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39화 (139/226)

139.  절강 항주 (7)

“지금부터 십칠년 전, 제가 아직 태어나기도 전의 일입니다. 저의 집안은 조부님 때부터 항주에서 전장을 운영해왔습니다. 전란이 일어나면서 항주 전역에 청군이 들어와 세사가 피폐해지기 전까지 말입니다.”

뒤에 서 있던 텁석부리 사내가 당태세를 노려보며 중얼거렸다.

“강남의 한인은 거의 절반이 도륙당하였소. 노사도 알고 있겠지만 말이오.”

당태세의 얼굴 역시 표정이 엄숙히 바뀌었다. 십칠년이라면 긴 시간이고 모든 것이 정리될 수 있는 기간이었다. 사람에 따라서는 지인의 얼굴도 잊을 수 있는 시간이다. 하지만 그 상처는 여전히 남아 살아남은 이들에게 망령처럼 붙어있었다.

“항주의 사람들은 모두 피난을 갔다가 다시 청이 성을 점령한 뒤 성으로 돌아왔지요. 그 때 제 조부의 전장은 황씨 성을 가진 그 사내에게 넘어갔습니다. 말인즉슨, 그가 청인들과 같이 넘어왔으니 그들에게서 가족과 돈을 보호해준다는 명목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하나 둘 빼앗았다는 이야기구먼. 이름만 남겨두고.”

당태세의 말에 허종은 고개를 끄덕였다.

“군사를 부리는 이였다 들었습니다. 그는 조부와 아버지를 거의 감금하고 노예처럼 전장에서 부리며 이문을 가로채 자신의 사익으로 돌리고, 결국에는 항의하는 조부를 없앴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제 아버지에게 전장의 재산을 양도받는다는 증서를 강제로 받고 이 전장을 인수했습니다.”

당태세는 말없이 허종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지금 노인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의문이 맴돌고 있었다. 그 의문은 산동부터 이곳까지 오면서 한결같이 들던 생각이었다.

왜 모든 문파들은 다른 지역에 정착할 때 이런 일을 벌이는 것인가?

왜 팔대문파는 하나같이 지나간 삶을 참회하기는커녕 더 안 좋은 쪽으로 방향을 잡고, 사람들을 죽이고 겁박하여 자신의 부와 세력을 확장시키는 일을 하였을까.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나직하게 혼잣말을 뱉었다.

“이젠 다 끝난거라는 생각이 들었겠지.”

의리(義理), 신용(信用), 평판(評判), 도덕(道德). 그 동안 지켰던 모든 것이 명(明)과 함께 사라졌다고 믿은 것임에 틀림없었다. 더는 지킬 것이 없다는 생각에 그들은 지금까지 그들을 가둬왔던 금제와 같은 족쇄를 벗어버리고 들개 같은 야성을 인간 세상에 풀어버린 게 틀림없었다.

협객에게 도리가 없다면 칼 든 흉한이나 다름이 없었다.

당태세의 표정이 점점 굳어지는 동안 허종의 입은 계속 열려있었다.

“제 부친은 제가 다섯 살 되던 해 과로와 홧병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저는 어미와 함께 동문 밖의 굴로 옮겨가 생활을 했지요. 어머니는 피눈물로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누누이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부터는 안 들어도 뻔한 이야기였다.

“황가는 제 부친의 전장을 모두 가로챈 뒤에도 이름을 바꾸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이 곳에서 고리대를 하며 재산을 불렸지요. 사람들은 허가전장의 이름으로 악행이 일어나면 허가전장을 욕하지요. 그리고 그 뒤에 누가 있는지 캐묻지도 않았습니다. 저는 어렸을 적부터 제 조부와 아버지가 만든 전장 밖을 보면서 이를 갈았습니다. 제 모친 역시 병에 걸려 제가 열 살이 되던 해에 세상을 등지고 마셨지요.”

조환의 눈은 잠시 깜박이더니 이내 이를 부드득 갈았다.

“저는 삼 년이나 걸려 이 곳에 들어왔습니다. 성도 주씨로 바꾸었습니다. 이곳에서 이 년간 청소를 하고 사환으로 올라선 지는 일 년밖에 안 되었죠.”

“이곳에서 일을 하려고?”

“이곳의 모든 것을 다 파악한 뒤, 언젠가는 제가 이 곳을 다시 되찾을 겁니다. 홍문의 힘을 빌어 정성공 장군의 신뢰를 쌓고 그들이 다시 고토를 회복한 뒤에 말입니다. 십년이 걸리든 이십년이 걸리든, 이 곳은 다시 제 가문의 일터가 될 것입니다.”

당태세가 빤히 허종의 얼굴을 노려보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차갑게 물었다.

“네가 많은 곡절을 겪은 것은 들어서 알겠다. 허나, 뭔가 이상하지 않느냐?”

“뭐가 말이오?”

“네 말을 따져보자. 허가전장에 들어온 지 육년이 넘었다면서 지금까지 뭐하다가 이제 와서 내 돈을 갖다 쓰겠다는 것이냐?”

“사환이 되어서야 장부에 손을 댈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올라오는 데 걸린 시간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허종은 히죽 웃음을 지어보였다.

“어떤 동행도 없이 혼자 돈궤를 들고 전장에 들어오는 이는 노대인이 처음이었으니까요.”

어처구니가 없었다. 손 쉬운 상대를 고르려고 지금까지 기다렸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는 거 아닌가. 도적의 본거지에 혈혈단신 들어온 것이었다.

동성문을 함정에 넣으려다 오히려 당태세가 엉뚱한 함정에 빠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지금까지 이야기를 듣고 있던 텁석부리가 당태세의 표정을 보더니 히죽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러니까 노사, 더 쓸데없이 시간을 끌지 말고 어서 돈이나 내놓으시오. 반청복명을 위한 장한 일이외다. 금문도주에게 비용 처리 받으면 바로 돌려드릴 것이니.”

“협조해주십시오.”

허종의 말에 당태세는 소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돈이야 아무것도 아니다. 하지만….”

“뭐 말이오?”

“너는 그 어린 나이에 묵은 원한을 풀만큼 자유롭지 못하느냐?”

노인의 말에 소년은 표정을 굳히며 노인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노대인. 그대의 삶이 어떤지 모르지만 원한을 이고 산다는 것이 무슨 기분인지 아시오? 결단코 그 일은 사람이 짊어지고 살 수 있는 것이 못되오. 하루가 지나고 십년이 지나도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을 거요. 하늘이 무너지고 숨을 쉬지만 답답함에 미쳐 죽을 것 같은 날이 영원히 계속되며 돌이켜 옛 일을 생각하면 참을 수 없이 눈물이 쏟아지는 거요. 그렇게 일 년만 살아보시오. 차라리 죽음을 달라고 말하게 될 거요.”

소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던 노인은 알겠다는 듯 머리를 숙이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노인은 한숨과 함께 가라앉은 목소리로 허종에게 말을 걸었다.

“좋다. 보증이야 서 주마. 대신 두 가지를 해줄 것이 있다.”

“뭐요?”

허종과 뒤에 서 있는 이들이 노인을 쳐다보자 노인은 천천히 허리를 펴고 지팡이에 기댄 채 앉아 손가락을 하나 펴 보였다.

“첫째, 돈의 인출은 내가 황가와 약속을 잡은 다음에 이뤄져야 한다. 화씨 장반이 내게 그 날짜를 일러준다 말하였으니, 그 뒤에 은을 찾아가라. 보증서는 써 줄 것이다. 이를 지킬 수 있겠느냐?”

허종은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야 정해진 날이 있으니 기다리는 것은 어렵지 않습니다.”

순간 당태세는 뒤에 서 있던 사내 세 명의 인상이 슬쩍 굳어지는 것을 눈치챘지만 얼굴에 낌새를 드러내지는 않았다. 당태세는 두 번째 손가락을 펴며 허종을 쳐다보았다.

“둘째, 네가 아는 황가의 모든 식솔과 사업을 내게 세세하게 알려라.”

“네?”

“십칠 년 전 청과 함께 이곳에 들어와 군사를 부릴 한인이라면 보통 인물은 아니다. 사병(私兵)을 다루는 위인이라면 그 군세를 그냥 낭비했을 리는 없을 터, 분명 지금도 항주 곳곳에서 그를 이용해 이문을 다루고 있을 것이다. 내 말이 틀리느냐?”

허종은 순간 눈이 둥그레진 채 노인을 바라보았다. 허종의 반짝이는 눈에 놀라움과 찬탄이 같이 섞여 있었다. 당태세는 다시 낮게 말을 이었다.

“나 역시 청을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호가호위하는 이들은 더 싫어하지. 그들에 대한 모든 정보를 다 내게 주어라. 식솔과 처자식과 부리는 종이 몇인지 까지 아는 대로 세세하게 다 내놓아라.”

“무엇을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너에게 해 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반청복명의 홍방에도 해가 되는 일은 아니겠지.”

그때 뒤에 있던 수염 기른 사내 하나가 슬쩍 앞으로 나오며 허종에게 말을 걸었다.

“용두, 말을 가려들으시오. 저 자는 외인이고 우리는 그저 저 자의 돈이 필요할 뿐이오.”

당태세가 슬쩍 주변의 사내들을 노려보고는 다시 허종을 돌아보았다.

“내가 여기 왔던 때를 기억하고 지금 이 순간을 기억하라. 나는 일구이언은 하지 않는다. 내게 천리안 네가 그 정보를 준다면.”

허종이 당태세의 눈을 보다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내가 네 원한을 깨끗하게 말소해줄 수도 있다.”

순간 알 수 없는 한기가 여름 아침의 전장을 휘감았다. 텁석부리 사내가 자기도 모르게 더듬대며 당태세를 향해 윽박질렀다.

“무, 무슨 허황된 소리냐! 용두, 저 자의 말을 들으면 안되오! 황씨의 동성가가 어떤 곳인지 우리는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동성가는 원래 북경의 동성문이었지.”

당태세의 낮은 목소리가 전장 안을 울리자 텁석부리는 자기도 모르게 입을 닫았다. 당태세는 슬쩍 지팡이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인질이 자리에서 일어서는데도 모여있는 네 사람은 차마 노인에게 손을 댈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천리안, 나를 이른 아침부터 미행할 정도라면 내가 머물고 있는 객잔 정도는 익히 알고 있으렷다. 내게 정리된 정보를 가져오라. 다른 사람이 아니라 꼭 내게 전해 주어야 한다.”

“……내가 그대를 미행하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소?”

“나는 파리가 따라오는 줄 알았지. 신경쓰지도 않았다.”

당태세는 히죽 소름끼치는 미소를 지어보이자 허종은 이내 안색이 창백해졌다. 소년은 다시 한 번 확인해 보겠다는 듯 입술을 혀로 축이더니 말을 이었다.

“황씨 동성가의 일꾼은 칠십 여인에 달하고 그 중에 칼을 쓸 줄 아는 이만 스무 명이 넘소이다. 그리고 그들 중 태반은 만성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소. 그들을 노사 혼자 무슨 수로 당한다 하는 것이오?”

“차용증은 정보와 같이 바꿔주마.”

당태세가 남긴 말은 그게 전부였다. 노인은 천천히 찻잔을 내려놓고 뒷문을 통해 지팡이를 짚고 빠져나갔다.

노인이 멀쩡하게 문으로 걸어 나가는 것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보고 있던 세 명의 장한은 아직도 눈을 껌벅이며 의자에 앉아있는 천리안 허종을 보며 말을 던졌다.

“이봐, 용두. 이게 무슨 일이야.”

“돈만 받으면 되는 일 아닌가?”

“지금 저 노인이 하는 말은 모두 허장성세야! 자네를 고발하여 녹영이나 포쾌에게 넘길걸세!”

허종은 슬쩍 뒤에 있는 이들에게 손을 들어보이더니 잠시만 기다려달라는 시늉을 하였다.

“저 노인의 말을 한 번 더 들어봅시다. 결코 허언을 할 사람은 아닌 것 같습니다.”

“허! 그저 창구에서 보고 오늘 칼로 겁박하여 본 것이 두 번째다! 무슨 연유로 그리 생각하느냐!”

“허종, 자네가 비록 우리의 용두지만 모든 것이 용두의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네. 홍문의 규율은 엄하네. 잊지는 않았겠지? 우리가 위험에 빠지게 되면 용두에게 가장 큰 책임이 있어.”

“물론 알고 있습니다.”

허종은 뒤에 서 있는 사내들을 돌아보며 조용히 말하였다. 소년은 어울리지 않는 눈빛으로 그들을 바라보며 다짐하듯 또박또박 한마디를 덧붙였다.

“제가 책임지고 돈을 마련하지요. 저 노인에 대한 처리는 제게 맡겨주십시오.”

한편, 천천히 뒷골목을 빠져나와 목괴를 짚고 운하 근처를 거닐던 당태세는 다시 자신의 뒤에 있는 허가전장을 바라보더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홍문(洪門)이라…….”

노인은 미간을 찌푸리며 슬쩍 주름잡힌 이마를 중지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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