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6. 절강 항주 (4)
다음 날 아침.
당태세는 일찌감치 항주의 정취를 느끼기 위해 객잔을 떠난 아룡이 나간 뒤에도 한참을 객실에 앉아 뭔가를 고민하다 작은 봇짐을 하나 두르고 항주의 길을 나섰다.
노인은 좌고우면하지 않고 그대로 항주의 남문을 향해 나아갔는데, 그곳에는 유명한 상회와 전장(錢莊)이 모두 모여 있는 상가거리였다.
원래 항주는 운하의 종착지기이도 하지만 운하 너머 소흥과 그 아래 남방의 물산들도 북경에 가기 위해서는 거쳐가야 하는 길이었기에 저절로 성시가 융성할 수밖에 없었고 돈의 융통도 꽤나 활발하게 움직이는 곳이었다.
당태세도 전장에 대한 이야기는 명대부터 들어온 바였다. 운하를 따라 늘어선 규모 있는 성시에는 다 그 성의 거주민들이 세워 둔 전장이 있어 이곳에서 돈을 융통하고 빌려주며, 거금을 대신 맡아주고 보관료를 받는 장사를 예전부터 해 왔었다.
그리고 당태세가 지금 돌아본 항주의 모습을 보아 하니 전장의 규모는 예전보다 더 커지면 커졌지 작아지진 않은 듯싶었다.
전란으로 나라가 바뀌고 수많은 이들이 죽었고, 특히나 남쪽의 피해가 청(淸)의 핍박으로 심각한 지경이 이르렀다 말은 들었지만 오히려 상업과 상인들의 처지는 명대보다 더 융성해보였다.
“세월이 좋아지는 것인가 내가 세월을 못 따르는 것인가.”
당태세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씁쓸한 입맛을 느꼈다. 노인은 남문근처의 전장들을 둘러보며 가장 규모가 큰 곳들을 물색하기 시작했다. 근처의 다관(茶館)에 앉아 나이 지긋한 상인들과 두런대는 이야기가 가장 정보를 모으기 쉬었다.
“지금 제가 여행중인데 아무래도 불안해서 항주에 돈을 맡기고 움직일까 합니다만…….”
“그렇다면 전장에 맡기는 것이 아무래도 낫겠지.”
“노사들께선 좋은 곳을 알고 계십니까?”
당태세가 여기까지 말을 하면 나머지는 노인들이 알아서 말을 붙여주기 일쑤였다.
아침 나절에 상가거리의 다관에 나와 있는 노인들은 할 일이 없거나 아침 일찍 가게 문을 열어두고 장성한 자식에게 좌판을 맡긴 뒤 잠시 쉬고 있는 노련한 상인들이 대다수였는데, 당태세는 그 중 비싼 다관에서 차를 마시는 사람들이라면 후자일 경우가 많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었다. 그리고 당태세의 그런 육감은 틀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큰 돈이라면 왕가전장이지.”
“왕가전장 괜찮지. 신용도 있고 사람도 관후하다오.”
당태세가 노인들의 이야기를 듣고 슬쩍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곳이 항주에서 제일 괜찮은 전장입니까? 가장 안전한 모양이지요?”
“안전하지요. 안전하기로는 왕가전장하고 사가전장이 제일 낫긴 하지만 그래도 왕가전장이지.”
“안전한 것만 따지면 허가전장이 항주에서는 제일 낫긴 하지만서도….”
“어허, 이 사람. 거긴 왜 이름을 올려?”
너댓명의 나이 지긋한 상인들이 한 전장의 이름이 올라오자 동시에 얼굴을 굳히고 말한 노인을 쳐다보았다. 말을 꺼낸 노인은 화급히 입을 닫고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지만 얼굴에는 낭패라는 글자가 써 있는 사람 같았다. 당태세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슬쩍 다시 입을 닫은 노인에게 캐물었다.
“허가전장이 어딥니까? 거긴 안전한 대신 다른 게 있는 모양이지요?”
“아니, 내 실수요. 그냥 그곳 신용이 좋다는 것이긴 한데…….”
“에끼 이 사람아. 신용은 무슨 신용. 거긴 외인(外人)이 돈 대고 있는 곳 아닌가.”
순간 당태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외인(外人)이라.
자고로 성의 전장들은 그 지역의 토박이 중에서 금전에 여유가 있는 이들이 설립하거나 갹출(醵出)하여 만드는 것이 상례였고, 성 안의 일을 상부상조하는 것에서 시작된 가게들이었다. 외인이 세운 전장은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허가전장의 허씨는 우리 토박이 아닌가. 그리고 그 전주(錢主)가 외인이라기엔 여기 오래 살았지. 십년이 넘게 살았는데.”
“그래도 거긴 아니지. 청인(淸人)인지 한인인지도 모르는 인물에다가 담보 변제를 너무 독하게 하지 않나. 여기 남문에도 그 허가전장 등쌀에 못 살겠다는 이가 천지인데.”
당태세의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가며 엊그제 아룡과 객잔주인이 말한 것들을 취합하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상인들을 보며 슬쩍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그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아니, 청인이 물주라니 그게 가능합니까? 원래 기인(旗人: 팔기의 사람. 만주족을 지칭)들은 장사를 하면 안 되는 거 아니오?”
“청인이 장사한다는 것이 아니오. 그 물주라는 사람이 영 종적을 알 수 없는 인물이라 그런 것이지. 풍설(風說)에 의하면 조정 물품을 대납해 주면서 부를 쌓았다고 하더구먼. 저 만성에 있는 이들이 그 이를 먹여살린다 이거지.”
만성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다관의 노인들은 거의 동시에 고개를 서쪽으로 돌렸다. 아무리 항주에서 장사로 먹고 사는 이들이지만 나이먹은 이들에게 아직 명(明)이라는 나라와 청(淸)이라는 나라는 같이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당태세는 장사로 늙은 그들의 눈빛에서 날카로운 물욕과 망국의 회한을 같이 볼 수 있었다. 모든 것이 말로 나와 귀로 듣는 것으로 이해되는 것은 아니었다.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지만, 당태세를 비롯한 노인들은 모두 같이 찻잔을 들고 차를 한 모금 입으로 넘겼다. 은은한 향기 아래 배어드는 쌉쌀한 맛이 오늘은 무척이나 떫게 느껴지고 있었다.
***
오시(午時)가 슬쩍 지났을 무렵, 뜨거운 열기 속에 사람들의 왕래가 드문 시간을 타서 당태세는 다시 남문을 찾았다.
지팡이를 짚고 천천히 뙤약볕을 걷고 있던 노인은 상회와 다관을 훌쩍 지나쳐 시장의 긴 골목을 지나 운하와 대로가 마주치는 곳에 서 있는 창살 쳐진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허가전장]이라고 쓰인 큼지막한 현판이 걸린 전장의 안은 역시나 출입문과 마찬가지로 창살이 쳐져 있는 창구 두 개가 놓여 있었고, 창구 하나는 비어 있었다.
그리고 창구에 앉아있는 나이 어린 직원은 뜨거운 여름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는데 당태세가 문을 열고 지팡이를 짚고 건물 안으로 들어올 때까지도 졸음을 이기지 못하고 게슴츠레 뜬 눈으로 당태세를 빤히 쳐다보고 있을 뿐이었다.
“무슨 일이오.”
젊은 사내의 목소리에는 귀찮음이 물씬 묻어나 있었다. 돈을 사고파는 일에 어울리지 않는 태도의 젊은이를 보며 당태세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사내에게 또박또박 떨어지는 어조로 말을 걸었다.
“이곳이 항주에서 제일 안전하다는 허가전장이 맞는가.”
젊은이는 말없이 눈을 들어 흰 콧수염을 지닌 노인을 바라보았다. 젊은이의 멍한 표정을 보던 노인은 맘에 안 든다는 눈빛으로 젊은이를 노려보더니 다시 말을 이었다.
“내가 원지에서 항주에 일이 있어 왔는데 돈을 안심하고 맡길 곳을 찾고 있네.”
“예. 맡기면 됩니다. 저희가 보관해 드리지요.”
노인은 빤히 젊은이를 노려보았다. 꾸벅꾸벅 졸고 있던 젊은이는 눈을 끔벅이더니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자신을 노려보는 노인의 시선을 받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대놓고 시비를 걸다시피하는 노인의 눈을 보던 젊은이도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노인을 바라보았다.
“뭐요. 왜 그렇게 보는 겁니까?”
“네 이놈. 손님이 돈을 가져왔으면 돈이 얼마이고, 기한이 얼마이고, 기한에 따른 이자가 얼마인지를 설명하는 것이 전장의 도리 아니더냐? 어디 손님이 들어왔는데 꾸벅꾸벅 졸면서 대답도 변변치가 않은 거야? 네 놈은 대체 어디서 굴러먹다 들어온 놈이냐!”
“뭐가 어째요?”
“당장 주인을 불러오너라! 내가 오늘 돈은 고사하고 한번 상도에 대해서 말을 해야겠다!”
노인이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전장의 천장이 울릴 지경으로 언성을 높이자 창구에 있던 젊은이 역시 눈을 부라리며 당태세에게 욕을 하기 시작했다.
“뭐 이런 늙은이가 다 있어! 갑자기 나타나서는 어디서 훈계냐! 대체 얼마나 거금을 들고 왔길래 함부로 유세를 하는 거냐! 엉!”
순간, 당태세가 오른팔에 끼고 있던 궤짝을 그대로 창구 앞에 올려놓았다. 퉁 하는 소리와 함께 궤짝이 묵직한 소리를 내며 젊은이 앞에 올라오는데, 순간 젊은이의 안색이 분노에서 경악으로 순식간에 바뀌었다.
“당장 전장주를 불러와라.”
“저……노사…아니, 대인. 자…잠시만 기다리시면…얼마나 되시기에…….”
당태세는 말없이 궤짝의 자물쇠를 풀어서 젊은이의 앞에서 활짝 궤짝을 열어보았다. 동전이 아닌 은화와 쇄은이 궤짝을 하얗게 채우고 있는데 그 안에 들어있는 금액이 얼마인지 쉽게 판단이 서지 않을 지경이었다. 은원보로 환산을 한다 쳐도 쉽게 구경하지 못할 거금이었다.
젊은이는 눈이 튀어나올 지경이 되어 자기도 모르게 뒤로 한 발 물러나더니 후다닥 뒷방의 문을 열고 다급한 목소리로 주인을 찾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어느 정도 자신의 계책이 들어맞고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사실, 이 궤짝안에 얼마가 있는지는 당태세도 몰랐다. 원래는 개봉팔십방회의 맹주 흑풍방 백당락이 알아서 챙겨준 돈이었고, 그 안에 충룡문에서 털었던 돈과 영우문에서 가져온 돈을 합친 것이었다.
잘은 몰라도 이 돈이면 당태세는 남은 평생 호의호식하면서 살 정도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어디까지나 길을 열기 위한 방편일 뿐이었다.
순간, 우당탕 소리와 함께 투실한 중년 사내가 젊은이와 함께 창구 안으로 달려 들어왔다. 메기수염을 한 사내가 당태세의 앞으로 힘들게 뛰어와 궤짝 안의 물건을 바라보았다.
뚱보 메기수염의 표정 역시 젊은이의 표정과 대동소이한 경악으로 바뀌는데, 당태세는 궤짝을 슬쩍 닫더니만 중년사내를 흘겨보며 차갑게 말을 뱉었다.
“여기가 항주에서 가장 신용이 좋다는 허가전장이 맞는가? 내가 잘못 찾아 온 것인가?”
“대, 대 대인! 송구하옵니다! 제가…제…제가 그러니까 이 곳의 장반(掌盤:책임자)을 맡고 있는 화가입니다. 이곳이 허가전장임은 확실합니다.”
“항주 제일의 전장이라는 곳이 이렇게 손님 볼 줄을 모르는데 어찌 항주의 상인이 천하제일이라 하겠는가! 이거 참!”
“죄송합니다! 대인! 대인 얼마나 이곳에서 오래 머무실 요량이신지….”
“한 달 정도 체류할 기간일세. 이자가 얼마인가?”
“대인! 그것은 제가 이 금액을 모두 계산해 본 뒤에 결정을 할 문제라….”
당태세는 슬쩍 화씨 성 가진 주인을 노려보더니만 슬쩍 숨을 들이키고 매서운 눈초리에 살기를 담은 채 독살스레 말을 뱉기 시작했다.
“이래서 한족들이란 게으르고 미련하다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강건성세로 천하를 다스리는 북경의 천자 폐하를 보아라! 만성 안에서 오늘도 상무(尙武)의 정신으로 상승불패를 다짐하는 기인들을 본받으란 말이다! 그들이 보기에 얼마나 우리 한족들이 버러지같이 보이겠느냐! 내 말이 틀리느냐 맞느냐!”
“네! 네! 모두가 통절하게 옳은 말씀이십니다!”
당태세는 머리를 조아리는 화씨 장반을 바라보며 입에서 토악질이 나오려는 것을 겨우 참고 있었다.
대체 아룡은 어떻게 생각을 하고 살기에 이런 말을 서슴없이 내뱉는지 기가 찰 지경이었다. 하지만 당태세가 써먹은 ‘무두리식’ 발언은 효과가 있었는지 화씨 장반은 이제 고개도 맘대로 펴지 못하고 있었다.
“당장 저울과 산판을 내 오너라! 내 앞에서 계산하고 이자를 맞추어라!”
“네! 대인! 그렇게 하겠습니다요!”
경황없이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다시 뒷방으로 들어온 화씨가 허겁지겁 저울을 찾고 있자, 그 뒤에서 숨 쉬는 소리조차 못 내고 숨어있던 젊은 사환이 화씨를 보면서 더듬더듬 말하였다.
“대인, 괜찮으십니까? 저는 지금 무서워서 밖에 나가지도 못하겠고…….”
“……무섭기는 매한가지다. 이놈아.”
화씨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저울을 붙잡으며 간신히 입을 열었다.
“우리 황대인 만큼이나 지독한 늙은이가 왔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