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서안으로 (11)
전직 녹림의 두령이자 현재 표사들의 우두머리인 육해주는 당태세의 말을 듣더니 즉각 인상을 쓰며 머리를 세차게 휘저었다. 사내의 표정에는 당태세의 말을 용납할 수 없다는 강한 자존심이 담겨 있었다.
“나는 표사요. 노사의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표물과 승객와 깃발을 잃어버린 표사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놈이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인명입니다.”
“잘 아는구먼. 그럼 그대가 무엇을 지켜야 할지 이미 알고 있는 것 아닌가?”
육해주는 발끈하며 당태세의 말을 되받아쳤다.
“노대인! 같이 가셔야 합니다! 표사는 물건을 버릴지언정 사람은 버리고 가지 않습니다!”
“그래, 자네가 버리지 말아야 할 사람들은 저 수레 안의 사람들이야.”
“노대인.”
“저들은 나를 노린다. 내가 대열에서 이탈하는 것을 보면 저들은 나를 쫓지 다른 이들을 쫓지 않을 것이야. 나 같은 늙은이의 목숨 하나 때문에 죄 없는 이들의 목숨을 담보로 잡을텐가?”
어느새 다른 표사들과 승객들 모두 수레의 앞뒤로 모여 당태세와 육해주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육해주는 자기도 모르게 그들의 표정을 바라보았다. 늙은 상인은 어깨에 붕대를 감고 있었다. 여인과 아이에게 칼을 들이밀던 살수에게서 그들을 보호하려다가 거죽을 상한 것이었다.
육해주는 입맛을 다시며 눈을 깜박이는데, 당태세는 낮은 소리로 조곤조곤 육해주를 설득했다.
“이미 어린 쟁자수가 목숨을 잃었네. 희생은 그것으로 족해.”
“노대인.”
“자네는 자네 부하들과 저들을 서안으로 데려가게. 그게 자네 일이고 이 늙은이는 잔명을 귀하게 쓰는 게 또한 할 일이야.”
“하지만….”
“저 꼬마를 외조부에게 보내주게.”
육해주가 여인의 품에 안겨서 곤히 자고 있는 아이를 쳐다보았다. 육해주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더니 신음을 흘리는데,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종리세리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내가 노사와 함께 남겠소. 표두께서는 가시오.”
육해주가 종리세리를 쳐다보며 눈을 깜박이자 지금까지 말없이 이 모습을 보고 있던 아룡이 쭈뼛하며 사방을 둘러보더니만 한 발짝 불쑥 나서며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수, 수숙부님! 어찌 숙부님만 이 자리에 남으…남으신다 하십니까! 저, 이 무두리가! 무두리가 옆에서 보필을 해야지요! 저, 저저저도 같이 남습니다. 남겠습니다!”
입술을 바들바들 떨면서도 고개를 뻣뻣하게 쳐드는 아룡의 모습을 쳐다보던 당태세가 실쭉 입에 미소를 지어보이며 이를 드러내는데, 그 모습을 보던 종리세리가 고개를 저으며 아룡을 바라보았다.
“산동의 무두리는 나를 보아라.”
“네?”
“너는 표사들과 같이 서안으로 달려가라. 네가 할 일이 있다.”
“제가요?”
종리세리는 품 안에서 뭔가를 꺼내 아룡의 손바닥에 쥐어주었다. 손바닥 위의 물건은 어두운 하늘 아래에서도 하얀 빛으로 번쩍이며 자신의 위세를 내보이는데, 그 물건은 다름 아닌 장군부의 옥패였다.
“너는 서안부 만성으로 달려가 그곳의 장수에게 이르되, 북경 보국장군부의 선무사 천호가 위급에 닥쳤으니, 말을 몰고 급히 달려와 우리를 구원하라 이르라.”
“선무사 천호!”
순간 모여있던 사내들이 모두 눈을 둥그렇게 뜨고 종리세리를 쳐다보는데, 옥패를 손에 받은 아룡은 갑자기 전신을 부들부들 떨더니 종리세리를 물기어린 눈으로 보며 목에 메인 채 간신히 목소리를 내었다.
“제, 제가 서안 대청(大淸)의 만성으로 제가 가서……천호의 위험을…알리란…말씀입니까?”
“네가 짊어진 무게가 천근이다. 할 수 있겠는가?”
종리세리의 말에 당태세가 고개를 끄덕이자 아룡은 목에 핏발이 올올이 선 채 턱에 힘을 주고 갈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무두리, 성공하지 못하면 만성 아래에서 혀를 깨물고 죽겠습니다!”
“죽지마라.”
당태세가 나직하게 아룡을 보며 말했다. 아룡의 눈과 당태세의 눈이 마주쳤다.
“나도 죽지 않을 것이다.”
***
해가 완연히 서산 아래로 떨어지고 성신(星辰)이 일광 대신 어두운 하늘을 밝히려고 사방에서 모습을 드러내었을 때, 수레에는 초롱이 올라오고 불이 밝혀졌다.
어두운 길을 따라 한 걸음이라도 더 나가려는 표사들의 바람인 듯, 마차는 불을 켜고 느릿느릿 서쪽으로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간간히 들려오는 표사들의 채찍소리와 짧은 고함소리만이 적막한 산길에 퍼지고 있었지만 수레의 앞에 달아놓은 등불은 지금 수레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멀리서도 알려주고 있을 터였다.
그렇게 한 식경 가까이 느리게 서쪽으로 나가던 마차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휘영청 달빛 아래 멈춰 사방을 돌아보았다.
아무런 말없이 조용히 제 자리를 지키고 서 있던 수레는 다시 등불을 흔들대며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느릿느릿 움직이기 시작하는 수레는 다시 서안을 향해 움직였다.
등불 앞에서 두 마리 말에 슬쩍슬쩍 채찍을 움직이는 늙은 마부는 종내 말이 없었고, 텅 빈 수레 안에서 화살과 활대를 만지작거리는 젊은 표사는 수레의 뒤쪽으로 펼쳐진 적막한 밤의 풍경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은 다름 아닌 당태세와 종리세리였다.
두 사람은 수레 하나를 비우고 육해주가 이끄는 수레들의 맨 뒤를 따라서 밤에 움직이다가 잠시 멈춘 틈을 이용해 호롱을 바꿔달고 자신들이 앞으로 나서서 길을 가기 시작한 것이었다.
지금쯤 육해주가 이끄는 나머지 표행의 수레들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다른 길을 통해 서안으로 가는 길에 접어들었을 것이었다.
“아무쪼록 놈들이 속았기를 바라오. 너무 뻔한 미끼인 것인데.”
“그들이 안다한들 안 와 볼 수가 있겠는가?”
당태세의 낮은 웃음소리를 들으며 종리세리는 고개를 끄덕이고 남아있는 화살촉들을 세어 옆에 쌓아두었다.
녹아방에게 뺏은 화살과 역참에서 당태세가 가져온 화살들로는 모든 이들을 대적하기 턱없는 숫자였지만 막상 혼전이 벌어지면 꽤나 유용하게 쓰일 것들이었다.
“그나저나 종리천호는 왜 나와 함께 남은 거요. 그들을 보호해 주는 것이 나을터인데.”
“내 관심사는 당문주 그대와 사형문이지 표국이 아니오.”
“거 참, 끈덕진 것인지 기묘한 인연인지 알 도리가 없군.”
“나도 모르겠소.”
당태세는 히죽 미소를 지어보였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이 종리세리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예전 당태세가 젊었던 시절, 강호를 누비다가 늦은 저녁 객잔에서 만났던 협사들의 담소와 기억이 선연히 떠올랐다.
지금 뒤에서 그를 따라온 사내는 십칠 년, 아니 수십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나타난 인간 같았다.
“그대는 한족 아니오. 왜 팔기가 된 것이오?”
“사연은 누구나 있는 법 아니오?”
“그대는 내 사연을 알고 있지 않은가.”
당태세의 말을 들은 종리세리는 물끄러미 당태세의 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종리세리는 다시 수레의 후방을 바라보며 활대를 다리 사이에 끼고 천천히 균형을 맞추더니 입맛을 다셨다.
“나는 산해관 바깥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이오. 어머니는 일찍 돌아가셨고, 나는 부친에게서 검술을 배웠소. 아비는 무인이었고 나도 무인이었지. 내 도법의 절반은 가전인 검술과 합쳐져 있는 것이오.”
“원래 유력 무문의 자제셨는가?”
당태세의 말에 종리세리를 짧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비는 금주성의 무장이었소. 금주성의 외곽 초소 다섯 곳을 감독하는 감군(監軍)이자 별장이었지. 그러던 중 홍타이지가 금주성과 산해관 전역에 대한 습격을 시작했소이다. 내 아비는 결사적으로 싸웠지만 결국 성채 다섯 곳을 모두 빼앗겼고…부하들을 데리고 성으로 철수했소. 부하들을 개죽음 당하게 할 수 없다는 이유였지.”
막상 입을 연 종리세리는 생각외로 조리있는 달변이었다. 하지만 종리세리는 자신의 과거를 이야기할 때마다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있었다.
“허나 금주성에서 부친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참수였소. 패장은 살아있을 가치가 없단 이유였지. 관례(冠禮)가 막 지난 나 역시 참형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아비의 죄를 같이 묻기 힘들다 하여 옥에 그대로 갇혀 있었소.”
“그대도 같이 참전했었는가?”
덩달아 눈살을 찌푸린 당태세의 말에 종리세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친의 종자로 부관이 되어 칼을 휘둘렀소. 나름대로 열심히 싸웠지요. 그때는 명의 군사였으니.”
“안타까운 일이로구먼.”
당태세의 말이 종리세리는 눈을 들어 반짝이는 별들을 보더니 계속 연이어 과거를 더듬었다.
“금세 금주성은 식량이 떨어졌소. 명나라는 지리멸렬 대군을 잃어버리고 금주성의 바깥은 팔기의 군사가 물셀 틈도 없이 포위하였지요. 아무런 방법이 없었소. 하루에 수십 명이 굶어죽었소. 나도 감옥에서 쥐를 잡아먹으며 간신히 나날을 버텼지요.”
종리세리의 눈은 지나간 과거를 바라보더니 슬쩍 이를 드러내며 미소 비슷한 것을 지었는데, 눈매는 일그러지고 입술이 비틀린 것이 차마 웃음이라 말하기 민망한 표정이었다.
“하루에 몇십 명이 굶어 죽을 지경이 되어서야 금주성의 주장(主將)은 결국 성문을 열고 청군을 맞이하였소. 참으로 우스운 노릇이지. 나를 구해준 것은 홍타이지와 그 아래 깃발을 잡고 있던 패륵이었소. 그들은 나를 구해주고 나를 부관으로 쓰기 시작했소. 용사의 아들이라고 하면서 말이오. 내가 성채에서 싸우는 모습을 봤다는 것이오.”
당태세는 말을 멈추고 뒤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종리세리의 말은 흐르는 것처럼 부드럽게 유장하게 넘어갔지만 그 내용은 결코 가볍게 들을 것이 아니었다. 선무사 천호의 눈 아래 잡힌 짙은 주름이 당태세의 눈에 새삼스럽게 들어왔다.
“이미 그때 내 나이는 관례(冠禮)를 넘겼고 나는 명의 사람이라 여기고 있었지요. 하지만 전쟁이 모든 것을 바꿔놓았소. 나는 아비의 허망한 죽음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백성의 반이 죽어 넘어가고 나서야 부하를 참하고 성문을 연 주장(主將)의 방침 또한 올바르다 생각하지 않았소. 차라리 생면부지의 나를 마음에 들어하며 깃발을 들게 한 청의 장군이 오히려 사람처럼 보이더군.”
“그게 보국장군인가?”
“서림각라씨의 장수였소. 그는 승승장구하며 무공을 세웠고, 나는 그에게 도법과 청의 말을 배우며 그와 함께 전장을 달렸소. 산해관을 넘고 북경으로 넘어오면서 나는 조금씩 내가 만주족의 습속을 익히고 있음을 알게 되었지. 나는 그때 기병의 묘리를 알고 만주족의 도(刀)가 생각보다 심오함을 깨닫게 되었소이다. 나는 군공이 올라 선무사 천호가 되었고…그 패륵은 보국장군이 되었소.”
당태세의 입이 열리며 탄식처럼 말이 흘러나왔다. 노인은 여전히 어두운 황야를 바라보고 있는 종리세리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것이 그대가 팔기가 된 이유로군.”
“나는 팔기가 맞소이다. 한인팔기가 아닌 패륵의 부하가 되어있는 진짜 팔기지요.”
“진짜 팔기라…….”
“하지만 나는 명나라 패장의 아들이며 청조 장군의 부하일 뿐이오. 나는 명나라 사람으로 살지도 않았고 만주족으로 태어나지도 않았소. 그저 나는 서림각라씨 보국장군부의 선무사 천호 종리세리일 뿐이오.”
“그게 자네인가.”
“지금까지는 그래왔지요.”
“지금까지는?”
종리세리는 밖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항주에 있을 때 북경에서 급전이 왔소이다. 보국장군께서 노환으로 돌아가셨다는 전갈이었소.”
“자네에게는 실로 중요한 사람이었던 모양이군.”
“내가 살아 움직이는 이유였지. 내게 목숨을 주었고, 내가 살아갈 힘과 목표를 주었고, 나를 한족이나 만주족이 아닌 사람으로 대해준 유일한 인물이었소.”
당태세는 종리세리를 보며 침묵을 지켰다. 종리세리 역시 활을 다리 밖으로 빼내며 털썩 수레에 주저앉아 멍하니 어두운 풍경을 지켜보다가 피식 쓰디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고 보면 내가 당 문주를 따라다닐 이유는 이제 없는 거나 마찬가지요. 명을 내린 분이 세상에 안 계시니 무슨 의미가 있겠소이까?”
“보국장군께서 나를 추격하라 명하셨는가?”
“그렇소이다.”
당태세는 슬쩍 눈 꼬리가 위로 올라가며 눈초리가 매서워졌다. 이제야 당태세는 왜 북경의 선무사 천호가 자신을 추적하며 칼을 들이밀었는지를 알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대체 나를 추적하던 이유가 무엇인가? 종리천호? 말할 수 있겠는가?”
종리세리가 당태세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젠 말할 수 있다는 표정이었다.
“폐일언하자면, 물건 하나를 문주에게서 가져오는 일이었소.”
“물건?”
그 순간, 종리세리와 당태세의 눈이 같이 커지더니만 동시에 수레 뒤쪽의 언덕을 향하였다. 수많은 인기척이 다급한 말발굽소리와 함께 한꺼번에 물려오고 있었다.
종리세리가 다급하게 자세를 취하는 순간, 당태세는 눈을 번득이며 마차의 앞으로 다가갔다. 어느새 당태세의 손에는 목괴 대신 채찍이 잡혀 있었다.
“일단 먼저 이곳을 벗어나세!”
당태세의 손에 잡힌 채찍이 허공을 가르며 말 등으로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