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절강 항주 (15)
“숙부님 어서 오십시오. 이…이…분이 그러니까 그때 서호에서 뵌 그 분인데…아주…말이…청산유수에다가…이뻐서…제가….”
히죽히죽 웃으면서 두서없이 말꼬리를 계속 무는 아룡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던 당태세는 청년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들기고는 가타부타 말없이 옆의 침상으로 아룡을 옮겼다.
아룡은 자기 침상에 올라가자 당태세를 보며 히죽 웃더니만 그대로 고개를 침상에 처박고 코를 골기 시작했다. 그 모습 보던 황병아가 싱긋 웃음을 짓자 당태세는 겸연쩍은 얼굴로 여인을 보며 중얼거렸다.
“저 놈 대취하면 늘 저 모양입니다. 소저는 신경 안 쓰셔도 되오.”
“그래도 숙부님을 잘 따르는 착한 조카네요. 방 안에서 저 분이 한 이야기는 오직 숙부님 이야기밖에 없었지요.”
“어수룩한 놈이라오.”
당태세가 말하자 황병아는 슬쩍 고개를 저으며 당태세를 또렷하게 바라보았다.
“누가 뭐라해도 가족보다 중요한 것은 없어요.”
황병아는 술잔을 들고 있었지만 취한 기색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더불어 여인의 다소곳한 자세는 헛 점을 찾아볼 수도 없었다. 제대로 무공을 뼛속까지 체득한 사람의 자세였다.
마치 먹잇감이 바로 앞까지 오기를 기다리는 삵과 같은 모습이었다.
‘황칠이 이 견자놈이 자식은 제대로 가르쳤군.’
당태세는 여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앞에 놓인 술잔을 잡았다. 지금 이곳은 술자리가 아니라 상대방의 복심(腹心)을 알기 위한 자리임에 틀림없었다.
황병아는 여인이지만 지금까지 보이는 행보로 봐서 어지간한 장부보다 뱃심이 좋았다. 결코 얕잡아볼 상대가 아니었다.
“가족이 중요하지요. 가끔은 바깥 일로 속을 썩일 때도 있소만.”
“바깥의 일은 가족들이 같이 모여 처리해야지요. 그게 가족의 본분이니까.”
기묘한 문답이었다. 당태세는 술잔을 입에 가져가다 여인을 보며 다시 술잔에서 입을 떼었다.
“이 곳은 어인 일이십니까? 과분한 선물을 보내주신 것도 모자라 이 야심한 밤에….”
“확인해 볼 게 있어서 왔지요.”
황병아는 말을 빙빙 돌리지 않았다. 여인의 차갑게 정제된 표정과 눈동자는 익히 이런 일을 수도 없이 겪었다는 반증이었다. 당태세는 마치 자신이 심문을 받는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다.
“무슨 연유로 우리 동성가에 접근을 한 것인가요? 노사? 그런 적이 없다고 말씀하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접근이라? 그저 기회가 될 때 사람들을 알아보는 것이 내 낙이오만…….”
“노사께서 우리 가문에 도움이 되는 인물인지 해가 되는 인물인지도 모르겠는데, 저희가 노사를 굳이 만날 이유가 있겠어요? 그리고 처음 보는 외인이 이렇게 오는 경우라면 당연히 경계를 해야지요.”
“장사꾼이 경계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그건 맞소.”
“장사꾼이 이유없이 사람을 만날 필요도 없어요. 그렇죠?”
황병아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순간, 당태세는 황병아가 왜 이곳까지 온 것인지를 본능적으로 파악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않은 기회로구나!’
지금 황병아는 자신을 의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자신이 득이 되는지 실이 되는지를 염탐하러 온 것이었다.
위험하지만 뜻이 이루어질 수 있는 기회였다. 득의지추(得意之秋)라 함은 바로 이런 것이었다. 당태세는 다시 자신에게 암시를 하였다.
‘나는 상인이고 이문을 위해서는 무엇이든 사고팔 수 있는 위인이다. 기화(奇貨)를 찾아서 천리를 움직인다.’
당태세는 깊게 숨을 들이키고 자신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정리하기 시작했다. 머리가 차가와지자 길이 보였다.
황병아는 말없이 앉아있는 당태세를 유심히 보고 있었고, 당태세는 그런 황병아를 물끄러미 보면서 씩하니 깊은 미소를 지어보였다.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것을 물어봐 줬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이문이 남는다면 무엇이든 해야 하지 않겠소?”
“지금까지 무슨 일을 하셨지요?”
본격적인 싸움은 지금부터였다. 당태세는 황병아의 표정을 살피다 슬쩍 주위를 둘러보더니 목소리를 낮추었다.
“내 이야기를 소저가 다른 곳에서 말하지 않는다는 보장이라도 있는가. 그대가 이곳 녹영군이나 포괘와 이어져 있을지도 모르는데.”
“노대인께서도 팔기의 천호를 알고 계시잖아요? 이미 항주에 그 정도 인연이 있으니 이렇게 과감하게 나선 거 아니신가요? 소영주에 오기 위해 은원보 두 냥을 맡겼다는 이야기는 이미 전장의 화씨에게 들었어요. 그리고…….”
황병아의 눈이 번득였다.
“우리 동성가에 볼 일이 있으시니 접근한 거 아니신가?”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만면에 지은 교활한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뭐, 한두 개를 건드린 것이 아닌데. 어디부터 이야기를 하면 되겠소?”
“가장 최근 것을 이야기해보시죠.”
“무창의 약재가격을 뒤에서 움직인 적이 있소. 고영약당이라고. 그곳에서 약재를 받아 다른 곳에 옮기는 작업을 한 적이 있소. 고영약당이 무창의 약재를 거의 선점하고 있었지.”
“그리고요?”
“장사에서는 대봉상회라고…그쪽과 어울려 보리시세에 장난을 좀 치곤 했다오. 그게 쏠쏠하지. 대봉상회가 장사의 곡물시장은 다 잡고 있거든.”
대봉상회의 이야기가 나오자 황병아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대봉상회의 회주는 최근에 돌아가셨다 들었는데요.”
당태세가 고개를 끄덕이며 히죽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욕심이 너무 많더라고. 아무리 그래도 보리가격을 그렇게 올려놓으면 하류로 내려올수록 가격이 감당이 안 된단 말이오. 마지막 거래는 유야무야된 것이지.”
“욕심이 많아요?”
“아마 다음부터는 호가장에서 보리수매를 주관하지 않을까 싶은데…호가장이라고 아시오?”
당태세의 말을 듣던 황병아는 뚫어지라 노인을 쳐다보더니 무슨 말인지 알아챘는지 눈을 크게 뜨며 천천히 입을 벌렸다. 당태세는 여인의 표정을 보며 다시 조용히 말을 이었다.
“산동 제남에서의 일도 말해드리리까? 이곳은 장사라기보다는 관리의 업무였소. 제남의 치안을 녹영군이 맡았었는데, 그 수가 적기에 내가 그곳에 사람을 심어….”
“됐습니다. 그 정도면 대충 노사가 무슨 일을 하시는지는 알 것 같아요.”
황병아는 잠시 입술을 오무리더니 당태세를 보고 짧게 말하였다.
“돈이 되면 정말 뭐든지 다 하시는 분이군요.”
“표면으로는 산동 포구에서 관곡을 나르고 있소이다.”
“저희는 진짜 관곡을 나르고 있어요. 그리고 이문을 만들지요.”
황병아는 어려운 말을 단숨에 했다는 듯 짧게 숨을 고르더니 당태세를 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하지만 관곡은 건드리기 위험하죠. 노사께서도 그 말씀을 하셨지요? 관곡은 잘못 건드리면 집안이 도륙당할 만큼 위험한 일이고…솔직히 장사라고 할 것도 없죠. 그냥 횡령에 가까우니까.”
“맞는 말이오. 하지만 그게 동성가의 전부는 아니지 않소?”
당태세의 말에 황병아는 싱긋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이제 다른 곳에서 이문을 찾을 때가 되었지요. 시대가 바뀌고 있어요. 돈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면 망하는 세상이잖아요? 그래서 우리는 다른 일을 찾았어요.”
“차(茶)에 관련된 사업이오?”
당태세가 슬쩍 다른 곳을 찔러보자 황병아는 고소(苦笑)를 머금더니 고개를 가로저었다.
“노사께서도 아직 옛 방식의 사업을 중시하시는 거예요. 그건 선대께서 하시던 사업이지요. 요즘은 그게 돈이 되지 않아요.”
“그렇다면 집을 수축하고 다시 파는 사업이오?”
“돈이 되긴 하고 꾸준히 할 수 있는 일이지만 시일이 오래 걸리지요. 사람도 많이 부려야 하고요.”
“그러면 무엇이오?”
황병아가 술잔에 입을 대더니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짧고 빠르게 대답했다.
“사람이죠. 사람장사가 제일 이문이 많이 남는 달까.”
“사람?”
“관심이 있으세요?”
“창기(娼妓)나 주루(酒樓)같은 걸 말하는 거요?”
황병아가 갑자기 까르르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가렸다. 당태세가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하는 것이 꽤나 즐거운 모양이었다.
당태세가 슬쩍 불쾌하다는 듯 눈썹을 꿈틀대자 황병아는 미안하다는 듯 손을 올리고는 다시 다소곳한 표정과 어조로 말을 이었다.
“죄송합니다. 노사. 사람장사는 다른 게 아니라 장정들을 모아서 다른 곳으로 일을 보내는 거랍니다. 생각보다 훨씬 이문이 좋아요. 그런데 문제는 쓸 만한 장정들이 많지 않다는 거죠.”
“어떤 종류의 사내들 말하는 거요?”
황병아가 싱긋 웃으면서 두 손으로 물장구를 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걷고 뛰고 밥 먹고 말하고 연장을 쥘 수 있을 정도면 족하지요. 물론 튼튼해야 하고요. 튼튼하기만 하다면 상관없어요.”
“허, 어디 왕릉이라도 쌓는 것인가.”
“비슷한 일이지요. 어쩌면 그것보다 쉬울거예요.”
황병아의 눈이 당태세를 뚫어지라 쳐다보더니 붉은 혀가 입술 사이에서 날름거렸다. 여인은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당태세에서 듣기를 원하는 듯 보였다.
“노사에게 제가 원하는 것은 하나예요. 그런 사람들을 불러 모을 수가 있나요?”
“무창과 장사, 산동에서 그 어름까지 대충 연이 닿는 곳이라면 가능하지. 적게는 천이요 많게는 만 정도면 되는 거 아니겠소?”
황병아의 눈이 번득이더니 당태세를 보며 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평생 찾아 헤매던 정인(情人)을 만난 듯한 얼굴이나 다름없었다.
“제가 노사를 만난 것이 홍복(洪福)입니다! 제가 내일 다시 모시러 오겠습니다.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정확하게 선을 보이고 말씀드리는 것이 낫겠지요? 어차피 투자를 하는 일이니까요?”
“이문은 어떻게 나누실 생각이오?”
“그것도 내일 오셔서 말씀을 나누는 게 좋겠어요. 서호의 제 장원으로 직접 노사를 모셔가서 말씀드리지요.”
서호의 장원.
동성문의 본거지를 말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순식간에 눈 앞에 호랑이굴의 문이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당태세는 가슴이 두근대는 것을 가까스로 진정시키며 떨떠름한 표정을 꾸미고는 술잔을 들고 어쩔 수 없다는 투로 말하였다.
“중요한 것은 내일 만나서 말해야겠구려. 지금 먼저 말하지만 이문이 박하여 내 발품도 감당하지 못할 정도라면 난 빠지겠소.”
당태세의 마지막 말에 황병아는 싱긋 웃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던 술잔을 단숨에 비워버리더니 붉은 입술을 빛내며 말하였다.
“걱정마세요. 노사에게나 저에게나 이번 일은 하늘이 준 기회니까요.”
황병아는 우아하게 몸을 돌리며 일어서 객잔의 방을 빠져나갔다. 검은 옷의 사내가 문 밖에서 황병아를 호위하며 가마까지 몸을 돌렸다.
당태세는 황병아를 배웅하러 객잔의 앞까지 여인을 따라 나섰지만 검은 옷의 사내는 가마 앞에서 팔을 뻗어 당태세가 가까이 오는 것을 막아섰다.
“괜찮아요. 절영자(絶影子), 저 분은 내일도 뵙게 될 터이니.”
검은 옷의 사내가 뒤로 한 발 물러나고 당태세가 슬쩍 예를 취하자 황병아가 탄 가마가 천천히 움직이며 객잔의 어두운 골목을 미끄러지듯 빠져나갔다.
당태세는 고개를 약간 숙인 채로 어둠 속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가마와 사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입맛을 다셨다.
“보법이 어디선가 익숙하다 했더니…별호가 절영자(絶影子)라?”
노인은 한숨을 쉬더니 다시 객잔 안으로 들어갔다.
이제 어둠은 완연하게 항주의 골목을 감싸고 객잔의 등불을 어두운 섬인양 감싸기 시작했다. 화려한 성도는 시나브로 침묵 속으로 빠져드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