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절강 항주 (14)
허가전장의 사환, 주가는 늦은 밤까지 결산을 마치고 겨우 문을 걸어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해가 넘어간 뒤에는 전장 문을 열지 않는 것이 허가전장의 규례였지만 달마다 계산하여 본점으로 보내는 산표를 맞추려면 야근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주가는 원래 자신의 신분인 홍문 용두 천리안 허종이라는 신분도 잊은 채, 산판과 산표를 정리하며 고된 하루 일과를 끝낼 수 있게 된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중이었다.
그 순간, 누군가가 뒷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허종은 슬쩍 문을 흘겨보았다. 이 시각에 뒷문으로 들어오려는 이들은 홍문의 좌당이 아니라면 급전을 빌리겠다고 오는 술주정뱅이들뿐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뒤이어 노인의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허종은 마치 얼어붙은 듯 그 자리에서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허 용두! 허 용두 계시는가! 날세!”
갑자기 입안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두근대는 허종이었다.
소년은 주먹을 꽉 쥔 채 천천히 뒷문으로 걸어가서 천천히 빗장을 빼고 문을 열어젖혔다. 순간, 노인이 한 사람을 업고 객잔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데, 들큰한 술 냄새가 사방에 진동할 지경이었다.
“맙소사. 노대인,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여긴 객잔이 아닙니다!”
“술도가에서 구해 온 사람일세. 채무자야! 이 사람 이곳에서 돈을 빌린 적이 있나?”
허종이 눈이 둥그래져 당태세와 뒤에 업힌 사람은 번갈아 쳐다보다가 눈이 사발만큼 커지는데, 당태세는 허종이 자기가 업고 온 이를 알고 있음이 분명하다 여겼다. 아니나 다를까, 허종의 입에서 떨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송각주, 송각주 어찌 된 일이십니까? 가산을 정리해서 집을 처분하고 떠나신 줄 알았는데?”
“아…여기…허가전장…….”
“네, 저 주가입니다! 절 기억하십니까?”
깡마른 사내는 떠지지 않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허종을 보더니 천천히 이를 드러내고는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이…더러운…허가전장…놈들아…….”
당태세는 황망한 표정의 허종을 보더니 고개를 내젓고 짧게 말하였다.
“지금은 안 되겠네. 어디 이 사람을 숨기고 원기를 회복시킬 곳이 없겠는가?”
***
“……주가 말대로요. 나는 오래된 주루를 황소저에게 매각하고 소주로 떠날 예정이었지. 이미 처자는 먼저 집을 알아보게 한 다음 내가 떠날 요량이었던지라 먼저 돈을 허가전장에서 융통한 뒤, 주루의 매각대금으로 그 빚을 청산하려 한 게지.”
삐쩍 말라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던 사내는 허종의 집에서 물을 마시고 잠시 정양을 하더니만 잃었던 기억과 총기가 살아났는지 띄엄띄엄 자신의 과거를 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황소저가 매각하기로 한 주루를 매각하지 않는 거요. 본인이 매각을 하기로 해 놓고 약조한 날이 되도록 잔금을 주지 않으니 나는 빌린 돈의 이자 갚는 것도 벅차기 시작했지. 그렇게 이자를 갚다 갚다….”
“더 이상 변제가 안 되자 잡아간거요?”
당태세가 묻자 송각주라 부른 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차를 마셨다. 허종은 눈을 깜박이며 당태세와 송각주의 눈치를 보았다.
다른게 아니라 저 송각주의 차용증을 써준 사람이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기 때문이었다.
“송각주께서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지시고 기일이 되어도 이자를 안 내시기에 전 송각주께서 야반도주라고 한 줄 알았습니다.”
“난 술도가에 잡혀간 뒤였네. 그 일면…뭔가 하는 뚱보와 홀쭉이가 밤에 들이닥쳤지.”
“대체 왜 그런 짓을 합니까?”
허종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송각주에 되려 질문을 하는데 지금까지 두 사람의 말을 듣고 있던 당태세가 허종에게 말했다.
“예전부터 흔하던 일이다. 고리대로 원금의 절반쯤을 탕감했다 싶을 때 상환능력이 안되면 가지고 있는 것을 다시 되팔라고 시키는 것이지.”
허종이 당태세의 말에 뭔가를 깨달은 듯 짧게 탄성을 지르자 송각주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손가락을 들어보였다. 정신을 완전히 차린 뒤였지만 여전히 사내의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내게 주루의 소유권을 넘기라고 하더군. 싫다고 하였지. 정신 나간 피리부는 노인이 나를 하루에 일곱 번씩 때렸네. 죽고 싶었어. 혀를 깨물고 죽으려고 했는데….”
사내의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내 자식과 아내가 소주에 있어! 절대로 죽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 절대로 서명하지 않았어! 계속 때리더군! 맞다가 죽을 거라고 생각했어…사람들이 앞에서 계속 죽어나가는데…언젠가는 나도 저리 될 거라고….”
사내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흐느끼다가 기력이 다했는지 앉은 자리에서 그대로 까부러지며 몸을 구부러지는데, 당태세는 그를 안아서 침상으로 갔다.
허종은 절름발이 사내가 목괴도 짚지 않고 마른 사내를 그대로 짊어진 채 침상에 누이는 것을 질렸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는 중이었다.
“허용두, 자네가 상대하려는 동성문이 어떤 곳인지 슬슬 감이 오는가?”
당태세가 송각주를 침상에 눕히고 허종을 돌아보자 허종은 입맛을 다시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소년의 눈동자에는 결기보다는 두려움이 더 많이 들어차 있었다.
당태세가 허종을 보며 짧게 말을 이었다.
“걱정마라. 전위(前衛)는 나다. 너는 뒤에서 이 일을 주관하면 되느니라. 용두라는 게 그런 것 아니냐?”
“……제가 어찌하면 됩니까?”
“관곡이 들어오고 나가는 길을 알아봐라. 수로를 타고 들어올 것이다. 그들은 배로 사람들을 나른다고 하였다. 이번 일의 가장 큰 일은 그 관곡을 실은 배들이다.”
“그것만 찾으면 되는 것입니까?”
허종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당태세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허종을 바라보았다.
“진정으로 네가 할 일은 지금부터다.”
“네?”
당태세는 물끄러미 침상에 누운 사내를 바라보더니 허종에게 말했다.
“저 이를 바라보면 무슨 생각이 드는가, 홍문의 용두여?”
허종이 고개를 들자 당태세는 허종을 바라보며 준엄하게 말했다.
“대저 사람이 결사(結社)를 만들 때는 자신의 생업을 걸고 모든 것을 바친다는 신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네가 어쩌다 그 길에 들어서 한 결사의 두령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너는 이미 용두가 아니냐.”
“그…그렇습니다.”
“홍문은 반청복명이 전부냐? 핍박받는 백성들을 위한 휼민(恤民)은 강령에 없는 것이냐?”
“오직 홍문은 충의로 사람을 사귑니다.”
“그렇다면 너는 네가 할 일을 하여라. 일단 좌당 셋에게 말해 저 송각주가 숨을 곳을 찾아보아라. 그리고 좌당들을 풀어 네 전장에서 나간 돈을 갚지 못하고 끌려갈 위기에 있는 자들을 모두 숨겨라.”
허종이 난감하다는 듯 연신 혀로 입술을 핥으며 주위를 돌아보는데 당태세는 그 모습을 보다가 슬쩍 미간을 찌푸렸다.
“왜 그러는가. 그것이 어려우냐?”
“그리하면 제 정체가 아무래도 밝혀질 위험이….”
“위험 없는 결사를 원했느냐?”
허종은 잠시 눈을 찌푸렸다가 다시 땅을 바라보더니 한숨을 쉬고 당태세를 억울하다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저는 그저 제 가문의 억울함을 풀고 정성공 장군의 군대가 항주의 질서를 바로잡기만을….”
“그게 무슨 결사의 두령이냐!”
당태세의 짧은 호통에 허종은 고개를 자라처럼 움츠렸다. 노인의 눈동자에서 불통이 튀어 작은 허종의 방을 삽시간에 태워버릴 것 같았다.
“네 욕심 하나 차리려고 남의 돈을 갈취해 다른 사람에게 보내어 너 대신 창칼로 전쟁을 치루겠다는 거 아니냐! 그게 사람이 할 짓이냐!”
허종 역시 인상을 쓰며 당태세를 향해 고개를 쳐들었다. 무서운 판관 앞에서 자신의 죄를 변호하는 사람처럼 이미 두 눈에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뒤였다.
“저는 그저 종지만한 도량을 가진 놈입니다! 천리안이라는 별호도 제가 붙인 게 아닙니다! 그냥 저는 제가 억울하여 제 원한을 풀어줄 사람들을 찾고 찾다가…….”
“저 침상에 누운 자를 봐라! 저 자가 너다!”
허종이 눈을 돌려 기력이 쇠한 채 죽은 듯 잠에 빠져 있는 송각주를 보며 눈을 깜박였다.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아래로 떨어졌다. 당태세의 준엄한 목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사람들에게 정의를 원한다면 네가 먼저 협의를 보여라.”
당태세는 말을 남기고 허종의 집을 박차고 나왔다.
노인은 천리안 허종의 나약함에 부아가 치밀러 오르는 것을 견딜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선선한 밤공기를 마시고 객잔까지 천천히 길을 따라 걷다보니 오히려 겸연쩍은 소리를 한 것은 자신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나야말로 옛 원수를 갚기 위해 사방에 시신을 뿌려 놓는 귀신 아닌가. 남은 여생을 피로 물들이고 죽어서는 육도를 떠돌 각오로 사는 인간이 어찌 어린 아이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단 말이냐?”
노인의 독백은 곧 자신이 들으라고 하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당태세는 자신이 지금까지 걸어온 일을 일절 후회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신의 길을 다른 이에게 권하고 싶지 않았고, 만방에 드러내고 싶지도 않았다.
당태세는 장사에서 떠나올 때, 마지막으로 해도침옹 양중일이 남겼던 말을 다시 한번 생각해내었다.
“도리(道理)라.”
양중일이 당태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하여 그 말을 던진 것은 아닐 터였다. 그는 생의 종당까지 피냄새를 맡고 달려가기를 원하는 늑대의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리고자 했을 터였다.
“늦었지. 너무 늦었어.”
늙은 사내의 마지막 말은 자조에 가까웠다. 사내는 이제 운하 앞의 등롱이 하나둘 꺼지는 것을 보면서 터덜터덜 객잔 앞 골목으로 접어들었다.
그때였다. 사내는 객잔의 앞에 작은 가마가 하나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크기는 작고 장식도 없었지만 깔끔하고 고급스럽게 생긴 가마였다. 당태세는 슬쩍 객잔 안쪽으로 바라보았다.
뭔가 안 좋은 예감이 산전수전 겪은 무인의 신경을 건드렸다. 그때였다. 객잔 주인이 슬쩍 마당 안쪽에서 당태세를 보더니 히죽 웃으며 손짓을 하였다.
“아이고, 이제 오시네! 안 그래도 손님이 와 계셨는데 말이오!”
“손님?”
객잔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였다.
“아 왜, 오후에 선물을 보냈던 서호의 황부인 말이오! 그 분이 긴히 할 말이 있다고 다시 오셨지 뭡니까! 거 참, 노사 명망이 대단하시오! 귀한 분을 객실 밖에 세워 두시고 말입니다.”
당태세의 눈이 슬쩍 객잔 안쪽을 향하였다.
“황소저가 지금 내 객실에 들어가 있단 말이오?”
“그럼요! 지금 조카분하고 환담을 나누고 있습니다 그려!”
“아룡하고?”
당태세는 깜짝 놀라 객잔의 안으로 들어섰다. 객잔의 작은 마당에는 서호에서 만났던 검은 복색의 호법이 슬쩍 몸을 일으키며 당태세를 향해 묵례를 하였다.
검은 복색의 청년은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기도를 굳이 감출 생각을 하지 않았고, 당태세를 향해 보이지 않는 위협을 하고 있었다.
딱딱하게 표정이 굳은 당태세는 흑의청년을 그대로 지나쳐 객실의 문을 열고 바로 안으로 들어갔다.
문이 열린 방 안에는 아룡과 황병아가 서로를 마주보며 술을 한 잔씩 하고 있었는데 이미 불콰해진 아룡의 웃는 얼굴과는 달리 황병아는 안색에 취기 하나 없었다.
여인이 고개를 돌려 당태세를 쳐다보더니 히죽 큰 입에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 이제야 오시는군요. 장대인. 안 그래도 대인이 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지요.”
여인의 목소리에는 알아채기 힘든 스산함이 깔려있었다. 당태세 역시 그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야심한 밤에 이곳까지 무슨 일이십니까? 황소저?”
“글쎄요. 뭔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어서 말씀이죠.”
여인의 눈은 여전히 웃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