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4. 절강 항주 (12)
긴 낮이 지나가고 어스름이 깔려 사방 모든 것이 어둠 속으로 깊게 빨려 들어가 자신의 색깔을 잃어버릴 즈음, 당태세는 목괴를 짚고 천천히 항주의 밤거리를 향해 나섰다.
여전히 밤에도 운하와 대로는 휘황한 등롱의 불빛 아래 다른 색깔을 띠고 지나가는 사람들의 걸음을 늦추게 하는데, 노인은 이리저리 몰려다니는 인파 사이를 조심스레 움직이며 길을 재촉하고 있었다.
당태세는 슬쩍 주변을 살피며 사방을 눈치 채지 못하게 살피는 중이었다.
객잔을 나설 때부터 누군가가 자신의 뒤를 밟고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가 골목을 빠져나가 대로에 접어들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뒤에서 일정 거리를 두고 따르는 사내 하나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무공의 소양보다는 주인의 명을 충실히 따르는 심부름꾼같이 보였다. 아마도 황병아가 가지고 있는 업장에 속한 위인이나 노복일 터였다.
“다행이구먼. 쓸데없이 피를 보는 것으로 염탐을 시작하고 싶지는 않았으니.”
당태세는 목괴를 또박또박 짚으며 사람들이 밀려드는 곳으로 움직였다.
야시장과 주루가 몰려 있는 건물 근처로 움직이자 뒤에서 그를 미행하는 사람이 가까이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일단의 사람들이 가까이 밀려오자 당태세는 목괴를 짚고 비틀대며 그들 사이로 들어섰다.
골목과 골목이 만나고 대로가 접하는 복잡한 길거리에 사람들이 가득차자, 당태세는 목괴를 들고 두 발로 뚜벅뚜벅 걸어 보법을 달리하고는 그 자리를 벗어나 골목으로 들어갔다.
당태세는 골목에서 골목으로 움직이며 재빠르게 신법을 써 다른 대로의 입구 쪽으로 나오며 목괴를 어깨에 메고 재빠르게 걸어 사람들 사이로 섞이며 남쪽으로 내려갔다.
그를 쫓던 이는 여전히 골목과 골목 사이에서 지팡이를 짚고 나오는 노인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당태세는 희미하게 미소를 흘리며 중얼거렸다.
“내가 진짜 절름발이인가 가짜 절름발이인가 이젠 나도 모르겠구먼.”
한참동안 두 발로 멀쩡히 걸어가던 당태세는 다시 목괴를 겨드랑이에 끼고 천천히 운하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오른쪽에 보이는 거대한 만성의 성곽은 달빛 아래 검은색으로 빛나며 운하 옆의 등롱들을 노려보고 있는데, 그 위에 펼쳐진 팔기의 깃발은 어둠 속에서도 윤곽을 확실하게 보이고 있었다.
당태세의 발길은 만성의 아래에서 흘러나오는 수로를 통해 다시 이어지는 운하를 따라 걷고 있었는데, 그 물길이 휘어지는 곳에서 천리안 허종이 말한 붉은 벽돌의 거대한 건물이 앞에 나타났다.
당태세는 주변을 살폈다. 이미 해가 떨어진 골목은 등불 하나 달려있는 곳이 없어 손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컴컴한데, 슬쩍 붉은 담 안쪽에서 비추는 화광은 아직 사람들이 안에 있다는 증거였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다행스러운 것은 그나마 컴컴한 도로를 지키고 서 있는 이들이 없다는 것이었다.
“하긴 술도가에 보초를 세워놓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구먼.”
당태세는 천천히 담을 따라 주변을 돌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넓은 술도가는 여염집 두세 채를 합쳐놓은 듯한 크기였는데 어지간한 고관대작의 집만한 넓이나 다름없었다.
안에서 술만 담기에는 턱없이 큰 곳이었다. 노인은 벽돌을 쌓아올린 붉은 담을 손으로 천천히 쓰다듬으며 위를 쳐다보았다.
당태세는 목괴를 등 뒤로 돌려 장포의 허리띠에 꽂고 두 손의 손가락을 두두둑 풀어주고 벽돌 뒤에 손을 갖다 대었다.
벽돌과 벽돌 사이의 작은 틈새로 노인의 강철 같은 손가락들이 들어가자 몸이 위로 떠올랐다. 노인은 천천히 벽돌과 벽돌 사이의 작은 틈을 딛고 수직으로 서 있는 벽을 타올랐다.
젊어서는 별로 쓴 일이 없지만 다시 깨어난 뒤에 체득한 재미를 톡톡하게 보고 있는 벽호공이었다.
노인은 소리없이 높은 담을 타올라 기왓장이 떨어지지 않게 조심스레 아래를 보며 재빠르게 땅으로 착지하였다. 사내의 오른발에 채워진 보철이 슬쩍 쇳소리를 내며 땅에 닿았지만 주변에는 어떤 인적도 느껴지지 않았다.
당태세는 목괴를 짚고 천천히 술도가의 안으로 들어갔다. 문 없이 뚫려있는 작은 토담사이의 입구를 지나 천천히 안으로 들어서자 비로소 인기척이 들려왔다.
누런 벽돌벽 양 옆으로 커다란 술 단지들이 기둥처럼 쌓여서 회랑 아닌 회랑을 만들고 있는데, 건물 안에 또 달려있는 커다란 목제 양문의 옆에 두 명의 장한이 손에 굵은 몽둥이를 쥐고 서 있었고 나무문 안에서는 뭔가를 철썩철썩 메치는 소리가 작게 들려오는 중이었다.
당태세는 오감을 집중하였다. 뭔가를 지속적으로 치는 듯한 소리 사이로 가느다란 사람의 신음이 같이 섞여 들어왔다. 그리고 그 문 안쪽에는 앞의 보초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견실한 기감(氣感)이 잡혔다.
고수의 기도였다. 노인은 좌고우면하지 않았다.
노인의 그림자가 술 단지의 그림자와 섞여서 앞으로 흘러나갔다. 그림자 사이에서 노인의 몸이 같이 움직이다가 순간 나무문 앞으로 몸이 쏟아져 나왔다.
두 장한의 눈이 채 당태세의 움직임을 쫓기도 전에 당태세의 손에 잡힌 목괴가 번개처럼 움직이며 두 사내의 머리를 후려쳤다.
동시에 몽둥이를 떨구고 제 자리에 무릎을 꿇는 사내들을 뒤로하고, 노인은 소리없이 나무문을 열었다.
시큰한 주정(酒精)냄새가 노인의 코를 찔렀다. 나무뚜껑을 닫아놓은 거대한 솥단지 안에서 뭔가 부글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사방에서 풍기는 술 냄새는 맡기만 해도 취할 것만 같았다.
거대한 중류소는 작은 등불이 여기저기 하나씩 놓여있고 찐 보리와 수수냄새가 사방에서 불어왔다. 다른 냄새가 섞인다고 해도 모를 지경이었다.
“피를 뽑아내도 알 수 없을 지경이구먼.”
당태세는 목괴를 손에 쥐고 천천히 발을 내디디며 앞으로 걸어갔다. 아마 이 안쪽으로 찐 곡물들과 주정을 섞고 발효시키는 곳일 터였다.
앞으로 발을 내디딜수록 거대한 솥단지와 항아리는 점점 많아졌고, 술 냄새는 점점 더 심해졌다.
급기야는 코에서 아무런 냄새도 맡지 못할 지경이 될 정도였다. 당태세는 앞이 점점 환해지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 술도가의 깊은 곳에서 여전히 작업을 하고 있었다.
노인은 항아리의 그림자에 몸을 숨기고 조금씩 앞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거대한 솥단지 아래 몸을 숨기고 어깨를 슬쩍 돌려 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을 살펴보았다.
한 사내가 묶여있는 일단의 사람들을 회초리로 치고 있었다.
등불 아래 괴상한 빛으로 번들대는 회초리는 내리칠 때마다 기묘한 소리를 내며 사람들의 몸에 들러붙었는데 회초리가 떨어질 때마다 묶여있는 사내들의 입에서는 형언할 수 없는 소름끼치는 신음이 흘러나왔다.
보아하니 이제 비명을 지를 힘도 없는 이들 같았다. 그때, 느릿느릿한 목소리가 회초리를 쥔 사내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래. 돈이 없다면 어쩔 수 있느냐……목숨을 버리고 해탈하는 것이 마지막 방법일 뿐이다.”
순간 당태세의 안색이 변하였다. 노인은 저 회초리를 든 사내를 익히 알고 있었다. 당태세는 천천히 몸을 일으키더니 목괴를 짚고 앞으로 뚜벅뚜벅 소리내어 걸어갔다.
회초리 소리가 멈추고 사람들을 타작하던 사내가 고개를 돌렸다. 사내는 놀랍게도 변발을 하지 않은 회색의 장발이었다.
“철적귀성(鐵笛鬼聲) 시운성. 네가 살아있었느냐.”
“누구냐?”
“동성칠걸은 두 명 빼고 다 죽은 줄 알았더니 아직 다 죽은 게 아니로구나.”
회색 장발을 늘어뜨린 초로의 사내는 휙 소리를 내며 회초리를 손에 바로 쥐었다. 등불에 비친 회초리의 옆면에 일곱 개의 구멍이 선연하게 보였다.
사내의 손에 들린 것은 쇠로 만든 피리였다.
“누구냐고 묻지 않느냐. 절름발이.”
“순천문주 당태세다. 내 얼굴을 잊었는가?”
순간 등불에 비친 회색머리 사내의 얼굴빛이 삽시간에 변하더니 뚫어지라 목괴 짚은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윽고 사내는 자신의 피 묻은 피리를 주섬주섬 닦아 허리춤에 꽂고는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눈썹까지 손을 들어 올린 뒤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철적귀성 시운성, 삼가 당문주를 뵙습니다.”
“오랜만이구나. 시운성.”
“살아계신 줄 몰랐습니다.”
“반가운 게냐. 두려운 게냐?”
“둘 다입니다.”
“거짓말을 못하는 건 여전하구나.”
당태세는 말을 마치고 시운성의 뒤에 있는 사내들을 바라보았다.
거대한 항아리에 사지가 포박당한 채 묶여 있는 두세 명의 사내들은 혼절했는지 넋이 떠났는지 제대로 눈을 뜨고 있는 이들이 없었고, 이들이 묶여있는 항아리 아래에는 흘러나온 피와 물들이 흥건하였다.
“네가 이들을 고문하고 죽이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왜 네가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 동성문에서 가장 학예(學藝)가 높고 대나무 같던 이가 너 아니냐.”
시운성은 당태세의 질문에 대한 대답대신 고문당해 죽은 이를 바라보더니 입맛을 다셨다.
“이들은 본문의 돈을 차용하여 허랑방탕하게 쓰고 그 수취를 찢고 자신이 빌린 금액이 얼마인지 잊고 사는 족속들인 바-”
“그래서 죽였다고? 네가 일반 백성을 죽인단 말이냐?”
“도리가 없습니다.”
시운성이라 불린 초로의 사내는 슬쩍 눈에 주름을 잡고 있었지만 딱히 표정을 바꾸지 않고 있었다. 당태세는 앞으로 나와 죽은 자들을 돌아보았다.
이미 요혈을 얻어맞고 눈이 풀린 채였으니 십중팔구 이들은 돈을 받기 위해 고문한 것이 아니라 죽이려고 이 자리에 부른 것이 분명하였다.
당태세는 그제야 커다란 술 단지 안에 들어 있는 것이 술이 아닌 사람들임을 알 수 있었다. 앞에 묶여있는 사람들이 달린 단지는 총 세 개. 한 항아리 안에 몇이 들어있는 지 알 수가 없었다.
“이들은 모두 어디로 보내느냐.”
“산과 강으로 가져가 묻고 던지지요.”
“차밭과 운하에…”
“그러합니다.”
당태세는 눈을 치켜뜨고 시운성을 노려보았다.
“황칠이가 시킨 일이냐?”
“……소문주지요. 이제 문주께서는 세사에 손을 떼시고 불사(佛事)에만 전념하고 계십니다.”
당태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불사라니, 부하에게 이런 일을 시켜놓고 자기는 불사에 매진한단 말인가.
소문주라 함은 분명 황병아를 가리키는 것일 터였다. 당태세는 물끄러미 시운성을 바라보았다.
사내는 변발을 하지 않았고, 얼굴색도 하얗게 뜬 것이 해를 보지 않고 산 지 꽤 오래된 듯 보였다. 언제부터 이 술도가에 자리를 잡은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당태세는 슬쩍 시운성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이미 주독(酒毒)이 올라 예전의 준수했던 얼굴도 만신창이가 된 상태였고 눈동자도 고르게 초점을 맞추지 못하였다.
일신의 무공까지 사라지진 않은 듯 보였지만 정신이 멀쩡한지는 당태세도 장담할 수 없었다.
“고고하게 살던 놈이 왜 동성문에 끝까지 붙어있는지 내 종내 알 수가 없었다. 왜 이러고 사느냐?”
“선대문주와의 약속은 천금보다 중하오. 나는 동성문을 버리지 못합니다.”
“쓸모없는 충심이구나. 아름답고 서럽도다.”
“도덕과 학예는 명의 깃발과 함께 버렸소이다.”
“너도 너를 버렸구나.”
“옳게 보셨소.”
순간, 시운성의 손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허리춤에 꽃아 넣었던 철피리가 다시 바깥으로 뽑혀 당태세의 목을 겨누고 있었다.
사내의 불안한 눈빛과는 달리 아직 꼿꼿한 손과 피리의 끝은 그 기세가 살아 있었다.
“절름발이가 되었다고 봐주는 건 없소. 당문주. 나는 동성문을 보호해야겠소.”
“아무렴.”
당태세가 목괴를 바로잡으며 시운성의 목을 겨누었다.
“스스로 분발하여 네 목숨부터 건져보아라.”
노인의 발이 슬쩍 앞으로 뻗으며 목괴가 앞으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