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 절강 항주 (19)
상황은 생각보다 일찍 정리되었다. 이미 술도가의 사내들은 종리세리가 나타나기 전부터 전의를 상실한 뒤였다.
모두 하나둘 무릎을 꿇고 천호의 뒤를 따라 나타난 팔기들에게 하나씩 포박을 당하는데, 오직 늙은 당태세 한 사람만이 무릎을 꿇지 않고 목괴와 소도를 정리하고 슬쩍 천호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천호의 급시우(及時雨)같은 도우심이 없었다면 참으로 난망했을 것입니다. 감사드리오.”
천호 종리세리는 당태세의 말에 쓰다달다 말없이 굳은 표정으로 사방의 팔기들과 포박된 한인들을 둘러볼 뿐이었다.
그 때, 일단의 병사들이 화급한 표정으로 술도가 안 쪽을 가리키며 뭔가를 외치자 종리세리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 때 당태세가 나직한 소리로 말을 걸었다.
“동성가의 채무를 갚지 않은 자들을 타살한 장소가 이곳입니다.”
“그 장소가 이곳이라?”
“시신은 술항아리 안에 있을 것이고, 매장은 차밭에 했을 거요.”
그 말을 들은 종리세리가 근처의 팔기 두 사람에게 재빠르게 뭔가를 속삭였다. 두 사람은 화급하게 다른 이들을 이끌고 현장을 벗어났고, 그들이 멀어지는 것을 보던 종리세리가 그제야 혼잣말처럼 한어를 중얼거렸다.
“관곡을 횡령하는 것과 제멋대로 살인을 일삼는 것은 중죄지. 이 두 가지 혐의에 증거까지 확실하다면 동성가는 엄하게 처벌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오.”
“제가 이미 천호께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종리세리가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늙은 고수의 눈이 젊은 무관의 눈과 마주쳤다.
“이들은 개과천선할 수가 없습니다.”
“왜 그리 생각하나.”
“이들은 자신의 양심과 소신을 무너진 나라와 함께 묻었소.”
종리세리는 당태세의 말에 반문도, 대꾸도 하지 않았다. 사내는 예리한 눈을 부릅뜨고 말없이 땅을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의 눈에 비친 것은 부서진 세곡선과 서로 포개진 채 죽은 늙은 사내 둘과, 앞으로 자신들의 앞날이 어찌 될지 모른 채 두려움에 떨고 있는 포박당한 사내들이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종리세리는 천천히 자신의 옆으로 다가오는 팔기의 다른 무관에게 짧게 뭔가를 지시하고는 다시 당태세의 앞으로 돌아왔다. 사내는 뭔가 결심을 굳힌 듯 보였다.
“이제 그대는 동성문주를 만나러 갈 것인가?”
“정해진 길입니다.”
“이번 만이네.”
“무슨 말씀이시오?”
“따라오게.”
당태세가 무슨 영문인지 몰라 어리둥절하고 있는 사이, 조금 전 종리세리에게 명을 받은 무관이 말을 한 필 끌고 술도가에 다시 나타나자 당태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종리세리는 어느새 자신이 끌고 온 말 안장에 올라타 있었다.
“순천문주 당태세, 어디까지나 국법을 위반한 자를 제보하였기에 그에 따른 예우를 해주는 것뿐이다. 난 그대의 복수행을 더 돕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다는 것만 알아주게.”
당태세가 종리세리를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자기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지어 보였다.
“이미 천호께서는 제 복수행에 관심이 없다 천명하신 걸로 아는데 굳이 다시 말씀하시는 이유는 대체 뭡니까?”
“늙은이가 말이 많군.”
종리세리가 천천히 고삐를 잡고 말을 앞으로 몰자 당태세 역시 목괴를 안장에 매달고 말 위에 몸을 실었다. 실로 십칠 년 만에 타 보는 말이었다.
맨 처음 말 등에 올라갔을 때는 몸이 휘청대며 중심을 잡는 것도 위태할 지경이었지만 이내 수십 걸음을 달리자 예전에 말을 부리던 가락이 다시 생겨났다.
앞장서 말을 몰던 종리세리는 당태세의 말 탄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한 차례 끄덕이고 빠르게 박차를 죄며 말을 앞으로 몰았다. 당태세 역시 그를 따라 말을 빠르게 부리기 시작했다.
말 두 필은 빠르게 항주의 북쪽을 향해 달려가기 시작하더니 이내 서호의 가장자리를 타고 서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황씨가문 동성가의 장원을 향해서였다.
***
아룡은 멍하니 객잔의 거실에 앉아 있었다. 더운 여름의 햇살이 발아래까지 비췄지만 아룡은 발을 그늘로 들일 생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그는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물을 마시고는 다시 텅 비어있는 객잔의 작은 안마당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중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숙부가 히죽히죽 웃음을 지어가며 비척비척 목발을 짚고 들어와 ‘놀랐느냐? 이건 모든 게 거짓부렁이란다. 다 유희야.’ 하면서 같잖은 흰소리를 내보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지금 텅 비어있는 객잔의 안마당과 객실의 빈자리는 아룡이 꿈을 꾸거나 누가 아룡을 놀리려고 마련한 자리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었다.
아룡은 아침에 자신이 행한 일을 다시 머릿속으로 복기해보았다. 술이 깨지도 않은 채로 비틀대며 장부를 들고 만성의 동문 앞으로 나갔을 때, 그가 본 것은 살아서 숨 쉬는 칼처럼 예리하기 그지없는 한인 팔기였다.
“당문주가 전해주라 하였더냐?”
팔기 사내의 목소리는 온 몸의 피를 다 얼리는 것 같았다. 혀도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끄덕거리기 급급한 아룡을 산산이 부숴버릴 것 같은 눈초리로 쳐다보던 천호 종리세리는 다시 질문을 던졌었다.
“지금 당문주는 어디 있느냐?”
“급한 일이 있다고 바로 나갔습니다. 그…화급…급하게 나가….”
“그래, 화급하군.”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종리세리가 바람소리를 내며 몸을 돌려 만성으로 뛰어 들어가는 것을 본 아룡은 그대로 다리가 풀려 제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 상태로 어찌어찌 객잔까지 다시 기어들어 오다시피 한 아룡은 그 상태로 지금까지 앉아있던 것이었다. 술이 깨고 머리가 맑아질수록 아룡의 머릿속은 개운한 것이 아니라 더욱 복잡해지는 중이었다.
“숙부는 대체 무슨 일을 한 거야?”
아룡은 빈 마당을 내려다보며 멍한 표정으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이윽고, 한참동안 눈을 깜박이던 아룡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며 다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숙부는 대체 누구지?”
혼잣말을 자신의 귀로 다시 들은 아룡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기 시작했다.
***
우거진 수목의 이파리가 담을 넘어와 고색창연함을 더해주는 거대한 장원의 문 앞에 늙은 절름발이와 청의 무복을 입은 무관이 동시에 말에서 내렸다.
두 사람은 말없이 장원의 정문을 바라보다 천천히 문을 두드렸다. 샛문으로 빠끔히 얼굴을 내밀던 종자가 청의 관복을 보자 화급하게 문을 열고 고개를 숙였다.
“군령(軍令)이다. 동성문은 문을 열어 두어라. 우리는 동성문주를 만나러 갈 것이다.”
“무슨 영이십니…….”
하인은 종리세리의 눈을 마주보더니 채 입을 다 열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뒤로 물러섰다. 종리세리는 그를 슬쩍 바라보고는 다시 차가운 눈초리를 돌려 주변의 사내들을 확인하였다.
많으면 마흔, 적으면 서른 정도 되어 보이는 건장한 사내들이 종리세리의 앞을 막고 있었으나 누구 하나 쉽게 청의 관인에게 대거리를 하려는 이는 없었다.
“나는 선무사 천호 종리세리다. 곧이어 항주의 관인들이 들어와 점고할 것이니 장원의 모든 문을 다 개방해 놓도록.”
“무슨 연유신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개중 담대한 자가 입을 떼었으나 종리세리는 철저하게 그들의 말을 무시했다. 사내는 슬쩍 위를 쳐다보더니만 고개를 끄덕이며 당태세를 쳐다보았다.
“문주에게 갈 것이니 모두 제자리를 지켜라.”
“저희가 호종하겠습니다.”
“필요 없다.”
당태세와 종리세리가 발걸음을 떼어놓았다. 모든 사람들의 주의를 끈 것은 종리세리였다. 그의 옆에서 지팡이를 짚고 같이 걸어가는 늙은이에게 말을 걸거나 눈을 마주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고작해야 한군팔기의 앞잡이거나 항주의 길눈 밝은 노인네로 치부하는 듯싶었다.
두 사람이 장원에 나 있는 길을 따라 울창한 숲 사이의 오솔길을 올라가는 것을 바라보던 동성문의 사내들은 이내 문 앞으로 몰려올 것이라는 기인들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를 놓고 서로 떠들기 시작했다.
아직까지 만성 안에서 벌어진 일과 술도가의 접전은 서호 북쪽의 장원까지 미치지 못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좋은 길이로세.”
당태세는 양 옆으로 우거진 녹음을 보면서 감탄을 내뱉았다. 종리세리는 길의 끝 커다란 암자에 도달할 때까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작은 언덕배기의 위에 위치한 암자는 암자라는 말이 무색하게 넓고 높은 건물이었다. 어지간한 가족 삼대는 모여 살아도 넉넉해 보이는 크기였다.
하지만 주위에는 시중을 드는 건장한 사내 너덧이 있고, 그들을 감독하는 것 같은 흰 옷의 노인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조용한 곳이었다.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이가 없었다. 분위기 하나만큼은 도량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곳에 동성문주 황칠이가 있는가?”
격식을 무시한 종리세리의 물음에 슬쩍 눈살을 찌푸린 백의 노인이 다가와 정중하게 손을 모은 뒤 청의 관리에게 대답하였다.
“가주께서는 지금 참선중이십니다. 무슨 급한 일이시기에 관에서 직접 오셨습니까? 제게 말씀해주시면 바로 가주께 알려드리고 조치를 취하겠습니다. 어디로 연락을 드리면 되겠습니까?”
대답은 종리세리의 등 뒤에서 울려 퍼졌다.
“네 놈 혀가 굉장히 매끄러워졌구나. 화영도(火映刀) 조호천. 젊었을 적에는 시장터 왈패가 부럽지 않더니만.”
순간 백의노인의 표정이 급변하더니 종리세리의 뒤에 서 있는 지팡이 든 노인을 노려보았다. 어느새 백의노인의 온 몸에서 갈무리 되어있던 내공의 정수가 웅혼하게 꿈틀대는 것이 느껴졌다.
“노사는 뉘시오? 뉘시기에 제 소싯적의 별호를 아시는 게요?”
“이 노인은 순천문주 귀린갈 당태세라고 한다. 이 자가 나 대신 동성문주 황칠이를 면담할 것이니 그대는 물러서서 다른 이들과 함께 있도록.”
이번에는 말이 노인이 아닌 관복을 입은 젊은 사내에게서 흘러나왔다. 백의노인은 두 사람을 연달아 살펴보다가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듯 눈을 크게 뜨고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당태세의 얼굴을 바라보던 백의노인은 점점 입이 크게 벌어지더니만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 걸음을 물러서더니 연신 침을 삼키기 시작했다. 당태세가 그를 노려보더니 슬쩍 이를 드러내었다.
“왜 그러느냐 화영도, 놀랐느냐? 두려우냐?”
“……그 무, 무슨!”
당태세가 껄껄 웃으며 조호천을 지나 암자 안으로 들어가려하자 조호천이 화들짝 정신을 차린 듯 앞으로 나오며 당태세의 앞을 가로막았다.
당태세가 슬쩍 눈을 들어 조호천을 노려보자 조호천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이를 드러내며 쥐어짜듯 겨우겨우 말을 내뱉었다.
“어찌…지금…안으로 들어가려는 게요! 문주를 죽이려는…거요?”
“알면서 왜 묻느냐.”
“그…그것은 용납할 수 없소이다! 나는 이제 동성칠걸이 아니라 문주의 호법이오! 아무리 순천문주라 하여도…….”
그 순간, 슬쩍 두 사람 사이로 종리세리가 들어오며 소리도 없이 허리춤의 안모도를 뽑아들고 조호천의 앞에 들이밀었다.
종리세리는 말없이 턱짓으로 당태세에게 들어가라는 시늉을 하였고 당태세는 슬쩍 고개를 숙이고는 암자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 들어갔다.
조호천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더니 순간 뒤로 훌쩍 몸을 날리더니 등 뒤에 차고 있던 유엽도를 뽑아들고 종리세리와 당태세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
“네 이놈들! 한 놈도 살아서는 못 나갈 줄 알아라! 모두 저들을 쳐라!”
종리세리는 화영도 조호천과 다섯 명의 장한이 칼을 뽑고 덤비는 모습을 빤히 보다가 칼을 한 바퀴 휘두르며 중얼거렸다.
“이건 공무집행을 훼방 놓는 짓이니 내가 처리하겠소. 나머지는 문주가 알아서 하시오.”
“이 과분한 후의를 어떻게 갚아야 하겠소? 종리천호.”
“빨리 들어가기나 하시오.”
무뚝뚝한 사내의 말을 등 뒤로 들으며 당태세는 슬쩍 암자라고 불린 저택의 문을 열어젖혔다.
암자의 문은 소리없이 열리며 그 안의 작은 마당을 당태세 앞에 그대로 드러내었다. 당태세의 눈에 이글대는 광망이 다시 피어오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