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 서안으로 (13)
“빌어먹을 사형문의 십대제자놈들, 십칠 년 전에는 목이 뻣뻣하여 안부도 묻지 않더니 이제 백발이 다 되어서야 하나씩 문안인사를 오는 게냐.”
당태세가 이를 드러내며 웃음인지 격노인지 모를 표정을 지어보이자 수레의 이글대는 불꽃을 받아 몸의 반이 그림자에 들어갔다 나왔다 하던 마상(馬上)의 창수는 슬쩍 눈을 위로 치켜뜨더니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다른 이들을 몇이나 보셨소이까?”
“무영쌍륜 은곽과 예봉취 백심주를 만났다.”
“그러시군요.”
“모두 시왕전에서 거하게 대접받고 있을게다.”
“아하.”
광풍인 나유박이라 불린 사내는 두 뺨에 깊은 주름이 패여 있었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얼굴에서는 세월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는 멀끔한 얼굴이었다.
사내의 얼굴은 마치 단단한 돌을 쪼개고 코와 입을 가로세로로 쪼갠 것 같은 두껍고 선 굵은 모양새를 띠고 있었는데, 종리세리는 저리가라 할 정도로 표정에서 희로애락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사내는 정중한 말투와 대조되는 살벌한 눈빛을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소생도 전력을 다하겠소이다.”
“어차피 나를 잡으라고 유독중이 보낸 것 아니었느냐?”
나유박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큰 창을 하늘로 들고는 짧지만 우렁찬 소리로 부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모두 하마(下馬)하라!”
종리세리가 말 위의 사래들을 노려보며 자신의 칼집에 놓은 손을 풀지 않고 있었다. 광풍인 나유박은 큰 창을 들고 풀썩 말 위에서 뛰어내리며 뒤의 부하들에게 조용히 다시 한번 명을 내렸다.
“우리 앞에 있는 적은 당대의 고수였고 북경 제일문의 문주셨다. 후학은 예를 갖추라.”
일곱 명의 사형문도들이 모두 말에서 내리며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개중에는 기다란 묘도를 지니고 있는 예장청 임필무의 모습도 보였다. 나유박의 입이 다시 열렸다.
“사형문의 무명(武名)에 누가 되는 일을 하지 말라. 세불리하면 그 자리에서 자진(自盡)하라.”
“존명!”
번득이는 불꽃이 만드는 그림자가 나유박의 반을 번득이는 빛으로 감싸고 나머지 얼굴 반을 그림자로 가려주었다. 나유박의 차가운 목소리가 당태세에게 들렸다.
“당문주. 생사결을 시작하겠소이다. 숫자의 불공평을 나무라지 마시오. 우리는 그대를 죽이러 왔소.”
“오냐, 광풍인. 예를 갖추었으니 나 역시 전력을 다 해주마.”
“예나 지금이나 지극한 광영이오!”
가만히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종리세리 역시 칼집에서 안모도를 빼들었다. 나유박의 눈이 종리세리를 향하였다.
“그대는 누군지 모르나 죽기 싫으면 칼을 내려놓으라.”
종리세리의 날카로운 눈이 광풍인 나유박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명료한 목소리로 답하였다.
“서림각라씨 보국장군부의 선무사 천호 종리세리. 당문주에게 힘을 보태겠다.”
“좋을대로!”
나유박이 싸늘하게 외치는데 한줄기 바람이 불며 불붙은 수레의 화염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마른 장작더미나 다름없는 수레는 이제 시뻘건 불길이 수레의 반절 이상을 삼키며 황야에 커다란 불기둥을 만들어 사방을 밝혔다.
그 불길 앞에서 두 사람과 일곱 명이 서로의 무기를 들고 상대방을 바라보니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흔들리는 그림자들이 먼저 주인보다 앞서 상대방과 합을 맞추고 있었다.
광풍인 나유박의 거대한 창이 하늘을 가리켰다 앞으로 내려오며 당태세의 목을 겨누었고, 예장청 임필무의 묘도가 전갈의 꼬리처럼 머리 옆으로 뻗어 내려오며 종리세리의 가슴을 겨누었다.
당태세와 종리세리는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목괴와 안모도를 들고 천천히 두 사람 사이의 거리를 벌리기 시작했다.
나유박과 임필무의 뒤로 다섯 명의 사내가 동시에 도를 빼들고 선인지로의 세로 칼을 등에 숨긴채 한손을 들어 적수를 가리켰다. 전형적인 사형문의 도식 첫 번째였다.
꽤 많은 제자를 성심성의껏 가르켰구나. 그게 무정금 유독중이지. 제 문파를 위해서는 제 부모도 팔아먹을 놈.
당태세의 눈이 번득이며 목괴를 두 손으로 잡고 왼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마차에서 뛰어내려 착지할 때 힘을 쓴 오른다리가 오랜만에 욱씬욱씬 쑤시기 시작했다.
“조금만 더 버텨다오.”
당태세의 혼잣말과 함께 그림자가 얼굴에 일렁이던 나유박의 눈이 일순간 범의 눈처럼 커졌다. 그와 함께 당태세의 눈은 늑대처럼 위로 치솟으며 안광이 번득였다.
나유박의 발이 땅을 박차고 흙먼지가 일기전에 몸이 먼저 화광을 뚫고 앞으로 돌진했다.
보철을 낀 당태세의 오른발 역시 땅을 밀면서 미끄러지듯 앞으로 나가며 목괴를 나유박의 대창을 얹고 주르륵 앞으로 밀어내었다.
나유박이 가볍게 난창으로 목괴를 퉁기고 창을 비틀어 창날을 당태세의 가슴으로 밀어 넣었다.
순간 당태세는 가볍게 목괴를 돌리며 창날을 퉁기고 몸을 낮추고 목괴를 땅에 스치듯 낮게 깔아 퍼올리며 나유박의 턱을 향해 일격을 날렸다. 하지만 나유박은 슬쩍 몸을 뒤로 젖히며 목괴를 피한 뒤 몸을 회오리바람처럼 휘몰아 창날을 옆으로 뿌렸다.
목괴와 장창이 부딪히며 경쾌한 타격음이 울렸다. 그와 동시에 불꽃을 머금은 묘도가 나유박의 옆으로 날아오며 종리세리의 몸을 향해 날아갔다.
사람 하나 길이는 되어 보이는 묘도의 긴 날이 종리세리의 몸을 뚫을 기세로 날아들었지만 종리세리의 안모도는 앞으로 곧장 나가며 들어오는 묘도의 길을 부수고 곧장 임필무의 목을 향해 들어갔다.
임필무가 몸을 빼고 방위를 바꾸자 뒤에 기다리고 있던 다섯 명의 도수가 생사결에 참전하였다.
다섯의 도수는 마치 허공을 날다가 먹이를 찾는 매들처럼 번갈아 예장청과 나유박의 주위를 맴돌며 당태세와 종리세리의 사각을 찾고 있었다.
당태세가 목괴를 상하좌우로 휘두르며 팔방(八方)의 방위를 선점하고 나유박의 창을 밀어대기 시작했다.
불똥이 사방으로 날리며 하늘위로 붉은 별들이 솟구쳐 올라갔다.
그 아래에서 빛나는 창날과 도가 불빛과 달빛을 머금고 직선과 곡선으로 서로 붙었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니, 적막하던 황야 한 곳에 별들이 떨어져 떠들썩한 잔치를 벌이는 것과 같았다.
하지만 그 안에서 감도는 살기는 하늘의 고요함과는 비견할 수 없었으니, 두 개의 병기가 일곱 개의 날과 맞서며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고 있었다.
“어딜!”
당태세가 목괴를 치켜들며 자신의 옆으로 들어오는 도수의 도를 빗막고 가슴팍을 찔러오는 나유박의 창을 가볍게 피하고는 무릎으로 창을 쳐올리고 그대로 몸을 낮추며 목괴를 바꿔잡고 손잡이를 뻗어 도수의 다리를 걸어챘다.
그 순간 등을 쪼갤 기세로 떨어지는 다른 칼이 당태세의 공세를 늦추었다. 당태세는 인상을 쓰며 목괴를 거둬들이고 몸을 뒤로 훌쩍 돌리고는 들어오는 칼날을 피하였다.
당태세는 목괴를 두 손으로 들고 목괴의 가운데로 도수의 칼을 밀어내며 자리를 바꾸었다. 하지만 도를 쥔 젊은이의 거센 힘이 나이먹은 당태세의 길을 막고 오히려 당태세를 힘으로 밀어붙이고 있었다.
당태세의 눈살이 찌푸려지며 발을 돌려 방위를 바꾸고 목괴를 젖혀 힘의 방향을 다른 곳으로 밀어 넣었다.
휘청이는 젊은 도수가 중심을 잃고 앞으로 넘어지려는 순간, 기다란 묘도가 훌쩍 뻗어 나오며 당태세의 목을 노리고 덤벼들었다. 당태세는 화급하게 한 발짝 더 뒤로 물러섰다.
창만큼이나 긴 묘도의 공격은 성가시기 그지없었다. 일곱 명의 도수는 모두 무예가 경지에 이른 이들이었고, 이들이 방위를 점하고 사방에서 당태세를 압박해 들어오니 정확한 살초를 만들어 넣는 것이 점점 버거워졌다.
당태세는 번득이는 눈으로 사방을 지켜보며 이를 악물었다.
“들개무리가 범 하나를 이길손가.”
당태세가 잇새로 혼잣말을 중얼대는 순간, 광풍인 나유박의 장창이 다시 번득이는 화광을 감싸안고 앞으로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당태세의 목괴가 장창을 막으려는 순간, 창의 궤도가 바뀌며 일순간 옆으로 독사의 머리처럼 움직이며 당태세의 가슴팍을 노렸다.
당태세가 급하게 목괴를 올려 창을 머리 위로 넘기는 순간, 도수 하나가 당태세의 가슴을 향해 도를 찔러 들어갔다. 당태세는 아직 자세를 허물 수가 없었다.
노인은 가슴으로 들어오는 도를 바라보며 이를 악무는데, 종리세리의 안모도가 앞으로 튀어나오더니 당태세를 노린 도수의 칼을 막고 앞의 공세를 막았다.
그 순간, 종리세리를 노리고 예장청 임필무의 묘도가 목 뒤를 찌르고 들어왔다. 당태세의 몸이 빙글 돌며 종리세리의 등을 막으며 임필무의 묘도를 튕겨 보냈다.
순간 세 명의 도수가 세 곳의 방위를 점하며 예장청이 튕겨나간 방위를 맡으며 두 사람에게 덤벼들었다.
종리세리와 당태세가 동시에 기합을 넣으며 서로의 등을 맞대었다.
순간 두 사람의 손이 번득이며 합을 맞춘 듯 오른쪽으로 몸을 돌리기 시작하며 풍차처럼 제자리에서 회전하며 자신들의 앞에 붙은 네 명의 도수를 상대하는데, 어느새 당태세의 목괴는 단괴와 소도로 분리되어 있었다.
당태세의 목괴가 도수의 칼날을 막아내고 두 번째 소도가 칼날의 방향을 반대로 날려버리고 몸을 돌리자 종리세리가 번개처럼 당태세의 자리로 들어와 예리한 안모도를 휘둘러 도수의 목을 쳐버렸다.
두 사람은 마치 나무를 엇갈려 짜놓은 기둥처럼 서로 맞물린 채 빙글 돌며 도수들의 공격과 검로를 파하고 요혈을 찌르고 베어 넘겼다.
순식간에 두 사람 주위에 네 명의 도수가 피를 뿌리고 쓰러졌다.
“이게 무슨….”
예장청 임필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목전에서 벌어진 일을 보며 말을 못 잇는데, 사문들이 죽어 넘어간 것을 보고 있던 남은 도수는 눈이 뒤집혀 종리세리와 당태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순간 광풍인 나유박의 호통이 떨어졌다.
“멈춰라! 어리석다!”
하지만 사형문의 도수는 그대로 몸을 날리며 허공으로 몸을 띄워 천지를 일도양단하겠다는 기세로 도를 내리쳤다.
그 순간, 종리세리의 안모도가 옆으로 들어와 내리치는 칼날을 옆으로 후려치고 그와 동시에 당태세의 소도가 허공에 뜬 사내의 배를 그대로 베어버렸다.
임필무가 눈살을 찌푸리며 인상을 쓰는데 두 사람을 향해 달려들던 사형문도는 사방에 피를 뿌리며 착지하는 순간 숨이 끊어져 버리고 말았다.
당태세와 종리세리는 불타는 마차를 뒤로 한 채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고 예장청 임필무와 광풍인 나유박을 쳐다보고 있었다. 칠대이의 싸움은 어느새 이대이의 싸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제 좀 정신 차리고 싸울 수가 있겠구나.”
당태세의 말에 나유박은 눈을 가늘게 뜨며 창날을 다시 고쳐 잡았다.
“당문주는 서안의 대문을 다시는 구경하지 못할 것이오.”
당태세는 나유박의 결기어린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두 손에 나눠진 단괴와 소도를 펼쳐 들었다.
“네놈이 오늘 밤 시왕전의 대문을 구경하는 것보다는 늦게 도착하겠지.”
종리세리는 얼굴에 떨어진 피를 슬쩍 손으로 닦아내고는 다시 안모도를 들어올리며 예장청 임필무의 두 눈을 향하였다. 임필무 역시 묘도를 두 손으로 잡고 종리세리의 목을 겨누었다.
네 명의 사내는 각자의 적을 바라보며 잠시 숨을 골랐다. 이제 불은 수레 전체에 붙은 채 시뻘건 모닥불이 되어 사방을 훤히 밝히고 있었다.
당태세의 그림자가 흔들리며 나유박의 창날 앞에서 좌우로 움직였다. 나유박의 예리한 눈이 당태세의 그림자를 따라 본체를 향해 올라가더니만 슬쩍 어깨를 옆으로 틀며 무릎을 낮추었다. 당태세 역시 자세를 낮추고는 단괴와 소도를 잡고 나유박의 어깨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불타는 수레가 무너지며 불티를 사방으로 떨구었다.
네 명의 인영이 동시에 땅을 박차고 불티를 날리며 서로를 향해 뛰어나갔다.
번득이는 칼날 네 개가 붉게 빛나며 상대방의 목숨을 끊기 위해 앞으로 날아갔다. 임필무의 기합성이 조용하던 황야의 모닥불 앞에서 울려 퍼졌다.
“죽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