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 절강 항주 (13)
당태세의 목괴가 어둠속에서 독사처럼 목을 쳐들고 시운성의 가슴팍을 향해 날아들었다.
사내의 두 다리는 천년묵은 고목처럼 안정되어 있었고 어느 때보다도 빠르게 적의 요혈을 향해 질러 들어갔다.
하지만 철적귀성 시운성은 자신의 철피리로 들어오는 목괴를 옆으로 퉁기더니 슬쩍 몸과 허리가 기묘하게 뒤틀리며 앞으로 죽 팔을 뻗으며 철피리를 내질렀다.
당태세가 가볍게 역습을 피하였지만 시운성의 몸은 마치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것처럼 당태세를 따라붙으며 연이어 삼차 사차의 공격을 가하였다.
가느다란 철피리가 목괴와 부딪힐 때마다 놀라울 정도의 충격이 당태세의 손을 타고 전해졌다.
당태세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는데, 시운성은 다시 몸을 훌쩍 아래로 구부리는가 싶더니만 절을 하듯 앞으로 손을 죽 뻗으며 그대로 파리를 들어 당태세의 단전을 향해 자격을 날렸다.
“제법이다!”
당태세가 몸을 돌리며 목괴를 창처럼 휘둘러 시운성의 공격을 막아내었다. 당태세의 보법이 다시 방위를 밟으며 시운성의 공세를 차단하고 목괴가 채찍처럼 사방에서 날아들며 피리 든 사나이를 공격했다.
하지만 시운성은 비틀대며 기묘한 보법으로 들어오는 목괴들을 하나하나 차례대로 피하고 피리를 들어 마지막으로 떨어지는 목괴를 어깨 뒤로 퉁겨버리더니 바로 발을 구르며 쏜살처럼 앞으로 튀어나와 피리를 그대로 치켜들며 당태세의 머리를 가격했다.
슬쩍 옆으로 머리를 젖힌 당태세의 귀 옆으로 피리의 귀곡성이 울려 퍼졌다.
당태세가 한 발 뒤로 물러서며 목괴를 앞에 방패처럼 세우더니 시운성을 바라보며 말하였다.
“귀문혈적수(鬼門血笛手)는 여전히 쓸만하구나. 철적귀성.”
“평생을 써 온 기술인데 달라질 것이 있겠습니까.”
“하지만 네 공력이 예전만 못하다. 이대로 한 번 더 붙으면 죽으리라.”
당태세의 엄중한 말에 시운성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갑자기 피리를 늘어뜨리고는 저벅저벅 한 곳으로 걸어갔다. 다름 아닌 건너편에 있는 술항아리였다.
사내는 항아리 위에 떠있는 표주박을 들어 술을 한 잔 들이키고는 하늘을 보며 너털웃음을 지어보였다.
“오랑캐의 쌀로 만든 술을 마시고 백성을 판 돈으로 만든 떡을 먹고 살아보시오. 돈을 갚지 못하는 자를 때려 죽이고 일을 원하는 자는 원지로 보낸다오. 이 짓을 십여 년 하다보면 쌓여있던 내공도 저절로 없어지는 것입니다.”
“네 삶이 비루하다 느낀다면 어이하여 이곳을 뜨지 않았느냐.”
당태세의 말을 듣던 시운성은 눈을 흘겨 당태세를 바라보며 미소인지 짜증인지 모를 표정을 지어보였다.
“도덕과 학예는 버렸는데 빌어먹을 충심(忠心)은 왜 없어지지 않는 거요?”
“동성문에 대한 충성이 협객지도를 버리고 쓰레기로 사는 것을 가하게 하였느냐?”
시운성이 고개를 끄덕이며 당태세를 쳐다보았다. 사내의 눈엔 처연한 빛이 어렸다.
“내 바깥에 나가 태양을 보지 않은 지 십년이 넘었소.”
하지만 당태세의 반응은 시운성이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다. 당태세는 눈살을 찌푸리고 시운성을 노려보더니 차갑게 대꾸했다.
“해를 못 볼 만큼 떳떳하지 못한 삶을 산 주제에 무슨 사설이 그리 길단 말이냐? 너는 그냥 썩은 협객이다!”
“뭐라고?”
당태세는 대답대신 사람들이 묶인 채 죽어있는 항아리를 가리켰다.
“저 꼴을 내가 봤는데 여기서 네 하소연을 더 들을 이유가 있겠느냐? 혀를 더 나불대지 말고 내 장하(杖下)에 죽어라. 내가 가지고 있던 네 기억을 더럽히지 말고!”
순간, 시운성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하였다. 사내의 허여멀건하던 얼굴에 순식간에 화색이 돌며 시뻘겋게 변하는게 침침한 등불을 통해서도 보일 지경이었다.
시운성은 오른손에 철적을 꽉 쥐고는 이를 부드득 갈며 당태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때려죽여주마, 당태세!”
갑자기 술도가의 분위기가 일신하였다. 두 사내가 서로를 노려보는 기세만으로도 사방의 공기가 부풀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계속 이를 갈고 있던 시운성의 손에 들린 피리가 부르르 떨리며 피를 찾았다. 당태세의 목괴가 천천히 방위를 잡으려 야수처럼 흔들리는 시운성의 피리를 유도하였다.
두 사내가 천천히 발걸음을 맞추며 맴을 돌기 시작했다.
이를 갈던 시운성의 몸이 먼저 움직였고 당태세의 눈이 어둠속에서 번득였다. 요망한 빛을 뿌리는 피리가 뱀처럼 등불 빛을 휘감으며 당태세의 목을 향해 날아올 때 당태세의 목괴가 같이 움직이며 시운성의 피리를 받았다.
순간, 시운성은 피리로 목괴를 막아내더니 그대로 펄쩍 뛰어오르며 무릎으로 당태세의 옆구리를 찍어 눌렀다. 당태세의 오른발이 순간 위로 올라오며 시운성의 무릎을 무릎으로 막아내었다.
쾅 하는 쇳소리가 당태세의 오른발에서 울려 퍼지자 시운성은 눈을 찌푸리더니 다시 발을 내려놓자마자 몸을 돌려 회각으로 당태세의 턱을 노렸다.
당태세의 목괴가 어깨 위에 얹히며 시운성의 발차기를 위로 흘려보내고 그대로 땅을 지지하고 있는 발을 걸어 시운성을 쓰러트렸다.
하지만 시운성은 순간 몸을 허공으로 띄우더니만 그대로 땅에 착지하더니 다시 피리를 들고 달려들어 당태세의 머리를 부숴버릴 기세로 달려들었다.
순간, 당태세의 몸이 옆으로 빠지는가 싶더니 거꾸로 잡힌 목괴의 받침부분이 낫처럼 시운성을 휘감아 들어오며 옆구리를 찍어버렸다.
헉 소리와 함께 비틀대는 시운성의 옆머리를 향해 다시 한번 목괴가 떨어졌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시운성의 머리가 그대로 땅바닥에 처박혔다.
기나긴 신음이 시운성의 목구멍에서 흘러나오듯 사방으로 퍼졌다.
“호흡 조절도 안 되는 놈이 무슨 깜냥으로 공중제비냐?”
“닥쳐라!”
시운성이 다시 벌떡 일어나 피리를 휘두르려는 순간 당태세는 아예 시간을 주지 않으려는 듯 번개처럼 목괴를 휘둘렀다.
퍽 소리와 함께 다시 옆머리를 두들겨 맞은 시운성이 그대로 머리를 술항아리에 들이받더니 다시 풀썩 아래로 쓰러졌다. 그를 바라보던 당태세가 낮은 목소리로 덤덤하게 질문을 던졌다.
“동성칠걸은 모두 살아있느냐.”
“지옥으로 꺼져라…당태세…….”
다시 퍽 하는 소리와 함께 시운성의 입에서 낮은 신음소리가 흘러나왔다.
“너와 산도염(散徒焰)기박자, 후요곤(吼謠棍) 모등수는 내가 확인하였다. 다른 이들은 어디 있느냐?”
“……화영도 조호천은 살아있소. 나머지는…죽었습니다.”
“일곱 중에 넷이 살아있다니, 반은 남아있는 셈이로군.”
덤덤하게 중얼대는 당태세의 앞에서 엎드려 있던 시운성이 다시 피리를 쥐더니 천천히 몸에 힘을 주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당태세는 비틀대며 일어서려는 시운성을 물끄러미 보더니 다시 질문을 던졌다.
“돈을 갚지 않은 자는 이곳에서 네가 죽인다고 치고, 사람들에게 일자리를 준다는 것은 무엇인데?”
“당문주……나를 살려두고 심문하려는 수작이라면 관두는 게 좋을 것이오.”
순간, 바닥에 누워있던 목괴가 톡하니 발끝에 맞고 살아있는 듯 꿈틀대며 솟구치더니만 보이지 않는 속도로 시운성의 넓적다리와 옆구리와 가슴팍을 연달아 후려쳤다.
컥 하는 소리와 함께 시운성이 그대로 다시 앞으로 고꾸라지는데, 그를 보던 당태세는 덤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누가 널 살려준다더냐. 빨리 말하면 쉽게 죽일 것이고 늦게 말하면 고통스럽게 죽일 것이다.”
시운성은 누운 채로 고개를 돌려 무표정하게 그를 내려다보는 순천문주를 올려다보았다.
순천문주의 별호는 귀린갈(鬼燐蠍)이었다. 한번 목표로 찍은 인간은 도깨비불처럼 소리없이 허깨비처럼 흔적없이 다가가 전갈처럼 기필코 죽여버린다는 위인이었다.
시운성은 그제야 당태세는 생사(生死)에 관해서는 농담을 나누는 이가 아님을 기억해내었다. 시운성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그대는 내 삶의 질고를 이해하지 못하오.”
“네 놈은 죽었다 살아나서 원수를 잡으러 다녀 본 적이 있느냐?”
시운성의 눈이 다시 당태세를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한참동안 당태세를 바라보던 시운성의 입이 천천히 열렸다.
“그들은…쌀을 내리고 배를 태워….”
“뭐라고?”
“배를…….”
당태세가 혼자 뭐라고 중얼대는 시운성을 향해 슬쩍 고개를 숙이는 순간, 갑자기 시운성의 눈이 활짝 떠졌다. 사내는 온 몸의 힘을 두 손에 모았다.
시운성의 두 손이 땅을 받치고 상체를 허공으로 띄우며 개구리가 앞으로 날 듯 온 몸을 던져 당태세를 향해 튀어 나갔다.
그와 동시에 시운성의 철피리가 가슴께부터 팔을 타고 뻗어나가며 당태세의 목을 향해 그대로 화살처럼 찔러 들어갔다.
시운성은 두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문 채 마지막 일격에 혼신의 힘을 다 실었다.
그 순간, 당태세의 손에 쥐어져 있던 목괴가 부드럽게 아래에서부터 위로 올라오며 시운성의 철피리를 허공에서 걸어버리고는 옆으로 틀어버렸고, 당태세의 우장(右掌)이 옆으로 밀려오며 시운성의 태양혈을 그대로 휘갈겨 버렸다.
퍽 소리와 함께 시운성의 머리가 옆으로 휙 돌아가더니만 목에서 두둑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쓰고 말았다.
“당태세 이 멍청한 늙은아! 아직 물어볼 게 많은데!”
당태세는 자기 분을 못 이기고 몸을 일으키더니 시운성을 내려다보았다. 이미 목이 꺾여 죽은 시운성은 더 말을 나눌 수도 없었다. 당태세는 고개를 내젓고는 다시 투덜거렸다.
“늙으니까 겁만 많아져 가지고! 무슨 쇠피리 한 조각 날아오는 걸 가지고….”
자기한테 역정을 한참 내던 당태세는 크게 숨을 돌리더니만 쓰러져 있는 시운성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했다.
노인은 등불 하나를 손에 쥐고 천천히 사방을 꼼꼼히 살피는데, 지금까지 주향(酒香)과 섞여 맡지 못하던 시신의 냄새가 이제 분별되어 노인의 콧속으로 빨려들기 시작했다. 노인은 자기도 모르게 이를 드러내었다.
“짐승의 본성을 억누르며 살지 못하니 사람들의 눈을 피해서 죄를 짓는게지.”
당태세는 시운성이 죽은 곳에서 조금 떨어진 작은 탁자를 발견했다. 시운성은 이곳에서 사람을 때려잡는 일에만 관여한 것이 아니라 술도가의 전부를 관할한 모양이었다.
하긴 학문이 있던 사람에게 채무자 처리만 맡길 황병아가 아니었을 터였다.
작은 탁자 위에는 차곡차곡 쌓여있는 장부가 있었고, 당태세는 가장 위에 있는 장부를 등불 아래로 가져와 책자를 천천히 넘겨보았다.
당태세는 한참동안 숫자와 거기 써있는 글들을 바라보더니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관곡을 빼돌려 그 곡식으로 술을 빚었군. 그것도 바로 코 앞에서.”
당태세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짓다가 뭔가 생각났다는 듯 혼잣말을 다시 중얼거렸다.
“오랑캐의 쌀로 만든 술을 마시고 백성을 판 돈으로 만든 떡을 먹는다…?”
한참동안 시운성이 남긴 말을 음미하던 당태세는 뭔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이 보던 장부를 품속에 집어넣고는 시운성의 시신을 들어 아까의 술항아리 안에 밀어 넣었다.
찰랑대던 술통 안으로 사람이 하나 들어가자 일시에 술이 아래로 쏟아져 내렸지만 이내 술통은 다시 잠잠해지고 위에 띄워놓은 표주박은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한가로이 술 위에서 맴돌이를 하는 중이었다.
“여기서 볼 일은 끝났으니, 다음은 황가의 장원이나 차밭으로 가야….”
당태세가 한숨을 돌리며 술도가를 떠나려는 순간, 당태세는 화들짝 놀라며 다시 몸을 돌이켰다.
어디에선가 사람의 기척이 들려온 탓이었다.
그 소리는 사람들의 시신이 넣어져 있는 항아리 뒤쪽의 어두운 곳에서부터 울려 퍼지고 있었는데, 짙은 어둠 속 깊은 곳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분명 사람의 신음이 틀림없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소리가 울려 퍼지는 곳을 향해 등불을 가지고 뚜벅뚜벅 걸어가기 시작했다. 등불이 어둠을 내쫓고 천천히 사방의 윤곽을 눈앞에 보이기 시작하자 당태세의 눈동자는 더더욱 커지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술도가의 작은 철창 사이에서 보이는 것은 분명 깡마른 사람의 손과 발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