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8. 절강 항주 (16)
“딱히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일은 어렵게 되었습니다. 좌당들이 말을 듣지 않아요.”
아침 일찍 전장 앞에서 만난 천리안 허종은 당태세의 얼굴을 똑바로 보지 못한 채 땅을 보고 웅얼거렸다. 소년의 얼굴은 거칠고 푸석해보였다. 제대로 잠을 자지 못한 듯 보였다.
아침부터 찌는 듯한 더위가 사방에서 몰려오자 소년은 피곤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더니 푸념하듯 말했다.
“왜 아직도 차용증을 받아내지 못하냐고 닦달하더군요. 하긴 그게 원래 제일 급한 일이었죠.”
“좌당이 어찌 용두의 일에 간섭한단 말인가.”
“……원래 그래왔습니다.”
당태세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리며 허종을 물끄러미 바라보아 말하였다.
“황병아와 어제 만났다. 오늘 내로 대충 그들이 행하는 사업의 전모를 들을 수 있을게다. 그러면 어떤 식으로 동성가가 항주의 일을 하는지 알 수 있겠지.”
“그렇습니까?”
“동시에 날 감시하겠지. 내가 황병아라도 그리 할 것이다.”
“황소저라면 그리 하겠지요. 맞습니다.”
“아쉽구나. 항주 홍문의 힘을 빌릴 수 있을까 하였는데.”
“저는 아무 도움이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당태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고 할 수 있는 것을 해야했다.
용담호혈에 들어가기 직전인데 더 많은 것을 바랄 수는 없었다. 단지 약간의 정보, 그 정도만 얻는다면 그것으로 항주 홍문의 역할은 충분한 것이었다.
“내가 알아봐 달라고 한 것은 알아냈느냐?”
“네, 관곡을 실은 배가 만성에 관곡을 내리고 그 앞의 좁은 수로로 빠져나가면 술도가가 있는 곳에서 크게 좌로 돌아 큰 운하가 있는 지류에 합류한 뒤 다시 북으로 올라갑니다.”
“북으로 올라간다고? 전단강을 타고 남쪽 소흥으로 가는 것이 아니고?”
“네, 그 배는 소주를 지나 장사를 지나 다시 관곡을 싣기 위해 간다 들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직접 들은 것이니 믿어도 되옵니다.”
“…그렇다면 배에서 곡식을 내리고 사람들을 어디선가 태우고 다시 북으로 올라간단 말이지? 그 행선지는 어디란 말인가?”
당태세와 허종 모두 그게 어디인지까지는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허종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당태세를 쳐다보았다.
“노사, 제 집에 머물고 있던 송각주가 정신을 차리자 한 마디를 한 게 있었습니다.”
“뭐라고 하던가?”
“자신이 갇혀 있었을 때, 뒷마당 벽 너머에서 사내들 수십 명이 두런대는 소리를 들었다고 합니다. 그것도 몇 번씩 들었다고 했습니다. 자기들이 어디로 가는 거냐고. 돈을 벌 수 있는 거냐며….”
“술도가 뒤에서?”
“네, 누군가가 인솔해 오지 않고서야 술도가에 모르는 사내들이 웅성댈 이유가 있겠습니까?”
당태세가 허종의 말을 듣고 이마를 만지작대자 허종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떨구었다. 소년은 아직 주름 하나 없어야 할 이마에 깊은 주름을 새기더니만 짧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송구하옵니다.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하였습니다.”
“아니다. 허용두. 그 정도면 되었네.”
“그래도….”
“내가 맡긴 돈은 언제든 꺼내 쓰게. 서명은 나중에 해 줄테니.”
허종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목괴를 짚고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갔다.
“노사.”
“좋은 일에 쓰게나. 내가 안 오거든 서명은 자네가 알아서 만들게.”
“노사!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당태세가 뒤를 돌아보자 허종이 결연한 표정으로 당태세를 보며 말하였다.
“관곡은 내일 들어올 것입니다! 장사의 보리수매가 늦어져서 원래 날짜보다 사흘정도 늦게 들어온다는 말을 들었는데, 역산(逆算)해 보니 그 날이 바로 내일이옵니다!”
당태세는 소년이 하는 말을 듣고 물끄러미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처음으로 푸근한 할아버지같은 표정을 지어보였다.
당태세는 슬쩍 미소를 지어보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이고 다시 목괴를 짚고 앞으로 걸어갔다.
허종은 성큼성큼 아침 햇살을 받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노인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당태세는 황병아와 절영자의 인도를 받아 서호 북쪽의 장원 안을 거닐고 있었다.
이미 해는 중천이고 사방은 열기로 가득 차 있건만, 녹림이 우거진 장원의 푸르름은 그런 뜨거움조차 다스리는 기운이 있는지 정원과 벽 뒤의 그늘은 서늘하기만 하였다. 산 위에서 불어오는 바람조차 열기 대신 서늘함을 머금고 있었다.
“뛰어난 풍광에 어울리는 정원이오.”
당태세의 짧은 감탄에 황병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계속 앞을 향해 나아갔다.
장원은 크고 담과 담 사이에 규칙이 있었으며 짧고 긴 복도마다 청황의 복색을 입은 사내들이 하나둘 씩 짝지어 있었다.
‘동성문은 이름을 감추었을 뿐, 사라지지 않았구나. 그 끈기와 집념은 칭찬해줘야 하겠군.’
당태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황병아는 앞장서 걷다가 슬쩍 당태세를 보면서 말하였다.
“이곳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던 이들은 원래 우리가 예전 고향대부터 거느리고 있던 식솔들이고, 해가 지나고 그 이들을 젊은 사람들로 교체시켰지요. 사람은 바뀌었을지라도 동성가의 유지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든든해 보입니다. 이 모든 것이 황소저의 지시입니까?”
“제 부친의 유산이지요.”
“선친께서는 상재(商才)만큼이나 현명하신 분이였을겝니다.”
“어머, 아직 아버지는 살아 계시답니다.”
황병아가 슬쩍 미소를 짓자 당태세는 겸연쩍다는 듯 황급하게 고개를 숙였다.
“이런! 이런 실수를! 죄송합니다. 어디 제가 가주님을 뵙고 안부라도 여쭐 수는….”
“그렇게는 안될 겁니다. 아버지는 저 위에 보이는 산사로 들어가셨지요. 한 달에 한 번도 얼굴을 뵙기 힘들답니다.”
황병아의 눈길이 머문 얕은 산은 장원의 뒤쪽을 따라 긴 소로가 연결되어 있는데, 산 중턱에 보이는 커다란 건물이 동성문주 황칠이가 머무는 곳 같았다.
“불사(佛事)에 뜻이 깊으시군요. 좋은 일이지요.”
“아버지는 장사꾼이고, 늘 관음행만 하신 것은 아니에요. 어느 때는 야차같이 사람들을 괴롭히기도 하셨고, 말로 못 전할 일도 꽤 하셨다지요. 젊은 시절의 일 말이죠.”
황병아는 당태세가 따로 묻지도 않은 말을 먼저 꺼내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노인은 억지로라도 미소를 지으려고 애쓰는 중이었고, 황병아는 그런 당태세의 속내는 알지 못한 채 계속 말을 이어갔다.
“자신의 지은 업보를 반성하고 싶으신 거겠지요. 개인적으로는 너무 민감하신 것 같아요.”
“그렇습니까?”
“자기 가족을 위해서 누구나 죄를 짓고 사는 게 인간 아니겠어요? 아버지는 우리 가족과 상단에게 해준 것만으로 자신의 의무를 다했다고 생각해요.”
“참으로 그러…그러할 것입니다.”
당태세가 굳어지는 혀를 풀며 억지로 말을 내뱉는데, 황병아는 다 왔다는 듯 슬쩍 걸음을 멈추고 당태세를 돌아보았다.
아름답게 미소를 지어보이는 여인의 얼굴에는 자신이 행한 것을 살펴보라는 묘한 자부심이 섞여 있었다.
당태세는 황병아가 서 있는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태세의 발 아래로 낮은 분지가 자리잡혀 있고, 그곳에는 기다란 가옥이 십여 채가 놓여 있는데 각 가옥의 앞에는 커다란 마당이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그 중 몇 개의 가옥에서는 사람들이 나와 오와 열을 맞추고 식사를 배급받는데 모두가 질서정연하게 규칙을 따르는 중이었다.
“각 집에는 백 명씩을 받고 있습니다. 가옥이 열 채이니 모두 합치면 한 번에 천 명씩을 수용할 수 있겠지요. 지금은 공급이 적어 삼사백 정도지만 노사께서 지원해 주신다면 천 명씩을 채울 수 있을 겁니다. 보름에 한 번씩이면 가능할까요?”
“이게…뭐 하는 곳이오. 마치 군진같구려.”
황병아는 뒤에 서 있는 절영자를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짧게 말하였다.
“더는 묻지 않으시는 게 좋아요. 우리가 할 일은 재화를 어디에 쓰느냐가 아니라 재화의 값을 얼마에 팔 수 있느냐는 것이죠.”
“지금 저들은 모두 황소저가 데려온 이들이오?”
“제가 집을 지으면서 그곳에서 데려온 사람들이죠. 저들은 나름대로 사정이 절박하지요. 일자리를 원하거든요. 저는 그들에게 원지(遠地)에서 일하게 해주는 대신 그곳에서 받은 돈으로 가족들을 부양할 수 있을거라 말하지요.”
“원지(遠地)로 보낸다고?”
“일단 보내는 것 까지가 우리 일이예요. 그 이상은 모릅니다. 노사께서도 보리를 팔면 그만이지 그 보리가 누구에게 가는 것 까지는 신경쓰지 않으시잖아요?”
황병아의 서늘한 미소에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보리와 사람이 같을손가. 대체 이들은 무엇인가? 어디로 간단 말인가?
“데려오는 것은 문제가 아니고 이곳에서 사내들을 건사할 수 있다면 숫자야 많을수록 좋겠지요. 하지만 사람들이 많아지면 이들을 어떻게 수송한단 말이오? 이게 관(官)의 일이오?”
“관(官)의 일은 아니지요. 아직까지는.”
들을수록 알 수 없는 말이었지만 당태세는 내친김에 마지막 의문점을 풀어내기로 마음먹었다.
“이들은 원지까지 어떻게 실어보내오?”
“빈 세곡선에 태워 보낼 거예요. 세곡선에는 관인(官印)과 통부(通符)가 달려 있으니 어디든 갈 수가 있으니까요.”
그 때였다. 발아래 펼쳐진 사내들의 숙소 앞에 뚱뚱한 노인과 홀쭉한 노인이 나타나 사내들을 바라보더니 손짓을 하며 이리저리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다름 아닌 일면불과 월면불이었다.
당태세가 그들을 뚫어지라 바라보며 수염을 쓰다듬자 황병아는 다시 말을 걸었다.
“노사께서 보기엔 어쩌신가요?”
“얼마씩 쳐 주겠소?”
“두 당 팔십 문. 개중 삽십은 저희가 비용대비로 받아야 하고요. 십문은 중개료라고 하지요. 사십문이 노사의 몫이예요.”
“구십으로 하고 사십오문을 주시오.”
“그건 너무 비싼데요.”
“어차피 보아하니 소저는 백문에 사람 하나를 넘기는 것 같은데…그렇다면 구십으로 하고 오문을 더 받는 것이 낫지 않겠소?”
사람 하나에 구십문이라. 당태세는 호흡을 갈무리하면서 천천히 황병아의 표정을 살폈다.
황병아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당태세가 흥정을 할 것이라는 건 이미 계산에 넣었다는 표정이었다.
한참동안 고심을 하는 척 하는 황병아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실로 어찌 보면 고혹적인 미소였다.
“그렇게 하시죠. 장대인. 언제부터 가능할까요?”
“한 보름정도는 기일을 주시오. 내가 소주에는 연이 없으니 최소 무창이나 장사에서 사람을 골라야 할 것이오.”
“그렇다면 오히려 잘 되었지요. 우리 배가 이곳에서 떠나 그쪽으로 올라갈 때 사람을 태우면 되는 것이니 말이예요.”
일사천리로 일이 진행되자 황병아는 기분이 풀렸는지 연신 미소를 지어보이며 당태세를 다정하게 쳐다보았다.
당태세 역시 이를 드러내며 껄껄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더니 황병아를 바라보았다.
“이거 참, 생각지도 않은 기회가 품에 들어왔구먼. 한 가지 내가 마지막으로 청이 있는데 그것을 들어주실 수 있겠소이까?”
황병아가 무슨 소리냐는 듯 당태세를 바라보자 당태세는 턱으로 아랫쪽에 움직이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황소저가 어떻게 저들을 다루는 지를 보고 싶소이다. 저들을 세곡선에 넣어서 움직인다는데 그 생각이 실로 놀랍구려. 내 눈으로 그것을 본다면 훨씬 쉽게 사람들을 데리고 올 때 도움이 될 것 같소. 그걸 보는 것이 가능하겠소?”
황병아는 문제될 것이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마침 잘 되었네요. 천시(天時)가 우리를 돕습니다. 세곡은 내일 항주 어귀에 도착할 거예요. 이미 전갈을 받았지요.”
“그렇소?”
“내일 자리를 만들어 볼 것이니 아침 일찍 북문 쪽으로 나오시면 되겠습니다.”
당태세의 눈빛이 번득였다. 오매불망 기다리던 소리였다. 드디어 귀린갈이 움직일 때가 된 것이었다.
그때였다. 갑자기 한 명의 사내가 급박하게 달려오더니 황병아에게 작은 서신을 전해주었다. 사내는 땀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고, 사내가 전달한 서신을 읽어보던 황병아의 표정 역시 갑자기 딱딱하게 굳어져 버렸다.
당태세는 슬쩍 황병아의 보고 무슨 일이냐는 듯 쳐다보자 황병아는 애써 미소를 지으며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장대인. 제가 하는 술도가에 일이 생긴 것 뿐이에요. 내일 아침 사시(巳時 09:00~11:00)까지 북문 앞의 운하로 나와 주시면 됩니다. 가능하시지요?”
“물론이오!”
“그럼 오늘은 여기서 헤어져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제가 밀린 일이 있어서 말이죠.”
황병아는 하인을 시켜 당태세를 안내해 줄 것을 명하고 절영자와 함께 먼저 장원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시운성의 주검이 발견된 것이 틀림없었다.
당태세는 하인을 따라 깊은 미로 같은 황가의 장원을 빠져나오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이 아직 남아 있음을 깨달았다.
‘시간이 채 하루도 남지 않았다.’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이 말라붙는 것을 느꼈다. 황병아가 눈치채는 것은 시간문제였고 일은 태산 같았다. 당태세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고 남동쪽을 돌아보았다.
만성(滿城)에 모든 것이 달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