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절강 항주 (10)
“역시 이곳에 계실 거라 생각했습니다. 종리천호. 항주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이 장모가 급히 이곳으로 왔지요. 이런 좋은 자리는 분명 놓치지 않으실 것 같아서 말입니다.”
“장행수?”
종리세리가 이름을 곱씹으면서 천천히 당태세의 앞으로 다가왔다.
황병아는 멍하니 청의 무관이 다가오는 것을 보다가 슬쩍 고개를 숙이며 한 발 뒤로 물러섰다. 종리세리는 당태세를 차가운 눈으로 노려보더니 황병아를 한번 쳐다보고는 당태세에게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인가.”
“아닙니다. 짧게 장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종리세리가 당태세의 말에 황병아를 쳐다보자 황병아는 미소를 지어보이며 다시 한 발 뒤로 물러났다. 관곡으로 장사 한다는 것은 결국 그 안에서 이문을 빼먹는다는 이야기인데 이런 이야기를 청의 무관 앞에서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황병아는 당태세를 잠시 쳐다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슬쩍 다른 곳으로 향하였다.
“두 분께서 격조하셨던 모양이군요. 장대인과의 해후는 나중으로 미루지요.”
여인은 슬쩍 자리를 비켜 다른 귀빈들이 있는 곳으로 움직였다. 당태세는 여인이 자리를 피하면서 황삼과 두 명의 사내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을 보았다. 이중, 삼중의 감시를 치고 있었다. 용의주도하기 그지없는 여인이었다.
“장행수라. 지금 나를 방패막이로 쓰자는 것인가.”
종리세리의 차가운 눈동자가 당태세를 바라보자, 당태세는 입맛을 다시더니 다시 종리세리를 바라보았다. 사내는 소주에서 만났을 때나 지금이나 달라진 것이 하나 없는 복장과 표정이었다.
“어쩌다 보니 그런 식이 되었소이다. 미안하오.”
“순천문주. 나는 그대의 벗이 아니오. 그리고 그대의 복수행에 도움을 줄 이유도 없소.”
“그래도 천호께선 지금 당장 날 잡아들이시지 않는구려.”
“당신이 노리는 자들이 이 회합을 주재한 저 여인과 식구들은 아니겠지?”
순간, 일면불과 월면불, 그리고 황삼이 지팡이를 짚고 있는 당태세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종리세리는 슬쩍 그들을 바라보더니 당태세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다른 건 몰라도 당신이 찾는 게 저 자들이라면 이 자리를 떠나는 게 좋겠소이다. 이미 당신에 대한 의심을 하고 있는 것 같은데? 아니면 내가 그대를 잡아가도 되고.”
순간, 당태세는 저 멀리서 풍광을 보고 있던 아룡을 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룡은 무슨 일인지 영문도 모르는 채 당태세 곁으로 다가왔다가 옆에 청의 무관이 서 있는 것을 보고 순식간에 몸이 얼어붙어 버렸다.
당태세는 히죽 웃음을 지으며 아룡을 종리세리에게 큰 소리로 소개시켰다.
“무두리! 여기 계신 종리천호가 내가 말한 그 분이시다. 북경에 직이 있으시지. 예전에 이 숙부가 많은 신세를 진 적이 있느니라!”
이미 반쯤 얼이 빠진 아룡은 당태세의 소개에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더니 고개를 있는대로 숙이고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종리세리에게 인사인지 절인지 모를 것을 올렸다.
“소생, 무두리. 천호를 뵙습니다!”
“무두리?”
“네! 천호대인!”
당태세와 아룡이 청의 무관과 인사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황삼과 일면불, 월면불은 슬쩍 고개를 젓고 어깨를 움찔하더니만 다시 다른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당태세와 아룡이 하는 양을 바라보던 종리세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당태세를 다시 돌아보았다.
“교활한 것은 그대를 따를 자가 없을거요.”
“그저 제 조카가 미욱한 것이니 해량해 주십시오.”
“미욱해 보이긴 하는군.”
“예에, 그렇습니다! 무두리! 되었다. 나중에 내가 자세히 네 소개를 전해드리마!”
당태세는 고개를 아직도 숙이고 있는 아룡의 등을 탁탁 두들기며 인사를 했으면 어서 가보라는 듯 엉덩이를 들이밀었다.
멀뚱하니 서 있는 아룡을 다른 곳으로 보낸 뒤 당태세가 다시 다가오자 종리세리는 다시 주위를 살피더니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당태세 역시 그와 함께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회랑을 돌아 빠져나갈 때 당태세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스럽게도 그들 뒤를 따라붙는 사람들은 이제 없었다.
새하얀 구름 위 새파란 하늘 아래 초록 물이 사방으로 펼쳐진 도원 같은 섬 위를 두 사내가 말없이 섬돌을 따라 걷는데, 한 줄기 서늘한 바람이 사내들을 둘러싼 물에 작은 파문을 일으켰다. 먼저 말을 건 것은 종리세리였다.
“조카까지 청나라 무관에게 소개를 시킬 정도로 막역해 보이면 간자(間者)라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이거겠지.”
“말씀하신 그대로요. 종리천호.”
“나는 지금 고함 한소리로 그대를 이곳에서 포박하고 서호 밑바닥에 그대를 수장시킬 수도 있소.”
“알고 있소이다.”
종리세리가 말을 멈추고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그렇다면 무엇을 믿고 자신에게 다가오냐는 무언의 물음이었다. 당태세는 잠시 숨을 골랐다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족쇄가 풀린 야수를 여염에서 가축으로 삼겠다 한들 그 본성이 바뀌겠소이까.”
“저들이 야수란 말이오?”
“동성문이오. 항주에서는 동성가라고 자신들끼리 말하지만 그 활동은 철저하게 숨기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래서 나도 종적을 찾지 못하였군. 주방팔기 안에서도 동성문을 아는 이가 없었소.”
“이제 그 꼬리를 찾았으니 몸통을 밝혀낼 셈이오.”
“그런데 그게 나하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순천문주 당태세.”
종리세리가 우뚝 그 자리에 멈춰서서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사내는 칼을 차고 오지 않았지만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엄정한 기운은 어지간한 사람은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하게 할 정도였다. 종리세리는 당태세를 바라보며 말했다.
“당문주. 나는 그대가 하는 일을 감싸줄 이유가 없소. 당신을 지금까지 놔두는 이유는 당신의 원수들이 국법을 범하고 선량한 풍속을 해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이지. 솔직히 그걸 감안한다 해도 당신의 손속은 무참하고 독랄하기 그지없더군.”
“내 별호가 귀린갈(鬼燐蠍)이오.”
당태세의 말에 종리세리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대는 원한에 사로잡힌 살인광이나 다름없소. 내가 떠난 뒤에 소주에서도 같은 일을 벌였나?”
“내 과거를 들었다고 하지 않았소?”
종리세리는 당태세의 얼굴을 말없이 쳐다보더니만 다시 고개를 돌리고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당태세가 그의 뒤를 따르려 하자 슬쩍 그는 손을 뻗어 당태세가 따라오는 것을 제지했다.
“내가 그대를 살려주는 것은 그대의 험난한 과거지사 때문이 아니라 지금의 사태가 험하기 때문인 것이오. 그대나 그대가 죽이는 자들이나 내 입장에서는 같은 죄인이오. 단지 나는 얼굴에 분칠을 하고 교언영색하며 백성과 황제를 속이는 자들을 더 싫어할 뿐이고.”
“알고 있소이다.”
“조만간 당신 역시 내가 치죄할 것이오. 그대의 무공으로 내게 대항하겠다면 하시오.”
종리세리가 뒤를 돌아보며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종리세리의 표정은 다시 엄숙한 선무사 천호의 얼굴로 바뀌어 있었다.
“그대의 무공이 불세출이라 한들 나 역시 물러서지 않을 것이니.”
당태세는 사내의 얼굴을 보더니 천천히 허리를 펴고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지어보였다. 조소나 실소가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미소였다. 사내는 천천히 두 손을 모았다.
“내 천호에게 먼저 약조하겠소이다. 이번 일이 대의에 맞지 않으면 동성문을 치지 않겠소.”
종리세리의 눈이 슬쩍 커졌다. 하지만 사내의 입에서 나온 것을 실소였다.
“허, 그대의 복수행을 미루겠다고? 복수행을 업으로 삼고 사는 이가?”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믿소이다.”
“뭘?”
“한 번 사람과 나라를 배신한 놈들은 결코 한 번으로 그치지 않는 법이오.”
종리세리는 대답없이 당태세의 눈을 바라볼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묵약(默約)이나 다름없었다.
청의 무복을 입은 한인은 짧게 한숨을 쉬더니 알겠다는 듯 당태세에게 손짓하며 이제 물러가 보라는 시늉을 하였다. 하지만 노인은 아직 남은 말이 있다는 듯 종리세리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한 가지 부탁이 있소만. 뭔가를 조사해 주셨으면 합니다.”
종리세리가 당태세를 빤히 쳐다보더니 한마디를 던졌다.
“정말 뻔뻔할 정도로 대담하구려.”
“가능하겠습니까?”
종리세리의 눈이 가느다랗게 변하며 노인을 노려보더니 천천히 턱을 들고 노인을 내려 보았다.
“그대가 나를 만날 수만 있다면야.”
바람이 불고 호수 다리 아래 떠 있던 연꽃이 넘실거렸다. 사내 둘의 머리 위에 있던 거대한 성벽같은 하얀 구름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짧은 대화는 연꽃도, 구름도 채 알아듣지 못할 만큼 조용하였다.
***
당태세와 아룡은 털끝만큼도 다치지 않은 채로 처소로 돌아왔다.
사방의 훌륭한 경치에 식사까지 대접받고 온 아룡의 기분은 하늘을 날아갈 것 같았고, 별탈없이 다시 처소로 들어온 당태세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아마 황병아는 팔기의 천호와 안면이 있는 이를 건드려봤자 좋을 것이 없고, 그다지 위험하지 않은 인물이라 판단한 듯 싶었다.
하지만 당태세는 슬쩍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우연하게 종리세리를 만나 위기를 모면했다고는 하지만 실제로 모임에서 얻어온 것은 하나도 없다시피 하였다.
황병아의 하는 일만 알아왔을 뿐이고 동성문의 실제적인 행동이 어디서 이루어지는 것인지도 채 파악을 하지 못한 터였다. 결국 당태세 자신의 용모만 황병아에게 각인시키고 돌아온 꼴이었다.
“어쩐지 너무 잘 풀린다 하였다. 빛 좋은 개살구 꼴이라니.”
“네? 무슨 일이십니까? 숙부님. 빛 좋은 개살구라니오?”
“아, 아니다. 너무 열심히 말하느라 제대로 뭘 집어먹고 오질 않아서 한스럽구나.”
“하하하! 그 무슨 말씀이신가 했습니다! 어쩐지 그 천호하고 너무 열심히 말씀하신다 했습니다. 어디서 두 분이 교분을 맺으신 겁니까?”
“북경에서 만났던가 예전 산동에서 만났던가…가물가물하구나.”
대충 아룡과의 대화를 얼버무리던 당태세는 결국 마음을 정했다는 듯 두 손을 짝하니 맞물렸다.
궁하면 통한다고, 필요한 사람이 대책을 마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천리안 허종이 준 산표에 써 있는 대로 하나하나 만나가면서 일을 풀어야 했다. 그리고 그 길을 막는 자들은 그곳에서 없애야 할 것이었다.
***
원래 항주는 사방의 물산이 풍족한 곳이었고, 다른 성에 비해 넉넉하니 인심도 좋은 곳이었다.
물론 부의 편차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라 부자와 가난한 자가 나뉘곤 했지만 지금의 동문처럼 빈자들이 우르르 모여 토굴 같은 곳에서 연명하던 적은 없었다.
“청군이 들어오면서 한 번 항주가 박살이 난 적이 있었다고. 그 때 가세가 기울어 아예 회복하지 못한 곳이 숱하지. 그게 여기 모여 사는 이유야.”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웃옷을 벗어젖히고 이를 잡고 있던 노인은 앞니 빠진 얼굴에 미소를 지으며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몸에서 무언가 빠져나간 듯한 노인은 가진 게 없으니 오히려 편안하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토굴과 간신히 올린 기둥에 판자를 덧대 이은 집들 사이로 작은 골목이 형성되고 나름대로 사람들이 살아가는 마을이 만들어져 있는데, 갈 곳 없는 노약자들이 반이요 성에서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는 하류가 반이었다.
멀쩡한 하오배들조차 오기 꺼려할 것 같은 곳이었다.
당태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살펴보았다. 도박장을 할 만한 곳도 없었고, 그렇다고 하오문이 할 만한 술집 같은 것도 보이지 않았다. 변변한 창고 같은 것도 없는 동리였다.
아무래도 천리안 허종의 말과 실제는 다른 것 같았다.
“노인장, 이곳에 혹시 사내들이 다니며 빚을 받아낸다던가 하는 일이 있습니까?”
“뭐? 빚? 이런 마을에 빚을 질 사람이 어디 있나? 무슨 물건을 가져다가 보증을 설 것인데?”
이를 잡던 노인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당태세를 쳐다보며 깔깔대는데 당태세는 낭패했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뜨거운 햇살이 머리 위를 내리쬐어 이미 목 뒤는 흥건하게 땀에 젖은 뒤였다.
“대체 이런 곳에서 무슨 빚을 받아낸단 말인가.”
그때였다. 일단의 사람들이 동문을 통해 걸어 내려오는 것이 당태세의 눈에 들어왔다.
들어오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남루하니 헤진 옷에 아이들과 노인들이 대부분이었는데,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공허한 눈에 시름이 가득하였다.
문제는 그들 뒤에 건들대는 장정들 대여섯이 몽둥이를 하나씩 들고 그들을 양떼처럼 이끌고 있는 모양새였다.
당태세는 옆의 이 잡는 노인을 바라보며 저게 뭐냐고 물으려 하자, 이 빠진 노인이 먼저 선수치며 히죽 웃음을 지어보였다.
“새 식구들이 들어오는구먼.”
“음? 새 식구라니요?”
“저 젊은이들이 늘 새 식구를 들여와.”
“아는 이들이오?”
이 빠진 늙은이는 어깨를 들썩하더니 다시 해맑게 웃음을 짓고 자기 옷의 이를 노려보았다.
“갈 곳 없는 사람들이지. 어디서 모아오는지 원…그나마 오늘은 적게 오는구먼. 뚱뚱이와 홀쪽이가 안 오는 걸 보니.”
당태세가 노인의 말을 듣다가 슬쩍 노인을 쳐다보았다.
“뚱뚱이와 홀쭉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