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54화 (154/226)

154.  절강 항주 동성문

널찍한 마당이 놓여있는 사합원 모양의 가옥은 평범한 부잣집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그나마 마당 가운데 놓여 있는 두 개의 연꽃무늬 석등만이 그나마 이 집을 도량이라고 주장할 만한 근거였다.

당태세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조용히 곧장 걸어 들어가며 가장 큰 집의 정방을 향하였다.

위의 한 층을 더 덧대어 이층으로 되어 있는 정방은 누런 목재로 바닥을 깔고 정면에 제단을 만든 뒤 그 위에 부처님을 모셨는데, 금색으로 빛나는 부처님과 그 뒤의 탱화들이 자못 엄숙하고 양 옆으로 펼쳐진 향로와 집기들이 제법 경건한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곳에 한 명의 처사가 머리를 관으로 틀어 넘긴 채 회색의 간소한 옷을 입은 채 좌선하고 있었다.

그 넓은 등이나 좌선을 하는 뒷모습을 바라보면 젊은 시절의 무위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케 하였다.

당태세는 조용히 정방 안으로 들어와 문을 닫았다.

이미 벽을 타고 종리세리와 화영도 조호천의 날 부딪히는 소리가 쟁쟁대며 들려오는 중이었지만 좌선을 하는 회색 옷의 노인은 미동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당태세는 회색 노인의 뒤에 쭈구리고 앉아 목괴를 옆에 두고 고개를 들어 불상을 마주 보았다.

상 위에서 당태세를 내려보는 부처님의 얼굴에는 자비로움과 평온함이 가득한데, 도량 안으로 살심을 가지고 들어온 당태세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무슨 경우로 이리 왔느냐는 듯 말없이 꾸지람하는 듯싶었다.

부처님을 바라보던 당태세는 슬쩍 두 손을 합장하며 아무도 듣지 못하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제가 지은 죄와 제가 지을 죄를 알고 있으니 너무 나무라지 마십시오. 후에 달게 받겠습니다.”

말을 마친 당태세의 눈은 다시 예리한 빛을 머금고 회색 옷을 입은 사내를 노려보았다. 호흡을 가다듬은 당태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참선이 길기도 하구나. 아무리 열심히 면벽수련을 해도 도를 못 깨우치는 모양이로세.”

“시주께서는 누구시오?”

점잖고 굵은 목소리가 회색 옷의 사내에게서 흘러나오자 당태세의 입에 조소가 머물렀다.

실로 그 목소리에는 세상을 초탈하고 불사에 은거하는 처사의 여유로움과 초연함이 담겨 있었으니 모르는 이가 그 목소리를 들었다면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 했을 법하였다.

“동성문의 황칠이가 이제 기척을 못 읽느냐. 옛 별호를 불러줄까. 취금효(聚金梟) 황칠이.”

“시주께서는 뉘시기에 죄 많은 과거의 제 별호를 들추어내어 제게 그 날의 아픔을 다시 생각나게 하시는 것이오. 사바세계의 업보가 너무 크니 이 몸이 감당을 하지 못하오이다.”

회색 사내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당태세의 입이 일그러지더니 앙천대소가 터져 나왔다. 사내의 입술은 벌어져 굉소를 터트리고 있었지만 그 눈빛은 지금보다 더 자욱하게 살기를 퍼뜨리고 있었다.

“허? 허허! 흐핫핫핫핫! 죄 많은 과거라? 네가 지금 하는 이야기를 알고나 있느냐?”

“소생의 과거사는 소생도 알고 있소이다. 허나 이제 소생은 다른 사람이오.”

“뭐?”

당태세가 눈을 부릅뜨고 회색 도인의 등을 바라보았다.

천천히 회색 도인이 몸을 돌려 앉았다.

텁수룩한 잿빛수염은 가슴까지 내려와 있었고 검은색보다 흰색이 더 많이 섞인 머리와 수염은 가지런히 정리가 되어 있는데 혈색 좋아 보이는 얼굴과 총기가 가득한 눈은 아직 사내가 헛소리를 하면서 여생을 마무리하기에는 너무 정정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었다.

변발을 치지 않은 처사의 머리카락은 이미 자신의 생이 속세와 무관함을 나타내고 있었다.

당태세는 오매불망 잊지 못할 원수의 얼굴이 앞에 드러나자 저절로 이가 드러났다. 하지만 회색 도포의 노인은 당태세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다시 근엄한 표정을 짓고 말을 이었다.

“석가세존의 제자 앙굴마라(央掘摩羅)는 한때 사람을 아흔아홉명 죽이고 그 손가락으로 목걸이를 만든 흉한이었으니 석가세존의 가르침 하나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소. 소생 또한 젊은 시절 탐심을 이기지 못하여 많은 죄를 저질렀으나 이제는 참회하고 불법을 받았으니 그대가 알던 이와는 전혀 다른 사람이외다.”

“뭐라고? 달라져?”

“소생은 오직 불법을 지키며 여생을 보내기로 맹세하였소. 일체의 욕심을 벗어버리기로 작정하였소. 지금의 나는 그때의 나와 다르니 어찌 같은 죄로 지금도 고통을 받겠소이까. 모든 것이 대자대비한 부처님의 은덕일 뿐이지요.”

당태세는 어이가 없다는 듯 멍하니 황칠이를 보다가 다시 되물었다.

“네 죄가 지금은 사라졌다?”

“죄는 사라지지 않았으나 사람이 바뀐 것이지요.”

“네 죄로 이득을 본 네 피붙이가 그 덕에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그 죄를 죄로 여기지 않고 사람들을 쥐고 흔들며 죽이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데, 너는 그 죄에 책임이 없느냐?”

황칠이는 당태세의 말에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합장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은 그들의 죄이지 나하고는 관계없는 것이오. 나는 참회하였으니 그들과는 다른 길을 가는 것이라오.”

“참으로 편한 방편이구나. 석가세존께서 너를 보시면 뭐라 하실까?”

“열심으로 용맹정진한다 하시겠지요.”

“오냐, 그래서 앙굴마라는 나중에 어찌 되었느냐?”

“아미타불, 앙굴마라는 나중에 그에게 원한을 진 자들에게 돌에 맞아 죽었으나 누구도 원망을 하지 않았소이다. 그것이야말로 참된 부처님의 제자라 할 수 있겠지요.”

“그래?”

그 순간, 갑자기 당태세의 손이 목괴로 뻗으며 회색 장포의 머리를 향해 벼락같은 일격을 날렸다.

회색장포를 입은 사내의 머리가 목괴에 맞아 산산조각이 나기 직전, 회색도포의 노인은 재빨리 몸을 뒤로 굴리며 훌쩍 재주를 넘어 뒤로 일 장을 물러서는데, 그 얼굴에는 지금의 고요함과는 거리가 먼 당혹스러움이 가득 들어있었다.

“지금 뭐하시는 게요!”

“왜 너는 죽을 생각이 없느냐, 황칠이?”

황칠이의 혈색 좋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내가 말한 것은 부처님의 설법이다! 대체 백주에 사람을 해하려는 네놈은 누구란 말이냐!”

“네 과거의 죄를 청산하러 온 사람이다!”

“같잖은 소리! 네놈은 대체 누구냐! 화영도는 어떻게 이런 놈을 여기까지 들여보낸 거야!”

“과거를 다 잊은 놈에게 이야기를 풀어주랴? 십칠 년전, 황제를 모시고 일시에 죽기로 한 보국구대문파맹을 세치 혀로 팔아먹고 이자성에게 성을 내준 네놈이 내 얼굴을 잊느냐?”

“십, 십칠년 전?”

“나를 죽이고 이자성에게 목숨을 구걸하고 나중에는 청에게 목숨을 구걸했던 네놈들이 내 얼굴을 잊었다고?”

순간, 황칠이는 배에 칼이라도 맞은 듯 상체를 앞으로 숙이며 눈을 부릅뜨더니만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목괴를 든 노인을 쳐다보았다. 어느새 근엄하던 황칠이의 목에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네놈은 귀린갈 당태세?”

“과거가 떠올랐으니 죄를 다 잊은 것이 아니구나. 잘 되었도다. 극락이 아니라 지옥으로 돌아가자.”

당태세가 벌떡 일어서 목괴를 잡자 황칠이 역시 몸을 일으키고 당태세를 쳐다보더니만 부처님을 모신 상 뒤에서 불쑥 커다란 월도(月刀)를 뽑아들었다. 당태세가 그런 황칠이를 보더니 씩 미소를 지어보였다.

“부처님 뒤에서 칼을 뽑다니 실로 너 다운 짓이구나!”

“어떻게 여기까지 들어왔느냐!”

“황병아에게 물어보아라.”

황칠이의 눈이 둥그래지는 순간, 당태세의 목괴가 조용한 법당 안에 바람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그와 함께 황칠이의 대도가 땅에서 하늘로 올라오며 번개같이 내리치는 목괴를 받으며 하늘 높이 치솟았다.

비록 사람은 하류라도 무공은 초절하니, 동성문의 무위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는 한 수였다.

어느새 황칠이도 처사의 모습에서 무인의 모습으로 탈바꿈하였다. 진지하게 변한 사내의 몸과 눈에서 박력이 넘쳐흘렀다.

사내는 마치 월도를 구름을 몸에 두른 용처럼 허리와 어깨에 두르고 앞으로 달려들었다.

늑대처럼 달려드는 당태세를 향해 위와 좌우에서 번갈아 칼을 후려치고 베어대는데, 당태세는 긴 한 자루 목괴로 들어오는 월도를 막아내며 양 끝으로 번갈이 치고 후리며 걸어당겨 쉴 새없이 황칠이의 발을 물고 늘어졌다.

“네 이놈!”

황칠이가 이를 들어내며 몸을 허공으로 띄우더니 그대로 한 바퀴 몸을 돌려 월도를 공중에서 아래로 내리찍었다. 당태세가 몸을 슬쩍 피하자 월도는 그대로 나무바닥을 일격에 찍어 두 쪽을 만들며 그대로 땅바닥에 박혔다.

당태세가 몸을 돌이켜 착지한 황칠이를 그대로 찔러 들어가자 황칠이는 몸을 돌리지도 않은 채 월도를 나무판자 째로 찍어올려 당태세에게 휘둘렀다.

당태세가 목괴를 휘둘러 나무판자를 일격에 산산조각내자 황칠이의 월도가 그 파편을 뚫고 그대로 당태세의 목을 찔러 들어왔다.

당태세는 몸을 비틀고 왼발을 축으로 삼아 빙글 한 바퀴 회전하며 월도를 피하고, 목괴를 돌려 황칠이의 등을 세차게 후려쳤다. 짧은 신음과 함께 황칠이가 비틀대며 뒤로 물러섰다가 다시 당태세를 보며 자세를 잡았다.

“대결에서 비루한 짓을 하는 것은 여전하구나.”

“검결에서는 이기면 그만인 법이다. 당태세!”

“오냐, 오늘은 네가 지는 날이다. 황칠이.”

당태세는 목괴를 땅에 내려놓고 오른발을 뒤로 뺀 채 손을 들어 황칠이에게 들어오라는 식으로 까닥거렸다. 당태세의 매서운 눈동자는 서늘하게 빛나는데, 그의 굳게 다문 입술에는 이 지저분한 제석망(帝釋網)을 끊어버리겠다는 일념이 충천하였다.

“오너라. 비루한 개야.”

황칠이도 이를 악물더니 자신의 월도를 번득이며 당태세의 몸을 향해 자신의 신형을 날렸다.

회색의 몸둥어리가 그림자처럼 땅을 타고 낮게 미끄러지더니만 월도의 날이 낫처럼 휘어지며 당태세의 허리를 두 동강낼 기세로 달려들었다.

당태세의 목괴가 가볍게 월도를 튕기고 자세를 바꾸는데 황칠이 역시 보법을 바꾸고 옆으로 파고들며 월도의 날을 눕혀 그대로 검처럼 밀고 들어와 당태세의 가슴팍을 질러 들어왔다.

그 순간, 당태세의 목괴가 짧게 잡히며 손잡이와 지지대가 월도의 날을 걸고 회전하며 옆으로 틀어버렸다.

황칠이의 몸이 자격(刺擊)의 기세를 못 이기고 자기 힘을 따라 그대로 앞으로 불쑥 상체가 쏠리는 순간, 당태세의 목괴 끝이 망치처럼 튀어나오며 황칠이의 이마를 그대로 강타하였다.

순간 황칠이의 오른 무릎이 풀썩 그대로 접혀지며 땅바닥에 닿는데 황칠이는 재빨리 다시 몸을 일으키고 월도를 든 채 뒤로 물러섰다.

황칠이의 이마에는 시뻘건 피멍이 든 채 한 줄기 선혈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황칠이는 다시 한 발짝 더 뒷걸음질 치더니만 월도를 붙잡고 가까스로 몸을 지탱하였다.

당태세는 자신의 목괴 끝을 만지며 황칠이를 마주보았다.

“소주에서 대장장이가 내 목괴의 끝에 쇠를 박아주었지. 이 쇳덩어리들은 소주 태호에서 살던 가난한 어부들의 낚싯바늘과 작살들을 녹여 만든 것이다.”

“다…당태세…네…네 이놈.”

“네놈과 네놈의 여식이 팔아먹는 사람들 같은 가난한 이들 말이다. 하루하루 벌어먹는 이들 말이야!”

“시…시끄러워!”

황칠이는 비틀대며 다시 월도를 쳐들고 당태세의 머리를 쪼갤 기세로 내리쳤다. 하지만 황칠이의 다리는 비틀대며 이미 목표를 상실한 상태였다.

슬쩍 한 뼘 차이로 떨어지는 월도를 피한 당태세의 손이 움직이자 다시 목괴의 끝머리가 망치처럼 날아가 황칠이의 이마 위 같은 곳에 정확하게 떨어졌다.

호두를 깨는 듯한 소리가 법당 안에 울려퍼지며 황칠이의 두 손에서 월도가 떨어졌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입을 벌린 황칠이의 얼굴로 선혈이 쏟아져 흐르기 시작했다.

“동성문은 오늘 부로 멸문이다.”

황칠이는 이제 바람결에 흔들리는 갈대처럼 온 몸을 휘청대고 있는데 이미 노인의 두 눈은 초점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노인의 멍한 목소리가 불당 안에 울려 퍼졌다.

“다…당태세…사…살려다오. 살려주면 만금으로…….”

“네 피 묻은 돈을 나더러 받으라고?”

딱 하는 소리가 한 번 더 법당에 울려 퍼졌다. 회색 도포를 입은 건장한 사내의 몸이 무너지듯 법당 안에 쓰러지며 피를 쏟았다.

누런 법당의 바닥의 마루가 조금씩 붉게 물들어가는데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서 있던 당태세는 슬쩍 고개를 들어 부처님을 바라보고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석가세존과 앙굴마라를 능멸해도 분수가 있지.”

노인은 조용히 법당의 문을 닫고 바깥으로 나왔다. 법당을 나서 작은 마당을 지나 대문을 열고 암자를 빠져나왔을 때, 당태세는 바깥의 사정도 이미 죄다 정리되어 있음을 발견했다.

이미 동성문도와 화영도는 길바닥에 몸을 누인 채였고, 종리세리는 쓰러진 화영도 조호천의 옷섶으로 자신의 안모도를 닦고 칼집에 칼을 꽂아 넣는 중이었다.

당태세와 눈이 마주친 종리세리는 입맛을 다시더니 내키지 않는다는 말투로 쓰러져 있는 화영도를 슬쩍 바라보았다.

“그릇된 충심도 충심이겠지. 내키진 않았지만 끝은 훌륭하였네.”

“내려가시지요. 천호.”

“끝났소, 당문주?”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황칠이의 의발에서 찾아낸 사면부를 접어 품 안에 넣었다. 종리세리의 눈이 번득이며 노인의 행동을 관찰했지만 종리세리는 딱히 다른 행동을 취하지는 않았다.

“끝났소이다.”

노인의 목소리는 잠겨 있었고 등은 땀으로 젖어 있었다. 두 사내는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이 같이 작은 언덕 아래로 몸을 움직이고 있을 때가 되어서야 한줄기 바람이 푸른 나뭇가지들을 흔들었다. 조금씩 바람이 호수 위를 건너 불어오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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