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63화 (163/226)

163.  서안으로 (8)

대저 표국에서 표행에 일이 생겨 모든 것을 내던지게 된다 하더라도 표두가 마지막까지 손에서 버리지 못한 것 세 가지가 존재한다.

그것은 다름아닌 표물와 인명(人命), 그리고 표국의 깃발이었다.

지금 당태세는 사형표국의 사(四)자가 써 있는 깃발 아래에서 사람들과 함께 진을 치고 다가오는 적들을 기다리며 앉아있었다.

당태세는 자신을 죽이려고 드는 사형문의 깃발 아래에서 자신을 치러 오는 이들을 기다린다는 것에 절로 헛웃음이 나왔지만 실제로 언덕을 향해 내달려 오는 말들을 쳐다보며 기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지금 자신과 함께 저들을 막겠다고 하고 있는 이들은 사형표국에 고용된 표사들이었고, 표사들 위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여기까지 동행한 쟁자수들과 승객들이 앉아있었다.

어디선가 아이의 재잘대는 소리가 당태세의 귀에 들려왔다.

순간 당태세의 눈빛이 다시 갈무리되며 풀어졌던 온 몸의 기력이 다시 날 벼린 칼처럼 곤두서는 것이 느껴졌다.

만약 저들이 노리는 것이 당태세 자신뿐이라면 당연히 이 진영에서 벗어나 따로 승부를 내는 것이 도리였다.

아룡과 종리세리와도 거리를 둘 필요가 있었다. 어차피 지금까지 살겁의 아수라장을 뚫고 다닌 것은 오롯이 당태세 혼자의 힘이었지 조력 덕분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래야만 하였다.

누군가의 칼에 기댄다면 복수행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당태세의 눈가에 다시 서늘한 빛이 돌며 입에서 뿌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차피 백이든 천이든 가로막는 건 모두 없애고 갈 것이다. 독행(獨行)에 무슨 호오(好惡)를 논하랴?”

마음을 다잡은 당태세는 고개를 쳐들고 점점 또렷하게 들리는 말발굽소리를 듣고 있었다. 일곱여덟 기의 말이 천지를 진동시키며 내는 소리는 바람과 땅을 타고 발과 귀에 동시에 전해졌다.

이윽고 뾰족한 말의 귀 한 쌍과 그 위에 탄 사내들의 죽립이 동시에 언덕 위로 모습을 드러내자 한줄기 흙바람이 말다리를 휘감으며 수레로 밀려 들어왔다.

수레 앞쪽에 진을 친 표사들과 수레 안쪽에서 바퀴 사이로 그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승객들 모두 말없이 찾아온 불청객들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사형표국의 표행이 맞으렸다.”

맨 앞에 멈춰선 흑마에 탄 사내가 죽립을 뒤로 젖히고 입을 열었다.

사내는 말 안장에 가늘고 길쭉한 묘도(苗刀) 한 자루를 매달고 있었는데 말투나 서 있는 다른 말들을 보아하니 이 자가 패거리를 이끌고 온 두령인 듯 보였다.

사내는 깃발 옆에서 박도를 든 채 그를 노려보고 있는 육해주를 바라보며 낮고 굵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이표두는 어디있나?”

“이 곳에 오기 전 녹림도와의 접전에서 목숨을 잃었소이다. 지금은 내가 이 곳을 지휘하오.”

“너도 사형표국의 사내렸다. 관등성명이 무엇이냐?”

“불청객이 먼저 이름을 밝히는 것이 도리 아닌가?”

가뜩이나 험상궂은 육해주가 인상을 쓰며 말 위의 사내에게 되묻자 말 위의 사내는 슬쩍 턱수염을 쓰다듬더니 알겠다는 듯 비릿한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나도 사형문의 사람이다. 예장청(銳長靑) 임필무라고 하네. 이 정도면 되었는가?”

“마면걸 육해주요. 이 표행의 부표두였다가 표두 노릇을 하고 있소. 대체 무슨 일이오?”

“승객 중에 당가라는 노인이 있소? 그 노인의 신변을 우리에게 넘기시오.”

예장청 임필무가 천천히 눈동자를 움직이다가 목괴를 들고 있는 당태세에게 시선을 멈추었다.

그리고 짧게 내뱉었다.

“그 자는 우리와 함께 이곳을 떠날 것이외다.”

당태세와 종리세리, 육해주와 임필무의 눈이 서로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임필무의 뒤쪽에 서있는 일곱 명의 기수는 모두 어느새 자신의 무기를 안장에서 뽑아 든 뒤였다. 개중 한 명은 각궁에 화살을 잰 채 표사들을 겨누고 있었다. 표사 중 하나가 이를 부드득 갈더니 말 위의 궁수를 보며 나직하게 욕을 중얼거렸다.

“팔기 새끼인가, 어디서 활을 들이밀어.”

종리세리가 옆에서 욕을 내지르는 표사를 슬쩍 쳐다보더니만 자신의 안모도에 손을 걸고는 여덟 기수를 노려보았다. 모든 이들이 서로를 응시하며 입을 닫았다.

수레 앞에서 진형을 잡고 있는 표사들도 어느 새 칼을 뽑아 들고 말을 탄 여덟 불청객을 노려보고 있었다. 말의 숨소리를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들리지 않았다.

누군가 조금이라도 다른 소리를 낸다면 바로 칼날이 앞으로 튀어나갈 기세였다. 그때였다. 차분하니 쉰 목소리가 수레의 앞에서 울려 퍼졌다.

“내가 너희들이 원하는 당가 노인이 맞는 것 같구나. 내 목을 원하는가?”

당태세가 목괴를 잡고 천천히 허리를 펴자 궁수의 시위가 천천히 당태세를 향하였다. 예장청 임필무의 날카로운 눈초리가 당태세를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그런 것 같군. 앞으로 나오라. 늙은이. 우리와 함께 이곳을 떠나야겠다.”

당태세가 예장청의 눈동자를 보더니 슬쩍 입술 새로 흰 이를 드러내었다. 노인은 목괴를 잡고는 한 발짝 앞으로 나서며 예장청과의 거리를 재고 있었다.

그 순간, 수레바퀴 뒤에서 다급하게 외치는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노사! 가지 마셔요! 따라가지 마셔요! 여기 계세요!”

그와 함께 상인들도 뒤에서 당태세를 보며 고함을 질러댔다.

“어딜 가시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거요! 협객 여러분! 저 노인은 우리를 녹림도로부터 구해 준 분이오! 죄가 있는 분이 아니라오!”

당태세는 슬쩍 이마에 주름을 잡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마면걸 육해주의 입이 열리더니 짐승이 으르렁대는 듯한 가래끓는 목소리로 예장청 임필무를 바라보며 말했다.

“불가하오.”

“뭐?”

“표행의 표두로서 말하는데, 나는 내 표물과 승객과 깃발을 다른 이에게 넘길 수 없소이다.”

“뭐가 어째?”

“정 이 노인의 신변을 인도받고 싶으면 서안에 가서 말을 나누시오. 그 전까지는 내 소관이요.”

“허?”

예장청 임필무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육해주를 보며 실소를 짓더니만 천천히 안장에 매달려 있는 묘도를 향해 팔을 뻗었다.

시위에 화살을 먹이고 있는 궁수의 활이 당태세에게서 천천히 육해주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당태세는 목괴를 잡은 손을 그대로 둔 채 오른손을 슬쩍 들어 머리를 쓰다듬었다. 노인의 하얀 변발 끝에 달아놓은 백사은침 하나가 당태세의 엄지과 검지 사이에 잡혔다.

임필무가 육해주를 보며 가소롭다는 듯 웃음을 지어 보였다.

“육표두라 하였느냐? 너는 사형문의 일원이 어찌 우리 일에 간섭하고 딴죽을 거느냐?”

“표사는 표행의 물건과 사람을 책임지오. 이 사람은 내 손님이니 내 관할이오. 손님의 의사와는 관계없는 내 임무란 말이오.”

임필무의 눈이 기묘하게 번득이더니 뭔가 깨달은 것이 있다는 듯 고개를 짧게 끄덕였다.

“그러고보니 네 놈이 녹림에서 건너왔다는 그 고집불통 표두로구나.”

“그렇소이다.”

“녹림의 도리와 표행의 도리가 엄연히 다르다. 네놈은 아직도 네가 두령이라 생각하느냐. 지금 내가 말하는 것은 사형표국 총파표두의 명이나 진배없다. 네가 그를 거역하느냐?”

“내가 따르는 것은 총파표두의 명이 아니라 표사의 규례다. 나는 녹림도가 아니라 표사의 도리를 따른다. 알지 못하면 가만히 있으라.”

“뭐가 어째?”

임필무의 손이 묘도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 냉랭한 목소리가 육해주의 반대쪽에서 흘러나왔다.

“칼을 놓아라.”

순간 임필무는 자기도 모르게 묘도의 손잡이를 다시 놓았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무덤덤하니 아무런 감정이 실려 있지 않았지만 목소리에 실린 내공이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것을 반증하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슬쩍 수레바퀴에 등을 기댄 채 허리춤의 안모도에 손을 올려놓고 있는 날카로운 콧수염의 사내였는데, 사내의 눈에서는 일체의 희로애락을 느낄 수가 없었다.

“표국의 표행을 강제로 멈추고 표사를 겁박하는 것은 범죄다.”

“네놈은 또 누구냐?”

“위법자는 치죄한다. 벌은 칼로 받을 것이다.”

“……미친 놈인가?”

“미친 건 네놈이지. 그 숫자로 표사들을 들이치다니.”

그제야 임필무는 지금 자신이 맡은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 자신이 데려가기로 한 노인은 절름발이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볼품없는 형상이었지만 기가 꽤나 드세보였고, 일고여덟 명쯤 모여 있는 표사들 역시 순순히 노인을 넘겨줄 것 같지 않았다.

더군다나, 수레바퀴에 기대고 있는 사내는 의심할 바 없는 고수였다. 예장청 임필무 자신도 승패를 측정할 수 없을 것 같은 무위가 느껴졌다.

잘 되면 신승(辛勝)이고 못하면 목숨을 날리는 낭패였다.

임필무의 눈동자가 좌우로 급하게 움직였다. 당태세의 눈과 종리세리, 육해주의 눈동자가 말 위의 사내와 번갈아 맞부딪혔다. 한참동안 말이 없던 임필무가 입맛을 다시더니 슬쩍 고삐를 잡아채었다.

“너는 오늘 하루를 벌었지만 이 표행은 서안까지 곱게 가지 못할 것이다. 육표두.”

임필무가 고삐를 잡아채자 사내의 말이 천천히 뒤로 움직였다. 임필무의 뒤에 있던 궁수가 시위를 천천히 내리고는 말의 고삐를 잡았다.

그를 신호로 언덕을 둘러쌌던 여덟 필의 말이 고개를 돌리고 다시 아래쪽으로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 서안까지는 멀었다. 늙은이. 오늘 밤은 푹 쉬시게.”

말을 남긴 임필무가 박차를 가하자 흑마는 울음을 터뜨리며 언덕 아래로 질풍처럼 달려 내려갔다.

여덟 필의 말은 올라왔던 것처럼 지축을 흔들며 요란하게 언덕 아래로 내달으며 표사들과 당태세의 시야에서 사라지는데, 시나브로 그들이 사라진 자리 위에는 어느새 검은 하늘이 드리워지고 수많은 별들이 찬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육해주는 그제야 한숨을 길게 쉬고 손을 들어 이마 위의 땀을 닦았다. 표사들이 육해주의 주변으로 모여들더니만 뭔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그러자 육해주는 손을 번쩍 들더니 눈을 부릅뜨고 주위의 표사들에게 힘 있는 목소리로 스스로 다짐하듯 소리쳤다.

“정당한 보수에 정당한 대가만 받는 거다! 더러운 일에 한 번이라도 발을 들여놓으면 그 순간부터 목줄 걸린 개가 되는 거야!”

“존명!”

“우리는 서안까지 그대로 간다! 다른 일은 일절 생각하지 말고!”

“존명!”

당태세는 천천히 다시 변발을 매만지고는 슬쩍 종리세리를 쳐다보았다. 종리세리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당태세를 외면하고는 천천히 반대쪽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그 모습을 보고 어이없다는 듯 입맛을 다시고는 육표두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육해주는 걸어오는 당태세를 바라보더니 팔짱을 끼고 투덜대듯 입을 내밀고 한마디를 던졌다.

“참나, 따라가실 작정이었소?”

“그게 현명한 방법 아니었겠소?”

“나는 똑똑하지 못해서 그런 방법은 모르오.”

당태세는 육해주에게 슬쩍 묵례를 하고 다시 수레를 향해 다가갔다.

수레 안쪽에서는 아무 말 없이 두 손으로 바퀴를 꽉 쥐고 있는 아룡의 얼굴과 함께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얼굴이 불쑥 나타나 노인을 보며 해쓱한 얼굴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상인들도 그를 보며 얼굴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잘 되었구먼! 그냥 큰소리 한 방에 물러나는 것을 보니 심약한 놈들이었소!”

“예전에 죽은 녹림도의 잔당인가?”

“숙부님. 괜찮으신 겁니까? 다른 적도들의 세력일까요?”

사람들의 물음에 당태세는 히죽 미소를 지으며 별 일 아니라는 표정으로 손사래를 치며 절뚝절뚝 수레의 안쪽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위협이 없어지자 이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서 하루를 마감하는 자리를 만드는 중이었다. 하지만 당태세는 입에 미소를 만들면서도 번뜩이는 눈의 섬광까지 감추지는 못하고 있었다.

‘저들이 일파(一波)였다면 이파와 삼파도 있겠지. 게다가 아무런 전력의 손실도 없었고.’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끄덕이다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다시 올 것이다. 세를 불려서 조만간 다시 올 것이야.”

당태세를 시중들기 위해 옆에 앉아있던 아룡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핏기가 빠져나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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