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38화 (138/226)

138.  절강 항주 (6)

다음 날 아침, 당태세는 천천히 남문의 상점가를 향해 몸을 움직였다.

운하를 따라 새벽의 안개가 자욱하게 낀 여름 아침은 더운 기운이 올라왔지만 아직 쾌적했고, 운하 건너편으로 보이는 웅장한 만성의 성벽은 무덤덤하게 홀로 지팡이를 짚고 걷는 노인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태세는 슬쩍 만성의 위를 바라보았다. 성루를 따라 나 있는 성벽 길 위에 청의 병사가 창을 들고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천하가 만주족의 발 아래 들어왔지만 아직 청의 군사들은 쉽사리 창을 내려놓고 갑옷을 풀지 않고 있었고, 그들의 힘은 성벽 안에 숨겨놓은 채 만약에 있을지도 모르는 사태를 대비하고 있었다.

당태세는 고개를 돌려 앞을 향하였다.

원래 자신의 적은 청이 아니었고, 본래 그가 성벽에 올라 명의 황제를 보위하려 한 것은 동족인 이자성으로부터였지만, 결국 황도를 집어삼키고 나라를 먹은 것은 청이었으니, 결국 청은 원수의 원수이자 자신의 원수이기도 하였다.

직접적인 포한은 없어도 굳이 깃발을 보고 따르고 싶은 마음은 결코 들지 않았다.

“아룡은 청의 치세를 보고 자란 위인이고 나는 명의 치세를 보고 산 사람이니.”

당태세는 뚜벅뚜벅 목괴를 짚고 걸으며 오랜만에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보고 들은 것이 있고 겪은 것이 있어 아룡처럼 살 수는 없음이라.”

남쪽으로 내려갈수록 한산하던 항주의 길은 사람들로 붐비기 시작했다. 나라의 흥망과 관계없이 새벽을 깨우는 이들은 늘 상인들이었다. 상인이 붐비는 골목과 나라는 융성하는 법이었고, 물가가 오르고 장사가 되지 않으면 나라는 기우는 법이었다.

당태세가 보기에 항주의 모습은 예전보다 더 융성해진 듯 보였다. 노인은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지만 이내 고개를 흔들고 자조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어쩌랴. 이게 천명이라면 당연히 수긍해야 할 노릇이나…….”

노인의 말은 거기서 끊겼다. 노인의 눈이 슬쩍 이리 같은 안광을 뿌리며 앞에 나타난 창살두른 문과 허가전장이라는 간판을 노려보는 중이었다.

“나는 묵은 원한을 흐르는 세상에 떠내려 보낼 정도로 자비롭지는 못하다.”

당태세는 잠시 허가전장 앞에서 간판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아직 허가전장의 장반은 동성문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했을 리 없었다.

미끼를 던졌으면 천천히 기다릴 때가 있는 법이었다. 당태세는 오늘 시장 주변을 탐문하며 허가전장에 대한 정보를 좀 더 모을 요량이었다.

전장의 물주는 몰라도 전장에 대한 평판 정도는 충분히 모을 수 있을 것이고, 만에 하나 부족하다면 하오문이나 도박판이라도 기웃대면 더 생생한 것을 알게 될 수도 있을 터였다. 써먹을 수 있는 패는 많이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좋았다.

“노대인, 이른 아침부터 이곳에 웬일이십니까?”

그 때, 뒤에서 한 사내가 당태세를 보며 안부를 물었다. 당태세가 돌아보자 다른 사람이 아닌 허가전장에서 맨 처음 당태세를 맞이하던 젊은 사환이었다. 당태세는 그를 보자 짐짓 고개를 천천히 끄덕이며 눈을 가늘게 떴다.

“허가전장의 아이로구나. 너는 어이하여 전장이 아닌 다른 곳에서 사람을 맞이하는가?”

“일이 있어 전장 문을 닫아놓고 잠시 밖에 나왔습니다. 이제 문을 열 것인데 잠시 들어와 차라도 한 잔하시겠습니까?”

사환은 어제와는 다르게 꽤나 빠릿빠릿한 어조로 노인을 응대하였다. 당태세는 슬쩍 눈살을 찌푸리고 그에게 대꾸하였다.

“네 주인이 없는데 어찌 네가 주인행세를 하는가?”

“제가 어제 대인께 실례를 많이 끼쳤으니 사죄의 의미로 차라도 한 잔 올리고 싶습니다. 뒤로 들어가지면 작은 정원이 있으니 그 곳에서 앉아 계시면 제가 바로 차를 가져오겠습니다. 서호의 용정차는 천하의 보물이오니……”

희한한 일이었다. 아이의 눈빛은 전장에 있을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총기가 흐르고 보이지 않던 재기(才氣)까지 발휘하는 모양새였다.

당태세는 기묘한 위화감을 느끼며 아이를 바라보다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소년을 따라 허가전장의 뒤를 향해 움직였다. 전장의 뒷문은 건물 뒤에 뻗은 작은 골목에 연이어 있었는데, 이곳은 바깥의 길과 다르게 인적이 드문 곳이었다.

그 때, 소년이 입술을 모아 짧고 센 휘파람을 세 번 불어 젖혔다.

“무슨 소리냐?”

당태세가 뒤를 돌아봤을 때, 소년은 품 안에서 작은 단도를 꺼내들고 있었다. 무표정한 소년의 눈은 당태세를 바라보며 짧게 말했다.

“어서 안으로 들어가시오. 장전은 오늘 낮이나 되어야 나올 거요.”

아무리 봐도 열대여섯 정도의 나이였다. 키도 그리 크지 않았고, 평범하기 그지없는 용모의 소년이었다. 게다가 칼을 집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살기조차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부실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당태세가 슬쩍 목괴라도 한번 내지르면 그대로 주저앉을 것 같았다. 무공의 기운 자체가 없는 아이였다.

이런 아이가 아침부터 자신을 미행했다면 아무리 당태세라도 눈치 챌 재간이 없었다.

“쓸데없는 일을 하면 몸이 상하느니라.”

그 순간, 당태세는 또 다른 기척을 느꼈다. 골목의 사이에서 세 명의 사내가 몸을 불쑥 일으키며 주변으로 다가오는데, 그 사내들은 미약하나마 일신에 무공의 기운이 느껴졌다.

당태세가 다가오는 세 사람을 바라보며 천천히 안색을 굳히자 앞에 있던 사환 소년이 당태세를 노려보며 침착하게 말했다.

“노대인. 그대를 해할 생각은 없소이다. 단지 그대의 돈이 조금 필요할 뿐이지.”

“내 돈이라니.”

“엄연히 말하면 이 허가전장의 돈이 필요한 것이지만 말이오.”

소년의 말은 노회하였고, 마치 불혹(不惑)은 넘은 중년사내가 쓰는 듯한 어투를 지니고 있었다. 어느새 세 명의 덩치 큰 사내가 장포 안에 두 손을 넣은 똑같은 모습으로 다가왔다. 분명 저 소매 안에는 단도들이 잡혀있을 터였다.

“내 돈이 필요하면 털어가면 될 것인데?”

당태세의 말에 소년은 피식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는 녹림도가 아니오. 그저 자금이 필요할 뿐이지. 노대인은 홍문(洪門)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소이까?”

“홍문?”

당태세가 질문을 되받자 소년은 눈을 가늘게 뜨고 히죽 미소를 지어보였다.

“항주 홍문의 용두(龍頭), 천리안 허종. 노대인을 뵙소이다.”

소년을 보던 당태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

당태세는 자신의 앞에 놓인 다구(茶具)들과, 다구 뒤에 앉아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는 소년과, 소년의 등 뒤에 팔짱을 끼고 서 있는 세 명의 장한을 노려보았다. 소년은 솜씨 좋게 차를 우려내어 당태세의 앞에 내려놓았다.

천하제일차(天下第一茶)의 반열에 당당히 어깨를 들이민다는 서호의 용정차가 내어놓는 고아한 다향이 노인의 코를 간질거렸지만 당태세는 찻잔에 손을 대지 않고 있었다.

“드시오. 대인. 독 같은 것은 들어있지 않으니.”

“나를 이리 부른 이유는 무엇이고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허가전장의 사환, 허종이라 불린 소년은 당태세를 보더니 자기가 먼저 차를 마셔보이고는 찻잔을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소년의 빛나는 눈동자가 형편없이 보이던 소년의 용모를 완벽하게 일신하고 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대인의 돈이오. 아까도 말했지만 이 허가전장의 돈을 필요로 하는 것이지만 말이오. 간단하오. 내게 차용증을 써 주면 내가 그 돈을 잠시 인출하여 쓰면 되는 것이오.”

“내 돈 얼마로, 무엇을 하려 하느냐.”

“은원보 두 냥을 빌려가겠소.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다시 채워드릴 테니 걱정 마시구려.”

“무엇을 하려 하는지는 말하지 않는구나.”

그러자 소년의 뒤에 서 있던 텁석부리의 장한 하나가 불쑥 앞으로 어깨를 들이밀더니 이를 드러내며 중얼거렸다.

“늙은이, 그대는 청인이냐 한인이냐?”

“나는 애오라지 한족이다.”

“그렇다면 우리 홍문의 일에 동참하는 것이 순리 아니냐. 네가 그 나이 먹도록 홍문의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것도 아닐 것인데.”

당태세는 텁석부리를 노려보며 차갑게 말을 뱉었다.

“한인이고 뭐고를 떠나 정확한 돈의 용처를 말하지 않으면 한 푼도 줄 수 없다.”

“병량(兵糧)을 사고, 무기를 살 것이오.”

당태세의 말이 끊기고 방금 대답한 소년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당태세의 표정은 허를 찔린 채 어안이 벙벙한 모습이었다.

“지금 뭐라고 했는가. 무기를 사다니?”

“금문도주 정성공 장군께 우리가 무기를 제공할 것이오. 정성공 장군에 대해서는 알고 있소?”

당태세의 눈이 천리안 허종을 뚫어지라 노려보았다. 노인의 눈동자에 실린 것은 살기가 아닌 말 그대로 사람의 심폐를 뚫어버릴 것 같은 안력(眼力)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쉽사리 마주치지도 못할 기세의 눈매를 소년은 용케도 바라보면서 버티고 있었다.

“정성공이라면 장강을 타고 올라와 소주와 항주를 겁박했던 자 아니더냐. 아직도 반청복명의 길을 걷고 있는 장수라고 들었다.”

“그 말대로요. 우리는 그들을 위해 일하오.”

당태세는 눈을 들어 소년 뒤의 세 사람을 쳐다보았다. 무공이 좀 있다 하지만 전장의 살벌함이 느껴지는 사람들은 아니었다. 오히려 뒷골목에 숨어서 다른 계략을 펼치는 살수들에 가까운 위인들이었다.

잘은 몰라도 홍문(洪門)이라는 곳 역시 그런 일을 위해 만들어진 단체 같았다. 당태세가 입을 다물고 있자 소년은 슬쩍 뒤를 돌아보며 차갑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일이 여기까지 왔으니 노대인에게 선택의 길은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지 않았구려. 차용증을 써 주든가 차가운 시신이 되든가 둘 중 하나가 될 것이오.”

소년의 협박에도 불구하고 당태세는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 사실 맘만 먹는다면 여기 앉아있는 네 사람은 세 수 안에 피바다에 코를 박고 죽어 있을 터였다.

하지만 당태세는 사내들의 말을 조금이라도 더 들어보기로 하였다. 뭔가 도움이 될 수 있는 말이 있을지도 몰랐기 때문이었다.

“너는 원래부터 허가전장에서 이런 일을 하고 있었나?”

“원래 이 일을 하러 허가전장…아니, 황가의 상점에 들어온 것이오. 그리고 이곳은 원래 내 터전이오.”

“뭐라고?”

소년의 침착하던 눈매가 슬쩍 가늘어지며 언성이 조금 높아졌다.

“나는 이곳에서 주가 성을 쓰고 있소. 내 본래 성인 허씨 대신 말이오.”

“……허가전장과 관련이 있는 모양이구나.”

“이곳의 주인 황가는 만성의 청인들에 부역해서 항주의 돈을 빼가는 사갈 같은 위인이오. 사람들을 돈으로 구워삶고 결국에는 그 돈으로 사람의 목을 옥죄어 자신의 뜻을 이루는데 쓴다오.”

“이 곳의 주인이 네 가족이었느냐?”

순간 당태세의 말에 천리안이라 불린 허종의 눈빛이 급변하며 입가에 경련이 일어났다. 당태세는 그런 사내의 표정을 말없이 지켜보는데, 뒤에 서 있던 텁석부리 사내가 불쾌하다는 어조로 당태세의 말을 끊었다.

“이보시게, 늙은이! 허튼 말은 그만하고 당장 돈이나 내 놓아라!”

“차용증에 서명하는 것은 금세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나는 타당한 연유를 알지 못하고서는 내 돈을 한 푼도 줄 수 없다.”

“뭐야?”

“나는 상인이다. 내가 투자할 수 있는 일이라면 어디든 투자한다. 하지만 그 일이 정확하지 않으면 땡전 한 잎도 허투루 줄 수가 없어.”

당태세는 이번에는 텁석부리 사내를 보면서 말했다.

“이 홍문의 용두가 여기 앉은 허 소협이라고 말하는데, 내가 보니 용력이나 연륜은 그대들이 훨씬 위에 있다. 어째서 이 허소협이 그대들 위의 용두가 되었는가?”

텁석부리 사내는 옆에 있는 두 사람과 얼굴을 마주보더니만 헛기침을 하고 당태세를 노려보았다.

“우리 홍문은 원래 사람의 능력과 성품에 따라 계급이 바뀌오. 예전 용두가 청인에 의해 죽임을 당한 뒤, 우리는 홍문에 들어온 천리안 대협을 만장일치로 우리 용두로 정한 것뿐이외다.”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번에는 천리안 허종을 보며 입을 열었다.

“천리안, 그대의 과거지사는 어찌 되는가? 분명 허가전장의 물주와 관련이 있으렷다?”

어느 순간부터 분위기는 묘하게 흘러갔다. 칼을 들이밀고 인질처럼 안으로 끌려들어 온 것이 분명 당태세일 것이었는데 조금 지나자 당태세가 사람들을 불러놓고 자연스레 심문을 하는 형국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좌중에 모인 홍문의 사내들은 지팡이를 짚은 노인의 전신에서 몰려오는 압박감이 천하고수의 투기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듯 보였다. 천리안 허종은 당태세를 슬쩍 쳐다보더니만 입맛을 다시고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제 과거를 아는 것이 투자와도 관련이 있습니까?”

“당연히 관련이 있다. 타당하다면 어찌 만금인들 못 주겠는가?”

“그렇다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꽤 오래 전의 일입니다.”

소년 허종이 침을 삼키더니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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