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 촉도난 (2)
산과 평야는 땅의 높낮이를 정하는 말일 뿐이지만 그 높고 낮음을 발로 직접 느껴보면 낱말 하나가 담을 수 있는 뜻이 얼마나 협소한지를 알 수 있었다.
시나브로 어둡고 험한 길을 오르고 내려가다 어느 순간 앞과 뒤가 가지런하게 계속 이어져 있는 길을 걷게 되면 지금까지 쌓여있던 불안함과 피로가 어디론가 사라지는 경험을 하게 되는 법이다.
당태세와 아룡 역시 험하기 그지없던 진령을 어느 순간 넘어 한중(漢中)의 평야로 내려서니 마치 지난 밤의 산행이 꿈처럼 느껴졌다.
산으로 둘러싸여 있다지만 천하 어디보다 비옥하고 아늑해 보이는 한중의 평야는 마치 도원경과 같이 느껴졌다.
“그러니까 숙부님, 저는 이제부터 섬서의 민삼아가 되라는 말씀입니까?”
어느 정도 풍경을 바라보는 여유가 생기자 아룡은 다시 당태세가 그간 짜두었던 계책을 다시 복기해보았다.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아룡에게 조용히 할 일을 일러주었다.
“오냐. 네가 잔도에서 만난 병자를 다시 섬서로 올려 보냈으니 그 자가 다시 올 일은 없을 것이다. 너는 민삼아라는 이름과 증표를 가지고 사형표국을 통해 사천으로 건너왔다 하면 되는 것이야.”
아룡은 이미 서안으로 들어가며 당태세가 만든 황망한 계책을 꽤 당해 본 편인지라 예전처럼 화들짝 놀라는 경우는 이제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본인도 경계심과 조심하는 버릇이 생긴 탓인지 당태세의 말을 곱씹으며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따져보기 시작했다.
“증표와 이름이 명부에 있으면 떡도 먹고 잠도 재워주겠지요. 하지만 정작 사천에 들어가서는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너더러 그 안에서 들어가 세작(細作) 노릇을 하라는 것 아니냐.”
“세작이요? 제가요?”
당태세는 슬쩍 목소리가 높아지는 아룡을 보는둥 마는둥 하며 고개를 재차 끄덕였다.
“사형문이 꾀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려거든 그 안에 직접 들어가는 것이 낫다. 하지만 나는 이미 용모파기가 되었으니 어쩔 수 없지 않느냐?”
“굳이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아룡이 혀로 입술을 핥으며 혼잣말을 중얼대자 당태세는 되었다는 듯 손을 앞으로 딱 내밀고 칼같이 말을 잘랐다.
“국법(國法)을 어기고 청의 치세를 어지럽히는 놈들이다. 어찌 네가 그리 약한 소리를 하느냐?”
“아니, 그게 아니오라….”
“이미 서안에서 네 역량은 충분히 보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 정도면 너는 네 앞가림은 충분히 할 것이다.”
아룡은 입맛을 다시며 불안한 눈빛으로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당태세는 안되겠다는 듯 슬쩍 뒤를 돌아보며 다시 한마디를 거들었다.
“걱정마라. 내가 있고 종리천호도 네 뒤를 밟을 것인데 어찌 그리 불안해하는가?”
“종리천호도 지금 오시는 중입니까?”
“당연한 것 아니냐?”
종리세리의 기척은 이미 서안 이후로 잡히지 않고 있었다. 허나 당태세는 천연덕스레 거짓말을 내뱉으며 아룡의 안색을 슬쩍 살폈다.
아룡의 표정이 다시 평상시의 안색으로 돌아가고 턱을 슥 앞으로 내밀고 눈을 반짝이는 모습이 나오자 당태세는 되었다는 듯 슬쩍 얼굴에 미소를 지었다.
“그렇다면 할 만하지요. 어찌 이 무두리, 대청의 안위를 위해 이 한 몸 희생하지 못하겠습니까?”
이 아이가 한 이십년, 삼십년만 일찍 태어났더라면 무슨 일이 있었을까. 명(明)의 충신이 되었을까. 어쩌면 당태세 자신과 함께 무너지는 황성에서 끝까지 나라의 사직을 지키다가 같이 스러졌을까?
노인은 일어나지 않을 상상을 해보며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런 일은 생각할 필요조차 없는 것이었다. 그저 지금 남은 길은 뚫린 도로를 타고 나아가 검각을 지나 사천으로 들어가는 것 뿐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이 험한 여로의 종지부를 찍는 것뿐이었다. 그것이면 모든 것이 다 정리될 터였다.
***
당태세와 아룡의 여정은 한중의 영강(寧强)에 도착하자 급진전을 타게 되었다.
조용하니 여기저기 흩어진 작은 전답이 둘러싼 작은 현은 사천으로 넘어가는 이들로 북적이고 있었는데, 어느 틈엔가 나타난 사형문의 사내가 증표를 받은 이들은 현청 앞으로 불러모으더니 일장 연설을 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민삼아라고 개명 아닌 개명을 한 아룡이 현청 안으로 나가자 당태세는 작은 다관에 앉아 차를 마시며 그곳에서 일어나는 짓을 보기로 하였다.
당태세는 지금 사람들을 불러모은 이가 사형문의 사내인지 아니면 이 지방의 현령이나 서기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사형문의 사내라기에는 무공의 조예가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것으로 봐서 사형문이 지방의 서리를 고용한 듯 보이기도 하였다.
“이제 여러분은 사천앞에 거의 다 오신게요. 여기 모인 분들은 모두 사천을 개간하고 터전을 잡으러 오신 분들이오. 맞소이까?”
아무리 봐도 관인(官人)의 냄새가 풀풀 나는 짧은 수염의 사내는 현청 앞에 앉은 사내들을 보더니 히죽 튀어나온 앞니를 내보이며 웃음 비슷한 걸 지어보였다.
“이제 저 앞으로 걸어가 검각만 지나면 바로 사천 초입이오. 이쯤 되면 슬슬 걱정이 앞서겠지. 대체 내가 사천에서 뭘 할 것인가? 안 그렇소?”
사람들 사이에 앉아있던 아룡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고, 멀리 떨어진 곳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당태세 역시 사내의 말하는 것을 자세히 듣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짧은 수염의 관인은 웃으며 사람들을 향해 두 손을 쭉 뻗었다.
“여러분은 그곳에서 기경(起耕)을 할 것이오! 이미 전답은 모두 준비가 되어 있소이다! 특별히 사형표국에서 오신 분들에게는 이미 개간된 넓은 옥토가 주어질 것이외다. 그곳에서 논을 갈고 파종을 하면 되는 거요! 이미 들어가서 살 곳은 준비되어 있소이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사람들은 일시에 안도의 한숨과 기쁨의 탄성을 내질렀다.
말은 안 했지만 대부분 사내들은 내심 알지도 못하는 고장에 가서 무슨 험한 일을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짓눌려 있던 듯싶었다. 아룡도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는 듯 턱을 쓰다듬는데, 그 모습을 보던 쥐이빨의 사내가 다시 말을 이었다.
“맨 처음은 장원 같은 곳에서 먼저 논밭을 가는 것부터 시작할 것이오. 아직 가옥이 모두 준비된 것은 아니라 들었소. 일단 장원에서 기거하며 논밭을 갈고 추수를 하게 되면 도착한 순서대로 하나씩 집을 불하합니다. 이건 사형표국과 사천 성도에서 협업하는 일이라 들었소이다! 그러니 걱정 말고 사천으로 가면 됩니다. 아셨소이까?”
“알겠습니다!”
관인의 언변은 생각보다 조리있고 현란했으며, 그 말을 듣던 사내들은 어느새 기운찬 목소리로 화답하였다. 진령을 내려와 시들하던 눈빛에 생기가 감돌고 있었다.
자기 땅을 받고 자기 집을 공짜로 받는다니 이런 근사한 일이 또 어디있단 말인가.
당태세 역시 그 말을 듣고는 수염을 쓰다듬고 입맛을 다셨다.
“농부에게 저보다 근사한 말이 있을꼬.”
그때였다. 당태세는 부드럽지만 강맹한 기운이 천천히 자신의 뒤쪽에서 다가오는 것을 느끼고 목괴를 잡았다. 당태세가 앉아있던 작은 다관 안으로 사내 하나가 슬쩍 몸을 넣은 것이었다.
넓은 죽립 아래 콧수염과 턱수염을 멋들어지게 늘어뜨린 훤칠한 사내는 황백의 장포를 두르고 긴 죽장을 짚은 유자(儒者)같은 사내였는데, 그는 다관 앞에 앉아있는 당태세를 바라보더니만 슬쩍 죽립을 벗으며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였다.
당태세는 물끄러미 사내를 바라보더니만 이를 드러내며 낮은 소리로 으르렁거렸다.
“누군가 했더니 네 놈이구나. 빌어먹을 십대제자놈.”
“오랜만에 말학이 순천문주를 뵙습니다.”
“파영만월(破影滿月)이었던가. 이해제. 네 호가 파영만월 아니었더냐?”
중년 사내는 당태세의 말이 나오자 눈가에 주름을 잡으며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 말학의 이름과 별호를 기억해주시니 그저 감읍할 뿐입니다. 문주님.”
“네놈이야 사형문에 있기는 좀 아까운 녀석이지. 차라리 열심히 학문에 정진해 묘당(廟堂)에나 들어가지 그랬느냐?”
“이미 나라가 바뀐 지 십년이 넘었는데 학문이 무슨 소용이랍니까?”
파영만월이라 불린 사내는 웃음을 머금고 당태세의 옆자리에 앉아 현청 앞에 구름같이 모여있는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당태세 역시 이해제에게서 시선을 떼고 차를 마시며 현청 앞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두 사내의 모습은 마치 나이 차가 있는 형제나 숙질처럼 보이고 있었는데, 평온하게 다리를 내려놓고 지팡이를 걸치고 의좋게 산을 올라갔다 하산하며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양새나 다름없었다.
“사형문주께서는 이미 당문주께서 오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놈이 알고 있다는 것은 나도 알아. 그 이야기를 전달하러 온 게냐?”
“아닙니다.”
파영만월 이해제는 물끄러미 당태세가 마시고 있던 찻잔을 바라보더니 옆에 있는 잔 하나를 가져왔다. 당태세가 다기를 들어 이해제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자 이해제는 가볍게 묵례를 하고 차를 입에 가져갔다.
당태세는 빤히 중년사내의 얼굴을 보더니 투덜대듯 입을 열었다.
“아직도 시부(詩賦)를 적느냐?”
“손 놓았습니다.”
“네가 가진 재주 중에 쓸만한 것은 그것뿐 아니었느냐. 설렁설렁대는 검보다야 훨씬 나았지.”
이해제는 씩 웃음을 짓더니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읽어줄 사람도 없고 나라도 없는데 시부가 무슨 소용입니까? 말과 활, 칼이 세상의 모든 것일진대.”
“……대체 여기 왜 왔느냐?”
노인은 차를 마시는 사형문의 제자를 말없이 빤히 쳐다보다 입을 열었다. 사내는 잠시 눈을 감고 다향을 흠향하더니 사방을 둘러싼 산과 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더 이상 들어오지 마십시오. 문주. 검각을 넘기 전까지가 마지막 경고요. 검각을 넘으시면 죽습니다.”
“웃기는군.”
당태세가 웃음을 짓자 파영만월은 당태세를 슬쩍 쳐다보며 부드럽고 중후한 목소리로 재차 권하였다.
“사천의 사형문은 중원에서 만난 사형문과 다를 것입니다. 이미 터를 닦은 지 십년이 넘었습니다. 당문주. 파촉 전체에 사형문의 손이 닿았고, 사천 성도(成都)는 이미 사형문의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파영만월 이해제의 눈이 슬쩍 빛났다.
“성도 안에 들어오시면 그림자 안이라도 숨을 곳이 없습니다. 사방에서 칼날이 옥죄여 들어와 종당에는 불운하게 끝날 것입니다.”
“유독중이 그런 말을 네게 시키더냐? 나더러 겁을 먹고 꽁지를 말고 도망가는 것이 상책이라 하더냐?”
당태세의 말이 은은히 노기를 띠자 이해제는 씁쓸한 미소를 머금더니 다시 차를 마시고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당문주.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은 제 충언입니다. 아시지 않습니까? 제가 문주님을 숭모하고 존경한다는 것 말입니다.”
당태세의 날카로운 눈이 파영만월 이해제를 노려보더니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어보였다. 노인은 찻잔을 내려놓고 이해제를 보며 이를 드러내었다.
“파영만월. 나이 먹고 얼굴에 주름이 늘어나니 네놈이 나와 동렬(同列)이라 착각하느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문주. 저는 제 역량을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왜 혼자 이곳까지 와서 내게 그런 흰소리를 지껄이는가?”
“첫 째는 순천문주께 대한 제 본심이고, 두 번째는 우리 문주님의 안배입니다.”
“뭐야?”
당태세가 이해제를 노려보았지만 이해제는 예의 부드러운 음성을 잃지 않은 채 미소를 지으며 화답하였다.
“제가 받은 명은 그저 당문주의 팔 하나, 다리 하나, 하다못해 눈이라도 노리라는 것입니다.”
이해제의 순후하던 눈동자에 어느새 살기가 들어차기 시작했다.
“당문주의 성격상 여기에서 뒤를 보이지 않으시겠지요. 저와 검결에 들어가시면 그 상처가 결국 문주의 발목을 잡으시리이다. 사천에서는 결코 쉬지 못하실 것입니다.”
당태세의 눈초리 역시 살기가 감돌고 있었다. 하지만 당태세 역시 이해제의 말을 듣더니 드러낸 이를 슬쩍 위로 올리며 미소 비슷한 것을 짓기 시작했다.
“네 놈이 네 팔 다리에 생채기 하나라도 낸다면 내가 중원으로 돌아가주마.”
당태세의 말이 떨어지자 파영만월은 입에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바라던 바입니다. 문주께서는 천수를 누리소서.”
“쓸데없는 소리 마라. 조용한 곳을 알고 있느냐?”
파영만월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오기 전에 봐 둔 곳이 있지요. 가시겠습니까?”
“아무렴.”
두 사내는 다관에서 같이 일어나 지팡이를 짚고 사람들 사이를 헤치며 모습을 감추었다.
아룡은 여전히 앞에서 청산유수로 늘어놓는 관인의 언변에 넋을 놓고 앉아있었다. 현청 앞의 누구도 두 사내가 종적을 감춘 것을 주의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