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40화 (140/226)

140.  절강 항주 (8)

녹청(綠靑)의 물빛이 서서히 금빛으로 변하는 서호의 물은 바람을 머금고 잔물결을 뭍으로 뿌려대었다.

서호의 어귀를 타고 나 있는 넓은 보도와 도보위로 이어진 아름다운 구름다리를 배경으로 간간이 뿌려져 있는 작은 섬들에는 작은 정자들이 올라가 있고, 멀리 호수의 건너편으로 긴 탑의 그림자가 아른거리니, 가히 이 광경은 선계(仙界)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비경이었다.

서호의 아름다움은 가까이 가서 살피는 것보다 성루 위에서 아침 햇살과 석양을 받아 빛날 때 감상하는 것이 실로 제일이었다.

종리세리는 오늘도 성루 위에서 서호로 지는 해를 바라보며 말없이 서 있었다.

“오늘도 서호에 빠져 있구먼. 지겹지도 않은가?”

“드넓기로는 태호에 비할 수 없지만 아취가 있기로는 태호가 서호를 따를 수 없군.”

“선무사 천호가 갑자기 예문관으로 직책을 바꿀 셈인 모양이구먼?”

종리세리의 뒤에서 너털웃음을 짓던 사내는 자신도 성루에 다가와 해가 넘어가는 서호의 물결을 바라보았다.

얼핏 봐도 종리세리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사내는 평복을 입고 망루에 올라와 있었는데, 군사들이 아무 제지를 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만성에서의 위치가 어느 정도 되는 인물임이 분명해보였다.

“확실히 항주는 아름다운 곳이지. 이런 곳이 세상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곤 한다네.”

“북경 생각은 나지 않는가. 과이가 태문(瓜爾佳 太雯)?”

“그냥 태문이라 부르게. 언제부터 그렇게 예를 갖췄다고.”

종리세리는 슬쩍 웃음을 머금고는 서호의 물결이 금빛으로 다가왔다 멀어지는 광경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태문은 사내의 얼굴을 바라보더니 슬쩍 자신의 콧수염을 쓰다듬었다.

“내일 서호에서 작은 모임이 있을 것이네만 같이 하겠는가? 사람들도 꽤 올 것인데.”

“자네가 간다면 얼굴은 비추겠네.”

“자네는 십년이 지났어도 변하는 것이 하나 없군. 구이도 종리세리. 늘 진지하고 과묵해.”

“사람이 어찌 쉽게 변하겠나.”

“가정은 아직도 안 꾸렸나?”

“별로 생각이 없다네.”

태문이라 불린 기인(旗人)도 자신의 친구 대신 석양을 머금고 빛나는 서호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자네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가 서림각라씨의 천호로 임직이 되었을 때였지. 지금도 그대로인가?”

“올라갈 만큼 올라갔다고 생각한다네.”

“거 참.”

과이가 태문은 슬쩍 성벽을 등지고 돌아섰다. 사내의 얼굴에 그늘이 지고 그림자 뒤에 표정이 숨었다. 대신 예리한 장수의 눈빛만은 남아 예전 같이 전선을 종횡했던 친구의 얼굴을 염탐하는 중이었다.

“구이도.”

“말하게.”

“왜 항주까지 내려온 건가?”

“보국장군의 명을 수행하러 내려온 것이네. 지휘사께 이미 말씀드렸네만.”

태문의 눈은 여전히 호수를 바라보는 종리세리의 얼굴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 명이 무엇인지 발설할 수 없는 것인가?”

“보국장군부 내부의 일이네.”

종리세리의 대답에 태문은 슬쩍 한숨을 내쉬고 눈길을 성 안쪽으로 돌렸다. 이제 저녁이 되어 파수를 서는 보초들이 교대할 시간이었다. 그리고 하루의 일과를 점고하고 지휘관에게 보고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주방팔기의 만성은 거대한 군영(軍營)이었다. 기인의 자식과 여인이 같이 사는 커다란 성읍이었지만 기본적으로 언제든 칼을 들고 튀어나갈 수 있는 군사 조직이었다.

태문은 시간이 별로 없다는 듯 옛 벗을 돌아보고 다시 한 번 짧은 숨을 내쉬었다.

“구이도. 솔직히 말하면 이곳에서 자네가 온 것을 껄끄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어.”

종리세리의 눈이 호수에서 친구를 향해 움직였다. 태문의 눈은 여전히 성 안에 고정되어 있었다.

“나야 자네와 함께 북경부터 같이 칼을 맞대고 싸운 전우니 자네의 성품을 알지. 자네는 행동으로 말하지 입으로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네. 만주족보다 더 만주족 같은 한인이지.”

“나는 만한의 구별이 없네.”

“알고 있어. 하지만 다른 이들 모두가 자네를 그렇게 생각하진 않아.”

태문은 입맛을 다시더니 영 껄끄러운 말을 한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자네, 여기 오기 전에 녹영 천총을 베고 팔기 효기교를 처벌했다면서? 숙주 근방에서 그랬다는 소리를 들었네.”

“선무사가 할 일이었네. 군기가 해이해서 백성들을 이유없이 핍박하더군.”

태문은 종리세리를 바라보았다.

“녹영 천총은 몰라도 효기교를 자네가 처리한 일에 대해서는 구설이 떠돌아.”

“선무사가 할 일이야.”

“모든 이들이 나처럼 자네를 기인(旗人) 취급하지는 않아. 한인팔기도 분명 있고 그들도 우리와 같이 칼을 든 전우지만 오래된 기인들은 그들을 팔기라고 취급하지 않지. 그런 구태의연한 이들이 분명 우리 주변에도 있네.”

종리세리는 고개를 들었다. 노랗게 빛나던 저녁놀이 사내의 눈으로 쏟아졌다.

사내는 인상을 쓰고 자신의 오랜 전우와 그들이 발을 딛고 서 있는 성루를 같이 돌아보았다. 수직하는 군사들이 교대를 위해 성루 위로 올라오는 것이 종리세리의 눈에 들어왔다.

“내가 자네에게 짐이 되는가?”

“그건 아니야. 단지 자네의 이야기를 좀 더 소상하게 해준다면 내가 자네를 변호하는데 도움을 줄 수는 있을 것이네. 사실 자네가 왜 여기 와 있는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이들이 너무 많지. 북경의 팔기, 그것도 서림각라씨 보국장군부 직속이 항주 만성까지 온 것도 이상하고…그게 한족이라는 것도 이상하니까.”

“…모든 게 이상하게 보이겠지.”

“말할 수 없나?”

종리세리는 입을 다물었다. 태문은 한참동안 친구를 바라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교대하는 군사들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군사들의 경례를 받으며 돌아가는 친구의 등을 바라보던 종리세리는 다시 몸을 돌려 저녁놀이 깔린 서호를 바라보았다.

이제 해는 호수 뒤편으로 넘어가고 붉은 기운만 하늘에 떠 있었다. 종리세리는 호수를 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언제쯤 올 것인가. 순천문주.”

***

“이게 조사한 바의 전부인가?”

“칠십 명이면 적지도 많지도 않은 숫자입니다. 이 안에 다 들어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당태세는 어두운 밤 그림자가 덧씌워진 항주의 작은 다관 안에서 어린 소년을 바라보는 중이었다.

당태세의 손아귀에는 전장에서 사용하는 작은 산표가 들려 있었고, 산표에는 숫자대신 작은 글자들이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당태세는 나름대로 기지를 발휘한 천리안 허종을 대견하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허종이 허가전장의 사환인 것은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일 터이니, 지금 노인과 허종이 업무상의 대화를 한다고 여길 것이었다.

저녁 무렵의 다관은 들어오는 이들이 적었고, 탁자마다 밝혀놓은 촛불은 멀리 있는 이들의 얼굴을 가늠하기에는 너무 빛이 약하였다. 당태세는 산표에 적혀있는 이름들을 뚫어지라 바라보고 있었다.

허종은 노인의 표정을 보다가 소리를 죽이고 입을 열었다.

“이것이 전부이니 약조하신 서명을 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황삼. 이 자는 동성문주의 동생, 황칠삼을 말하는 것이냐?”

허종은 자기 말을 씹고 묻는 당태세는 슬쩍 노려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본명은 모릅니다. 하지만 장반이 그가 전주의 동생이라는 말은 하더군요.”

“동성문주의 아우도 무공이 어느 정도 되었지. 성격은 형과 판박이였고. 그 자가 하는 일이 관곡을 내어 만성까지 가져가는 일이라 이것이구나.”

“만성 아래의 운하를 이용하지요. 직접 소흥과 소주에서부터 배를 움직이니 그의 얼굴을 제대로 본 적은 별로 없습니다.”

당태세는 그 다음 산표를 보더니만 슬쩍 눈살을 찌푸리고 허종을 바라보았다.

“일면불(日面佛)과 월면불(月面佛)이라? 이들은 부처님 아니냐? 이게 동성문과 무슨 관련이 있느냐?”

허종은 두 이름이 나오자 자기도 모르게 얼굴을 찡그리더니 주변을 살피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사실 부처님에 대한 모독입니다. 이 두 늙은이는 허가전장 뿐 아니라 동성가에 관련된 채무를 해결하는 이들로…….”

“채무?”

“채무를 받아내는 수법이 악독하고 잔인합니다. 보통 허가전장의 이름으로 일을 하지요. 하나는 곧 죽을 것처럼 파리하고 하나는 엄청나게 살집이 있어서 사람들이 별명처럼 부르는 이름입니다.”

당태세도 허종을 따라 눈살을 찌푸렸다. 용모에 관한 것만으로는 어떤 이들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동성문에서 그가 알 법한 이들과는 관계가 없어 보였다.

눈살을 찌푸리던 허종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이들은 예전에도 허가전장이 아직 황가의 손에 넘어가기 전부터 있었던 이들입니다. 어머니가 이를 갈면서 말씀하시던 게 생각납니다. 저들이 아버지 멱살을 잡고 벽에 메치고는 갖은 폭행을 다했다고…조부님을 협박한 것도 그 두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허종의 말대로라면 예전부터 황칠이와 같이 돌아다닌 사람이라는 소리였다. 아마 얼굴을 보면 알 것이었다.

“이들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느냐?”

“보통 동문 근처의 하오배들을 수족처럼 부리며 채권을 회수합니다. 요즘은 다른 전장들의 일도 맡아서 하며 그 사이에서 이문을 챙긴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그리 말하는 허종의 눈매는 분노가 가득 차 있었다. 전장(錢莊)에서 잔뼈가 굵었고 홍문의 용두라 자칭하는 이였지만 아직 어린아이였고 자신의 감정을 모두 통제하지는 못하는 나이였다.

당태세는 물끄러미 소년을 바라보다 말을 돌렸다.

“너는 언제부터 홍문의 용두가 되었느냐? 홍문에 들어간 것이 언제인가?”

갑자기 뚱딴지같은 질문에 허종이 당태세를 바라보더니 말과 표정이 냉랭하게 변하였다.

“세세한 것은 묻지 않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보니 네 아래의 세 명은 서로 도당을 꾸민지 꽤 되는 이들이었다. 너를 왜 갑자기 용두로 올렸단 말이냐. 언제 그들을 만나 홍문에 들었느냐? 이해가 안 되는구나.”

“무엇이 이해가 안 가시오?”

“홍문은 달랑 너희 넷이냐? 그 아래에 다른 접주나 문도가 없느냐? 어찌 홍문의 용두가 되어서 하오문을 통괄하는 노인 둘을 처리하지 못하는가?”

허종은 그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당태세의 말을 듣고 잠시 침묵에 빠졌다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입을 열었다. 조금 전까지 보여줬던 냉정한 결기는 사라지고 조심스런 소년의 말투가 전해졌다.

“제가 홍문을 알게 된 것은 허가전장에 들어간 지 오년이 지난 뒤로, 사환이 될 때 즈음이었습니다. 그 때 세 명의 좌당(座堂)과 우연히 만나게 되었지요. 그들은 하오배에게 봉변을 당할 뻔한 저를 구해주었고, 어쩌다 인연이 되어 제 하소연을 들은 뒤에 저를 용두로 추대하고 정성공 장군과 연을 맺게 해 주었습니다.”

“기이한 일이구나.”

허종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 홍문의 군세는 항주의 기인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 정도의 세력이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집요한 토벌에 의해 대부분의 지사들이 잡혀 죽고, 지금은 저 세 사람만이 명목을 유지하고 있지요. 하지만 지사중의 지사고 호걸중의 호걸입니다. 저들이 저를 용두로 삼은 것은…저들이 나중에 팔기에게 죽더라도 홍문의 유지를 잇게 하기 위해서…….”

당태세는 무슨 말인지 알겠다는 듯이 손을 들어 하종의 말을 막고 고개를 끄덕였다.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가 원하는 것은 오직 동성문에 대한 복수였을 뿐, 다른 방회의 싸움에 관여하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개봉팔십방회의 구봉문의 싸움은 어쩔 수 없이 세력과 세력의 싸움이었지만 두 번 다시 성을 뒤집는 그런 난장판은 벌이고 싶지 않았다.

더군다나 팔기를 적으로 돌린 채 동성문을 앞으로 맞이하는 일을 피해야 하였다. 당태세는 마지막 산표를 넘겨 보다 눈을 크게 떴다. 그곳에 적혀있는 이름과 내용은 당태세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황병아?”

“동성가의 맏딸이며 현재 밖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가 차기 동성가의 가주가 될 것 같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동성가의 장원은 서호 북쪽에 있고, 그곳에 부친과 기거합니다.”

당태세가 뚫어지라 산표에 써 있는 글을 읽고 있자 허종이 산표에 쓰여진 내용을 말하며 이야기를 첨언하였다.

“황병아는 부서진 동문과 북문의 가옥들을 수축하고 다시 팔아 이문을 남기고 있고, 용정의 차나무도 십여 그루 가지고 차를 판매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수익은 항주에 늘어선 주루에 백주(白酒)를 공급하는 것에서 나옵니다. 커다란 술도가를 가지고 있다 들었습니다.”

당태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것은 고리대도 아니고 관곡을 빼돌려 얻는 수익도 아닌 정당한 상업이었다. 하지만 분명 그 뒤에는 동성문의 돈이 들어있을 것이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첨언해 드리자면, 황병아가 조만간 노사를 초청할 것입니다.”

“뭐라고?”

“장반 화씨가 말하는 것을 넌지시 들었습니다. 조만간 유력한 물주들을 모아서 서호에서 연회를 베풀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화종의 말을 듣던 당태세의 눈빛이 번득였다. 예상보다 빠른 시간에 회답이 온 것이었다.

“그런데 이런 시시콜콜한 사안을 왜 원하시는 겁니까? 이문이 붙지도 않는 사람들의 동향인데 말입니다.”

“그것이 궁금하냐.”

당태세는 번득이는 눈빛을 감추지 않고 자신이 앞에 놓인 산표를 소매 안에 넣으며 허종을 바라보았다. 소년은 촛불보다 더 번득이는 노인의 광망을 바라보는 것이 버거웠다.

“개인적인 청산(淸算)이다.”

노인의 빛나는 눈동자는 소년의 질문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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