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 촉도난 (3)
“슬슬 갈대꽃도 질 때가 되어가는군요.”
당태세는 목괴를 짚고 앞서 길을 내며 강둑을 걸어가는 파영만월 이해제의 뒤를 따랐다.
이미 갈대는 가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짙은 갈색으로 물들어가는 갈대꽃은 이미 사람의 키보다 훌쩍 높은 곳에 열려 바람에 이리저리 꽃술을 흩날리는데, 구름이 흘러가는 파란 하늘은 서늘한 바람을 머금고 있었다.
죽장으로 갈대를 슬쩍 옆으로 밀면서 앞으로 나가던 중년인은 죽립을 들고 하늘을 보더니만 짧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비가 와야 할 터인데.”
사내는 여유롭게 길을 걷더니 작은 개울을 건너 너른 백사장이 모여있는 작은 개울가의 섬으로 올라갔다. 사방이 갈대로 뒤덮여 있는 작은 개울 안에 만들어져 있는 작은 모랫벌은 둥그런 모양으로 두 사람이 넉넉하게 서고도 남음이 있었다.
당태세는 사방을 둘러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곳이라면 팔기도 찾을 수 없겠구나.”
“밖에서 보이지도 않겠지요.”
당태세는 모랫벌 위로 올라와 목괴를 땅에 대고 파영만월 이해제를 쳐다보았다. 이해제 역시 죽립을 벗어던지고 당태세를 보며 손을 들어 예를 표하였다.
“염치불구 검결을 청하니, 문주께서는 허락해 주십시오.”
당태세는 슬쩍 콧수염을 만지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의 차가운 눈매가 주름잡힌 중년인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당태세는 이해제를 바라보며 이해제의 뒤 풍경과 하늘과 흐르는 물을 모두 한 눈에 담고 있었는데, 그 시선은 마치 지금 자신의 앞에서 움직이고 지나가는 모든 것을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 보였다.
“나이를 먹으니 피를 보는 것이 그리 즐겁지 아니하다. 가급적이면 살업에서 멀어지고 싶구나.”
“소생 또한 의미없는 칼부림은 하지 않사옵니다.”
“허나 골수까지 박힌 포한은 뽑아야겠기에 네 너를 그냥 보고 있을 수는 없느니라. 너는 애오라지 사형문의 사내 아니냐.”
“저는 사형문에서 자랐고 사형문의 이름으로 살았으니 죽을 때도 사형문의 사람으로 죽겠습니다.”
이해제는 끝까지 공손하였지만 갈대처럼 뿌리가 그 자리에 있었다.
당태세는 사내의 말을 쾌하게 여겼다. 사내는 당태세에게 예를 다 하고 있었으니, 그 역시 후학에게 예를 갖추고 싶었다.
광풍인 나유박과 파영만월 이해제는 실로 사형문이라는 이름에 묶여 있는 것이 아쉬운 이들이었다. 하지만 검객은 칼의 예리함으로 말하는 법. 주저함은 오히려 상대방에 대한 결례일 뿐이었다.
“내가 보는 풍경에서 네가 사라지면 오직 하늘과 땅과 물만 남겠구나. 좋은 풍경에 너 하나 그곳에 더 두지 못함이 유감이로다.”
“감사합니다.”
이해제는 당태세의 말에 슬쩍 미소를 짓고 고개를 숙이더니 천천히 죽장에서 자신의 장검을 뽑아내었다.
사내의 검은 예리하니 푸른 하늘이 온전히 비쳐 보이는데, 그 은은한 빛에 스며든 살기가 오히려 불어오는 바람에 걸맞았다.
“검객이 어찌 감사함으로 손속에 정을 두리오.”
당태세 역시 천천히 목괴를 둘로 뽑아 소도와 단괴를 잡고 이해제를 마주보았다.
“오라. 삼초는 양보하겠다.”
“그렇다면 소생이 삼초를 가져가겠습니다.”
말이 끝나고 이해제의 학같이 기다란 몸이 앞으로 느리지도 가볍지도 않게 움직이며 일검을 뻗었다. 사내의 검이 날갯짓 같은 손의 움직임을 타고 부드럽게 올라와 당태세의 가슴을 향하였다.
당태세의 단괴가 슬쩍 옆으로 움직이며 예를 표하듯 가슴 앞에서 멈추고 검을 방향을 옆으로 밀었다.
이해제의 검은 다시 가볍게 손목의 회전을 타고 백로의 부리짓처럼 위에서 아래로 움직이며 당태세의 가슴을 한 번에 베어들었다. 그러나 당태세 역시 가볍게 앞으로 발을 뻗으며 소도를 뻗어 자신의 가슴 앞을 막았다.
소도에 막힌 이해제의 검이 하늘로 올라가며 사내의 몸이 슬쩍 모래를 밟으며 앞으로 나왔다.
머리 위로 올라갔던 사내의 검이 아래로 내려오며 노인의 머리를 향해 떨어지기 직전, 사내의 발이 슬쩍 돌아가며 옆으로 빠졌고, 직선으로 떨어지는 검은 가볍게 옆으로 흐르며 당태세의 목을 그었다.
순간 당태세의 몸 역시 부드럽게 뒤로 휘어지며 단괴의 끝이 검날을 잡고 슬쩍 옆으로 밀어버렸다.
노인이 양보한 삼초는 순식간에 물 흐르듯 지나갔다.
그와 함께 당태세가 몸을 돌리며 소도를 가볍게 뻗어 이해제의 가슴을 향해 첫 수를 내밀었다. 그러자 이해제의 손과 검은 부드럽게 안으로 말리며 원을 그려 당태세의 손을 손짓 하나로 밀어내는데 깃털 같은 움직임 안에 천근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당태세는 들어오는 장력에 반(反)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세를 타고 부드럽게 몸을 돌려 단괴로 이해제의 오른 어깨를 때렸지만 이해제 역시 미끄러지듯 뒤로 빠지며 검신 위에 단괴를 올리고는 접시를 받쳐들 듯 그대로 검을 옆으로 든 채 바로 당태세의 목을 찔러 들어갔다.
당태세도 발을 뒤로 빼며 자신을 쫓아오는 검날을 바라보며 몸을 젖혔다.
이해제의 검은 당태세의 목 일촌 앞에서 멈추었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두 사내가 발을 내디딘 모래사장에는 희미한 족적 몇 개만이 찍혔을 뿐이었다.
푸른 하늘의 구름이 서로 뭉치고 흩어지며 빠르게 동에서 서로 날아갔다.
갈대는 서로 모여 부드럽게 갈색 꽃술을 부비며 사방을 뒤덮은 깃발처럼 일시에 한 방향으로 움직이다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데, 그 아래 흐르는 맑은 시냇물은 하늘의 움직임과는 관계없이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모든 것이 움직이는 데 오직 두 사람만이 제 자리에 멈춰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형문의 검법은 익히 당태세가 아는 것이었고, 당태세의 보법과 도법 역시 이해제의 눈에 낯설지 않은 것이었으니, 칼과 도가 팔을 타고 나가고 들어가는 것은 수많은 문파와 사람에 따라 다르나 결국 발(拔)하여 동(動)하고 점(点)하고 참(斬)하는 것은 모든 초식의 뼈와 골수였다.
만류귀종(萬流歸宗)이라, 결국 천하의 모든 것은 하나로 갈음됨이니 두 사람은 이미 그 경지에 오르고도 남음이 있었고, 경지에 오른 뒤에도 한참의 시간을 흘러 보낸 뒤였다.
“네 검이 일가를 이루었구나.”
“아직 모자랍니다.”
검을 빼든 이해제의 얼굴에 이제 웃음은 남아있지 않았다. 당태세 역시 목괴를 가슴 앞으로 가져오며 소도를 앞으로 향하였다.
“모자람은 평생 채워지지 않으리라.”
“그러합니까?”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이해제의 검이 바람을 타고 모래를 넘어 당태세의 가슴 앞으로 들어왔다.
껑충한 사내의 몸이 바람이 되어 들어오자 노인의 단괴는 검을 받으며 이해제의 몸과 함께 뒤로 움직이니, 마치 노인은 구름이 되어 바람을 타고 움직이는 것 같았다.
당태세의 소도가 위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며 이해제의 턱을 노리자 이해제의 검이 소도를 누르고 몸을 가볍게 낮추며 한 바퀴 맴을 돌았다.
두 가닥 소매가 바람에 날리며 원을 그리고 손끝에 잡힌 검날에 빛을 감아 당태세의 몸을 가볍게 베어 들어가는데, 당태세 역시 몸을 돌리며 소도로 검을 받아 다른 방향으로 회전하였다.
바람은 세차게 불며 갈대를 휘날렸다. 물살 위에도 파문이 일었다. 두 사내의 검과 도가 다시 맞붙으며 서로의 요혈을 향해 날을 세웠다.
찌르고 베어 들어가는 도신과 검신이 서로의 몸에 걸리고 맞붙으며 다시 물러났다가 앞으로 들어오면서 빈틈을 노렸지만 이미 상대방의 몸은 그 자리에 없었으니, 두 자루 쇠붙이는 허공과 실체 사이를 더듬으며 자신이 마땅히 갈 길을 찾는 중이었다.
이미 두 사람의 손에 들린 무기는 장단과 경중의 의미가 없었으니, 춤사위 같은 몸짓 사이에 언뜻 비치는 짧은 사각(死角)을 누가 먼저 점하느냐가 관건이었다.
이해제의 검이 순간 바람을 뚫고 앞으로 뻗어 나오며 당태세의 어깻죽지를 노리는데 그 출수가 실로 실바람 사이의 광풍이었다. 허나 당태세의 눈은 이해제의 검을 놓치지 않고 있었다.
보이지도 않게 들어오는 검날을 향해 뻗어 올린 것은 당태세의 목괴가 아닌 소도였다.
소도는 그대로 들어오는 이해제의 검날을 받아 올리더니 밀려오는 강맹한 바람을 타고 연기처럼 앞으로 흩어지며 쏟아져 그대로 이해제의 가슴을 향해 들어가는데, 눈치를 챈 이해제의 검과 몸이 옆으로 비틀리며 칼의 진로를 차단하였다.
순간, 당태세의 단괴가 그대로 손목 안에서 돌며 이해제에게 돌아가는 장검을 위로 쳐올렸다.
이해제의 눈이 커지며 화급하게 뒤로 몸을 빼는 순간 당태세의 몸이 쏟아지는 물살이 되어 이해제의 몸을 향해 덤벼들었다.
당태세의 손에 들린 소도가 번득이며 이해제의 가슴 앞에서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위아래를 찌르는데, 이해제의 우수에 들린 검이 내려오며 소도를 가까스로 내리쳤다.
하지만 당태세의 진심은 소도가 아닌 단괴에 올라가 있었다.
노인이 손아귀 안에서 돌려잡은 단괴의 끝은 창날처럼 그대로 앞으로 뻗으며 이해제의 검신 사이로 들어가 이해제의 명치를 그대로 찍어버리니 우직하는 소리와 함께 갈비뼈가 부서지는 감촉이 그대로 당태세의 손아귀에 전해져왔다.
이해제의 입에서 순식간에 바람 빠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사내의 손에 들린 칼이 방향을 잃고 흔들리는 순간, 당태세의 손에 들린 소도가 그대로 늑골 사이의 심장을 찌르고 다시 빠져나왔다.
순식간에 검결은 끝이 나 버렸고, 하얀 모랫벌은 삽시간에 시뻘건 색으로 뒤덮이며 사내의 쓰러지는 몸을 품에 안았다. 당태세는 쓰러진 파영만월 이해제와 모랫벌에 꽂힌 장검을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다가 한마디를 던졌다.
“…모자람을 채우는 법은…….”
당태세는 입을 벌렸지만 그 다음 말이 나오지 않았다. 노인은 쓰러진 사내를 물끄러미 보면서 다시 입을 다물었다가 한참 뒤 말을 이었다.
“……필요 없는 말이지.”
사람이 사라지고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과 갈색으로 익어가는 갈대숲과 개울이 남았다. 모든 것은 맨 처음 이곳에 왔을 때와 달라진 것이 없었다. 그저 사람의 들고 남만 있을 뿐이었다.
당태세는 다시 목괴를 잡고 천천히 모랫벌을 나와 갈대를 헤치고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제 현청 앞에 모여있던 이들은 자리를 파하고 하나둘 제 갈 길로 돌아갔고, 몇몇은 벌써부터 남쪽을 향해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는 이도 있었다.
아룡 역시 당태세가 앉아있던 다관 근처에서 그를 찾아 고개를 기웃거리고 있었다. 당태세는 목괴를 짚고 그를 찾고 있는 아룡 옆으로 가서 슬쩍 말을 걸었다.
“무두리 이놈, 이제 그렇게 대놓고 나를 찾으면 안 된다고 하였거늘. 왜 아직도 얼쩡거리는거냐?”
“숙부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 혼자 어찌 검각을 넘어갑니까요. 저곳을 넘어가면 그때부터는 정말 밭 갈고 김 매러 혼자 다녀야 할 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래. 가는 것이야 같이 간다만.”
당태세는 아룡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목괴를 짚고는 검각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아룡 역시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의 뒤를 따랐다.
아무래도 사천에 가서 할 일이라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에 적잖이 기분이 나아진 모양이었다. 하지만 당태세의 표정은 아룡과는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좋은 날은 이미 모두 흘러간 것 같구나.”
당태세의 중얼거림은 아룡의 귓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