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41화 (141/226)

141.  절강 항주 (9)

뭉게구름이 하늘 위에 하얀 탑을 쌓아올리고 그 위에 또 다른 천상(天上天)을 쌓아올린 아침, 당태세와 아룡이 묵고 있는 객잔으로 천리안 허종이 편지를 들고 찾아왔다.

하지만 허종은 항주 홍문의 용두로 온 것이 아니라 허가전장 사환의 자격으로 찾아와 당태세에게 초대장을 주러 온 것이었다.

“오늘 서호(西湖)의 소영주에 허가전장의 전주께서 고객들을 모시는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고객 뿐 아니라 항주의 귀한 손님들과 만성의 고관대작들도 같이 하는 자리이니 귀한 발걸음을 옮겨 주시면 참으로 감사드리겠습니다.”

사환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고 있던 아룡의 입이 헤벌쭉 벌어지며 당태세를 바라보는데 당태세는 그것 보라는 듯 아룡을 보더니 히죽 열없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거 봐라, 내가 뭐라더냐? 돈 맡기길 잘 했지?”

“허, 웬일로 숙부님이 이런 일을 성사시키셨습니까? 영 숫기 없으신 분이 어쩌려고 이런 떠들썩한 자리를 만드셨어요?”

“험! 나도 너와 같이 다니며 배운 것이니라. 가만있자. 만성의 고관들도 참석한다고 하니, 무두리. 너는 의관을 단정히 하고 네가 당당한 청의 신민임을 만천하에 보여주도록 해라!”

“여부가 있겠습니까! 제가 청조 남아의 표본임을 만방에 알려줄 것입니다!”

허가전장의 사환, 천리안 허종은 당태세와 아룡의 만담 같은 대화를 들으며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었다.

지금까지 당태세가 그의 앞에서 보여줬던 것과는 전혀 다른 표정과 인상으로 조카와 떠벌대는 광경은 아무리 해도 적응이 안 되는 듯 보였다.

아룡은 사환을 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그만 나가보라는 시늉을 하였고, 사환은 당태세에게 슬쩍 눈인사를 하고는 바르게 객잔에서 물러났다.

확실히 천리안 허종은 눈치 하나만큼은 아룡만큼이나 빨랐다. 당태세는 아룡을 바라보며 조용히 누가 들을 새라 목소리를 낮추었다.

“자, 무두리. 이제 우리가 슬슬 나설 때로구나. 아무쪼록 그 때 말한 것처럼 우리 정체를 들키지 않고 즐기다 오면 되는 것이다.”

“그럼요! 여부가 있겠습니까!”

앞으로 있을 일에 신이 난 아룡을 보면서 당태세는 히죽 이를 드러내고 웃어 보였다. 오늘 그 자리에서 보는 이들이 항주 동성문의 복수행을 결정하는 이들이 될 것이었다.

***

서호는 당대의 문인이었던 소동파와 백낙천이 지방관으로 부임해 각각 자신들의 시대에 치수를 하고 방죽을 쌓아 만들어 놓은 사람이 빚은 호수였다.

그리고 두 걸출한 문인이 만들어 놓은 호수 한 가운데를 명(明)의 황제 만력제가 준설을 하고 흙으로 메꿔 밭 전(田)자 모양의 인공섬을 만들었으니 그것이 바로 소영주라는 섬이다.

이 섬은 호수 가운데 다시 호수를 만든 섬으로 서호 사방을 관조할 수 있는데, 이 소영주에서 호수를 바라보는 것이 일세의 가경(佳境)이라 전해지고 있었다.

지금 당태세와 아룡은 허가전장이 마련한 커다란 배에 몸을 싣고 항주의 유력가들 사이에 앉아 넓은 호수를 가로질러 소영주로 들어가는 중이었다.

이미 당태세와 아룡은 자신들의 성을 장(長)씨로 둔갑하고 산동 포구에서 관곡을 거간하는 중간상으로 행세할 것을 입 맞춰놓은 뒤였다.

“소주의 경치가 천하제일이라 믿었는데 실로 항주의 사방 경관은 소주에 버금갑니다. 숙부님. 아니, 풍취는 항주가 더욱 아름다운 것 같습니다!”

아룡이 물결을 가르며 나가는 뱃전 위에서 연달아 탄성을 지르는데, 당태세는 웃으며 지팡이에 손을 걸친 채 커다란 배에 탄 사람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대부분은 항주에서 나고 자란 토박이들로 황병아가 벌려 놓은 여러 사업에 인연이 닿는 이들 같았다.

당태세가 봤을 때 저들 중에 무공을 쓰는 이들은 극히 드물어 보였고, 그들이 호법 삼아 데려온 몇몇 젊은이들 정도만이 조금의 내공이 잡히는 수준이었다.

당태세가 슬쩍 고개를 들어 뱃머리를 바라보자 앞에 보이는 소영주를 향해 움직이는 다른 커다란 배들 몇 척이 보였다. 황병아가 부른 다른 손님들일 터였다. 꽤 많은 숫자의 사람들이었고, 이들이 이 항주의 돈줄을 좌지우지하는 이들일 터였다.

“이거 괜스레 거한 자리에 불려 온 거 같구먼.”

당태세는 쓴웃음을 지르며 다가오는 소영주를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먼저 도착한 배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내리는데, 작지 않은 섬은 지은 지 얼마 안 되는 전각들과 오래된 전각들이 서로 어울려 회랑을 만드니 마치 섬 자체가 커다란 별궁(別宮)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일행은 한데 모여 소영주의 가운데 놓인 커다란 전각으로 들어가니, 그곳에는 한 여인이 하얀 비단옷을 입고 서서 다가오는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시원시원한 용모를 가진 젊은 미녀는 검은 옷을 입은 하인을 대동하고 서서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여유로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저 여인인가.”

당태세가 슬쩍 수염을 어루만지는 순간, 여인의 밝은 목소리가 좌중의 손님들을 단번에 집중시켰다.

“만장하신 항주의 귀인 여러분, 오늘은 우리 동성가에서 특별한 손님들을 모아서 이렇게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여기 마련한 음식과 술은 진미(珍味)가효(佳肴)라 하기에는 질박합니다만 서로 모여 즐기며 항주의 나아갈 길을 말씀해 주시고, 좋은 탁견이 있으시다면….”

여인은 슬쩍 허리를 굽히며 뒤에 서 있는 청의 관복을 입은 사내를 앞으로 데려왔다.

“지휘사께 건의를 해 주시옵소서.”

사람들은 모두 짧게 탄성과 환호를 지르며 예를 갖추었다. 상업에 대해 식견이 없는 당태세가 보더라도 여인의 말솜씨와 자세는 상당한 것이었다.

사람들을 한 곳으로 모으는 화술과 정확하고 또랑또랑한 말투와 몸짓은 왜 이 황병아라는 여인이 부상대고의 반열에 낄 수 있는지를 반증하고 있었다.

“……그 밑천이 아비의 돈이었겠지만 꽤나 대단해 보이는구먼.”

“걸물(傑物)입니다. 숙부님, 대단한 여인 아닙니까? 실로 한인이지만 만청의 기개가 보입니다.”

“실로 그렇구나.”

당태세는 아룡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여인이 앞장서 전각 안으로 사람들을 안내하는 순간, 당태세의 눈이 슬쩍 가늘어졌다.

여인의 보법은 여염 집안에서 배운 것이 아닌 무공의 성취를 보이고 있었다.

그와 함께 여인의 옆에서 그녀를 호종하는 검은 옷의 훤칠한 젊은이 하나도 눈에 띄었는데, 태양혈이 불쑥 나온 것이 한 눈에도 고수의 기도임을 알아챌 수 있을 지경이었다.

“아무리 상인 흉내를 내어도 무문(武門)이라 이것이냐.”

여인은 천천히 다니며 자신과 안면이 있는 사람들을 보고 인사를 나누는데, 실로 이런 일이 익숙한 사람 같았다. 당태세 역시 아룡의 옆구리를 툭툭 치고는 조용한 소리로 언행을 주의할 것을 당부했다.

“우리는 산동의 장가니, 아무쪼록 꼬리를 잡히지 않도록 유의하자꾸나.”

“알겠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흥겹게 지내며 교분만 쌓겠습니다.”

“오냐, 너만 믿는다.”

당태세는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돌아다니며 서호의 풍경을 감상하는 척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 모임을 주관하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고 그들의 용모를 살피는 것이 첫 번째요. 만의 하나 황칠이가 나타난다면 그의 동선을 추적하는 것이 두 번째였다.

일단 손발을 치고 마지막에 머리를 자르고자 하는 게 당태세의 생각이었다.

‘황병아라는 여인과 마찬가지로 사람들을 접대하고 있는 이들을 찾아야 한다. 황삼. 일면불, 월면불. 그리고 다른 이들도 있을 수 있겠지.’

당태세가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저 멀리 건너편의 회랑을 타고 일단의 사내들이 걸어 들어오는 모습이 당태세의 눈에 들어왔다.

그때였다. 당태세의 눈이 커지며 같이 걷고 있는 세 사내의 모습이 그대로 눈 안에 들어왔다.

십칠 년이라는 긴 세월이 흘러 체격이 바뀌고 얼굴에 주름이 잡히며, 머리도 한의 상투가 아닌 청의 변발을 한 채였지만 당태세의 시선에 들어온 세 사내의 얼굴은 당태세의 뇌리 속에 있는 해묵은 기억을 끄집어 현재의 얼굴과 그대로 대조해볼 수 있을 지경이었다.

맨 앞에서 가느다란 눈을 좌우로 굴리며 얇은 수염 두 가닥을 내려뜨린 중년 사내는 나이에도 불구하고 탄탄해 보이는 팔과 어깨를 지니고 있었다.

“황칠이의 아우, 황하사(黃河蛇) 황칠삼. 변한 것이 없구나.”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이를 부드득 갈면서 지팡이를 짚고 사람들 사이로 몸을 파묻고 그를 계속 노려보았다.

보국구대문파가 황성의 돈대를 거점삼아 방위를 나누었을 때, 끝까지 동성문의 위치선정을 두고 그와 말다툼을 벌였던 사내였다.

그들은 작은 문 옆을 끼고 여차하면 성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곳을 동성문의 위치로 달라고 졸랐고, 결국 그 뜻을 관철시킨 이였다.

“형 황칠이와 우애가 좋다는 것 빼고는 쓰레기 같은 놈이었지.”

노인은 혼잣말을 중얼대며 황칠삼의 뒤에 있는 두 명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거대한 덩치에 흰 수염을 기른 푸짐한 체구의 노인과 그 옆에서 어깨가 절반 넓이 밖에 안 되어 보이는 깡마르고 수척한 노인 둘이 회랑을 따라 걷고 있었다. 당태세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들을 바라보더니 입맛을 다셨다.

“아무리 봐도 동성칠걸 가운데 산도염(散徒焰)기박자와 후요곤(吼謠棍)모등수인데…저들이 일면불 월면불인가.”

세 사람은 모두 사방을 쳐다보며 사람들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가만히 하는 양을 살펴보니 섬 안에 들어온 이들을 감시하는 모양새였다.

황칠삼이 슬쩍 두 사람을 보며 턱으로 살짝 누군가를 가리키자 일면불과 월면불이 슬쩍 그 사내에게 다가가더니 뭔가를 물어보고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황칠삼에게 돌아왔다.

당태세는 이마에 주름을 잡았다. 생각보다 용의주도한 모습이었다.

“동성문이 이리 오래 되도록 사람들 눈에 안 띄는 이유가 있었겠지.”

그때였다. 사내의 뒤쪽에서 서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당태세는 사내들에게서 시선을 돌려 반사적으로 자신의 뒤에서 다가오는 기척을 향하였다.

그곳에 있던 것은 다름 아닌 백의의 여인이었다. 황병아, 바로 그 여인이었다.

“기묘한 지팡이를 짚고 다니시는군요. 노사.”

“아, 황대인 아니십니까. 말씀은 많이 들었습니다.”

“저를 아시나요?”

“아닙니다. 항주에 도착해서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대가의 이름만 알고 있지요. 많은 사업을 벌이고 계신 여걸이라는 소문을 들었는데…오늘 뵈니 실로 그 말이 과장이 아닙니다그려.”

여인은 당태세의 물 흐르듯 넘어가는 변설을 듣더니 자기도 모르게 환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큰 입이 벌어지며 드러난 하얀 이는 여인의 화통한 성격을 내보이는 것 같았다.

하지만 당태세는 여인의 눈에 웃음기가 하나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여인의 눈매는 장사꾼의 눈이 아니라 무인의 눈이었다.

“저를 대인이라고 불러주시는 분은 노사가 처음이시네요. 그냥 소저라고 하세요. 항주 사람이 아니신게죠?”

“저는 산동에서 온 장가입니다. 잠시 항주에 왔다가 전장에서 거래 중에 좋은 모임이 있다는 말을 들어서….”

“산동에서 무슨 일을 하시지요?”

“관곡(官穀)을 대고 있습지요.”

“관곡이요. 쉽지 않은 일일텐데요?”

“쉽지 않지요. 매달 들고 나는 게 같지 않으니 걱정일 뿐입니다. 그나저나, 황소저는 무슨 일을 항주에서 하십니까?”

당태세가 슬쩍 말머리를 돌리자 옆에 서 있던 흑의의 청년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당태세는 자신의 갈무리한 내공을 사내가 알아챈 것이 아닐까 내심 걱정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정작 황병아는 눈웃음을 짓더니 선선히 자신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저는 항주에서 집을 매매하고 거간하며, 작은 술도가에서 주루에 술을 공급하지요. 여기 나온 백주들도 제가 만들어 넘기는 것들이랍니다.”

“허허, 거 참. 재주가 많으십니다. 한 일만 해도 평생 모자라는 게 사람 일이거늘.”

“집안에서 도움을 많이 받았지요.”

황병아는 스스럼없이 말하며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여인의 서늘한 눈은 여전히 당태세에게서 떨어지지 않고 있었다. 의심섞인 눈, 모든 것을 대충대충 넘기지 않는 맹금의 눈과 같았다.

“올해는 세곡이 중선(中船)으로 얼마나 많이 들어왔나요? 산동에서는 수직군에 몇 말이 들어가지요?”

순간 당태세의 눈과 황병아의 눈이 동시에 맞부딪혔다. 당태세의 눈을 바라보는 황병아의 눈매 속으로 끝을 알 수 없는 근기(根氣)와 내공의 기백이 느껴졌다.

맙소사. 동성문의 진전을 지닌 것은 황칠이 뿐이 아니구나.

이미 동성문의 무예는 이 여인에게 넘어왔구나. 당태세는 그 순간, 황병아가 그에게 그냥 다가온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 여인은 당태세의 기척을 눈치 챈 것임에 틀림없었다.

당태세는 입이 바싹 말라오는 것을 느꼈다.

“그건 기밀사항이라 여기서 말씀드리기가 애매합니다만….”

“그러신가요. 그럼 어디 조용한 곳에서 장대인의 탁견을 들을 수 있을까요?”

“아, 지금은 제가 만날 사람이 있어서….”

황병아가 당태세의 변명을 듣더니 피식 웃음을 머금었다. 이미 노인의 수작은 다 알고 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이곳에서 급하게 뵐 사람이 따로 계시다는 건가요? 산동에서 항주까지 오셔서 말입니까?”

당태세는 순간 손을 번쩍 들어 보이며 목괴를 짚은 손을 들어 손을 맞잡고 쾌하게 인사를 올렸다.

황병아가 아닌 황병아의 뒤쪽을 보면서 한 일이었다. 순간 황병아는 당태세의 입에서 나온 소리를 듣고 화들짝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아이고! 강녕하십니까. 종리천호! 오랜만에 뵙습니다. 저 장행수올시다.”

황병아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있던 청나라의 무관 하나가 당태세를 바라보더니 눈을 둥그렇게 떴다. 다름아닌 선무사 천호, 종리세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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