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 서안으로 (2)
원래 남경은 명의 걸물 영락제가 북경으로 수도를 천도한 뒤에도 홍무제 주원장의 유지를 잡아 풍패지향(豊沛之鄕)의 위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그후, 명이 쇠락의 길을 걷고 이자성과 청나라가 번갈아 들이치며 명의 명줄이 끊어졌을 때에도 남명(南明)의 강역으로 최후의 자존심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 마지막 화양연화는 채 1년이 지나지도 않아 청의 손에 끝장나고 말았다.
남경은 왕조의 수도가 아닌 그저 넓은 남쪽의 부성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명이 망하고 십칠 년이 지난 지금은 예전의 전란을 딛고 일어나 사방의 물산을 꾸리며 강남을 아우르는 대도의 위상을 새로이 정립하고 있었으니, 실로 겉으로 봐서는 평안하기 그지없는 곳이었다.
“실로 많은 것이 바뀌었으면서도 바뀐 것은 거의 없구나. 신기하고 애통하구나.”
아룡과 당태세는 넓은 성시의 골목을 가로지르며 쌓여있는 물산과 사람들의 행렬을 가로질러 표국들이 몰려 있다는 중문(中門)을 향해 움직였다.
표국이라는 직종이 다시 융성하기 시작한 것은 채 오륙년이 안 된다고 아룡에게 설명 들은 대로 중문앞에 표국의 깃발을 달고 있는 이들은 서넛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의 깃발이 걸려있는 상가 건물은 넓적하니 땅에 붙어 작은 장원처럼 보일 지경으로 크고 넓었다.
“말과 수레가 같이 움직일 것이니 건물이 작을 수야 없겠지.”
당태세의 혼잣말에 아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말과 수레뿐이 아니라 물건을 보관할 창고와 화물과 승객을 경호할 표사들도 준비해야 하니 이것저것 생각하면 여간 커다란 사업이 아니었다. 게다가 더 중요하고 미묘한 부분의 문제도 있었다.
“이들은 한인(漢人)인데도 무기를 지닐 수 있게 하니 참 미묘하군요.”
“원거리 표행에 녹림도를 막아야 하니 당연한 것이겠지. 하지만 그러려면 관(官)의 비호는 당연히 있어야 할 것이다.”
“뇌물 말씀입니까?”
아룡이 슬쩍 표국의 깃발들을 보며 한족들은 어쩔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지만 이제 그런 말을 차마 앞에서 내뱉지는 않았다. 이곳은 표국의 영역이었고 이 사내들은 그런 말을 듣고 욕으로 끝내지는 않을 성 싶었다.
당태세는 이들이 남경이나 서안뿐 아니라 다른 성에도 자신들의 지부를 가지고 있음을 기억해 내었고, 여기저기 팔기의 고관들과 녹영에게 꽤 많은 접대를 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서안까지 가는 표국은 사형표국밖에 없다고 하였지. 무창과 장사에도 분명 비슷하게 있었겠지. 소항에도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사형문의 위세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고강할 지도 모르겠구나.’
용담호혈(龍潭虎穴).
자칫하면 지금 당태세가 들어가는 곳은 사지(死地)와 다를 바 없을지도 몰랐다. 사형문주는 음험하고 잔악하긴 해도 바보는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가장 세사(世事)를 가감없이 보기에 음험하고 잔악한 사내일지도 모르는 위인이었다.
사형문주 무정금(無情襟) 유독중(柳篤仲).
그는 생각이 당대의 문주들과 약간 다른 사람이었다. 그의 별호 무정금(無情襟)은 그의 성격을 단적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는 냉정한 사내였고, 기본적으로 자신이 정한 가치 외의 모든 일에 호불호를 두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의 첫 번째 가치는 정의도 아니고 협기도 아니었다. 하다못해 무공도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자신의 첫 번째 지켜야 할 가치로 삼는 것은 자신의 문파, 사형문의 존속과 흥왕이었다.
그는 사형문을 엄정하게 규율하였고, 제자들을 훌륭하게 육성하는데 주력하였다.
하지만 제자들의 협행(俠行)을 하는 것을 두둔하지 아니했고, 악명을 날리는 것을 징계하지 아니하였다. 문파의 이름은 어찌되었던 유명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가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휘하의 사형문을 이끌고 보국구대문파맹에 들어왔을 때에도 당태세는 그의 저의를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당태세가 보기에 유독중은 망해가는 명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 사람이 아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기에 당태세는 따로 사형문주 유독중을 불러 그에게 저의가 무엇이냐고 성벽 위에서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리고 당태세는 그 날 무정금 유독중이 한 말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지금 우리 문파가 혈혈단신 성을 나가봤자 이자성의 대군에게 척살 당할 것이네. 그럴 바엔 성을 방패삼아 농성하는 것이 지금은 낫네. 그렇다고 같이 동귀어진 할 생각은 없네. 때를 봐서 판단을 내리고 문도들을 살리는 것이 문주인 내 책임이지.”
“죽을 생각도 없으면서 농성군을 하겠다는 이야기인가?”
당태세의 말에 유독중은 눈썹하나 꿈틀대지 않고 대꾸했다.
“자네의 죽을 길과 나의 사는 길은 결국 같은 것이 될 것이네.”
그 당시에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당태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구대문파 중 여덟 문파가 배신하고 성벽이 무너지고 이자성의 군사가 황도로 밀어닥치며 무너지는 성벽 아래로 칼을 맞고 굴러 떨어져 십칠 년간 생사의 경계를 헤매고 돌아온 지금에서야 당태세는 유독중의 말이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문파를 살리기 위해 황제와 나라를 가볍게 팔아넘길 수 있는 사내였고, 배반자라는 악명 따위는 귓가에 흘러가는 풍설로 치부할 인간이었다.
팔대문파를 한꺼번에 등 돌리게 한 것은 분명 그의 농간이었을 것이었다. 그 정도 강단과 배짱이 있는 사내였다. 봉문주 오자평보다 훨씬 능력이 있는 사내였다.
‘십칠 년 동안 사형문을 서안으로 끌고 간 뒤 아이들을 조련했겠지. 내가 맞서 싸운 아이들은 대부분 전란을 제대로 겪지도 않은 젊은 신진 후계들이었지.’
당태세는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인상을 있는 대로 쓰고 있었다.
‘십대제자들도 아직 남아있고, 세대교체를 한 이들도 있다고 광탄사가 말했지. 실로 조직을 꾸려나가는 데 있어서는 손무나 오자 같은 이와 비견할 수 있는 자가 유독중이지.’
당태세는 거기까지 생각을 정리하자 절로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룡이 손을 흔들어 보이며 사형표국의 책임자 같은 이와 이야기를 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사형표국의 사내들은 하나같이 건장해 보였고, 화물을 나르고 수레를 움직이는데 절도가 있었으며 고객을 대하는 모습에서 어색함이라곤 느껴지지 않았다.
뼛속까지 장사꾼이면서도 무인이라는 태가 드러나는 이들이었다.
“그 심성이 사람이 아니라 야수인 것이 문제지. 뛰어난 들짐승.”
“네? 숙부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 아무것도 아니다. 그저 혼잣말이었다.”
아룡이 슬쩍 주변을 살펴보며 사형표국의 사내들을 날카로운 눈으로 훑어보았다. 당태세는 아차 싶었다. 지금 아룡에게 많은 정보를 주거나 이 아이를 격동시켜 의심을 살 이유가 없었다.
더군다나 아룡은 사형문이 누구인지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는 상황 아닌가. 괜스레 수풀을 건드려 독 오른 뱀을 튀어나오게 할 이유는 없었다.
“무두리, 괜히 네 기백을 여기서 노출시키지 말아라. 표두에게 서안까지 가는 것은 말을 해 보았느냐?
그제야 아룡은 아차 싶었던지 표정을 관리하며 장황하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아이고, 내 정신이야. 말씀드리는 것을 잊었습니다. 표두가 말하기를 우리가 지금 딱 맞춰서 왔다는군요. 한두 사람만 더 오면 내일 오전이나 오늘 저녁에 출발할 것이랍니다. 우리는 그냥 서안까지 몸만 갈 거라고 해서 화물비는 따로 안 받기로 했습니다만 가는 길의 숙식비와 쟁자수와 표두 두 사람의 숙식비를 합친 금액은 따로 계산을 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지. 알았다.”
“그래도 서안까지 가는 장사꾼들도 꽤 있어서 이번 상단은 꽤 규모가 된다고 합니다. 마차 네 대에 열 명 정도의 손님인데 표국의 짐까지 합치면 다섯 대 정도에 쟁자수가 합쳐지면 근 서른에서 마흔은 될 거랍니다.”
당태세가 생각해도 마차 다섯 대면 꽤 규모가 되는 집단이었다. 명말에는 스무 대가 넘는 수레를 오십여 명이 넘는 표사들이 수행했다는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었지만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당태세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 정도 규모가 되는 집단이라면 작은 녹림도들은 덤비지도 못할 터였다. 그리고 사실, 당태세가 걱정하는 것은 외부의 녹림도가 아니었다.
“아, 숙부님, 저 사람이 이번 여행의 책임자인 표두입니다.”
아룡의 말이 끝나자마자 맨 앞의 수레쪽에서 건장한 사내 하나가 터덜대며 이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였다. 사내는 외형부터가 천생 무인이었다.
비록 변발을 쳤지만 시커먼 구레나룻에 별처럼 반짝이는 눈과 튼튼한 턱을 지닌 사내는 실로 예전 강호에서 만났음 직한 협객의 상이었다.
그는 지팡이를 짚고 있는 당태세와 아룡을 보더니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인사를 올렸다.
“이번 표행의 책임을 지고 있는 표두 이팔문이라고 합니다. 공자의 말로는 서안까지 가신다고요?”
“그렇소이다. 내 더 늙기 전에 서안을 꼭 보고 싶어서 말이오.”
당태세의 말에 이팔문이라 불린 사내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로 노대인의 풍류가 하늘에 닿습니다! 서안은 좋은 곳이지요. 천년고도의 풍취가 가득한 곳입니다! 그건 그렇고, 몸이 불편하신 듯 보이는데 표행을 감당하시겠습니까? 생각보다 고된 길일수도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비록 지금 몸은 이래도 소싯적에는 꽤나 강호유람을 했습니다.”
“알겠습니다! 마침 인원이 다 찼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오늘 저녁 성문이 닫히기 전에 출발을 할 것입니다. 다른 상인들과도 약조를 하였습니다. 그 때 출발해도 되겠지요?”
생각보다 빠른 출발이었지만 당태세는 오히려 남경에 오래 머무는 것보다는 하루라도 빨리 서안으로 떠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정금 유독중의 표국을 이용하여 움직이는 일이었다. 시일이 늦어질수록 자신에 대한 소문은 더 빨리 퍼질 것이었다. 그리고 지금 서안으로 떠난 황병아는 유독중보다는 못해도 나름대로 용의주도한 위인이었다.
“좋습니다! 오직 이표두만을 믿고 움직이겠소!”
“걱정마십시오. 이 위둔보(威鈍步) 이팔문이 성심을 다해 노사와 공자를 서안까지 무탈하게 모실 것이니 말입니다!”
이팔문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당태세는 쓴웃음을 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 사내 역시 둔(鈍)자 결을 쓰는 사형문의 제자였다.
참으로 해괴한 일이었다. 원수를 잡기 위해 원수가 마련한 수레를 타고 원수의 목전으로 가는 처지가 된 터였다.
‘저 표두가 나에 대해 어디까지 알고 있으며, 알고 있다면 어떤 일을 벌일 것인가?’
아직 어떤 것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당태세는 그저 만전에 만전을 기하는 일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나마 아룡도 아무것도 모르는 것이 아니라 희미하게나마 경계를 하고 있을 터이니 그나마 도움을 될 터였다.
당태세는 사형표국 안으로 들어가 자신들이 타기로 한 수레를 살펴보았다.
표국의 표사들과 쟁자수들은 하나같이 눈이 매서워보였다. 일신의 무공은 높지 않아 보였지만 언제든 칼을 허리춤에 뽑아 사람들에게 겨누는 일은 할 법한 이들이었다.
‘독 바른 칼날이나 마찬가지구나. 외적은 걱정하지 않겠지만 저 칼이 내게 언제 향할지 알 수 없으니.’
당태세가 이리저리 생각하며 수레 위로 아룡과 함께 올라가자 그 안에 이미 자리를 잡은 사람들이 슬쩍 인사를 하며 당태세와 아룡을 맞이해주었다.
마차 안에 있는 이들은 대부분 서안으로 물건을 팔거나 떼러 가는 상인들이었고, 작은 아이들과 처자도 타고 있었다. 생각 외로 거창한 행렬이었다.
“자, 이제 모두 인원 점고가 끝난 것인가? 출발하세!”
위둔보 이팔문이 뒤를 보며 소리를 지르자 표사 하나가 뒤에서 큰소리로 답하였다.
“아직 한 명이 안 왔습니다! 말을 끌고 온다는데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말? 표행에 자기 말을 끌고 온다고? 말이 먹을 꼴은 우리가 댈 수 없다고 말했느냐?”
“네! 이미 이야기 했는데도 한사코…아, 저기 오고 있습니다!”
표사의 말에 당태세와 아룡은 자기도 모르게 수레의 뒤쪽을 쳐다보았다. 누런 황포를 입은 사내 하나가 잿빛 말을 몰고 터덜터덜 수레 쪽으로 오고 있었다.
사내는 후줄근하지만 새로 사 입은 듯한 황포에 검은 바지를 입고 뒤쪽에 칼이라도 숨긴 듯한 긴 보따리를 말 엉덩이에 매달고 있었다.
황포사내는 산뜻한 옷차림에 어울리지 않게 날카롭게 정리된 콧수염과 콧수염만큼이나 매서운 눈빛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표두를 보자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공손히 말하였다.
“서안까지 가기로 한 종리세리라하오. 말을 가져왔으니 수레에 따로 자리를 비울 필요는 없을 것이오.”
아무리 봐도 변복을 하고 사람을 잡으러 가는 포쾌 같은 인상이었다. 이팔문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사내를 보다가 입맛을 다시며 말했다.
“원로장도인데 그 말로 같이 갈 수 있겠습니까? 서안은 그리 만만한 길이 아니오.”
“걱정 마십시오. 북경도 가 봤으니까.”
위둔보 이팔문은 뭔가 켕긴다는 듯 황포사내의 얼굴과 봇짐과 복색과 말을 이리저리 한참을 살피더니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대고는 수레 옆으로 말을 붙이라는 시늉을 하였다.
종리세리가 고개를 숙이고 수레 뒤쪽으로 말을 몰고 가자 이팔문이 쟁자수와 표사들을 보며 큰 소리로 구령을 내렸다.
“모두 출발한다! 깃발을 들어라!”
이팔문의 명과 함께 수레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과 수레가 같이 움직이며 사형표국의 문을 나서 말머리를 북으로 돌렸다.
당태세는 슬쩍 주변을 살피는 척 고개를 빼고 사방을 살펴보았다. 쟁자수들과 표사들이 수레와 마필의 옆으로 붙어서 움직이며 사방을 살피면서 천천히 남경의 성문 밖으로 일사불란하게 수레를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수레의 맨 뒤쪽에 말을 타고 그들을 따르는 황포의 사내가 얼핏 당태세의 눈에 들어왔다. 말 위의 종리세리는 수레에 타고 있는 당태세를 쳐다보고 있었다.
“정말 요령이라고는 없는 인물이로구먼.”
탄식인지 웃음인지 모를 것이 당태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