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 절강 항주 (18)
“물러서라.”
노인의 말은 짧았지만 박력이 있었다. 부둣가에 오와 열을 맞추고 서서 배가 오기만을 기다리던 장정들은 목괴를 짚고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다 부서진 배에서 내린 절름발이 노인의 말에 자기도 모르게 양 옆으로 물러섰다.
대저 평범한 사람들의 안목은 앞에 서 있는 사람의 외양으로 판단하는 것이 상례지만, 지금 앞에 서 있는 노인의 눈초리를 감당할 수 있는 장정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아침 내 공들여 만들어 놓은 오와 열이 일순간 무너지자 오와 열의 맨 뒤에 서 있던 뚱뚱한 노인과 홀쭉한 노인이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듯 앞을 쳐다보았다.
안 그래도 부둣가에서 조금 전 울려퍼진 벽력괴성에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두 노인은 부둣가에서 갑자기 등장해 뚜벅뚜벅 걸어오는 절름발이 노인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수의 기도였다.
“네 놈은 누구냐.”
홀쭉하고 피골이 상접한 노인이 자신의 두 소매에 팔을 집어넣더니 자기 팔뚝 길이의 소도 두개를 꺼내 들고 당태세를 맞이하였다.
마른 노인의 소도 두개는 왜도(倭刀)처럼 날이 가볍게 휘었는데 날의 반절은 톱처럼 이빨이 박혀 있었다.
그와 함께 마른 노인의 옆에 서 있던 뚱뚱한 노인도 자신의 품 안에서 팔만한 몽둥이 세 자루를 꺼내들고 주르륵 늘어뜨린 뒤 자신의 목에 뱀처럼 휘감으니 다름아닌 흑색 삼절곤(三絶棍)이었다.
그 모습을 보던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이를 드러내었다.
“산도염(散徒焰) 기박자, 후요곤(吼謠棍) 모등수. 역시나 네놈들일 줄 알았지. 머리를 박박 밀었어도 모습이 달라지지는 않는구나.”
“네 놈은 누구기에 우리의 옛 별호를 알고 있는가!”
깡마른 기박자가 성마른 표정으로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높이자 당태세는 우뚝 자리에 서더니 같잖다는 듯 코웃음을 치며 입을 열었다.
“동성문이라는 정파의 보호를 받으며 사람들을 해하는 것을 낙으로 삼던 네놈들이 일면불 월면불이라 불리는 것이 가소롭다. 역시 내 판단이 맞았어. 늙어서 개과천선한다는 것은 아이들의 동화로다.”
“누구냐고 물었다 이 괘씸한 것아!”
후요곤 모등수의 철판을 두들기는 듯한 목소리가 울리자 술도가에서 직공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그리고 그 중 건장한 자 십여 명은 각각 몽둥이와 박도를 들고 모등수의 옆으로 몰려드니, 이들이야말로 진짜 동성문의 문도들이 틀림없었다.
그리고 조금 지나자 술도가 안에서 검은 복색의 사내와 청색 비갑을 흰색 장의 위에 덧입은 늘씬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내었다.
다름 아닌 절영자와 황병아였다. 황병아는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을 바라보더니 순간 얼굴이 굳어지고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무슨 일인지 대번에 사태를 파악한 듯 싶었지만 결단을 아직 내리지는 않은 듯한 모양새였다. 당태세는 여인의 표정과 태도를 보며 속으로 적잖이 감탄하였다. 실로 무림의 종사에 맞는 것은 동성문주 황칠이가 아니라 그의 딸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인지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장행수?”
“황칠이의 여식아. 나는 장행수가 아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표정에 여유가 있던 황병아의 안색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당태세는 얼굴이 하얗게 질리는 황병아와 그녀의 옆에서 기를 돋구고 있는 절영자를 쳐다보더니 이를 한껏 드러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내 이름은 순천문주 귀린갈 당태세로 십칠 년 전, 동성문주 황칠이의 배신으로 죽은 내 가족과 문도들의 복수를 하러 나왔느니라. 그 핏 값은 철저히 계산하여 이자까지 다 받을 것이니 그 비용은 너와 네 주변의 인물들로 계량(計量)하겠다.”
“귀린갈 당태세?”
순간, 투실한 후요곤 모등수의 표정이 아연실색 변하더니 슬쩍 한 걸음을 물러섰다. 하지만 정작 황병아는 굳은 얼굴에 노기를 띠더니 이를 악물고 당태세의 선전포고에 냉랭한 목소리로 받아쳤다.
“어이없는 늙은이였군! 지나간 과거를 잊지 못하고 치졸한 복수극으로 우리 가문을 멸하겠다고? 지금까지 네놈 혼자 이런 사달을 낸 것이라면 오늘 그 죄과를 톡톡히 치를 것이다!”
산도염 기박자가 혀로 입술을 핥으며 황병아를 쳐다보고 인상을 쓰는데, 후요곤 모등수도 말을 더듬대며 황병아에게 말을 걸었다.
“저…가, 가주…저 자의 심정을 격동시키지 마십시오. 위험합니다.”
“뭐가 위험하단 말이오! 일면불! 고작해야 절름발이 늙은이 하나 아닌가! 대업을 이루다가 손에 피 하나 안 묻히는 부상대고(富商大賈)가 있고, 명장이 있다더냐! 여기 모인 동성문도에게 명한다! 저자를 난도(亂刀)쳐서 운하에 뿌려 고기밥을 만들어라! 저 자가 누굴 능멸했는지를 똑똑하게 알려주마!”
“젠장.”
산도염 기박자가 이를 악물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 두 자루 거치소도를 빙글 돌리며 자세를 잡자 후요곤 모등수도 두툼한 목에 걸었던 삼절곤을 들고 당태세를 향해 앞으로 전진 하였다.
두 호법이 자세를 잡자 뒤에 서 있던 동성문도들이 먼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앞으로 튀어나가며 당태세를 향하니 당태세의 주변에 있던 사내들은 깜짝 놀라며 이리저리 퍼져 당태세의 주변에 훤히 뚫린 광장을 만들었다.
절름발이 노인은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젊은 동성문도들을 찌푸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동성문에 들어가 본 것이라고는 자신보다 약한 자들과 집단과 돈으로 이뤄진 자기 패거리의 권력뿐이었을 터였다.
“닭장을 벗어나 족제비를 만나봐야.”
순간 당태세의 몸이 앞으로 움직이며 손에 들고 있던 목괴가 전후좌우로 빠르게 한 번 움직였다.
퍼퍽 소리가 한 번의 흐름에 연이어 이어지며 순식간에 세 명의 사내가 그대로 머리와 목을 움켜쥔 채 땅바닥에 나동그라지니, 기세좋게 달려오던 동성문도들은 화들짝 놀라며 제자리에 멈춰섰다.
기세를 이기지 못하고 엉덩방아를 찧으며 칼을 놓친 놈도 있었다.
“세상이 닭을 위한 것이 아님을 알 것이나 그때는 이미 늦었으리.”
노인의 손에 들린 목괴가 엉덩방아를 찧은 사내의 옆머리를 그대로 후려치며 앞으로 튀쳐나갔다.
당태세의 손에 들린 검은 목괴가 햇빛을 받아 요망한 색으로 빛나며 사내들의 가운데로 뛰어드는데, 목괴를 쥐고 있는 노인의 눈빛은 오히려 햇살보다 더 강렬해보였다.
노인의 손에 들린 기이한 모양의 막대는 검은 뱀처럼 동성문도들의 가슴과 허벅지와 목과 머리를 물고 찌르고 때리고 찍으며 물 흐르듯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몽둥이와 박도를 든 일진이 수수깡처럼 박살나며 사람들이 사방으로 뒹구는데, 후위에 서 있던 너댓 명의 잔당들은 채 손을 뻗지도 못한 채 오금이 굳어 움직이지를 못하였다.
황병아의 입과 눈이 동시에 벌어지는 순간, 절영자의 눈은 가늘게 좁아지며 손에 들고 있던 칼집에서 칼을 뽑아들었다.
“소가주는 피하시오!”
순간, 당태세의 오른쪽에서 한 마리 검은 구렁이가 당태세의 검은 목괴를 휘감으며 당태세의 진로를 막았다. 순식간에 길어져 당태세의 머리를 향해 날아오는 검은 구렁이의 속도에 당태세는 주춤하며 고개를 돌려 구렁이의 공격을 피하였다.
다름 아닌 후요곤 모등수의 삼절곤이었다.
늙고 비둔한 노인은 덩치에 걸맞지 않게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자신의 몸에 두르고 있는 삼절곤을 길게 창처럼 잡고 당태세를 위협하였다.
당태세가 목괴로 삼절곤을 들어막고 모등수의 품을 향해 목괴를 뻗자 모등수는 재빠르게 삼절곤을 끌어들여 양손으로 삼절곤의 양 끝을 잡고 가운데 토막을 방패삼아 들어오는 당태세의 목괴를 퉁겨내고는 양 손의 두 막대로 쌍곤의 묘를 살려 반격을 행하였다.
그 순간, 당태세의 옆으로 또 다른 살기가 밀려들어왔다.
햇살아래 번쩍이는 두 자루 톱날의 비수가 보이지도 않는 속도로 밀려들어 오는데 당태세는 재빠르게 몸을 돌려 자신의 허리와 옆구리를 노리던 산도염 기박자의 쌍도를 피하였다.
뚱뚱하고 마른 두 노인이 각각 양손에 삼절곤과 쌍소도를 들고 당태세를 마주보니, 당태세가 바로 황병아를 향해 나갈 길이 막혀 버렸다. 당태세는 이를 부득부득 갈며 두 사람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길을 열어라. 늙은이들아.”
“어서 달아나십시오. 소가주!”
후요곤 모등수의 외침에도 황병아는 제자리를 지키며 이를 드러낸 채 당태세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멀리서부터 들려오는 날카로운 만주어가 황병아의 분노를 차갑게 누그러뜨렸다.
황병아는 운하의 소로를 타고 달려오는 기병과 그 뒤를 따라 만성에 몰려나오는 팔기의 병사들을 확인하였다. 다시 앞에서 산도염 기박자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절영자를 따라가십시오! 떠나세요!”
황병아는 당태세를 죽일 듯이 노려보더니만 몸을 돌리더니 검은 복색의 사내와 함께 재빠르게 술도가를 빠져나갔다. 당태세가 눈을 부릅뜨고 그를 향해 몸을 움직이자 당태세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모등수와 기박자가 당태세를 붙잡고 놔 주질 않았다.
“더러운 놈들! 물러서라!”
“죽은 우리를 밟고 넘어가라. 당태세!”
“원한다면!”
당태세의 손이 목괴를 잡더니 소도를 빼내었다. 단괴(短拐)와 소도(小刀)로 분리된 당태세의 지팡이가 두 손에 나뉘며 햇살아래 춤을 추었다.
모등수의 삼절곤이 모등수의 목을 타고 길게 뻗어나와 당태세의 몸을 노리고 빨려들 듯 날아들자 당태세의 단괴가 삼절곤을 걷어 올린 뒤 번개처럼 내 지른 소도가 모등수의 가슴을 노렸다.
순간 기박자의 쌍도가 다시 들어오며 당태세의 가슴팍을 노리고 들어왔다. 당태세는 삼절곤을 후려치고 다시 단괴와 소도를 돌리며 기박자의 쌍도와 맞붙었다.
칼과 칼이 부딪히고 단괴와 칼이 서로를 긁으며 소리와 불꽃을 일으켰다. 그때 거리를 벌렸던 후요곤 모등수가 다시 삼절곤을 들고 당태세를 향해 달려왔다.
하나의 무위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두 사람은 붙어 있으면 기묘한 공방일체를 만들고 있었다. 오래 질질 끌다가는 오히려 당태세가 두 사람에게 체력으로 밀릴 확률이 더 높았다.
당태세는 쌍도를 예리하게 휘두르는 기박자를 노려보다 슬쩍 앞으로 파고들며 목괴를 휘둘렀다. 기박자의 단도가 목괴를 퉁겨내고 바로 요혈을 찾아 바람처럼 가슴을 찔러왔다.
당태세는 흐름을 놓치지 않았다. 노인은 들어오는 단도를 단괴로 얽은 뒤에 재빠르게 단도를 쥔 팔을 틀어 기박자의 손을 뒤로 꺾어버렸다.
깡마른 노인의 손이 당태세의 우악스러운 목괴에 말리며 뒤로 돌아가자 노인의 입에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손이 비자 옆구리가 훤하게 드러났다.
당태세는 오른손에 쥔 소도를 가지고 기박자의 옆구리를 향해 소도를 들었다.
그 순간, 후요곤 모등수의 삼절곤이 그림자처럼 다가와 기박자와 당태세 사이로 파고 들어왔고, 당태세의 소도는 기박자의 옆구리가 아닌 모등수의 가슴팍을 향해 번개처럼 궤적을 돌렸다.
모등수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찰나, 이미 당태세의 소도는 모등수의 가슴을 찌른 뒤 다시 제자리로 빠져나온 뒤였고 호흡이 무너지는 모등수를 어깨로 들이받아 기박자에게 보낸 당태세의 신형은 모등수를 방패삼아 기박자의 사각(死角)으로 뛰어들었다.
죽어가는 친구의 몸뚱어리를 몸으로 얼싸안은 기박자의 눈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자신의 목을 향해 정 반대의 궤도로 들어오는 소도였다.
“이 교활한 놈아!”
기박자의 피를 토하는 절규와 함께 당태세의 손이 매정하게 기박자의 몸을 훑고 빠져나왔다. 뚱보 노인의 몸이 피를 뿌리며 죽은 말라깽이 친구 위로 얹히며 그대로 땅바닥에 쓰러졌다.
당태세가 검결을 끝내는 것과 동시에 말을 타고 달려온 종리세리가 채 말을 세우기도 전에 착지하며 안모도를 빼들었다. 사내는 또렷한 한어로 모여있는 이들을 향해 외쳤다.
“여기 있는 이들은 모두 무릎을 꿇어라! 대청 선무사 천호의 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