을 들어 두 사람이 들어간 곳의 현액을 올려다보았다.
“포일연(抱日淵)이라…….
당태세는 현액을 소리내어 읽어보았다. 사천 포일문의 이름은 이제 포일연으로 바뀌어 있었다.
**
“포일연은 이 동네에서 유명한 대장간이라오. 아니지. 사천 성도에서 제일 유명한 대장간일걸? 이 거리 앞에 그들이 하는 철점(鐵店)을 보셨소이까?”
포일연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작은 객잔에 여장을 푼 당태세가 주인에게 포일연에 대해서 묻자 젊은 객잔주인은 즉각 당태세의 물음에 답을 주었다.
젊은 객잔 주인은 말을 하면서 씩 미소를 짓는 것이 포일연에 대해 말하면서도 뭔가 즐거운 기분이 드는 모양이었다.
“포일연의 가주인 마대인은 꽤나 솜씨좋은 사람이오. 그 사람이 만드는 농구는 이가 빠지지 않는다고 하더이다. 나도 이 앞의 철점에서 작은 채도를 산 적이 있는데 꽤 쓸만 하다오. 게다가 그 집의 여식이 대단한 미인이지.”
젊은 객잔주인은 거기까지 이야기하더니 다시 씩 웃음을 짓는 것이 생각만 해도 즐겁기 그지없는 모양이었다. 당태세가 객잔주인을 빤히 쳐다보고는 실소를 지으며 물음을 이었다.
“그렇게 미인이오? 말하면서 입가에 웃음이 떠나질 않는구먼?”
“하하! 노사께서 마소저를 보지 못했으니 하는 말이지. 내 요즘 낙이 뭔가 하면 매번 정오에 서문 앞으로 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마소저의 얼굴 한번 보는 거라오. 비록 대장간의 자식이라고 하지만 얼굴에 귀태가 가득하고 음전하면서도 선하고 활달한 것이…하, 그 뭐라고 해야 하나….”
“천녀(天女)?”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던 객잔주인이 당태세를 바라보더니 바로 그거라는 듯 고개를 세차게 끄덕였다.
“그렇소이다. 바로 항아(姮娥)라 이거요. 사람의 용모가 아니라니까? 실로 어떤 사천의 영걸이 그 여인과 연분이 맞을지 모르지만 실로 그 사내는 누대의 복을 한 번에 받는 것일게요.”
“허허, 거 얼굴만 보고 선한지 음전한지 어찌 알 수 있단 말인가. 원래 겉이 아름다운 사람이 속까지 곱기는 어려운 법인데.”
당태세가 슬쩍 사내를 꼬득여 봤지만 객잔주인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노사가 한번 얼굴을 보고 멀리서라도 말을 걸어보시오. 사람이 절대 귀천을 따지지 않고 처음보는 이나 오랫동안 봤던 이나 한결같이 예를 지킨다오. 그게 다 부모의 교육 아니겠습니까?”
“사람들이 좋아할만 하구먼.”
당태세는 거기까지 말을 잇고 슬쩍 이마를 어루만졌다. 당태세가 아는 한 마길은 자식이 없었다. 최소한 십칠년 전에는 없었다.
물론 마길도 처는 있었고 그 아내 역시 미모가 뛰어나기로 이름이 높았지만 원래 몸이 허약하여 자식은 보기 힘든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결국 사천으로 넘어온 뒤에 딸을 가졌다는 이야기인데 앞뒤를 따져보면 기껏 나이를 많이 잡아도 열일곱이라는 말이었다.
“금지옥엽이라 이건가. 그렇다면 철장타가 호법을 서는 것도 이해가 가는 일이지.”
그리고 그 아비의 성정을 가졌다면 그 여식 역시 온화하기 그지없을 터였다. 포일문의 문주 율중일적(䫻中一寂) 마길은 그 별호대로 어떤 상황에서도 침착하고 온화하기 그지없었다.
백룡문주 왕양성과 같이 북경 구대문파 가운데에서는 가장 순후하며 관대한 사내였다. 물론 그의 무공이 관후한 성격을 따라가는 것은 아니었고 정중동(靜中動)의 매서운 검법과 권각은 실로 일세의 절기로 호평받기에 무리가 없었다.
포일문주 마길은 십칠년이 지난 지금도 가장 이해가 안 가는 변절자 중 하나였다.
“그가 순후하다 하여 의리를 내버릴 만큼 비겁한 자도 아니고 그가 부드럽다 하여 충의를 져버릴 만큼 사특한 자도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왜 그런 결정을 했는지 알 수가 없고…….
당태세는 어두운 방안에 들어와 혼잣말을 중얼대다가 다시 숨을 들이쉬고는 독백을 읊조렸다.
“왜 그가 싫어하는 사형문과 같이 사천에 붙어있는 것인가?”
사형문주 유독중과 포일문주 마길은 원래 서로를 경원하는 사이였다.
백룡문주 왕양성도 사형문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백룡문에는 도려진이라는 변수가 있었다. 포일문은 사형문과 친해질 접점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마길은 사형문주 유독중의 매몰차고 냉혈한 성격을 기꺼워하지 않는 위인이었다.
“그새 무슨 일이라도 벌어진 것인지…….”
당태세는 순간, 눈살을 찌푸리며 입 밖으로 나온 말을 쓸어 담지 못하는 것을 후회하듯 이를 드러내며 눈빛을 번득였다. 등잔하나 켜 있지 않은 어두운 객잔의 방 안에서 노인의 두 눈만이 마치 짐승처럼 번쩍이며 광망을 뿌려댔다.
“내가 할일은 포일문과 사형문의 근거지를 찾고 포일문주 마길과 사형문주 유독중을 없애는 것이고, 그와 함께 동성문의 후계인 황병아를 찾아 없애는 것이다. 이미 포일문의 본채는 찾았으니 나머지는 사형문 뿐이렷다.”
당태세는 혼잣말은 자신에 대한 다짐이었다. 노인은 마치 자신의 앞에 열거한 세 사람의 모습이 있기라도 하듯 살기를 띈 눈으로 앞을 노려보았다.
“그리하면 내 모든 일이 끝난다. 내 할 일이 그렇게 끝나면 내 업보도 끝난다. 그러면 모든 게 끝이야.”
노인의 이가 드러났다.
“그때까지는 정(情)도 없고 루(淚)도 없다. 오직 핏줄기로 쓸어내릴 원한만 있을 뿐이다.”
그때였다. 누군가 객실의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당태세가 침상에서 눈을 문으로 돌리자 젊은 객잔주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주무십니까? 당과(糖菓)를 조금 내왔는데 드셔보시겠습니까?”
“아니, 조금 뒤면 저녁식사 시간인데…….
“그러지 마시고 하나 드셔보시겠습니까? 오늘 새로 만들어낸 것이라 맛이…맛이 괜찮을 것인데….”
객잔주인은 말을 더듬고 있었다. 조금 전 말을 나누던 쾌활한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었고 사무적이고 어딘가 급하게 마무리 짓는 어조였다. 당태세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당태세는 슬쩍 손을 뻗어 침상 옆에 세워 둔 목괴를 집었다.
노인의 오감이 예리해지고 갈무리된 내공이 천천히 온몸을 돌아가자 벽 뒤와 객잔 주인의 몸 뒤로 서서히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살기가 너무나도 확연하게 당태세에게 느껴졌다.
그러자 당태세는 파영만월 이해제와 나눈 대화가 새삼스레 머릿속에 떠올랐다.
-사천에서는 결코 쉬지 못하실 것입니다.
당태세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고 목괴를 손에 잡고 천천히 문 앞으로 다가섰다.
여전히 객잔주인은 그 자리에 머물고 있었다. 당태세는 변발 친 민머리를 쓸어내리고는 문 앞에서 객잔주인에게 조용히 말하였다.
“성의를 거절할 수가 없구먼. 그렇다면 어디 한번 먹어볼까요?”
“네, 네! 그러시겠습니까?”
문을 바라보는 당태세의 눈이 번득였다.
“문 옆으로 물러서시오.”
당태세의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문짝이 쪼개지며 시퍼런 검날이 당태세의 가슴을 향해 찔러들었다. 당태세의 몸이 옆으로 움직이며 슬쩍 검날을 피하고는 문을 잡고 훌쩍 밀어젖혔다.
검을 잡은 이가 문짝과 함께 뒤로 밀려나며 환한 바깥풍경이 당태세의 안으로 밀려들었다.
엉덩방아를 찧으며 나동그라지는 객잔 주인의 옆으로 한 명의 검수가 모습을 드러내더니 당태세의 가슴을 향해 칼을 밀어넣는데, 당태세를 향해 찔러 들어가는 칼보다 당태세의 뻗어나가는 목괴가 훨씬 빨랐다.
검을 쥔 사내의 이마에서 딱 하는 소리가 울려 퍼지더니 검이 손에서 떨어졌고 손으로 감싸 쥔 사내의 이마에서는 피가 손가락 사이로 줄줄 새어 나왔다.
당태세가 어두운 굴속에서 튀어나온 범처럼 객실에서 튀어나오며 목괴를 들어 이마를 감싼 도수의 명치를 번개처럼 친 다음 아직도 문에 박힌 검을 뽑지 못하고 낑낑대는 검수의 목을 향해 사정없이 일격을 날렸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자객이 고개를 떨구며 객잔 바닥에 쓰러지는데, 뒤에서 칼을 뽑아든 채 이 모습을 보고 있던 두령은 멍하니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유독중이 보냈느냐 마길이 보냈느냐?”
끝이 갈라진 유엽도를 든 사내는 세 살수의 좌장처럼 보였는데, 일순간 얼어붙었던 사내는 죽립을 벗어던지고 자세를 바로잡더니 당태세를 노려보며 기합을 넣었다.
사내의 결의에 찬 눈동자가 당태세를 바라보며 입에서 대갈일성이 흘러나왔다.
“죽을 자에게 알려줄 것은 없다!”
“허.”
당태세가 슬쩍 입가에 미소를 짓더니 목괴를 왼손으로 잡고는 오른발을 뒤로 물렸다.
“네놈은 오늘 일구이언(一口二言)이 무엇인지 알게 되겠구나.”
당태세의 목괴가 소리없이 앞으로 뻗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