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 서안으로 (5)
사방으로 우거진 산림 사이로 뚫린 작은 길은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면 마치 녹색 천 위에 드리워진 누런 실처럼 보였다.
수레 두 대가 마주보고 간신히 통과할 수 있는 것 같은 길을 타고 수레 다섯 대와 표사들은 수레의 간격을 맞춰가며 천천히 길을 타고 서쪽으로 향하였다.
조금만 걸어도 등 뒤에서는 땀이 흘러내렸다. 우거진 수풀은 햇살을 가려주는 대신 찌뿌둥한 습기를 사방에 뿌려댔는데 그나마 햇살은 마차의 포장으로 가릴 수 있다지만 사방의 찐득한 공기는 어떻게 할 방도가 없었다.
아이는 어미의 품 안에서 답답하다는 듯 계속 칭얼거렸고 아직 젊은 어미는 아이의 머리를 다독이면서 조용한 목소리로 아이를 달랬다.
“아가 조금만 참으렴. 할아버지 집에 가까이 가면 더운 게 없어질 거야.”
아이만 더위를 참을 수 없는 것이 아니었다. 마차 안은 찜통이나 다를 것이 없었고, 늙은 상인들이나 젊은 아룡이나 연신 수건으로 목 뒤를 훔치면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것은 매일반이었다.
“정말 서안에 도착하면 물을 한 통 받아놓고 하루 종일 그 안에 들어가 있고 싶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소항의 더위는 어린아이 투정이나 다름없네요.”
아룡이 넌더리난다는 듯 입을 벌리고 투덜대자 그 뒤에 앉아있던 점잖은 상인 하나가 웃으면서 말을 받았다.
“조금만 참으시게 공자! 이제 저 언덕만 넘어가면 수풀이 줄어들고 조금씩 황야가 나온다오. 그곳은 햇살이 강하지만 그늘에만 들어있으면 이곳보다는 낫지. 그때부터 서안에 가까워진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오.”
아룡이 눈을 들고 마차 앞을 쳐다보았다. 사방이 망망대해 같은 수풀에 쌓여있는데 상인이 말한 언덕이라는 것이 대체 뭔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룡이 사방을 훑어보는 것을 지켜보던 상인이 손가락을 들어 아룡의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저기 저 언덕 보이지 않는가. 저기 말이오.”
“아니, 저 희미한 산 말입니까? 저기까지 언제 간단 말입니까요?”
“내일이나 모레, 글피정도면 가겠지.”
“세상에.”
아룡이 어이없다는 듯 마차 뒤에 몸을 눕히고 수건으로 목을 훔치는데, 구석에 앉아있던 여인은 코를 타고 뚝뚝 떨어지는 땀을 보다가 상인에게 말했다.
“그나저나 언제쯤 쉴 수 있을까요? 마차 안에서 이렇게 앉아있는 것이 더 진이 빠지네요. 잠깐이라도 내려서 아이 밥이라도 먹였으면 싶은데 말이죠.”
“이곳은 아니된다오.”
“네?”
상인의 표정이 굳어지며 슬쩍 주위를 살피자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사방을 둘러보았다. 상인은 아낙네에게 행여 누가 듣기라도 한다는 듯 목소리를 낮춰 말하였다.
“이곳부터 저 산 너머까지의 길이 사실 좀 위험하다오. 여기는 녹림도(綠林徒)가 횡행하는 곳이라 어지간하면 빨리 움직이는 것이 낫단 말이지.”
“어머나.”
여인이 눈이 둥그레지며 아이를 품 안으로 끌어들이는데, 그를 보던 다른 늙수그레한 상인이 너털웃음을 지으며 괜찮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걱정마오. 해가 좀 떨어질 때쯤 되면 공터가 하나 나올텐데 거기서 잠깐 쉴 것이오. 그 자리가 물이 나오는 곳이라 말들이 쉴 수 있거든.”
이 길을 수십 번 다녔다는 늙은 상인은 자기 손금을 보듯 이곳 지리에 정통한 듯싶었다. 아니나 다를까, 늙은 상인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부표두 육가의 험상궂은 얼굴이 불쑥 마차 안으로 들어오더니만 사람들을 보며 한마디를 건넸다.
“조금 뒤에 잠시 마차를 세울 거요. 잠시 나와서 쉰 다음에 다시 길을 떠나기로 합시다.”
“여기서 오늘 저녁을 묵는 것이오?”
아룡의 말에 육가는 험상궃은 표정을 더욱 무섭게 찌푸리더니만 짧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오래 살고 싶으면 그런 짓은 생각도 마시구려. 오늘은 밤을 새서라도 고개까지 갈 것이니.”
***
다섯 대의 마차는 길을 벗어난 공지에서 멈춰 섰다.
말에 먹을 물과 꼴을 준비하는 동안 가지런히 서 있는 마차들의 옆으로 표사들이 나와 수레에 태운 화물과 승객을 보호하였다.
사람들은 잠시동안 수레 바깥에 나와 조금이라도 불어대는 바람에 몸을 맡기고 더위를 식히고 있었지만 그들을 바라보는 표사들의 눈초리에는 경계심이 가득하였다.
육표두가 말한 것처럼 이 근방에 녹림도가 많다는 것은 사실인 듯 보였다. 당태세 역시 목괴를 짚고 나와 사방을 훑어보았다.
빽빽하게 우거진 초록의 수풀은 길과 숲의 경계를 허물어뜨리고 있었다. 주위는 쥐 죽은 듯 고요하였다. 오직 말들의 투레질 소리와 상인들과 아이의 울음소리만이 이곳이 이승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다.
“빨리 먹이고 가자. 한시가 급하다.”
주위를 살피던 육표두가 표사들을 채근하는 것이 당태세의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험상궂은 표정으로 사방을 보면서 연신 손바닥에 묻은 땀을 바지춤에 닦고 있었다. 사내는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그와는 반대로 수레의 끝에서 사방을 보고 있던 표두 이팔문은 비교전 평온한 모습이었지만 가끔 사람들을 바라볼 때는 그 역시 뭔가 조바심을 내고 있는 듯 보였다. 부표두 육가의 혼잣말이 당태세의 뒤에 얹혔다.
“……왜 여기 멈춘거지.”
당태세가 육가의 말을 듣고 슬쩍 눈살을 찌푸리는데, 그 순간 뒤에서 사내의 낮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름 아닌 천호 종리세리였다.
“짐승 소리가 들리지 않소.”
“뭐라고?”
“길 주위가 모두 조용하지 않소.”
순간 당태세는 주변의 길에서 자욱하게 안개처럼 살기가 퍼지는 것을 직감하였다.
종리세리 역시 당태세와 눈이 마주치더니 천천히 몸을 뒤로 돌려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당태세는 목괴를 짚고 허리를 폈다.
그와 함께 건너편 길 바깥의 수풀이 사정없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목괴를 잡고는 주변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수풀은 한 곳이 흔들리는 것이 아니었다.
사방의 수풀에서 부스럭 소리가 나기 시작하더니만 급기야는 사람의 기척이 동시에 감지되었다. 수풀이 흔들리는 것을 본 사람은 비단 당태세와 종리세리 뿐이 아니었다.
표사들이 낮은 소리로 서로를 부르고 마차 안에서 병기를 꺼내들기 시작하자 승객들은 모두 제자리에 얼어붙은 채 표사들의 굳은 얼굴과 수풀을 번갈아 살피기 시작했다.
“모두 걱정 마시고 어서 마차 안으로 들어가시오! 빨리!”
어느새 이팔문이 앞으로 나서며 자신의 허리춤에 있는 보도를 뽑아 들었다.
누가 뭐라고 하기고도 전에 승객들은 모두 마차 안으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뛰어드는데, 오직 마차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남아 있는 이는 당태세 뿐이었다.
그 순간, 수풀이 갈라지듯 나뭇가지가 열리며 괴이한 복식을 한 사내들이 새하얗게 갈려있는 칼을 들고 튀어나왔다.
머리는 변발을 하지 않는 봉두난발에 윗도리는 조끼를 하나 걸치거나 아예 안 입은 사람이 태반인데, 허리아래에는 짐승의 가죽을 걸치고 바지 위에 토끼와 승냥이의 가죽을 덧댄 하의를 입고 가죽신을 신은 자들이었다.
한 눈으로 봐도 녹림도라는 것을 알 수 있는 복장이었다.
“젠장.”
부표두 육가가 욕을 내뱉으며 손을 들어 그들의 두목으로 보이는 덩치 좋은 사내를 향해 말을 걸었다.
“산중(山中)처사(處士)들이여. 우리는 사형표국의 형제들이다. 가지고 있는 무기를 내려놓고 거래로 해결을 보세.”
“거래라, 좋은 이야기지.”
얼굴에 큼지막한 흉터가 있는 대도를 든 사내가 육가의 말에 웃으며 화답하였다. 육가는 그런 사내의 얼굴을 보더니 다시 입맛을 다시고 말을 걸었다.
“그대들은 녹림의 어느 방 소속인가?”
“녹아방(綠牙邦)이라 한다. 우리의 이름을 아느냐, 표사?”
육가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신의 소개를 계속 이어갔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 오늘부터 교분을 쌓으면 되는 것이 길의 도리다. 우리 사형표국은 서안과 남경, 북경과 성도를 잇는 드넓은 곳을 다니는 표국이다. 형제도 많고 재물도 많지. 우리와 교분을 터놓고 우애를 다지는 것이 녹아방에게도 나쁠 것이 없으리라.”
부표두 육가는 인상을 있는 대로 쓰면서도 고래의 규례를 따라 녹림도와 예를 나누는 중이었다. 원래 표행 중에 녹림도를 만나는 경우는 대부분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표국에서 길을 지키는 녹림도에게 성의를 표시하고 길을 통과하는 것이 관례였다.
녹림도는 굳이 칼을 잘 다루는 표사들과 싸웠다가 손해를 볼 이유가 없었고 표국 입장에서도 성가시지만 녹림도에게 약간의 예물을 쥐어주고 물건을 안전하게 운송하는 것이 훨씬 이득이었다.
“성의라, 첫 만남에 얼마나 성의를 표하겠다는 것인가?”
“은 다섯 냥에 면포 두 필이면 어떠한가?”
육가의 말은 부드럽게 이어졌다. 분명 출행 전에 맞춰둔 녹림도에 대한 비용일 터였다. 하지만 육가의 말을 듣던 녹아방주는 슬쩍 코웃음을 치더니 수레를 보며 누런 이를 드러내었다.
“저 수레 하나에 실린 면포만 하더라도 그 열배는 될 터인데 고작 두필 먹고 떨어지라는 것이냐?”
부표두 육가의 험상궂은 얼굴이 더 일그러지며 이가 드러났다.
“대체 그렇다면 얼마를 더 원하는 것이냐?”
그때였다. 지금까지 아무 말 없이 팔짱을 끼고 부표두의 흥정을 지켜보던 표두 이팔문이 갑자기 자신의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더니 주변의 표사들을 향해 우렁찬 목소리로 영을 내렸다.
“모두 무기를 들어라! 협상은 결렬이다!”
“뭐요?”
순간 육가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이팔문을 쳐다보는데, 이팔문은 육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숨 돌릴 틈도 없이 다음 명령을 표사들에게 내렸다.
“녹림도를 공격하라!”
“뭐 하는 짓이오?”
육가의 외침에도 불구하고 이팔문은 칼을 부여잡고 앞에 있는 녹림도를 향해 온 몸을 던졌다.
총표두가 앞장서 나가며 칼을 휘두르자 뒤에 서 있던 표사들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표사들이 병기를 들고 움직이자 녹림도들도 기다렸다는 듯이 칼을 휘두르며 사방에서 뛰쳐나왔다.
“뭐냐! 뭐가 잘못된 거냐?”
육가는 욕을 내뱉으며 자신의 박도를 움켜쥐고는 이를 부드득 갈았다.
수풀에서 튀어나온 녹림도들이 표사들과 뒤엉키며 날붙이와 날붙이가 맞붙었다. 사방에서 칼과 칼이 비비고 튕기며 귀에 거슬리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당태세의 앞으로도 벌거숭이에 가까운 사내 하나가 시뻘겋게 녹이 슬어있는 박도를 치켜들고 돌진해 들어왔다.
당태세가 슬쩍 눈살을 찌푸리며 가볍게 목괴를 땅에서 튕겨 올렸다.
목개가 번개처럼 사내의 턱을 올려치자 벌거숭이 산적은 눈이 그대로 뒤집어지며 녹슨 칼을 땅에 떨구고 그 옆으로 고꾸라졌다.
그때였다. 위둔보 이팔문이 슬쩍 당태세를 노려보더니 칼을 들고 당태세를 가리켰다.
그러자 커다란 녹아방주와 그 옆에 서 있던 녹림도 둘이 병기를 움켜쥐고 급작스레 방향을 바꿔 당태세를 향해 달려왔다.
당태세는 그 모습을 보더니 슬쩍 머리를 매만지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 이거냐. 고작 생각해 낸 것이 녹림도의 증원군이라?”
당태세는 목괴를 짚고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대도를 팔랑개비처럼 좌우로 휘두르는 녹아방주와 그 옆에서 작은 단창과 도를 들고 튀어드는 두 명의 녹림도는 무공에 어느 정도 조예가 있는 이들이 틀림없었다.
자신들이 표적삼은 노인이 움츠려 들지 않고 오히려 다가오는 모습을 보자 세 명의 녹림도는 재빨리 간격을 벌리고는 당태세를 가운데 넣고 진을 짜 협격하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노련한 움직임이었다.
오른쪽에 서있던 녹림도가 재빠르게 단창을 뻗어 당태세의 옆구리를 찌르자 왼쪽의 칼잡이가 당태세의 목을 향해 칼을 뿌렸다.
당태세는 슬쩍 일 보 뒤로 후퇴하며 목괴로 단창을 밀어버리고 칼날의 궤적을 가볍게 피하는데, 그 틈을 타고 녹아방주가 커다란 칼을 도끼처럼 위에서 아래로 휘두르며 당태세의 몸을 두 쪽 낼 기세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당태세의 몸은 이미 그 자리에 붙어있지 않았다.
“느려 터졌구먼.”
어느새 당태세는 단창을 쓰는 사내의 앞으로 몸을 바싹 붙이고는 목괴를 위에서 아래로 휘둘러 단창 든 사내의 머리를 공격했다.
재빠르게 창수가 머리 위로 창을 받쳐 드는 순간, 목괴는 허공에서 방향을 바꿔 그대로 창수의 가슴을 찍어버리고 손잡이로 다리를 낚아채니 순식간에 창든 장정이 허공에 공중제비를 틀면서 거꾸로 땅에 처박혔다.
순간 녹아방주와 도수가 움찔하며 당태세에게서 한 발 물러섰다. 자신들의 생각외로 고강한 적수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었다.
그때였다.
“조심하시오. 문주!”
종리세리의 새된 소리와 함께 당태세의 목괴가 반사적으로 앞에서 날아오는 물건을 옆으로 후려쳤다.
날카로운 충격이 목괴를 타고 당태세의 손에 지릿하게 전해지는데, 어느 틈엔가 쓰러진 창수의 위치에 다른 적이 나타나 당태세를 노리고 있었다.
그는 다름 아닌 위둔보 이팔문이었다.
당태세가 표두의 얼굴을 확인하더니 얼굴에 천천히 노기를 띠기 시작했다.
“평안하게 가자고 내 분명히 말했을 텐데?”
“미안하게 되었소. 당태세. 존성대명이 당태세가 맞소이까?”
당태세가 이팔문을 노려보더니 이를 드러내었다.
“오냐, 내 이름을 알았으니 시왕전에 가야겠구나.”
당태세의 눈이 번뜩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