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 절강 항주 (5)
“다 합해서 백이십냥 사백오십칠문입니다. 은원보 2개와 십냥짜리 은정 두 개로 환전하시고 잔돈은 그래도 남겨놓을까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숫자를 말하는 허가전장의 장반(掌盤: 책임자), 화씨의 입은 바싹 말라 있었다. 당태세는 장반 화씨가 권하는 차를 마시며 전장의 안쪽, 접객실에 앉아 화씨의 말을 듣고 있었다.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손을 들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은원보 두개만 환전해주게. 아무래도 유람하는 도중이니 푼돈을 많이 쓰지 않겠는가.”
“알겠습니다! 대인! 그렇게 환전을 해 놓겠습니다! 증서는 바로 발행을 해 드릴 테니 돈은 금고 안에 넣어둘까요?”
당태세는 고개를 슬며시 끄덕이고는 화씨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여름철에 보기 힘든 거금을 일시에 맡겨놓는 부호에다 성질까지 더러운 노인이 앞에 앉아있으니 화씨는 투실한 얼굴에 땀이 비오듯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노인이 역정이 난 건 화씨 때문이 아니라 자기 자신 때문인 듯 보였다.
“그거 참. 아무리 개봉부터 여러 관도를 돌며 유람을 했기로서니 은원보 두개 밖에 남지 않았단 말인가. 내가 너무 돈을 물쓰듯 하면서 천하유람을 하였구나!”
화씨는 당태세의 말을 들으며 자기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켰다. 보아하니 저 북쪽 어느 지방의 부가옹(富家翁)인 모양인데 개봉부터 여기까지 내려오면서 돈을 쓰고 남은 게 은원보 두개라면 맨 처음 출발할 때는 얼마나 소지하고 있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허허. 여기저기 좋은 것들을 많이 보고 내려오신 모양입니다. 대인!”
“한 석달 넘게 여행을 하였소이다. 이제 돈도 반절 정도밖에 안 남았구먼.”
은원보 네 개! 화씨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지금 앞에 있는 이 노인은 말 그대로 돈이 썩어 남아도는 부류의 인물이었다.
소주와 항주에 부자가 많고 돈을 물 쓰듯 하는 이들이 넘친다 들었지만 은원보 두 개를 여행하는 데 썼다면 은 백냥을 길거리에 뿌리고 다녔다는 이야기였다. 이런 위인은 항주에도 손에 꼽을 정도의 위인이었다.
“실은…내가 내 조카의 견문을 넓혀주려고 같이 여행을 하는데, 그 녀석 씀씀이가 워낙 커서 내가 좀 고생을 하고 있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항주에서는 돈을 전장에 맡기는 거요.”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돈은 보이면 쓰게 되지 않겠습니까?”
당태세는 화씨의 말에 조금 전까지의 성마른 모습은 어디론가 날려버리고 길게 한숨을 쉬더니만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궁여지책이랄까. 소항같이 크고 번성한 대처에 와서 사람들이 근검하게 일하는 모습을 본다면 뭔가 바뀔 줄 알았는데 여전히 주색에 빠져있으니 이 놈이 가업을 어찌 이을 지도 막막하구먼.”
“실례가 아니라면 본업이 어찌 되시는지…..”
“크지 않은 포구를 하나 운영하고 있네. 그리 크진 않지만 관곡(官穀)을 운용하고 있으니 그것으로 어찌어찌 입에 풀칠을 하고 살고 있는 게지.”
관곡(官穀)이라는 말이 나오자 화씨의 눈이 둥그렇게 변하였다. 당태세는 눈살을 찌푸리며 걱정도 되지 않는 아룡의 걱정을 하느라 인상을 구기고 있었지만 전장의 장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놓치지 않고 관찰하는 중이었다.
“관곡을 포구에서 운용하시다니 실로 대단한 가업을 지니신 게 틀림없습니다. 관곡이 돈이 되는 일이지요.”
“잘 알고 계시는가?”
“조금은요.”
당태세가 찻잔을 든 채 화씨를 바라보며 목소리를 낮추었다.
“쉽지 않은 일이지. 아는 사람은 있어도 유지하기가 어려워. 이문을 남기는 건 쉬워도 말이야.”
화씨는 당태세의 눈을 쳐다보더니 알고 있다는 듯한 눈초리로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이곳의 전주(錢主)도 비슷하신 일을 하고 계십니다.”
“호오, 그런가. 허대인이 관곡 쪽으로 일을 하시는구먼.”
화씨는 짧게 고개를 저었다.
“허가전장의 전주는 허씨가 아닙니다. 원래 허씨가문의 전장이었지만 그 이름만 남겨주고 이미 다른 분의 손에 들어간 지 십여년이 넘었지요.”
“그렇소? 남들은 여전히 허씨 집안의 전장인 줄 알겠구먼. 그럴 이유가 있는 거요?”
“별로 이름을 밝히고 싶어하지 않으십니다.”
“조심성이 많으시구먼. 훌륭한 상인이야.”
당태세가 슬쩍 날카로운 눈매로 화씨를 노려보았다. 화씨는 당태세와 눈을 마주치자 화급하게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당태세는 화씨를 빤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한 달 정도 백이십냥을 맡기게 되면 이자는 어느 정도 쳐 주는가?”
“그리 긴 시간은 아니라 많이 드리지는 못합니다. 고작해야 은 두 냥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만….”
“너무 심하구먼.”
화씨는 입맛을 다시며 슬쩍 당태세의 눈빛을 살폈다. 아무리 한 달이라도 은원보 2개 분량의 돈을 예치한다는 건 전장 입장에서 기가막힌 행운이었다.
화씨는 괴팍한 노인이 돈을 들고 다른 곳으로 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화씨를 빤히 쳐다보던 노인은 입맛을 다시더니 되었다는 듯 손을 털었다.
“이자는 되었네. 돈이야 다다익선이지만 은 두냥을 어디에 갖다 붙인단 말인가?”
“저, 노사…아니 그러시면 제가 전결로…….”
“차라리 이 전장의 주인과 차나 한잔 하는 게 낫겠구먼.”
“네?”
“늘그막의 상인이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은 교분을 트고 상권을 넓히는 일 아니겠는가.”
“허가전장의 전주를 뵙고 싶다는 말씀입니까?”
“나도 장사를 하는 사람이니, 이럴 때 큰 상인과 교분을 터놓으면 어찌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내가 돈을 맡기고 그 값으로 항주의 부상대고와 인연을 맺는다면 이자 두 냥이 헐한 값 아니겠는가?”
당태세의 눈이 빤히 화씨의 눈을 살피자 화씨는 잠시 말이 없더니 딱 부러지는 말로 대답하였다.
“그건 좀 어렵습니다.”
“뭐라고?”
“황대가는 원래 사람들을 잘 만나지 않으십니다. 사실을 말씀드리면 저도 얼굴을 뵌 적이 없습니다. 가끔 만성 안에 세곡을 대납하는 것도 동생이 알아서 할 정도지요. 그 외 자질구레한 것도 다 그 동성가의 사람들이 실무를 담당합니다.”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주먹을 꽉 쥐었다. 드디어 듣고 싶었던 이름 두 개가 연달아 튀어나온 것이었다. 동성문. 그리고 황대가. 황대가라면 분명 동성문주 황칠이를 말하는 것일 터였다.
분명 동성문은 항주에 똬리를 틀고 있는 것이었다. 뭔가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당태세에 화씨는 화를 풀라는 듯 은근한 목소리로 노인을 달래다시피 하며 말하였다.
“하지만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도 제가 동성가의 실무를 모두 알고 있습니다. 우리 전장들의 장반을 관리하는 이들도 그들이고 말입니다. 동성가의 당두들과 교분을 쌓게 되시면 차차 황대가까지 만나는 것은 일도 아니겠지요.”
“그건 가능하단 말이지?”
당태세가 슬쩍 표정을 누그러뜨리자 화씨는 눈에 힘을 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는 제가 당연히 자리를 만들어드리겠습니다! 제 전장의 큰 손님 아니십니까!”
***
“아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신 겁니까? 전장에 돈을 맡겨놓았다고요?”
질펀하게 술자리에서 놀고 저녁 늦게 들어온 아룡은 당태세가 꺼내는 말을 듣더니 벌건 얼굴이 더 시뻘게지더니만 눈을 둥그랗게 뜨고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당태세는 눈을 껌벅이며 뭐가 잘못되었냐는 듯이 아룡을 바라보았다.
“그래, 왜 어때서 그러느냐? 어차피 전장에 맡긴 돈은 우리가 다른 곳으로 갈 때 찾으면 그만 아니냐. 우리가 객잔에 보관하였다가 도적에게 털리는 것보다는 훨씬 낫지 않으냐?”
“그야 그렇습니다만 우리가 쓸 수 있는 돈이….”
“아, 그 정도야 빼 놓았지. 나를 뭐라고 생각하느냐. 무두리.”
아룡은 당태세가 이야기하며 전대를 돌려보이자 안심했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아무리 봐도 아룡은 자기 먹을 술과 고기 값만 착실하게 챙겨주면 뭐가 어떻든 신경쓰지 않겠다는 심산 같았다. 당태세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고 있었다.
‘일단 자기 돈이 아니라 생각하니 관심이 없는 게로구나!’
사람들 사귀는 거나 일 처리할 때 빠릿빠릿한 것은 맘에 들지만 자신이 책임 질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매정할 정도로 관심이 없는 게 또한 아룡이었다.
당태세는 새삼스레 이 아룡이라는 놈이 자신을 홀대한다는 이유로 동무를 무참하게 죽도록 내버려 둔 위인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선한 면이 보일지 모르지만 근본까지 믿을 수는 없는 아이였다. 하지만 바꿔 생각하면 제대로 미끼만 던지면 자기 일은 충실하게 수행할 수 있는 그릇이었다.
‘지금 내가 필요한 것은 그런 허수아비 같은 놈이지.’
당태세는 마음을 먹고 아룡에게 넌지시 말을 이어갔다.
“무두리. 내가 금월방주에게 받은 돈을 맡겼더니 그 금액이 상당히 되는 모양이다. 그래서 그 전장의 주인이 나를 어디 산동에서 온 부가옹 취급을 하더구나!”
“하하, 그렇습니까? 사실 우리가 여행하면서 돈이 모자라 걱정한 적은 없지요!”
“아 글쎄, 그러더니만 자기가 전주하고 잘 안다고 우리에게 좋은 구경을 시켜준다 하지 않더냐! 잘 하면 항주의 부상대고하고 만찬을 같이 할 수도 있겠더구나!”
아룡은 갑자기 당태세의 입에서 뜬금없는 이야기가 나오자 졸린 눈을 끔벅거리더니만 잘 되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거 잘 되었습니다. 안 그래도 숙부님 여로에 지치셨을 테니 좋은 음식 드시고 보양 좀 하십시오.”
“나중에 그 일이 잘 되면 너도 나와 함께 가지 않으련? 그 전장의 물주라는 사람이 바로 만성에 관곡을 대는 사람이라 들었는데 말이다.”
“만성이요?”
슬쩍 눈을 감으려던 아룡의 눈이 조금씩 커지자 당태세는 고개를 끄덕이며 히죽 웃음을 지어보였다.
“우리 청나라의 치세에 대대적으로 협조를 하는 훌륭한 부호 같았다. 그런 사람이 부르는 자리라면 당연히 기인들에 대한 일도 많이 알 것이고, 너처럼 천하풍운의 포부를 지닌 이라면 당연히 그런 이들과도 교분을 쌓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내가 그 전장 주인의 권유를 듣자마자 든 생각이 바로 너와 동행해야겠구나 하는 것이었느니라!”
“숙부님. 정말입니까? 그런 귀한 자리에 우리가 초대받을 수 있다고요?”
아룡의 눈에서 졸음이 사라지고 혈색이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왔다.
당태세의 입에서 나온 청나라의 치세와 기인이라는 말은 아룡에게 보약이나 다름없는 단어인 듯 보였다. 그런 아룡의 긴장한 표정을 보던 당태세는 염려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 힘을 주어 대답했다.
“그래, 한번 좋은 말이 나오나 들어보자꾸나. 대신, 우리가 산동 금월방에서 왔다는 소리를 하면 안되느니라! 우리를 산동 포구에서 하역업을 하며 돈을 벌어들인 집안인 척하는 게야!”
“당연하지요! 어찌 우리가 흑도방회의 일로 돈을 벌어 그 돈으로 이 청나라의 강역을 누빈다고 말하겠습니까! 그것은 말도 안 되지요!”
“흑도방회라는 말도 쓰지 말자! 그냥 우리는 산동의 금월상회에서 돈을 벌어들인 집안이라고 하자꾸나! 나도 당가가 아니라 장가라고 소개하고!”
아룡이 손바닥으로 자기 가슴을 툭툭 치며 걱정 말라는 듯 엄숙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숙부님! 걱정 마십시오! 그 정도 요령도 없는 무두리가 아닙니다! 어차피 좋은 의도로 시작한 일이니 선한 마음으로 속이는 것은 악한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하십시오! 그런 선인(善人)들과 교분을 쌓는 것이야 말로 더욱 큰 선행 아니겠습니까!”
아룡은 되는대로 아무 말이나 갖다 붙이며 말을 주워섬기는데, 어쨌건 당태세가 원하는 대로 같이 움직이겠다는 소리였다.
아룡의 청나라와 만주족에 대한 열망은 당태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강렬한 듯 보였다. 당태세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래, 네가 그리 말하니 나도 분발해야 되겠구나. 어서 날짜를 잡아보마.”
당태세의 푸근한 미소 위로 번득이는 눈동자가 빛을 발하였다. 노인의 계획은 차근차근 계단을 밟아 올라가 결국 마지막에 계단 위에 있는 이의 목을 이빨로 물고 단숨에 숨통을 끊어버릴 계획이었다.
장소가 어디든 사람이 몇이든 중요치 않았다.
당태세는 자신의 계획을 믿어 의심하지 않았다. 어긋날 곳이라고는 하나도 없어 보였다.
그때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