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 절강 항주 (17)
원래 운하를 따라 서있는 관성(管城)들은 육문(陸門)과 수문(水門)을 같이 두는 것이 관례였다. 육문으로는 사람의 행로를 막고 수문은 드나드는 배를 감시하였다.
만의 하나 변고가 있을 시에는 육문은 병사의 창칼로 진을 치고 성문을 걸어 잠근 뒤 출입을 방비하였고, 수문은 성문 위의 도르래를 올리고 닫아 쇠창살을 아래로 움직여 배의 출입을 통제하였다.
지금 당태세의 앞에서 떨어지려고 하는 만성의 수문도 뾰족뾰족한 쇠꼬챙이가 박혀있는 쇠창살이었는데, 천근의 무게로 떨어지는 쇳덩이를 맞은 배는 여지없이 수장당할 터였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뱃전을 으스러지라 움켜쥐었다. 무림의 고수고 뭐고 쇳덩이가 성문에서 떨어지는 것을 막을 방도는 없었다.
당태세는 이를 악물고 어두운 수문 위를 올려다보았다. 병졸 둘이 도르래를 내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나마 오랫동안 쓰지 않아 녹이 슬어 있는 도르래의 쇠사슬이 쇠창살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겨우겨우 막아내고 있었다.
천하에 두려울 것이 없던 당태세의 등이 순식간에 흠뻑 젖어들었다. 지금 당태세가 타고 있는 중선은 막 수문에 진입하여 쇠창살이 떨어지는 위치로 돌입하는 중이었다.
당태세는 눈을 부릅뜨고 마치 자신의 안력(眼力)으로 쇳덩이를 고정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처럼 보였다.
“천지신명이시여!”
순간, 좌르륵 소리와 함께 쇠창살이 풀려 내려오기 시작했다.
녹이 난 쇠창살은 당태세가 탄 세곡선이 아래를 지나가자마자 천둥소리를 내며 물을 향해 처박혔고, 당태세의 배를 뒤이어 따라오던 세곡선의 바로 앞에서 철창이 되어 수로를 가로막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뒤를 따르던 세곡선이 창살과 부딪히며 수문에 멈춰 섰다.
멈춰선 세곡선을 향해 팔기의 화살이 빗발처럼 쏟아졌다. 동성문과 사형문의 인부들은 대부분 마지막 배에 타고 있었다. 비명이 울려 퍼지자 당태세는 눈살을 찌푸리며 이를 악물었다.
“망할.”
당태세는 고개를 돌리고 앞을 바라보았다. 웅장하게 서있는 만성의 성벽을 뒤로 한 채 두 척의 세곡선은 운하에 파도를 일으키며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창살에 의해 만성 안에 가둬진 세곡선의 사내들은 모두 만주족에게 붙잡히거나 죽임을 당할 것이었다.
정작 이들을 인솔하고 뱃길을 잡는 선장은 당태세가 탄 세곡선 앞의 선두 배에 타고 있었다. 그들은 열심히 삿대를 움직이며 앞으로 뻗어있는 운하를 타고 쏜살같이 남으로 내려가는 중이었다.
“이대로 가면 술도가에서 멈추지 않겠지. 그대로 운하를 타고 도망칠 작정이군 그래.”
당태세는 몸을 일으키고 선수를 향해 움직였다. 좁은 운하였지만 두 척의 세곡선은 생각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물을 가르고 내려가는 중이었다. 당태세는 앞을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자 운하의 물길이 왼쪽으로 급하게 꺾이는 지점이 나타났다. 그 곳을 지나면 바로 오른쪽에 술도가가 위치하고 있었다.
송각주의 진술에 따르면 배를 타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이들은 저 술도가에서 배들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그때였다. 만성의 문이 열리는 것과 동시에 한 필의 말이 번개처럼 문을 빠져나와 남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기수는 다름 아닌 천호 종리세리였다. 사내는 만성의 일을 다른 이에게 맡기고 배를 쫓아 달려 나온 것이 분명했다.
종리세리는 말을 몰면서 아래 운하로 떠내려가는 두 척의 세곡선을 날카로운 눈으로 연신 바라보고 있었는데, 그 거침없는 행동이나 빠르기가 가히 장수의 반열에 오르고도 남을 법하였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몸을 벌떡 일으키고 종리세리를 보며 손으로 앞을 가리켰다.
“술도가에서 봅시다! 그곳이 이들의 소굴이오!”
종리세리의 고개가 알았다고 끄덕이는 것처럼 보였다. 종리세리는 다시 앞을 보고 전속력으로 말을 몰아댔고 당태세는 그가 아무쪼록 자신의 말을 알아들었기를 바랐다.
“종리세리는 자기 일은 알아서 할 위인이니.”
선두에서 선장을 태우고 나가는 세곡선은 모든 사내들이 달라붙어 양 옆으로 삿대를 치고 노를 휘저으며 열심히 배를 앞으로 몰고 있었다. 당태세가 탄 배와 선두의 세곡선과는 작은 소선(小船)하나가 들어간 정도의 간격이 벌어져 있었다.
당태세는 고슴도치 가시처럼 갑판에 숱하게 꽂혀있는 화살을 하나 뽑아들고는 노를 젓고 있는 사내를 노렸다.
“소싯적 재주가 아직도 통하려나.”
혼잣말을 중얼대던 당태세의 손이 뒤로 젖혀졌다가 바로 앞으로 뻗었다. 당태세의 손에서 뻗어 나온 화살은 그대로 시위를 떠난 듯 날아가 노를 젓고 있는 사내의 넓적다리에 정확하게 틀어박혔다.
사내가 구슬픈 비명을 흐르며 뒤로 고꾸라지자 노를 젓고 있던 다른 사내들이 화살이 날아온 곳을 찾다가 당태세를 바라보고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당태세 역시 눈살을 찌푸렸다.
“어깨를 노렸는데……젠장할.”
하지만 당태세의 노력은 즉각 효험을 보았다.
뒤따르는 세곡선의 선수에서 누군가 화살을 쏘고 있다는 것이 보이자 죽자살자 노를 젓던 사람들은 누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손을 놓고 화급하게 자리를 피하였다.
선두 세곡선의 속도가 순식간에 눈에 띄게 느려졌다. 앞장서 가던 세곡선과 당태세가 탄 세곡선의 차이가 조금씩 좁혀드는 것이 노인의 눈에 들어왔다.
당태세가 꽂힌 화살을 하나 더 뽑아 앞으로 던지려는 순간, 앞의 세곡선에서 단창 하나가 쉭 소리를 내며 날아와 당태세의 손 아래 뱃전에 툭 하니 꽂혔다.
세곡선에 타고 있던 동성문의 문도가 그를 노리고 던진 것이었다. 당태세의 눈썹이 슬쩍 위로 올라섰다.
“세곡선에 창까지 싣고 다닌다 이거구먼.”
힘차게 뻗은 당태세의 손에서 날아간 화살은 시위를 떠난 화살보다 매섭게 일직선으로 날아가더니 창을 던진 동성문도의 목을 그대로 관통하고 사내를 갑판에 처박아버렸다.
순식간에 주변에 있던 사내들이 옆으로 우르르 퍼지며 몸을 피했다. 어느새 선두의 세곡선과 당태세의 세곡선은 닿을 정도로 가까워져 있었다.
당태세는 눈을 부릅뜨고 몸을 일으켜 선수에 몸을 세우더니 그대로 배를 박차고 하늘에 몸을 띄웠다. 지팡이를 든 노인이 두 팔을 펼치고 학이 땅에 착지하듯 배와 배 사이를 뛰어넘어 맨 앞의 세곡선에 몸을 사뿐히 내렸다.
노인의 떨어진 곳 옆에 있던 열댓 명의 사내들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생시에 벌어지는 일이라고 믿기 힘든 모양이었다. 대부분의 사내들은 눈만 껌벅이며 노인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 와중에 결기있고 덩치 좋은 사내 하나가 뭔가 각오한 듯한 표정으로 당태세를 바라보더니 뒤에 있던 박도를 두 손으로 잡고 단숨에 거리를 좁히며 당태세에게 달려들었다.
순간, 당태세가 몸을 슬쩍 옆으로 움직이며 목괴를 슬쩍 뿌리치자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박도를 든 사내는 머리를 뒤로 젖히며 그대로 갑판에 머리부터 떨어지며 박도를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어느새 사내의 코와 입에서는 선혈이 쏟아지고 있었다.
“덤벼라. 여기서 내 손에 죽든지 나중에 팔기의 손에 죽든지 둘 중의 하나로다.”
당태세는 말을 뱉은 뒤에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남아있는 방도들이 죽기 살기로 자신에게 덤벼들 것을 각오하고 있었는데, 당태세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양 뱃전으로 달려가더니만 그대로 몸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누구 하나 뒤를 돌아보지 않고 그대로 운하로 몸을 던지는데, 실로 문파에 대한 충심만 없다면 가장 현명한 선택지라 할 만하였다.
“누가 관곡 빼먹는 놈들 아니랄까봐 위부터 아래까지 안 썩은 놈이 없구먼.”
당태세는 넌더리가 난다는 듯 목괴를 짚고 뚜벅뚜벅 선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배가 왼쪽으로 급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뒤를 돌아보니 키잡이가 있는 힘껏 몸을 다 써가며 배를 좌현으로 돌리고 있었다. 운하가 구부러지고 있었고, 구부러진 운하의 우측에는 시뻘건 벽돌로 올린 커다란 건물, 술도가가 보이고 있었다.
흐릿하게 보이는 술도가의 부두에는 꽤 많은 인영이 서 있었는데, 분명 그들이 황병아가 말한 ‘멀리 배달되는 사내들’일 터였다. 당태세는 이를 악물었다. 배는 분명 술도가를 그냥 지나쳐 운하를 타고 빠져나갈 심산이었다.
당태세가 이 배를 탄 이유가 없어지는 셈이었다. 술도가를 지나가기 전에 배를 세워야 할 것 같았다. 당태세는 재빨리 떨어져 있는 박도를 주워 키잡이를 향해 던졌다.
안 그래도 한 눈으로는 뱃길을 보고 한 눈으로 당태세를 곁눈질하고 있던 키잡이는 당태세가 박도를 줍자마자 자신도 다른 이들처럼 운하로 뛰어들었다. 당태세는 어이없는 표정을 짓고는 재빠르게 선장을 향해 달려 나갔다.
키잡이가 없어지고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 배가 왼쪽 뱃전을 운하에 부딪히더니 다시 비틀대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수에서 선장의 욕지거리가 울려 퍼졌다.
속도는 줄었지만 여전히 운하를 가르며 나가는 세곡선의 빠르기는 상당한 것이었다. 당태세는 몸과 마음 모든 것이 급하게 움직였다.
“당장 배를 멈춰라! 닻을 내려!”
당태세가 뒤에서 튀어나오며 소리치자 선장은 화들짝 놀라며 둥그런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선장은 다른 문도들과는 배짱이 다른지, 품 안에서 기다란 단도를 뽑아들더니 당태세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네 놈이 황삼과 같이 배를 탄 늙은이렷다. 오늘의 이 빚을 내가 갚아주마!”
“뱃사람은 목숨 아까운 줄 모른다더니 사실이구나.”
당태세는 비웃으며 목괴를 들었지만 이마에서 땀이 숭숭 흐르고 있었다. 이 상태라면 술도가를 지나서 그대로 소흥으로 빠지는 대운하로 접어들게 될 판이었다.
선장 목을 날리는 게 급선무가 아니라 배를 세우는 게 제일 급했다. 하지만 이런 판단이 무색하게 당태세의 앞에 있던 선장은 자신이 자청해서 당태세 앞으로 튀어나오며 단도를 움켜쥐고 눈을 희번득거렸다.
“죽어라, 늙은이!”
그 순간, 당태세는 자신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작은 목선 하나가 갑자기 구부러진 운하의 옆에서 튀어나오더니 목선이 낼 수 있는 전속력을 다 해서 세곡선의 옆으로 나가온 뒤 불문곡직 그대로 옆을 들이 받아버리는 것이 아닌가.
순간 쾅하는 소리와 함께 세곡선이 그래도 오른쪽으로 밀려나가며 술도가 앞에 설치된 부두를 그대로 정면으로 들이받아 버렸다.
그 서슬을 못 이기고 선장은 그대로 배에서 튕겨나가며 세곡선과 운하 사이의 좁을 틈새로 비명과 함께 빨려 들어갔고, 세곡선의 선수와 술도가의 부두는 말 그대로 풍비박산이 난 채 한 덩이가 되어 뒤엉키고 말았다.
당태세가 목선을 일찌감치 발견하고 그대로 뱃전에 엎드리지 않았다면 아마 선장과 같은 운명을 맞이하고 말았을 터였다.
당태세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사이, 뒤를 따르던 세곡선이 다시 앞의 세곡선을 들이받았고 당태세는 다시 머리를 싸잡은 채로 갑판에 납작 붙어서 욕을 있는대로 하기 시작했다.
“이런 망할! 아주 박살을 내놓는구만!”
당태세는 이제 수수깡처럼 앞판이 부서진 채 물이 밀려들어오는 세곡선 위에서 부둣가를 쳐다보았다.
부두 위에는 기백이 넘는 사내들이 지금 앞에서 벌어진 해괴망측한 광경에 모두 넋을 놓고 있었는데, 그들을 통솔하는 뚱뚱한 늙은이와 홀쭉한 노인도 멍하니 눈을 부릅뜨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어찌되었든, 지금 부두에 배를 정박시키는 것은 성공한 셈이었다.
“노사!”
당태세는 순간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 소리는 이미 망가질 대로 망가진 작은 목선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가냘픈 소리였고, 어린 소년의 소리였다.
목선의 위에서 두 손을 움켜쥐고 바들바들 다리를 떨면서도 끝까지 당태세의 시선을 피하지 않고 있는 소년은 깡마른 중년 사내와 함께 노를 잡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였다. 소년의 굳게 닫힌 입과 번득이는 눈동자를 본 당태세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허용두. 이게 무슨 일인가?”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한 것뿐입니다! 송각주께서도 기필코 도와주신다 하셔서 이렇게 왔습니다!”
“그러한가?”
“그렇습니다! 저는 항주 홍문의 용두니까요!”
아직도 다리를 떨고 있는 천리안 허종을 보고 있던 당태세의 입술에 피식 미소가 올라왔다. 노인은 허종을 바라보며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네! 이제부터는 내 일이니 용두는 빠지시게!”
“무운을 빌겠습니다! 대인!”
당태세는 고개를 돌리고 부두를 바라보았다. 지금까지 인상을 쓰고 있던 노인의 입이 벌어지며 송곳니가 드러났다. 사내는 이 순간 자신의 심정이 실로 쾌(快)함을 느끼고 있었다.
“오냐, 동성문아. 이제 청산의 시간이구나!”
당태세의 발이 뱃전을 넘어 부두 위로 사뿐하게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