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 절강 항주 (3)
“만성 안으로 물건을 가지고 들어가는 상인들이 있지요. 아, 있어요. 못 들어가게 한다는 건 위에서나 하는 말이지.”
나이 지긋한 객잔주인은 찰진 동남방 사투리를 섞어가며 노인이 물어보는 말에 착실하게 대답해주었다.
객잔에서 늘 손님만 상대하며 틀에 박힌 이야기를 늘어놓다가 비슷한 연배의 노인이 항주의 소사에 대해 물으니 적잖이 말할 기분이 나는 모양이었다.
당태세는 아룡과 성도를 한 바퀴 돌고 난 뒤, 조금 더 놀겠다는 아룡은 놔두고 객잔에 돌아와 넌지시 객잔 주인과 말을 트고 궁금한 상황을 물어보는 중이었다.
“아까 보니 팔기 군사들이 나와서 술과 음식 같은 것을 사 가던데? 못 들어가니 여기서 사는 거 아니오?”
“조금이지. 그냥 주전부리 정도랄까?”
“주전부리?”
당태세의 말에 객잔주인은 외지인은 잘 모르는 이야기를 해 준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만 자기만 아는 지식을 풀어내는 선생인 양 슬쩍 뽐내는 투로 말을 시작했다.
“사실 말이오. 저 팔기들은 우리한테 양식을 다 사 가는 것은 아닙니다요.”
“그래요? 그럼 저들은 곡량을 어디서 의존하오?”
“위에서 내려보낸다고 들었습니다. 나라에서 다 대주는 거지. 운하를 통해 북경에서 바로 곡량을 내성 안으로 넣어줘요. 양곡을 성내에 의존하게 되면 문제가 생긴다던가?”
“아.”
당태세는 슬쩍 멀리 보이는 만성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병법상으로는 그게 맞는 듯 싶었다.
저 만성은 항주의 주둔군인 동시에 감시병이기도 한 것이다.
군량미를 따로 쌓아두고 농성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어야 만약 항주성 내에서 소요가 나더라도 보급의 차질 없이 한족들을 소개(疏開)할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러면 저들이 성 내에서 사는 물건은 자질구레한 생필품같은 거겠구려?”
당태세의 말에 객잔주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가락으로 골목 앞쪽의 번화가를 가리켰다. 객잔의 앞 골목을 따라 나가면 바로 주루와 기루가 붙어있고 상점이 운하 옆에 긴 회랑을 이루며 놓여 있으니 아룡이 대놓고 이곳에 객잔을 잡은 이유가 자명해 보였다.
“사람이 어찌 밥하고 떡만 먹고 살 수 있습니까? 만주족도 사람이고 거기도 여인과 아이들이 있지요. 이리저리 필요한 물건들은 그들도 구입을 합니다. 하지만 외상도 많이 가져가고….”
“외상을 가져간다고?”
당태세의 말에 객잔주인이 눈썹을 위로 추겨 올려 보이며 히죽 웃었다.
“뭐 어쩌겠습니까? 팔기(八旗)가 외상을 단다는데 한족이 별 수 있어요?”
“허. 참.”
당태세는 턱을 쓰다듬었다. 이제 다시 자라나기 시작한 턱수염의 감촉이 까칠하니 손바닥에 느껴졌다. 다시 면도를 해야 할 때가 된 터였다.
당태세는 변발을 친 머리와 턱수염을 깎을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자 어느새 자기도 알음알음 청나라의 백성이 되어버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도 모르게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그렇다면 저 팔기들에게 따로 장사를 하는 집은 없겠구려. 이렇게 따로 나와 구매를 한다면….”
“아니지요.”
“네?”
“아까 말씀드렸잖습니까. 운하로 곡량을 대주고 북경에서 들어오는 물품을 내린다고 말입니다. 그걸 만주족이 하겠습니까?”
당태세가 눈이 동그래져서 객잔주인을 바라보자 객잔주인은 슬쩍 얼굴을 찡그리고 손을 모아보이더니 속삭이듯 말을 걸었다.
“그게 진짜 돈이 되는 일이라 들었습니다. 일단 연줄이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인데다가 중간에 하역을 하면서 조금씩 이문을 남긴다고 들었거든. 그게 진짜 장사인거지.”
“허허, 그거 참…그 사람들은 거부(巨富)겠구려?”
“거부지. 그럼. 내가 알기로도 만금의 부자라고 들었소이다.”
“그 사람 이름이 뭡니까? 만나 본 적은 있으시고?”
당태세의 말에 객잔주인은 아쉽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저도 그런 사람이 있다는 말만 들었지요. 저 만성 안에서 거래하는 사람인데 우리가 그 사람 정체를 알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 만금을 쌓아놓고 있다는 소문만 무성하지요.”
***
드넓은 항주에 동성문이라는 집단은 흔적도 없었다.
그리고 비슷하게 무공을 쓰는 이들이나 완력을 쓰는 이들도 없었다. 항주에도 하오문이 있고 비류가 있겠지만 동성문이 그 쪽으로 빠져 있었다면 아예 금월방주 장철오가 준 정보는 거짓이나 다름이 없을 터였다. 그렇다면 결국 문제는 저 성벽 안에 있었다.
당태세는 객잔 앞의 작은 도로에 나와 운하 건너편에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거대한 성벽을 올려다보았다.
“만성(满城)이라…….”
일단, 만성 안으로 잠입해서 그곳과 거래하는 이가 누군지 밝혀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태세가 기문둔갑을 써서 만주족으로 변신을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설상가상 만주어는 알지도 못했다.
그리고 만에 하나 만성에 들어가 그곳에 물건을 대주는 한인을 만났다 했을지라도 그들이 동성문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한마디로 득보다 실이 많았다.
“영우문하고는 또 다른 식의 은신이구나. 동성문주, 어울리지 않게 잔머리를 쓰다니.”
하지만 당태세는 항주에 동성문이 남아있다면 분명 자신의 눈에 걸려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건 다름이 아닌 동성문주의 인성 때문이었다.
탐심이 지나치면 자신을 묶는 올무가 되고 아무리 교활하다 해도 꼬리를 남기게 되는 법이었다.
“그 놈은 만족한다는 것을 몰랐으니, 아무리 만금을 쌓아두는 부자가 된다 한들 또 다른 치부에 손을 댈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그게 무엇이 될지,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당태세는 알 도리가 없다는 점이었다.
결국 당태세는 머리를 부여쥐고 끙끙거리다가 할 수 없다는 듯 객잔 침상에 몸을 눕히고 앓는 소리를 내었다.
“내가 부자가 아닌데 그 녀석의 속내를 어찌 알 수가 있는가 말이야…….”
몸으로 부딪혀서 창칼을 쓰는 것이 머리를 써서 해결하는 것보다 훨씬 쉬운 일이었다.
당태세는 자포자기식으로 침상에 누운 채 아룡이 저녁말미가 되어 벌개진 얼굴로 자기 침상에 누울 때까지 그대로 드러누워 있었다.
“숙부님, 어디 아프십니까? 웬일로 침상에 누워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십니까? 다관이라도 다녀오시지…….”
“아니다. 뭔가 생각을 좀 할 게 있어서 그랬느니라.”
“무슨 생각이오?”
당태세는 슬쩍 아룡을 쳐다보았다.
이미 꼭뒤까지 술이 올라 얼굴이 벌개진 녀석이 힐끗대며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데, 저 녀석은 세상사 아무 걱정없이 술 퍼먹고 기생 부르는 것에 평생을 쓸 놈처럼 보였다.
지금 여행지에서 얼마 안 되는 노자로도 저러고 잘 노는데 부자였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보니 참 기막히기 그지 없었다. 가진 재주와 가진 단점이 모두 극명하게 나오는 아이였다.
“우리가 부자였으면 얼마나 좋았으랴 하는 생각이 들었느니라.”
“허허, 아니 갑자기 왜 어울리지 않는 고민을 하십니까? 숙부님은 원래 재물에 연연하지 않는 분 아니셨습니까?”
“그래도……이렇게 천하를 주유하다 보니 돈 있는 자들이 노는 것과 우리 같은 이들이 노는 것은 그 하늘이 다르지 않느냐? 특히나 이 항주같이 부자 성읍에 와 보니 우리 노자가 조금 더 넉넉했더라면 네가 좀 더 잘 놀 수 있지 않았겠느냐?”
아룡은 지금까지 당태세가 누워서 한 고민이 자기를 잘 먹고 잘 놀게 해주지 못해 자책한 것임을 알게 되자 화들짝 놀란 표정이 되더니 씩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보였다.
“숙부님! 그런 걱정 마십시오! 이 무두리! 금월방주님과 숙부님의 은혜 덕에 지금도 잘 먹고 잘살고 있습니다! 제 인생 최고의 날들입니다! 어찌 그런 걱정을 하십니까!”
당태세가 아룡의 말을 듣자 슬쩍 몸을 일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이하게도 슬슬 아룡이 맞장구를 쳐 주자 지금까지 흐린 안개처럼 답답하기만 하던 머릿속이 맑아지더니 무슨 말을 해야 할 것인지 슬슬 앞에 드러나고 있었다.
“무두리 너 뿐만이 아니라 내 생각도 하는 것이야. 나도 이제 조금 있으면 늙어서 거동도 못하겠지. 그래서 이리 천하구경을 다닌다만…이 동네에는 내 나이에 엄청난 부를 축적한 사람들도 있다더구나. 그러니 나도 슬쩍 처지에 대해서 생각해 본 것이다.”
“그런 부류를 부러워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돈에 묶여서 어딜 가지 못합니다! 저와 숙부님처럼 날개 돋친 듯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인생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그리고 우리 노자 정도면 정말 넉넉한 거라니까요?”
순간 당태세의 눈이 번득였다.
그래. 아룡의 말이 맞지 않는가. 돈이 많다면 그 돈을 가지고 가장 중요시할 일이 무엇인가?
돈을 불리고 지키는 일이 가장 큰 일이 되지 않겠는가?
“그도 그렇구나. 부가옹들은 자기가 벌어들인 돈을 다시 늘리느라 경황이 없겠지. 그게 어찌 사람이 인생을 즐기는 일이라 하겠는가!”
“그렇지요! 숙부님이 이제야 다시 예전의 호기로움을 찾으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 맞다. 맞아. 다 늙어서 가게를 보고 살림을 꾸려가는 골치 아픈 일을 하면서 돈이 늘어나는 것을 본다는 게 어찌 힘든 일이 아니겠느냐 말이야!”
“아니, 돈이 많으면 자기들이 가게를 보지는 않겠지요. 사람들을 관리하지. 그게 더 힘든 겁니다요.”
“뭐?”
당태세가 아룡을 빤히 쳐다보자 아룡이 당태세를 보며 세상물정 모르는 노인이라는 듯 슬쩍 엷은 미소를 띠며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거금을 벌려면 사람을 상대해서 돈을 모아선 안 됩니다. 돈이 돈을 번다는 소리 모르십니까?”
“돈이 돈을 벌어?”
“쉽고 편하게 돈을 먹으려면 자기가 일하는 게 아니라 일하는 사람을 사야지요! 금월방이 왜 포구를 먹으려고 했는지 생각이 안 나십니까? 거간들을 싸게 부리면서 하역하는 물품에서 돈을 받아내는 것 아닙니까?”
당태세가 눈을 깜박거리자 아룡이 손바닥을 짝하니 붙였다가 슬쩍 떼어보였다.
“물주는 뒤에서 받은 돈을 가져가면 되는 거지요. 일은 거간들이 하는 것이고 말입니다. 그래야 작은 수고로 여러 곳을 경영하니 그게 돈이 돈을 부르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네 말은 그러니까 거부는 뒤에서 물주 행세를 하면서 돈을 번다 이것이구나.”
“그렇지요. 부자가 돈을 늘이는 것은 뭐니뭐니해도 돈놀이지요.”
“돈놀이…….”
순간 당태세는 그동안 자신의 머릿속을 감싸고 있던 안개가 말끔히 걷히는 것을 느꼈다. 만성이니 뭐니 하는 것에 속아 제대로 된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었다.
지금 동성문이 이 항주에 남아서 만주인들에게 부역한 것으로 돈을 벌었다면 분명 다른 곳에서 돈을 쓰고 있을 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 아룡과의 대화에서 어느 정도 윤곽을 드러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청조에 부역하여 세를 불리고 불린 돈을 다시 불리려면…….”
“네? 숙부님, 뭐라고요?”
“아, 아무것도 아니다. 돈이 돈이 되어 다시 돈을 불리려면…….”
“숙부님, 그게 전장(錢莊)에서 하는 일 아닙니까. 전장의 물주들이 대부분 만금의 부자지요.”
순간 당태세의 눈이 휘둥그레지더니 아룡을 뚫어지라 바라보았다. 당태세의 입이 자기도 모르게 벌어지며 아룡에게 큰 소리를 외쳤다.
“정말 네 녀석은 희한한 녀석이로구나! 게으른 장자방 같은 놈이로다!”
“네? 장자방이요?”
화들짝 놀라 눈을 껌벅이는 아룡을 뒤로 하고 고개를 돌린 당태세의 눈동자는 기이한 빛을 뿜어내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