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77화 (177/226)

177.  섬서성 서안 (4)

하늘 위에는 마치 솜을 잘게 쪼개놓은 듯한 구름이 동쪽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이미 서안의 공기는 무더위에서 많이 벗어나 있었다. 조금만 지나면 이제 서늘한 공기가 오래된 성벽에 머물며 아침 저녁으로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옷깃을 올리게 만들 터였다.

기실 당태세는 종리세리를 만나러 갈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북경에서 온 천호는 자신이 어디로 갈 지를 이미 알고 있었고, 그가 복수행을 끝낼 때까지 그를 쫓아다닐 것을 알고 있었다.

당태세는 자신의 품 안에 모아둔 사면부들을 다시 한번 만져보았다.

지금까지 모아둔 것은 모두 여섯 쪽, 앞으로 두 장만 더 모으면 그의 지난한 복수행도 끝이 날 것이었다. 그리고 종리세리 역시 여덟 장의 사면부를 가져가면 죽은 보국장군의 명을 완수하게 될 터였다.

당태세는 그때까지 종리세리가 그림자처럼, 사냥터의 사냥개처럼 그의 뒤를 충실히 밟으리란 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태세는 왠지 모르게 종리세리에게 자신이 서안을 떠나게 됨을 알려주고 싶었다. 맨 처음 비내리는 장사의 골목에서 만났을 때와 수많은 곡절을 겪고 난 지금은 많은 것이 변해 있었다.

“숙부님.”

당태세는 아룡의 채근에 슬쩍 상념에서 벗어났다. 아룡은 눈을 들어 단단하게 땅에 뿌리를 박고 있는 만성의 성루를 보고 있었다.

“저기 있는 분이 종리천호 아니십니까?”

당태세는 아룡의 말을 듣고 성루 위에서 아래쪽을 무심하게 바라보고 있는 무관을 쳐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아래 검은 복장으로 아래를 보고 있는 매 같은 얼굴의 사내는 쉽게 당태세의 눈에 들어왔다.

“그가 맞구나.”

당태세는 종리세리 역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 아닐까 미심쩍었다.

***

“사형문주 유독중은 사천 성도로 본거지를 옮겼고, 동성문의 후계자인 황병아 역시 그와 함께 달아났소.”

만성에서 내려와 성의 문 앞에서 두 사내는 서로를 마주보며 인사를 나누었다.

아룡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슬쩍 종리세리에게 묵례를 하였지만 종리세리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당태세의 말에 종리세리는 가타부타 말없이 표정 없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측근에게 들은 말이겠지.”

“십대제자에게 들은 말이오.”

“들은 바로는 사형문 본채가 시산혈해였다고 들었소. 추관이 아예 넋이 나간 얼굴로 돌아왔더군. 태어나서 그런 광경은 전쟁 때 말고는 본 적이 없다 하였소.”

“억울하게 갇힌 이들을 풀어주다 생긴 일이오.”

“문주는 자신의 한 일을 부정하지도 않고 죄를 인정하지도 않는구려.”

“죄값은 언젠가 하늘 아래에서 치르게 되겠지.”

종리세리는 덤덤하게 말을 이어가는 노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동쪽으로 뻗은 긴 대로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사내의 눈은 곧게 뻗어 동문까지 이어지는 대로에 고정되어 있었지만 그렇다고 당태세를 무시하는 것은 또 아니었다.

“지금 성도로 갈 것이오?”

“그곳에 나머지 둘이 모여 있소. 그곳에서 내 오랜 여로가 끝이 나겠지.”

“실로 그것이 끝이오? 당문주?”

종리세리는 여전히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로 물었다. 당태세는 종리세리의 말에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그것이 끝이 아니면 뭐란 말이오. 내가 다시 세상에 나온 이유가 오롯이 이 복수행 하나뿐이거늘.”

“성도의 일이 끝난 뒤에는 무엇을 할 것이오?”

“……아직 그것까지 생각해 보지는 않았소이다.”

당태세가 잠시 머뭇대다 말을 잇자 종리세리는 침착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당태세에게 대답했다.

“사람은 언젠가는 자신의 일을 마무리하고 그 뒤에 올 일을 생각해 봐야 할 때가 오는 모양이오. 그때가 되면 어디로 갈지, 무엇을 할지 다시 생각해 봐야 하지요.”

“그렇겠지요.”

“아무쪼록 나는 그대가 좋은 선택을 하길 바라오.”

당태세가 무슨 소리냐는 듯 종리세리를 보는데, 종리세리는 뒤를 돌아보지 않고 다시 조용하게 말하였다. 종리세리의 목소리는 이전과 달리 냉랭함이 없었고, 오히려 부드럽기까지 하였다.

“당신은 옳은 사람이오.”

“뭐요?”

당태세가 뜬금없다는 듯 종리세리를 쳐다보는데 종리세리는 다짐하듯 또렷하게 다시 한 번 말하였다.

“당문주, 당신은 선한 사람은 아닐지 몰라도 옳은 사람이오. 아무쪼록 여생의 뜻이 바뀌지 않기를 바라오.”

“무슨 일이오? 무슨 소리요?”

그 순간, 당태세는 슬쩍 기이한 기척을 느끼고 동문을 바라보았다.

일단의 팔기가 대로를 통해 만성을 향해 곧장 직진해 오는 것이 당태세의 눈에 들어왔다. 종리세리 역시 자신을 향해 멀리서 달려오는 팔기들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북경에서 사람들이 오고 있소. 이미 전갈이 나보다 먼저 도착했더군. 항주의 친구가 북경으로 파발을 보내고, 그들이 서안으로 사람들을 급파한 것이겠지.”

“무슨 일이오? 사달이 난 것인가?”

“순천문주 당태세. 먼저 길을 떠나시오. 나중에 내가 찾으리다.”

종리세리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당태세를 쳐다보았다.

당태세를 바라보고 있는 종리세리는 쓴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북경 선무사 천호는 희로애락을 얼굴에 담지 않았건만, 지금 보고 있는 종리세리의 표정에는 만감이 모두 들어 있었다.

“이 자리를 떠나시오. 그대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소.”

“내가 손을 빌려주지 않아도 되겠소?”

“이건 우리 서림각라씨의 일이오. 외인이 간섭할 일이 아니라오.”

종리세리는 천천히 만성을 향해 몸을 움직였다. 종리세리가 다가가자 수문장이 예를 갖추고 만성의 문을 열었다. 동문의 대로를 따라 달려오고 있는 말 위의 팔기들 역시 만성을 향해 곧장 다가오는 중이었다.

당태세는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다가 종리세리의 등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몸 조심하시게!”

종리세리는 슬쩍 고개를 끄덕이고 만성 안으로 사라졌다. 당태세는 자신의 앞에서 천천히 만성의 문이 닫히는 것을 바라보며 가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뒤에 서 있던 아룡이 저벅저벅 걸어와 당태세의 옆에 섰다.

“무슨 일입니까요? 이번에는 같이 안 가시는 건가요?”

당태세는 한참동안 굳게 닫힌 만성의 문을 보더니 짧게 고개를 저었다.

“우리더러 먼저 가라는 구나. 아직 할 일이 남아있다고.”

“따로 오신다는 말이겠지요? 예전에도 그러신 거 아닙니까?”

당태세는 아룡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푸른 하늘 위로 구름이 빠르게 지나가고 있었다.

“따라오겠지.”

***

“멀리도 오셨구먼. 선무사 천호 종리세리.”

말에서 내린 젊은 사내는 광장에 홀로 서 있는 종리세리를 보면서 아는 척 인사를 하였다. 하지만 사내의 눈은 웃지 않고 있었다.

사내는 물론이고 사내 뒤에서 하마하는 네 명의 사내 역시 온 몸에 살기가 가득 흐르고 있었다. 종리세리는 그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선두에서 다가오는 이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호군교 아규은이었나.”

“아, 기억하고 계시는군. 숙주의 역참에서 만났던가?”

“기억하지. 너의 오만방자한 말을 어찌 잊겠느냐?”

종리세리의 말에 아규은은 히죽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투구의 끈을 풀러 내려놓고는 종리세리를 노려보았다. 젊은 서림각라씨의 장교는 종리세리를 바라보는 눈이 곱지 않았다.

“한인 주제에 말을 섞는 것조차 영광으로 알아야 하거늘.”

“나는 보국장군의 부하다. 네놈의 말이 귀에 거슬리는구나.”

“좋소. 하긴 내가 귀천을 따지려고 이 먼 길을 온 것이 아니니까.”

호군교 아규은은 종리세리의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오더니 허리를 펴고 두 손을 앞의 허리띠 장식에 올려놓더니 가늘게 뜬 눈으로 종리세리를 노려보며 말했다.

“공적인 소명을 가지고 서안까지 왔소이다. 항주의 첨사 과이가 태문에게 연락을 받았소. 분명 우리 서림각라씨가 항주로 그대에게 서신을 보낸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대는 서안까지 왔구려?”

“아직 장군께서 내린 명을 완수하지 못하였다.”

“장군께서는 물건을 회수하라 하셨지. 그 물건을 아직도 찾지 못하였다는 말인가?”

종리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만 더 하면 완수할 수 있을 것 같군.”

종리세리의 말에 아규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모은 성과를 우리에게 넘기고 그대는 북경으로 떠나시오.”

“그렇게는 못 하겠네. 나는 보국장군께 직접 하명을 받았다.”

“보국장군께서 돌아가셨음을 알지 않은가. 종리세리, 당신이 받은 칙명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야.”

아규은의 눈이 서늘한 빛을 띄기 시작했다.

“단지 우리가 알고 싶은 것은 당신이 장군께 하명받은 그 물건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 물건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이제 말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규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종리세리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할 수는 없다.”

“뭐라?”

“살아생전 장군께서는 그 물건이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꺼려하셨다. 오직 내게 명을 내려 그 물건을 찾아오라 하셨을 뿐이다. 비록 장군께서 지금 안 계시지만 나는 그분의 명을 충실히 따를 의무가 있다.”

“무슨 소리냐?”

“나는 그 분이 찾아오라는 물건을 모두 찾은 뒤, 그 자리에서 없애버릴 것이네. 서림각라씨와 보국장군부에 누가 될 물건이다.”

“그렇다면 그 물건을 내놓아라. 내가 네 대신 임무를 완수하리라.”

아규은의 말에 종리세리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어처구니 없다는 표정으로 말을 받았다.

“내가 호군교 네게 그 일의 비밀을 말하게 된다면 너 역시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된다.”

호군교 아규은의 눈이 커졌다. 종리세리의 눈에서 서늘한 기운이 뻗쳐 나왔다.

“세상에 그 일을 아는 자는 없어야 한다. 늙은이들은 입을 닫고 비밀을 간직한 채 무덤으로 갈 것이다. 그렇다면 오직 나 하나만이 남게 될 것이다. 나는 그 물건들을 멸해야 할 의무가 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한족인 네놈의 말을 우리 서림각라씨가 믿으란 말이냐?”

“장군께서는 오직 나를 믿었다.”

“같잖은 소리로구나.”

아규은이 손을 풀고 검대에 손을 올렸다. 아규은의 뒤에 서 있던 이들 역시 천천히 손을 검대에 올렸다.

성루에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서안의 지휘사는 광장에서 벌어지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가 다급하게 손을 올리며 아규은에게 고함을 질렀다.

“호군교는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것인가! 만성 안에서 사사로운 결투는 금지되어 있다!”

“지휘사께 아뢰오. 지금 이 일은 우리 서림각라씨의 규율에 관련된 것입니다! 공적으로 처벌을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뭐라고?”

“규율?”

지휘사와 종리세리의 입에서 각각 물음이 나왔다.

아규은은 비릿한 웃음을 짓더니 종리세리를 보며 판관과 같은 엄숙한 표정이 되어 나이에 어울리지 않은 장중한 목소리를 내며 앞에 선 이를 노려보았다.

“한 가지 더 말해주마. 사실은 이 문제가 나를 여기까지 오게 한 것이나 마찬가지니.”

“뭐냐.”

“보국장군부 선무사 천호 종리세리. 보국장군께서 돌아가신 뒤, 우리 서림각라씨는 너를 우리 일족에서 추방하기로 결정하였다. 한족이 서림각라씨의 일족으로 머무는 것은 더 이상 용납할 수 없다는 게 우리 부의 결정이다. 고로, 너는 지금까지 네가 받은 권리를 내려놓고 네가 행하는 의무 역시 내려놓으라.”

종리세리는 말없이 아규은의 입을 바라보았다.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가 흘러나왔지만 오히려 종리세리의 표정은 평안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종리세리의 입이 열리고 덤덤하게 사내의 말이 흘러나왔다.

“받아들일 수 없다.”

“네 놈이 그렇게 나올 줄 알았지.”

아규은은 눈을 번득이며 성루 위에서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는 지휘사를 바라보았다.

“지휘사께 건의합니다. 이 결정을 종리세리에게 통보하니, 그의 뜻을 칼로 묻고자 합니다. 가능하겠습니까?”

서안의 지휘사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아규은을 바라보더니 종리세리에게 고개를 돌렸다. 종리세리 역시 자신의 대답을 안모도의 손잡이에 올려놓고 있었다.

“선무사 천호 종리세리. 그대는 씨족의 결정을 받아들일 수 있는가?”

“칼로써 말하겠습니다.”

이미 만성 안의 군관들은 성루와 길거리를 가득 메운 채 광장에 서 있는 종리세리와 다섯 명의 서림각라씨의 도수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말을 뱉은 이상 모든 것은 결과로 보여야 할 것이었다.

지휘사는 있는대로 인상을 쓰며 두 진영을 노려보았다.

“빌어먹을 놈들.”

지휘사는 이를 부드득 갈더니만 주변을 메우고 있는 팔기들을 보며 우뢰같은 고함을 질렀다.

“모두 자리를 지키고 광장 안에 끼어들지 말라. 지금부터 벌어지는 일은 가문의 일이나 누구도 관여해서는 아니 된다!”

“존명!”

팔기들의 외침과 함께 종리세리와 다섯 명의 도수가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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