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 섬서성 서안 (1)
사람이 대나무에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래 숱한 왕국의 수도가 되어 왕국의 명멸(明滅)을 수없이 바라본 섬서의 고도(古都) 서안(西安)은 무덥고 습한 여름과 차갑고 메마른 겨울로 유명한 곳이었다.
서안 사람들은 참을성이 남달랐고 자신들의 성읍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였지만 흘러가는 역사에 삶을 내맡기는 순응 또한 뛰어난 이들이었다.
오래된 성벽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는 서안은 한때 천하의 명도였고, 명조 말기에는 이자성의 반군이 흥왕한 반군의 성지였으며, 지금은 청나라의 전략적 요충지가 되어 관중의 목줄기를 날카로운 이빨로 움켜쥐고 사방을 감시하는 곳이 된 터였다.
하지만 성민들은 자신의 위에 어떤 위정자가 오든 간에 별다른 불평을 하지 않았다. 그것이 이 오래된 고도의 성민들이 살아가는 방편이기도 하였다.
성벽 위에 이자성의 깃발이 흩날리건 만성 위에 팔기의 깃발이 흔들리건 간에 성민들은 자신의 삶에 큰 영향이 없다고 믿는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살지 않으면 목숨을 부지하기 힘든 것이 서안 성민들의 삶이었을 것이었다.
당태세와 종리세리가 성문을 들어서며 팔기들이 지정한 장소로 말을 끌고 들어가자 그곳에는 반가운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있었다.
당태세와 종리세리가 말에서 내리자 맨 앞자리는 감격하며 차마 입을 닫지 못하는 무두리 아룡이 서있었고, 그 뒤에는 늙은 상인들과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이 당태세를 기다리고 있었다.
노인이 말에서 내려 목괴를 짚고 비틀대며 사람들에게 다가가자 모여 있던 이들은 누가 뭐라고 할 것 없이 우르르 몰려와 당태세의 손을 잡고 연신 감사와 치하를 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노사, 다시 보니 참으로 반갑습니다! 하루가 백년 같았소! 다시 못 볼 줄 알았소이다!”
“숙부님, 이 분들이 제 갈 길을 안 가시고 한사코 기다리겠다고 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 여기서 숙부님 오실 때까지 같이 숙식을 했습지요.”
당태세는 아룡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어깨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예전의 인자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이번만큼은 억지로 꾸며낸 미소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온 미소였다.
“무두리, 네 수고가 많았다.”
당태세의 말에 아룡은 입가에 활짝 미소가 올라오며 절로 고개가 위로 올라갔다. 지금까지 겸손하게 팔기들 옆에 서 있던 태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다시 껄렁한 말투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제가 어찌 숙부님의 위난을 보고 가만히 있겠습니까! 이 강건성세의 청조(淸朝)를 위해 이 무두리가 못 할 일이 또 무엇이겠습니까! 그저 분골쇄신하여 공을 이룰 뿐 아니겠습니까!”
“그래 그래, 어련하겠느냐.”
당태세는 입맛을 다시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드는데 슬쩍 한 사람이 당태세의 곁으로 다가왔다. 처음 보는 노인이었다.
그는 수레를 타고 왔던 젊은 아낙과 함께 어린 계집애의 손을 잡고 있었는데 노인은 당태세의 앞에 서자 두 손을 잡고 머리 위로 올리며 공손히 예를 갖추었다.
“노대인, 참으로 감사드립니다. 제 딸과 손녀를 지켜주셨다 들었습니다.”
“제가 한 일은 별로 없습니다. 따님의 담력이 대단하고 아이가 순하여서….”
“아닙니다. 노사. 제 늘그막의 마지막 희망을 보살펴주셨습니다.”
당태세는 입을 다물었다.
아낙네는 다시 살아 돌아온 당태세를 보더니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는데, 어미의 치맛자락을 잡고 있던 계집애는 목괴를 짚고 있는 당태세를 보더니 뭐가 그리 좋은지 엄마와 외조부의 손을 잡고 깡총깡총 뛰고 있었다.
당태세는 가까스로 나오지 않는 말을 억지로 밖으로 내밀었다.
“……사람이 당연히 할…도리를…지킨 겁니다.”
“감사합니다. 참으로 감사하오.”
노인의 감사에 이어 눈물을 흘리던 여인이 고개를 숙이며 목메는 목소리로 감사의 예를 표하였다.
“노사, 실로 감사합니다! 살아계셔서 너무 다행이예요! 얼마나 걱정했던지…….”
당태세는 얼굴이 화끈거렸다. 오히려 이들을 사지로 몰고 간 것은 자신이었거늘, 왜 이들은 나에게 이렇게 하례를 하며 고마워하는가.
늙은 당태세는 절로 고개가 아래로 떨어지고 연신 입술을 혀로 문지르는데 오히려 겸연쩍어하는 노인을 보던 사람들은 모두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그의 주위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숙부님.”
“엉?”
고개를 쳐든 당태세를 보며 아룡이 슬쩍 굳은 표정이 되어 말을 이었다.
“한 가지 걸리는 게 있습니다. 다른 게 아니라 표사들에 관한 겁니다.”
“표사들이 무슨 문제라도 있느냐?”
그러고보니 지금 아룡의 주변에는 표행에 참가했던 승객들과 그들의 짐만이 있을 뿐, 그들을 여기까지 데려다 준 표사들과 쟁사수의 모습은 일체 보이지 않았다.
당태세가 그제야 무슨 일이 있었음을 짐작하고 아룡을 바라보는데 아룡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팔기들을 슬쩍 쳐다보더니 말소리를 낮춰 속삭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이 서안으로 들어온 뒤에 제가 옥패를 들고 만성으로 가지 않았습니까요. 그 사이에 사람들이 와서 물건과 손님들을 여기에 내려두고 표사들을 모두 데리고 갔다는 겁니다요.”
“무슨 소리냐? 어떤 사람들이?”
“어떤 사람이겠습니까? 바로 사형표국의 사람들이겠지요. 원래 표행은 표국에 도착한 뒤에 거기서 물건을 모두 내려주고 손님들과 여행 도중에 생긴 차액을 계산하는 것이 원칙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것도 없이 그냥 손님과 화물을 다 내렸다는 겁니다.”
아룡이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늙수그레한 상인이 옆에서 아룡의 말을 거들었다.
“그러게 말이오! 참으로 기이한 일이지. 이렇게 성문 안쪽에 짐을 부려 내려놓는 일은 표행에서 처음 겪은 일이오. 게다가 그 육표두를 사람들이 데려가는데….”
“데려가는 데 무슨 일이 있었소?”
늙은 상인은 자신이 본 바를 말하면서 힐끗 성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아마 그 쪽이 사형표국이 있는 곳 같았다.
“아니, 마치 죄인을 압송하듯이 옆에서 깍지를 끼고 육표두를 데려가더란 말이오. 나머지 표사들도 그렇게 데려가고 쟁자수들은 무슨 가축 몰듯이 수레 하나에 다 태우고 데려가더라고. 내가 어이가 없어서 그네들에게 뭐라 하려고 했는데 인상이 하도 험악해서 말도 못 붙이겠더이다.”
말을 듣고 있던 당태세의 표정이 다시 평상시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노인의 눈이 다시 가늘어지고 기묘한 광채를 띠자 상인은 자기도 모르게 슬쩍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사형표국에서 모두를 데려갔다는 말이구려. 노대가께선 사형표국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늙은 상인은 손을 들어 성벽을 따라 길게 뻗은 남쪽의 길을 가리켰는데, 그 길은 성벽에 가려져 있어 대낮인데도 침침하니 볕이 들지 않은 곳이었다. 상인은 그 길을 보면서 입맛을 다셨다.
“늘 지나다닐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표국에 들어가는 길은 음침하기 그지없지. 아무쪼록 별 일 없기만을 바랄 뿐이오.”
“별 일은 없을 겝니다.”
당태세가 목괴를 짚고 나서며 상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별일이 있으면 별일을 없애면 되는 것이고요.”
상인은 당태세의 말에 침을 삼키며 그저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
“그런데 숙부님. 저희끼리만 표국으로 가도 되겠습니까요?”
당태세와 함께 잡아놓은 객잔으로 향하고 있던 아룡이 불쑥 말을 꺼내자 당태세가 아룡을 돌아보았다.
“무슨 소리냐. 우리 말고 누가 또 표국에 간단 말인가?”
“그 왜…. 옥패를 주셨던 종리천호 있지 않습니까? 그 분 꽤나 진중하니 믿을만 하고 숙부님과도 막역하시지 않습니까? 같이 표국에 들르시는 것이 낫지 않을까요?”
“막역하기는 무슨…….”
당태세는 피식 코웃음을 치다가 마지막으로 성문 앞에서 본 종리세리의 모습을 떠올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는 만주어를 몰랐지만 분명 종리세리가 서안의 팔기들과 나누는 말은 어조를 보건데 결코 좋은 이야기는 아닌 듯 싶었다.
‘한인과 같이 수레를 타고 건너오다 멋대로 칼부림을 한데다가 종당에는 팔기의 군사를 불러내놓고 자신은 멀쩡하게 말을 타고 왔으니 내가 상관이라도 뿔이 났겠지.’
아마 종리세리는 만성 안으로 들어가서 자신의 이야기를 서안의 지휘사에게 보고를 하고 있을 터였다. 그것은 당태세의 세상 바깥의 일이었고 당태세가 상관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종리세리는 알아서 자신의 처지를 변호할 수 있을 터였다.
당태세가 본 종리세리의 마지막 모습은 마상(馬上)에서 예의 무표정한 얼굴로 팔기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모습이었다. 사내는 단단한 중심을 갖고 있었으니 꺾이지 않을 것이었다.
유일하게 그가 종리세리의 다른 표정을 본 때는 일망무제의 황야에서 사면부를 내밀고 북경으로 가라고 했던 그 때뿐이었다.
“종리천호는 만성 안에 들어갔으니 우리가 불러낼 방도가 없다.”
“그럼 잠시 기다리셨다가…….”
“무두리야, 네가 무엇을 두려워하느냐? 저 황량하고 적막한 황야를 단신으로 넘어와 만성의 팔기들과 독대한 너 아니냐?”
아룡이 당태세의 말을 듣자 갑자기 불쑥 어깨를 펴더니만 눈을 깜박이기 시작했다.
역시나 아룡 이놈은 공치사 한 번에 성벽을 일착으로 타 넘을 놈이었다. 불안한 듯 사방을 살펴보던 아룡의 눈이 다시 앞으로 고정되더니 턱에 힘이 들어갔다.
“물론입니다. 제가 누굽니까! 무두리 아닙니까!”
“오냐, 너와 내가 있다면 충분히 육표두에게 무슨 일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별 일 없으면 좋겠습니다.”
“나도 그렇구나.”
“그런데 별일이 있으면 어찌 합니까?”
“구해야지. 너도 뭔가 꺼림칙스러우니 내게 육표두의 행방을 말한 것 아니겠느냐?”
아룡은 슬쩍 뭔가 생각하더니만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람이 험상궂고 험악한 위인 같았는데 지내고 보니 참 건실한 사내였지 않습니까?”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때 녹림에 있었고 그 죄가 남아있는 사람이라지만 지금 그의 삶을 보면 그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분명 사형표국은 그를 붙잡아 명을 따르지 않은 죄로 치죄를 할 요량임에 틀림없었다. 다른 곳도 아니고 사형문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다.
“무두리. 그놈들이 네 용모를 제대로 파악했느냐?”
아룡은 당태세의 말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저는 서안성에 들어오자마자 냅다 수레에서 내려 만성으로 뛰었습니다. 제대로 육표두에게 인사도 못했습니다. 사형표국 사람들이 봤을 리가 만무하지요.”
“그럼 되었다. 네가 표국으로 들어가야겠구나.”
“네? 제가요?”
아룡의 얼굴이 삽시간에 백짓장처럼 창백해졌다. 하지만 당태세는 아룡을 보면서 엄숙한 표정을 지으며 할 일을 일러주었다.
“잘 들어라 아룡. 너는 이제부터 이곳 서안에서 무창으로 가는 행객(行客)이니라. 약재상을 하는 숙부의 일을 도우려 내려간다고 하여라. 대충 침의 남평수의 용모를 생각하면서 말하면 입에서 말이 술술 나올 것이다.”
아룡은 당태세의 말에 눈을 휘둥그래 뜨고는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비용이나 출발일자 같은 것을 묻고는 표국을 돌아다니며 시시콜콜 캐물으며 흠잡을 게 있는지 주위를 살펴라. 돈은 악착같이 깎으면서 말이야!”
“도, 돈을 깎아요?”
“안 그러면 의심할 것 아니냐? 넌 약재상 집안의 아들이니 일단 돈을 아끼는 게 우선이다. 명심 하여라! 돈을 안 깎으면 더 의심하는 법이야!”
“저기…표사들하고 시비 붙어야 하는 겁니까? 표사들은 칼을 가지고 있는데….”
당태세는 인상을 찌푸리며 손가락을 피고는 쓸데없는 소리 말라는 듯 아룡의 코앞에서 흔들어보였다.
“시비는 지금 붙는 게 아니다. 지금부터가 중요해. 표국의 대략적인 생김새와 문의 위치 같은 것을 잘 보도록 해라. 개중 어느 곳에 육표두와 표사들이 머물 만한 곳이 보일게야. 네가 들어가서 가장 중요하게 파악해야 하는 것은 그것이다. 어디에 육표두가 갇혀 있을만한 지를 찾는 거다. 어떠냐, 혼자 할 수 있겠느냐? 생각보다 쉬울게다.”
아룡의 목울대가 꿀렁 움직이더니만 당태세를 바라보며 고개를 힘차게 끄덕였다. 비록 낯색은 하얗게 변했지만 아룡의 눈에 전에 보기 힘들었던 결의가 보이는 중이었다.
“수, 수숙부께서 제게 중임을 주셨는데 제가 어찌 헛되게 돌아다니겠습니까!”
“오냐, 이 모든 게 대청(大淸)의 부흥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고 일하거라! 이들은 모두 이 청나라의 건강함을 좀 먹는 이들이니라!”
당태세의 말이 끝나자 아룡은 턱을 부들부들 떨며 주먹을 불끈 쥐어보였다. 어느새 하얗게 질렸던 아룡의 얼굴에 홍조가 떠오르고 있었다. 청(淸)이라는 말은 아룡에게 영약이나 다름없는 신통한 단어였다.
어느새 아룡은 의기가 충천하며 협심이 가슴속에 가득 차오르는데, 만약 칼이라도 쥐여주면 혈혈단신 사형표국으로 들어가서 접전이라도 벌일 기세였다.
“존명! 존명! 제 신명을 바쳐 임무를 완수하겠습니다!”
“오냐! 역시 내 조카로다!”
아룡의 빛나는 눈을 보던 당태세도 짐짓 근엄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