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 서안으로 (14)
불빛으로 붉게 물든 창날이 형체를 일그러뜨리며 당태세의 가슴을 향해 날아들었다.
당태세의 단괴가 몸을 중심을 지키고 있다가 들어오는 창날을 막으며 오른손에 들린 소도가 앞으로 뻗으며 나유박의 가슴을 베어 들어갔다.
하지만 나유박 역시 그대로 칼을 맞아줄 만큼 호락호락한 창수는 아니었다.
나유박의 손이 움직이며 묵직한 창대를 들어올려 가벼운 당태세의 소도를 퉁기고 번개처럼 끝이 날아오며 당태세의 태양혈을 노리는데, 당태세 역시 나유박의 공세를 이미 읽고 몸을 틀어 나유박의 창끝을 코앞에서 흘려보냈다.
어느새 두 사람은 위치를 바꾸며 나유박이 불타는 수레를 등지고 당태세에게 창을 겨누었다.
무표정한 창수의 뒤에서 타오르는 불꽃은 더욱 거세지며 사방을 밝히는데, 붉게 타오르는 화광은 시나브로 창수 옆을 지키고 있는 두 자루 칼날에도 휘감기며 살기를 더해갔다.
예장청 임필무의 묘도와 종리세리의 안모도가 서로의 칼날을 맞부딪히며 부딪혔다 다시 떨어져 나왔다.
번득이는 칼날이 검광이 되어 상대방의 요혈을 찌르고 가르며 사방으로 움직이는데, 두 사내는 발을 땅에 대고 다시 방위를 밟을 때마다 흙먼지를 일으키며 자세를 바꾸고 적수의 목숨을 탐하였다.
예장청의 장대한 묘도가 허공에서 맴을 돌며 회오리가 되어 종리세리의 좌우를 난타하며 폭풍처럼 휘몰아치는데, 종리세리는 안모도를 잡고 오직 직선의 투로를 잡고 회오리의 중심을 뚫으며 그대로 상대방의 요혈을 한 번에 꿰뚫을 기세로 들어갔다.
길고 짧은 투로와 곡선과 직선의 검세가 맞부딪히며 서로의 머리위로 번득이는 검광을 휘감는데, 실로 누가 이기고 질 것인지 가늠을 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두 사람을 감싼 검광들이 번득이며 불꽃의 옆을 돌면서 어우러지는데, 그들의 옆에서는 매서운 창날과 예리한 소도가 맞부딪히며 떨어지기를 반복하며 또 다른 무위를 뽐내고 있었다.
마치 거친 황야에 커다란 불을 피워두고 네 사람이 한데 모여 서로 어우러져 한바탕 춤사위를 벌이는 형국이었으나, 그 춤의 끝을 기다리는 것은 애오라지 두 사람의 죽음이었다.
당태세가 눈을 번득이며 불을 등지고 서 있는 나유박을 향해 달려들며 좌수의 단괴를 뻗어 나유박의 장창을 후려쳤다.
나유박의 장창은 살아있는 뱀처럼 아래로 떨어지며 당태세의 단괴를 피하더니 다시 용처럼 하늘로 치솟으며 당태세의 눈을 노렸다.
당태세의 소도가 들어오는 나유박의 창을 막고 몸을 한 바퀴 돌리며 창대를 타고 나유박의 목을 향해 일도를 뿌렸다. 순간 나유박이 몸을 뒤로 젖히며 소도의 참격을 간발의 차로 피하였다.
순간 당태세의 이가 번득이며 좌수의 단괴를 슬쩍 몸 쪽으로 젖혔다. 무심하던 나유박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느새 나유박의 장창이 당태세의 왼손과 단괴 사이에 단단히 끼인 채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된 것이었다. 당태세의 차가운 눈빛이 나유박의 눈을 마주보았다.
“네 놈은 그 나이가 되도록 우직하니, 기격(奇擊)과 속임수에는 여전히 미숙하구나.”
“문주의 공부가 터무니없는 게요.”
순간 나유박은 아무 미련없이 창대를 놓아버리더니 그대로 앞으로 달려들며 품 안에서 단도 두 자루를 뽑아들고 당태세를 향해 달려들었다.
냉정하기 그지없는 상황판단이었다. 당태세 역시 단괴에 낀 장창을 떨구고 두 손에 든 단괴와 소도를 가지고 나유박의 쌍도를 막아냈다.
껑충한 키의 나유박은 미끄러지듯 들어오며 양손을 자유자재로 휘두르며 당태세의 양손 어깨와 머리를 노리고 움직였다. 당태세의 손도 나유박의 손과 함께 속도를 맞춰 움직였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을 감싼 도광들이 불빛 아래에서 번쩍대는데 일촌의 깊이만 더 들어가면 절명할 수 있는 살초가 난무하는 가운데에서도 두 사람의 몸뚱이에는 생채기 하나 나지 않고 있었다.
당태세가 이를 악물고 조금씩 두 손을 빠르게 움직이자 나유박 역시 무표정한 얼굴에 깊은 주름이 생기며 휘두르는 단도가 더욱 빨라지고 있었다.
두 사람의 손은 이제 육안으로 확인하기도 힘들 지경이 되었는데 오직 두 자루 단도와 단괴와 소도가 맞부딪히는 소리만이 요란하게 불타는 황야에 울려퍼질 뿐이었다.
순간, 나유박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이를 드러내고 오른손에 잡힌 단도를 크게 휘두르며 당태세의 목을 향해 번개처럼 날을 박아넣었다.
하지만 당태세의 소도가 나유박의 좌수를 빗감아 아래로 떨구고 좌수의 단괴가 나유박의 우수를 위로 걷어올리는 것이 더 빨랐다. 찰나의 순간 찰나의 틈이 드러났고 당태세는 그를 놓치지 않았다.
좌수에 잡힌 단괴가 그대로 나유박의 가슴을 후려치고 헉하는 바람 빠지는 소리가 울려퍼질 때 당태세의 소도가 나유박의 가슴을 한일자로 그어버린 뒤 훌쩍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섰다.
나유박의 두 손에 잡혔던 단도가 동시에 땅으로 떨어지며 바닥에 꽂혔다.
“장창의 뒤를 잡았던 손이 아무래도 힘이 더해지는 법이지. 네 손이 느린 것이 아니라 네가 힘을 더 쓴 것이다.”
당태세는 어느새 소도의 피를 땅에 뿌리며 덤덤하게 나유박을 바라보는데, 나유박은 가슴을 움켜쥐고 당태세의 말에 수긍한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훌륭한 공부, 오랜만에 보고 갑니다. 당문주.”
“다시 만나 반가웠다. 광풍인.”
나유박의 몸이 천천히 무너지며 머리가 땅에 닿았다. 당태세는 말없이 쓰러진 광풍인 나유박의 몸을 보며 가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더할 것도, 덜 것도 없는 훌륭한 무인의 종생이었다.
당태세는 눈을 잠시 깜박이더니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는 여전히 예장청 임필무와 종리세리의 검결이 진행되고 있었으나, 이미 승부는 종리세리 쪽으로 기울어져 있는 듯 보였다.
불빛아래 번득이는 종리세리의 검은 여전히 예리하고 오직 직선으로 전후좌우를 베며 나아가는 중이었는데, 긴 묘도를 짊어진 예장청의 옷은 이미 여기저기 베어지고 피가 드문드문 배어나오는 중이었다. 이미 얼굴에도 한줄기 긴 흉터가 남은 채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새삼스레 당태세는 종리세리의 도법이 얼마나 효과적이고 빈틈없으며, 얼마나 잔혹한지를 깨달았다. 긴 묘도를 휘두르는 예장청의 내공은 이미 바닥이 난 지 오래인 듯 보였다.
종리세리는 슬쩍 뒤에서 지켜보는 당태세의 기척을 느끼고는 한바탕 큰 공격으로 예장청 임필무의 묘도를 쳐내고 무표정한 얼굴로 적수를 노려보았다.
“인명은 소중하니 그대는 칼을 버리고 항복하라. 서안의 만성에 데려가 합법적인 재판을 해주마.”
“허, 팔기가 한족을 재판하겠다고?”
임필무의 맥 풀렸던 눈에 다시 이글대는 독기가 올라왔다.
“그게 무슨 합법적인 재판이냐? 게다가 네놈은 한족 아니냐? 한족이 무슨! 무슨 빌어먹을 것이 있다고 만주족의 재판을 권하는가!”
임필무가 울부짖듯이 종리세리를 노려보며 말하자 종리세리는 무뚝뚝한 말투로 종리세리의 말을 받았다.
“나는 한족도 아니고 만주족도 아니다. 보국장군부의 선무사 천호 종리세리다.”
“개소리!”
예장청 임필무의 몸이 앞으로 튀어나오며 어깨에 올렸던 묘도가 다시 허리를 타고 내려오며 종리세리의 목으로 향하였다. 묘도가 바람을 가르며 들어오자 종리세리의 몸도 슬쩍 앞으로 나오며 안모도가 위로 들렸다.
종리세리의 안모도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들어오는 묘도를 그대로 받으며 직선으로 위로 올라간 뒤, 종리세리의 이마 위에서 멈춘 뒤, 그대로 앞으로 뻗어 예장청 임필무의 목을 빠르게 찌르고 제자리로 돌아왔다.
종리세리가 움직인 거리는 채 반보가 되지 않았고, 임필무는 온 힘을 다해 달려오며 숨이 끊어져 버렸다.
사형문의 제자는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지며 흙먼지를 덮어썼고, 손에서 벗어난 묘도는 모닥불이 되어버린 불타는 수레까지 날아가 꽂혀버렸다.
일순간 천지는 침묵으로 가득 찼다.
불타는 나무조각들이 딱딱 소리를 내며 불꽃을 하늘로 쏘아 올렸다. 살아서 하늘을 바라보는 두 사내는 종내 말이 없었다.
***
“더는 쫓아오는 사람이 없는 것 같소이다만.”
당태세는 종리세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고삐를 움켜쥐었다. 두 사람은 각자 말 위에 올라타고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서안을 향해 가는 중이었다.
수많은 살수들이 당태세와 종리세리를 습격하고 남은 것은 새하얗게 잿더미가 되어버린 사형표국의 네 바퀴 짐수레와 죽은 살수들이 남긴 마필뿐이었다.
결국 그들의 잘 훈련된 말은 당태세와 종리세리의 도움이 되기는 하였으니, 피와 쇠가 주인을 새로 바꿔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말들은 영리해보였고, 자신들이 어디서 왔는지를 기억하고 있는 듯 싶었다.
말과 사람의 생리는 엄연히 다르고 그 삶도 달랐으니, 잘 훈련된 군마들은 위에 탄 인간들이 누구인가에 관계없이 자신이 싸울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자신이 쉴 마구간을 향해 돌아가는 것일지도 몰랐다.
짐승도 머리를 누일 곳이 정해져 있었건만, 하얀 머리를 모두 밀고 변발을 땋은 망국의 협객은 자신이 목표로 삼고 찾아가는 성읍에서 안식을 취할 생각이 없었다.
노인은 오른다리의 시큰한 통증이 슬쩍 허리를 타고 다시 찾아온 것을 느꼈다.
예전같이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앞으로도 노인을 기다리고 있을 수많은 투쟁의 순간순간, 그의 신경을 예민하게 할 정도는 될 것 같았다.
종래 노인이 말이 없자 종리세리는 그의 옆으로 말을 가져오더니 물끄러미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예전부터 알던 이를 베어 기분이 안 좋으신게요?”
“그것은 아니오.”
“말이 없으시구려.”
“시간은 사람을 기다려주지 않고 육신은 생각보다 빠르게 쇠하는 듯싶소.”
“당문주는 나보다 장수할 거요.”
종리세리는 덤덤한 표정으로 앞을 보면서 허탄한 말을 내뱉었다. 당태세는 물끄러미 한족 천호를 바라보았다.
기묘하고 강한 사내, 하지만 허공과 땅 사이에 줄을 하나 걸어놓고 그 위에 위태하게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내는 불필요한 동정을 당태세에게 보이는 중이었다.
“나를 죽이려 온 사람과 등을 맞대고 싸울 줄은 몰랐지.”
당태세가 쓴웃음을 짓자 종리세리는 표정의 변화도 없이 중얼거렸다.
“강호에서는 흔해 빠진 일 아니오?”
“이제 강호가 어디 남아있는가.”
“협객이 있으면 강호는 여전히 남아 있는 것이겠지요.”
두 사내는 말고삐를 잡고 같은 속도로 가지런히 길을 타고 말을 달리고 있었다. 당태세가 물끄러미 종리세리를 보더니 물었다.
“나에게서 뭔가를 찾아갈 것이 있다 말했지 않소? 그게 뭐요?”
종리세리는 당태세의 얼굴을 슬쩍 보더니 기다릴 것도 없다는 듯 흔쾌히 대답했다.
“팔대문파의 사면부요. 우리 장군과 패륵들의 서명이 들어가 있고, 명 황제를 배신한 팔대문파의 서명이 모두 적혀있는 증서가 있소. 나는 당문주 그대가 그것을 모두 회수했다고 믿고 있소. 동성문주에게서 탈취한 그 피 묻은 종이 말이외다.”
당태세는 눈을 끔벅이며 종리세리의 말을 듣더니 슬쩍 품속을 더듬어 보이다 검은 얼룩이 묻은 접은 종이들 한 움큼을 천호 앞에 들어 보였다.
종리세리의 눈이 순간 커지며 당태세가 쥐고 있는 물건에 눈동자가 고정되었다.
“이거 말이오?”
“……그대가 모두 회수해 간 게 맞았군. 왜 회수한 것이오?”
“그대의 설명대로요. 모두의 이름이 적혀있고 도장이 찍혀있더군. 뭔지 모르지만 중요한 물건이라 생각하여 가져온 것이지. 사실 맨 처음 주통산이 이걸 지니고 있었던 것은 나도 나중에 알았지만 말이오.”
“알고 모은 것이 아니란 말인가?”
“내가 이게 뭔지 알고 모은단 말인가. 청나라 말도 모르는데.”
두 사람의 말이 제자리에 멈춰 섰다.
당태세가 종리세리를 쳐다보자 종리세리 역시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한동안 말없이 종리세리를 응시하던 당태세가 자신의 손에 들린 종이뭉치를 종리세리에게 내밀었다.
“가져가시게.”
“당문주.”
“이것만 있으면 그대는 다시 북경으로 돌아갈 수 있지 않소?”
종리세리는 당태세의 눈을 바라보았다. 종리세리의 손이 슬쩍 고삐를 놓고 당태세의 손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다가 순간 허공에서 멈춰 섰다.
당태세는 어서 가져가라는 듯 종이를 흔들어보였지만 종리세리는 마치 돌을 쪼아 만들어 놓은 석상처럼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당태세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였다.
앞에서 누군가 급박하게 말을 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당태세와 종리세리는 화급히 자세를 잡고 다시 말의 고삐를 잡는데, 멀리서 들려오던 말발굽소리는 이내 질서정연한 구보처럼 오와 열을 맞춘 마필의 대오가 되어 당태세 앞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두정갑에 활을 옆에 차고 말을 달려오는 이들은 다름 아닌 서안의 주방팔기들이었다. 종리세리는 짧게 한숨을 쉬며 그들 앞에서 손을 들어보이고는 만주어로 크게 소리치며 그들의 앞으로 다가갔다.
군사들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장수 하나가 눈살을 찌푸리며 종리세리에게 뭔가를 한참 설명하고 호통치는 것으로 보아 그들이 병사를 낸 것에 대한 책임을 종리세리에게 묻는 듯 싶었다.
당태세는 물끄러미 뒤에서 그들을 바라보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래도 아룡이 제대로 일을 해주었구먼.”
당태세는 피식 미소를 지으며 말 위에서 사방의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서늘한 한줄기 바람이 뜨거운 햇살 속에서 노인의 이마에 맺힌 땀을 씻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