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절강 항주 (11)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다.
당태세는 뜨거운 햇살을 등에 받으면서 천천히 사내들이 인도해 가는 행렬을 따라 동문 밖의 깊숙한 곳으로 움직였다.
사람들은 등 뒤에 볕을 받으면서도 장정들이 시키는 대로 터덜터덜 앞으로 걷고 있었고, 장정들 역시 뙤약볕 아래 말이 없었다.
짧은 행렬은 동문 밖 사당이 있는 곳에서 멈춰 섰고, 행렬을 인솔해 온 청년들은 몽둥이를 건들대며 사람들을 몰아세웠다.
“들어서 알겠지만 이제 이 근방에서 당신들은 알아서 터전을 꾸리시오. 이제 예전 집은 허물어져서 못 들어갑니다.”
“이런 법이 어디있소! 누대에 걸쳐 살던 집을….”
“그러게 돈을 준다고 할 때 알아서 비웠어야 하는 거 아니야!”
건장한 청년이 항의하는 노인에게 빽 소리를 지르자 노인의 다리춤에 매달려 있던 아이가 울음을 터트렸다.
당태세는 물끄러미 작은 언덕배기 옆에 앉아 사내들의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딱히 청년들은 당태세의 행동에 신경을 쓰는 것 같지 않았다. 늘상 있는 일로 여기는 듯 하였다.
당태세는 눈살을 찌푸리고 몽둥이 든 사내들을 보며 목괴를 꽉 움켜쥐는 중이었다. 그 때, 당태세의 눈이 슬쩍 커졌다.
“자, 앞에서부터 나오시오. 사흘 치 양식하고 돈이오.”
“이걸 받으려고 여기까지 온 줄 아느냐!”
“그럼 당장 어찌 할 거요? 집은 헐리고 갈 곳도 없으면서?”
노인은 이를 악물고 잠시 땅을 보더니만 어쩔 수 없다는 듯 청년에게 손을 내밀었다.
청년들은 자신들이 이고 지고 온 봇짐들을 사당 앞에 쌓아두고 사람들에게 하나씩 자루를 건네주는데, 그 안에는 음식과 돈이 들어있는 모양새였다.
당태세는 눈을 껌벅이며 자신의 앞에서 벌어지는 광경에 당혹감을 느끼고 있었다.
“양식과 돈?”
청년들은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착실하게 자신들의 일을 끝까지 마무리지었고, 끌려온 사람들은 멍하니 자루를 받아든 채로 체념한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일을 끝낸 청년들은 사람들에게 짧게 인사를 건네더니 터덜터덜 왔던 길을 따라 동문을 향해 올라갔다. 햇볕 아래 지친 것은 노인들뿐이 아닌 듯, 청년들은 당태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길을 걸어갔다.
“대체 이게 무슨 일인거요?”
햇살 아래에서 나타난 절름발이 노인이 맨 처음 양식자루를 받은 노인에게 다가가자 노인은 그를 바라보고는 한숨을 쉬며 푸념을 시작했다.
“평생을 살던 집에서 오늘 아침에 쫓겨나 살 터전을 잃어버렸소이다. 그래놓고 손에 주는 것은 쌀 한 줌에 돈 몇 푼이구려.”
“누가 이런 일을 했단 말이오?”
“원래 무너져 가던 집들이 즐비한 골목이었다오. 그런데 몇 달 전부터 계속 돈을 줄 테니 나가라고 말이 나왔지. 맨 처음 돈을 받은 이들은 나름 후하게 돈을 받고 나갔는데…….”
노인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자신의 손에 잡힌 자루를 멍하니 쳐다볼 뿐이었다. 당태세는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지금 노인이 하는 말을 듣자면 정당하게 가옥을 수매하고 끝까지 퇴거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소량의 돈과 양식을 줘서 쫓아낸 듯 싶었다. 하지만 이는 명대에도 있었던 일이고 딱히 어떤 것이 죄라고 할 일도 아니었다.
아니, 돈과 식량까지 줘서 내보냈다면 오히려 장자(長子)의 태도라고 칭찬받을 일 중 하나였다.
“빌어먹을.”
당태세가 뜻없는 욕지거리를 내뱉자 노인은 입맛을 다시며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떻게든 되겠지. 애 아범도 다시 일을 찾으러 나간다고 했고…….”
“그러고 보니 모두 아이들과 연로하신 분들뿐이구려. 장성한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소이까?”
“그들이 적당한 일자리를 찾아준다고 모두 데려갔소.”
“일자리까지 찾아주겠다고 말이오? 대체 누가 말이오? 집을 헐고 다시 짓겠다는 이들이?”
노인은 당태세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장정들이 돌아간 동문 근처를 쳐다보았다.
“시원스럽게 생긴 처자 하나하고 뚱뚱하고 홀쭉한 노인 둘이었지. 나름대로 예는 차려서 행동하는 것 같더구먼.”
***
갑작스럽게 전장 앞으로 다가온 당태세가 창구 앞에서 예의 졸고 있는 사환 허종을 바라보며 눈을 부릅떴다.
화들짝 놀란 허종은 주변을 돌아보더니 장반 화씨가 안쪽 사무실에 있는 것을 확인하고 목소리를 낮추었다.
“대인, 어찌하여 지금 오셨습니까? 지금은 차용증을 쓸 수가 없습니다. 장반이 퇴근하거나 아침 일찍 오셔야지요!”
“허 용두,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
당태세의 차가운 눈매를 보던 허종은 노인이 온 것이 차용증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단박에 깨달았다. 허종의 표정이 진지하게 변하더니 힐끗 뒤를 보고는 다시 당태세를 쳐다봤다.
“무슨 용무십니까?”
“동문 밖에 나가서 일면불과 월면불의 행태를 살피려 하였다. 황병아가 그곳에서 사람들을 내모는 것은 봤지만 상도(商道)에 아주 어긋나는 일을 벌이진 않았다.”
허종의 눈이 휘둥그래지자 당태세는 못을 박듯 차갑게 말하였다.
“차용증에 서명 같은 건 아예 없을 줄 알아라.”
“자, 잠시만 대인,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허종은 슬쩍 뒤를 쳐다보더니 화급하게 안쪽에서 문을 열고 창구 밖으로 나와 당태세를 끌고 전장의 구석으로 가서 빠르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뭘 보고 오신 겁니까? 저도 직접 가서 보고 오진 않은 터여서….”
“홍문의 용두라면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도 모른단 말이냐? 그러면서 용두야?”
“그 사안들은 좌장 삼인이 제게 가져다 준 정보입니다.”
“좌장이 용두를 속이는 것이라면 어찌 할 것인데?”
당태세의 말에 허종은 눈을 부릅뜨고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소년은 아직 자신의 감정을 모두 제어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일면불 월면불이 제 아버지를 협박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그곳에서 예를 차렸을지는 몰라도 결코 그럴 위인들이 아님은 제가 압니다! 정보가 꼬였거나 그들이 일을 바꾼 것이겠지요!”
“넌 그리 보느냐?”
“황병아는 용의주도한 여인입니다. 저도 예전에 한번 본 적은 있습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여자였습니다.”
당태세는 슬쩍 수염을 어루만졌다. 허종이 여기서 거짓말을 한다 하여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오히려 손해를 볼 일이었다. 그렇다면 결론으로 나올 수 있는 것은 둘 중 하나였다.
황병아가 일을 조심스레 처리하고 있거나,
홍문의 세 좌당이 거짓을 고하고 있거나.
당태세는 전장 안에서 다시 속삭이듯 허종에게 말했다.
“내가 그곳에서 듣기로 허름한 집의 재주없는 장정들을 모아서 일을 주겠다고 데려간다 하였다. 무슨 연유인지는 아느냐?”
“처음 듣는 소리입니다.”
“집을 지을 때 부려먹는 인력은 아니고?”
“집을 짓고 부수는 것을 재주없는 사람들에게 맡길 리 없지 않습니까?”
허종의 말을 듣자 당태세는 다시 침묵을 지켰다. 동문의 노인 말을 들어보면 뚱뚱이와 홀쭉이는 그 근방에서 종종 모습을 보인 게 분명했다. 굳이 양식을 주고 돈을 주는 자리에 그들이 왔다는 것은 그들의 힘이 필요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당태세는 이마를 만지작거리더니 짧게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모두가 거짓이거나 모두가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 수도 있지. 예전에는 그랬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을 수도 있고.”
“노대인”
“음?”
“그런데 이런 일을 파헤치는 것이 우리의 사업과 무슨 관계입니까? 노사께서도 이들과 원한이 있는 것 같은데…이들에게 어떤 식으로 원한을 갚기 위해 움직이시는 겁니까? 관(官)에 연줄이라도 있으십니까? 동성가가 항주에 대고 있는 연줄도 무시 못할 것입니다.”
당태세는 물끄러미 자신의 옆에 소리를 죽이고 앉아있는 허종을 바라보더니 짧게 말하였다.
“허 용두, 자네가 바라는 것이 가문의 재흥인가 아니면 복수인가?”
“둘 다입니다. 나는 정성공 장군께 군비를 대고 그들이 다시 반청복명하여 항주를 회복할 때, 저들을 치죄하고 내 부모의 명예를 되찾을 예정입니다.”
“원대한 계획이구나. 아쉽지만 나는 너처럼 주어진 시간이 많지 않다.”
“그러시면 무슨….”
“네가 산표에 올린 인간들은 모두 죽을 것이다.”
순간 허종의 얼굴이 마치 돌로 깎아놓은 석상처럼 굳어버렸다. 멍하니 초점이 나간 표정으로 당태세를 바라보는데, 당태세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허종을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너도 홍문의 용두라면서. 반청복명을 입에 내고 살 정도라면 당연히 사람 목숨을 취할 각오는 해야 하지 않느냐?”
“저…노사는 대체…….”
“지금부터 집중해라. 내가 봤을 때 저들은 지금 도리에 맞게 일을 하고 있다. 그렇다면 예전에 사람들을 핍박하는 일을 관두거나 다른 곳에서 은밀하게 하고 있다는 말이다.”
“……네.”
허종은 반쯤 넋이 나간 듯한 표정에 당태세를 귀신 보듯 하며 슬쩍 고개를 뒤로 빼고 있었다.
“일면불 월면불이라 불리던 노인 둘은 내가 예전부터 알던 이들이다. 동성칠걸이라 부르던 동성문의 고수들이지. 평생 사람잡던 놈들이 나이 먹고 개과천선했다는 소리를 난 믿지 않아.”
허종의 표정이 다시 조금씩 예전의 안색을 찾고 있었다. 당태세가 소년을 노려보았다.
“그들이 사람을 죽인다면 어디서 죽이겠느냐. 골라 봐라.”
“……황병아는 자신이 기거하는 장원과 차나무를 관리하는 숲. 그리고 술도가를 왕래합니다. 자신의 집에서 사람을 잡거나 협박할 리는 만무하지요. 의심 살 일은 안 할 것입니다.”
“동감이다.”
당태세의 눈을 보던 허종이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었다.
“차나무는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도 조금만 배우면 일을 할 수 있을 것이고 숲 속은 조용하니 인적이 드물 것입니다. 술도가는 사방이 넓은 집 안이니 집 안에서 무슨 일이 있는지 밖에서는 모를 것이고요.”
“나라면 술도가를 택한다.”
“네?”
“사방이 트인 곳은 위험해. 숲이야 죽은 사람이나 묻는 곳이지 산 사람에게 뭘 캐물을 만한 곳은 아니지.”
“노사, 당신은 누구십니까?”
“네가 그것을 알면 나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당태세의 입이 히죽 미소를 지어보이며 낮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허종은 다시 낯색이 창백해지며 한걸음 뒤로 물러났다. 아무래도 뭔가 단단히 잘못 연결된 인연이라고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당태세는 물러나는 소년을 바라보며 천천히 지팡이를 짚고 몸을 바로 하고 한마디를 던졌다.
“술도가는 어느 쪽이냐?”
“만성의 남쪽 아래 운하를 따라가다 보면 오른쪽으로 꺾어지는 지류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붉은 색의 커다란 벽돌담이 보이실 겁니다.”
당태세가 허가전장을 빠져나온 것은 아직 햇살이 채 지기 전이었고, 당태세는 해가 떨어진 뒤 야음을 틈타 술도가를 염탐하기로 마음먹었다.
당태세가 다시 숙소로 돌아왔을 때, 늙수그레한 객잔 주인은 그를 바라보더니 마침 잘 되었다는 듯이 반기며 그를 쳐다보았다.
“대인, 안 그래도 손님이 와서 대인을 찾았다 갔는데 이거 참 아쉽게 되었습니다그려.”
“손님이라니? 청인이었소?”
“무슨 말씀! 저 서호의 황씨 성 가진 부인께서 특별히 대인을 주라며 이리 선물을 보내오지 않았습니까. 차와 술입니다요. 허허, 대인 풍채가 남다르다 여기긴 했지만 그런 분과 교분까지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요!”
당태세는 눈을 크게 뜨고 자신의 방문 앞에 두고 간 커다란 술통과 찻잎이 담긴 나무궤짝을 바라보았다.
술통과 목함에는 검은 묵으로 황(黃)자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었으니, 황병아가 보낸 것임이 틀림없었다. 당태세는 물끄러미 두 물건을 바라보다가 나직하게 신음을 흘렸다.
“다 보고 있다 이것인가.”
노인은 슬쩍 주변을 살펴보았지만 어느 누구 하나 기척을 남기고 있지 않았다. 당태세의 이가 드러나며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나직하게 입에서 새어나왔다.
“바뀌는 것은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