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절강 항주 만성 (1)
석양은 무더위와 함께 조금씩 서호 아래로 가라앉고 있었다.
종리세리는 어제와 그제 동일하게 서루의 문루 위에 서서 지고 있는 해와 호수를 바라보는 중이었다. 사내와 해는 변함이 없었다. 늘 동일한 과정에 동일한 시간을 지나 동일한 곳을 보며 움직였다.
아니, 움직이는 것은 세상이고 그들은 제자리에서 변함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수직을 서는 군사들조차 이제는 종리세리의 위치에 대해 불평을 하는 사람은 없었다.
바늘 하나 들어갈 것 같지 않은 사내의 표정 역시 일절 변화를 허락하지 않는 듯 보였다. 사내의 눈앞에서 조금씩 해가 호수 아래로 가라앉으며 호수의 빛나는 황금물결이 붉게 변하며 식어갈 때, 사내는 자신도 서루를 떠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천호의 종적을 찾는 것은 오래 걸렸지만 누군지 알아보는 것은 순식간이로구려.”
순간 종리세리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듯 눈이 휘둥그레지며 자신의 뒤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뒤에 서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절름발이 늙은이였다.
노인은 목괴까지 짚은 채로 서루의 망루 위에 올라와 있는 것이었다. 종리세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어떻게 만성 안으로 들어왔는지를 물으시는 게요?”
“그대가 실로 미쳤구나. 이곳은 기인 외에는 출입금지다. 한인이 이곳을 기웃거리면 바로 참수다. 모르는가?”
“천호와 연분이 있다면 그것은 어찌어찌 벗어나겠지요.”
탕태세가 만면에 미소를 짓고 서 있자 종리세리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드러냈다.
“여우 같은 늙은이. 내가 네 친구라도 된단 말이냐.”
종리세리의 말에 당태세 역시 표정을 진지하게 바꾸며 말하였다.
“듣고자 하는 것을 듣고자 왔소이다. 그리고 천호께 전해드릴 말도 있습니다.”
그때, 수직하던 군사들이 종리세리 옆에 이상한 이가 있음을 보고 창을 든 채 다가왔다. 종리세리는 병사들과 당태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다 인상을 쓰며 손을 뻗었다.
“내 손님이다. 물러서라.”
천호의 만주어를 들은 병사들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고 그 모습을 보던 당태세는 종리세리를 보며 목소리를 낮춰 말하였다.
“동성가의 탐리와 죄악을 고하겠습니다. 증거도 확보했습니다.”
“죄목은?”
“관곡의 횡령과 살인, 그리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사사로운 사민(斯民)이오.”
“사민?”
“동성문의 차기 당주가 장정들을 모아 타 지역으로 보내고 있소.”
“자세히 말해보시게.”
종리세리의 날카로운 눈이 슬쩍 주변을 살피더니 그 역시 목소리를 낮추었다.
당태세와 종리세리가 지는 해를 보며 두런대는 모습은 마치 나이를 넘어선 돈독한 사내들의 우애를 보는 듯 하였다.
짧게 당태세가 그간의 이야기를 정리하자 종리세리는 날카로운 눈빛을 빛내며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증거가 없다면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소. 당문주. 이곳은 항주 주방팔기의 강역이오. 내가 힘을 쓸 수 있는 상황이 아니란 말이외다.”
“지금은 동성문에 다녀오느라 가져오지 못했습니다. 제가 내일 오전 진시(辰時 07:00~09:00)에 증거물을 전해드릴 것이니 만성의 동문 앞에 와 주십시오.”
“그 나이에 실로 맺고 끊는 것이 대단하구먼. 그대는 포쾌를 했어도….”
종리세리는 슬쩍 입술을 올렸다가 다시 표정을 굳히고는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그건 그렇고, 그대는 어떻게 이 금성탕지인 만성 안으로 잠입하였는가. 사안에 따라서는 이게 동성문보다 더 큰 중죄가 될 수도 있음이다. 파수를 죽이고 성벽을 넘어 들어온 것인가?”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직 해도 지지 않았는데.”
“그러면?”
당태세가 히죽 웃음을 지어 보이더니 자신의 목괴를 슬쩍 들어보이고 말했다.
“동문 밖에서 외상거래를 하는 팔기의 부인 한 명을 도와드린 것 뿐이오. 내가 대신 돈을 치러주고 물건까지 안으로 운반해 드렸지요. 그 부인은 저를 늙은 장사꾼이라 여기셨을 겁니다. 아마 그 분은 지금쯤 내가 성문 밖으로 나갔을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말입니다.”
종리세리는 당태세의 얼굴을 한참동안 바라보다가 한 마디를 내뱉을 뿐이었다.
“어이가 없구먼.”
“이젠 제가 부탁드린 것을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종리세리는 당태세를 보더니 슬쩍 주변을 둘러보고는 성벽에 몸을 기대고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천호가 한족의 말로 중얼대는 소리를 만성 안에서 듣는다면 종리세리도 문책을 받을 일이었지만 이젠 종리세리도 될대로 되라는 듯한 표정이었다.
“홍문(洪門)은 망한 지 오래요. 절강의 마지막 홍문이 망한 지도 이미 십 년이 지난 일이오. 그 잔당조차 남아있는 이들이 없지. 팔기는 최소한 자신을 거스르는 자들을 처리하는데 있어 확실하거든.”
종리세리가 당태세를 보며 다짐하듯 말했다.
“지금 남아있는 홍문은 가짜요. 누군가 홍문의 이름을 빌리려 하는 거겠지. 이 정도면 되었소. 당문주?”
“되었습니다.”
당태세가 엄숙한 표정으로 다짐하듯 천호의 말을 받았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종리천호.”
***
그날 밤, 당태세는 꿈을 꾸었다.
그는 거대한 지붕이 하늘을 완전히 가린 황궁과도 같은 큼지막한 정자에 넓은 탁자를 가운데 둔 연회에 초대되어 있었다.
당태세는 자신의 앞에 놓인 시뻘건 술잔과 피가 뚝뚝 떨어지는 생고기를 접시에 받아둔 채 자신의 옆을 둘러싸고 있는 벗들과 함께하고 있었다.
벗들은 당태세는 상관도 하지 않고 자신들의 앞에 차려놓은 붉은 술을 마시고 피가 흐르는 생고기를 입에 넣고 씹었다.
그들의 수염을 타고 붉은 물이 흘러나와 탁자를 흥건히 적셨지만 누구 하나 신경쓰는 이가 없었다. 당태세는 그들을 바라보며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모두 술에 취해 웃고 있는 이들은 일찍이 그가 알던 이들이었고 그와 함께 철석의 맹세를 한 이들이었으며 다시 살아나서 그가 죽여버린 인물들이었다.
“왜 그렇게 풀이 죽어있나. 당태세?”
목에 난 칼자국으로 술이 새어 나오는 백룡문주 왕양성이 싱긋 웃어보이며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옆에 앉아있던 창백한 얼굴의 구봉문주 오자평이 당태세를 힐끗 보더니만 비웃음을 머금었다.
“죽은 사람들하고 술을 먹자니 기분이 안 좋은가? 자네가 죽인 사람들이라 더 안 좋아?”
“너희들은 죽어도 싼 놈들이었다.”
당태세가 차갑게 대꾸하자 말없이 술잔을 기울이던 견정문주 진윤타가 시뻘개진 눈을 부릅뜨고 당태세를 보더니 이를 부드득 갈았다.
“내 자식과 내 목숨을 둘 다 끊어놓고 그런 말을 하느냐, 당태세?”
“당형, 죽어보니까 알겠더군. 내 자식들도 같이 죽여버리고 군자인 척한 건가?”
전신이 피로 물든 채 고기를 씹어먹던 영우문주 전영포가 눈을 부라리며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충룡문주 주통산이 도사 복장의 소매를 활짝 펼치며 덩치에 안 어울리는 깔깔대는 목소리를 내며 당태세를 손가락을 가리켰다.
“네놈 덕에 우리가 모두 지옥에 모였구나! 아직 셋이 남았어! 네놈은 그들도 우리 자리에 합석을 시킬텐가?”
“당연히 죽일테다. 한 놈도 남김없이 죽일거다!”
당태세가 이를 부드득 갈며 중얼대자 다시 갈증을 못 참은 왕양성이 시뻘건 술을 들이켜며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그런다고 무엇이 달라지는가? 우리의 과거는 이미 지나갔고, 지금 자네가 사는 세월은 명의 시대가 아닌 것을?”
“그래, 철 지난 한풀이에 우리가 속절없이 당한 것 아닌가.”
주통산이 깔깔대며 당태세에게 손가락질하자 다른 사람들도 일제히 당태세를 바라보며 눈을 둥그렇게 떴다. 사내들은 이구동성으로 당태세에게 얼굴을 들이밀고 말하였다.
“네가 지금 벌이는 일이 우리가 네게 저지른 죄와 다를 것이 무엇이냐?”
당태세는 자신의 앞에서 아귀떼처럼 떠드는 이들의 목소리와 웃음소리를 들이며 조금씩 얼굴에 깊은 주름이 잡혀갔다.
늙은 무인의 눈썹아래 짙은 그림자가 깔리고 코와 입에 경련이 일면서 이가 저절로 드러났다. 사내의 입이 열리며 폐부 속에서부터 떨림이 새어나오는데, 떨림은 분노와 만나 말이 되고 말은 포효가 되어 하늘과 땅을 뒤집었다.
“시끄럽다 이 더러운 짐승들아! 불의를 밥으로 먹고 배신을 낙으로 삼는 악귀들아!”
당태세의 눈이 번득이며 안광이 튀어나왔다.
“이 세상에 인과응보가 없다면 내가 응보가 되어주마! 하늘이 후박함이 없다면 내가 잔학함으로 너희들을 심판할 것이다! 세월이 지나면 죄가 사라진다고 믿는 후안무치한 것들아! 내가 너희들 도말할 것이다! 너희들의 자취와 후손과 유지를 깡그리 멸해주리라! 세상에 공정함이 없어도 강호에는 심판이 남아있다! 강호는 사라졌어도 내가 강호를 알고 있으니!”
당태세의 눈에서 불꽃이 아래로 떨어지며 식탁을 불로 사르고 지붕을 휘감았다. 불꽃이 용이 되어 하늘로 치솟으며 앉아있던 무리들 위로 화염이 비가 되어 떨어졌다.
“지옥에서 지켜보아라! 이 당태세의 가는 길을!”
당태세는 눈을 떴다.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쿵쿵대는 소리와 함께 조금 전까지 눈앞을 밝혔던 지옥불과 지붕과 식탁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객잔주인이 객잔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당태세는 비틀대며 나가 문을 열었다. 끔벅이는 당태세의 눈앞에 객잔 주인과 청황의 제복을 입은 종자 하나가 손을 모은 채 서 있었다.
“대체…이 아침부터 무슨 일이오?”
“동성가의 황가주께서 장대인께 전하는 말씀이오. 오늘 들어오기로 한 배가 예상보다 빨리 도착하여 지금 북문에 대기하고 있으니, 어서 먼저 올라오시라는 분부십니다.”
당태세는 눈을 번쩍 떴다. 동성가의 하인이 입는 제복이었다. 당태세는 하늘을 쳐다보았다. 더운 공기가 가득한 새벽하늘은 이미 동녘부터 밝고 있었다.
“지금 몇 시인가.”
“곧 진시가 될 것입니다.”
“맙소사.”
당태세는 입을 다물더니 뭔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고는 하인을 바라보았다.
“잠시만 기다리게. 옷을 입고 나오겠네.”
당태세는 대답을 듣기도 전에 문을 닫아걸고 다리의 보철을 단단히 채운 뒤, 옷을 입었다.
목괴를 잡고 잠시 방 안에 서 있던 당태세는 봇짐 안에 있던 책자 하나를 꺼내 쥐고 건너편에 있는 침상으로 달려갔다.
여전히 세상모르고 코를 골며 자고 있는 아룡에게서는 아직도 술 냄새가 진하게 퍼져 나왔다. 당태세는 목괴를 들어 번개처럼 아룡의 허벅지를 내리쳤다.
짝하는 소리와 함께 코 고는 소리가 비명으로 바뀌며 아룡의 눈이 번쩍 뜨였다.
“세상에! 숙부님! 아야! 지금 뭐 하시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라. 아룡.”
당태세의 목소리에서 한기가 흘러나왔다.
아직도 잠이 덜 깬 아룡은 당태세의 목소리에 눈을 쉴새없이 깜박대며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데, 당태세는 자신이 들고 있던 책자를 그대로 아룡의 가슴팍에 꽃아넣듯 밀어 넣었다.
“내가 지금 객잔을 떠나거든 너는 번개처럼 일어나 이 장부를 들고 만성의 동문 앞으로 나아가라.”
“만성이요? 동문이요? 장부라니요?”
“설명할 틈이 없다. 그 곳에 가면 일전에 서호에서 봤던 팔기의 천호. 종리세리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아…종리천호. 네네. 종리천호. 그런데 갑자기 왜…….”
“입 닥치고 들어! 이 장부를 천호에게 전해주어라! 네 발걸음 하나에 항주의 안위가 걸려있다!”
“네?”
당태세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눈을 질끈 감았다 뜨며 아룡에게 말하였다.
“무두리! 대청제국의 주방팔기가 오직 너의 부지런함 하나에 흥망이 걸렸느니라! 네가 이 장부를 전해주어야 팔기의 위신이 살고 백성들이 산다! 알겠느냐!”
“네? 네! 네? 팔기가요? 네! 네! 알겠습니다!”
아룡의 눈이 휘둥그래지며 혀가 멋대로 입 속에서 노니는데, 그를 보던 당태세는 전에 본 적이 없는 무서운 얼굴로 아룡을 노려보며 마지막 한 마디를 덧붙였다.
“잊지 마라, 내가 떠나자마자 바로 몸을 일으켜라! 내 명이다!”
당태세는 말을 마치기 무섭게 목괴를 짚고 문을 훌쩍 열었다. 아룡은 당태세가 누군가의 호종을 받으며 객잔을 떠나가는 것을 열린 문을 통해 지켜보고 있었다.
멍한 눈으로 당태세가 사라진 객잔의 마당을 보던 아룡은 다시 시선을 돌려 자신의 품 안에 놓여있는 두툼한 장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사내의 입에서 혼잣말이 중얼중얼 흘러나왔다.
“동문의 천호…종리세리…종리천호……팔기…팔기군 천호 종리세리!”
아룡의 뿌옇던 눈에 조금씩 총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