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 절강 항주 (2)
강남 소주가 옛 오나라의 수도였다면 절강의 항주는 오나라의 맞수였던 월나라의 수도였다.
두 성도는 서로가 같은 듯 하면서도 달랐고 다른 것 같으면서도 동일한 면이 있었으니 사람들의 화려함은 소주가 앞서고 도시의 화려함은 항주가 앞선다고 말할 지경이었다.
옛 명조(明朝) 시대에 제주도에서 풍랑을 만나 절강으로 떠내려 왔다가 구조되었던 조선의 관원, 최부(崔溥)가 쓴 표해록(漂海錄)에 보면 당시의 항주에 대해 기록하기를,
‘항주는 큰 동남방의 도회로, 가옥이 잇달아 행랑을 이루고 처맛자락이 이어져 장막을 이뤘으며, 저자에는 금은이 쌓여있고 사람마다 비단옷을 걸쳤다. 그리고 돛대와 배들이 빗살처럼 늘어서고 주점의 깃발과 기루가 서로 마주보고 있는 사철이 봄 같은 곳.’이라 하였다.
실로 항주의 영화로움은 나라가 바뀌었지만 청나라까지 이어지니 지금 당태세가 바라보고 있는 항주의 모습은 최부가 썼던 예전의 모습과 젊은 시절 당태세가 보았던 수향(水鄕)의 아름다음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성곽도 그대로이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의 모양새도 여유롭고 품위가 있었고 운하를 따라 펼쳐지는 그림 같은 경치도 바뀐 것이 없었다. 뱃전 옆에 앉아 연달아 감탄사를 발하는 아룡의 표정은 이미 넋이 반쯤 빠진 듯하였다.
하지만 정작 뭍에 내리고 항주의 시가로 들어간 후가 되자 당태세는 자신이 알던 항주와 뭔가 기묘하게 달라진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항주의 모습이 바뀐 것이었다.
“저게 무엇인가?”
위화감의 정체는 다름 아닌 벽이었다.
항주성의 서쪽 안으로 또 다른 내성(內城)이 하나 불쑥 튀어나와 있었는데, 그 규모와 길이가 거의 예전 항주성의 삼분의 일을 차지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성루의 위에는 팔기(八旗)의 깃발이 꽂힌 채 당당하게 바람에 나부끼는 중이었다.
“만성(满城)입니다.”
“만성?”
당태세가 아는 체하는 아룡의 말을 되묻자 아룡은 뭐가 이상하냐는 듯 어깨를 들썩이며 당태세를 돌아보았다.
“팔기들이 머무는 곳 아닙니까? 각 성 대처마다 하나씩 성이 있지 않습니까? 개봉부에서도 보셨으면서 그때는 별 말씀 없으시더니….”
“아, 그랬느냐? 나는 개봉부는 아예 성을 새로 쌓고 있길래 또 다른 구역인 줄 알았지 뭐냐. 그럼 저 성 안에서 만주족이 산다 이것이야? 성 안에 성을 쌓고 산다고?”
아룡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마치 항주에서 몇 년은 산 사람처럼 턱을 만지작거리며 설명을 시작했다.
“원래 고귀한 팔기의 청인들은 한족 같은 잡류와는 같이 살 수가 없는 법입니다. 봉황이 죽실(竹實)을 먹는 것이지 어찌 참새들처럼 같이 앉아 낟알을 쪼겠습니까? 팔기의 청인들은 저 성 안에서 군사조련을 하고 무예를 익히고 같이 우정을 나눈다 들었습니다. 실로 사내라면 저런 만성 안에서 살아야하는 것이지요.”
아룡은 게슴츠레 만성의 위에 나부끼는 팔기의 깃발을 보며 넋을 놓고 있는데 실로 만주족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 된 것 같았다. 당태세는 저절로 찌그러지는 눈살을 겨우 바로잡고는 헛기침을 하고 성문을 가리켰다.
“그것 참. 다른 것은 모르겠는데 저쪽이 서문이 있던 자리인데…저리 나가면 바로 서호(西湖)에 도달해 좋은 경치를 볼 수 있는데 그게 안 되니 답답하구나.”
“그건 좀 안 좋네요.”
아룡은 노는 데 방해가 된다는 소리를 듣자 이내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아룡은 사방에 보이는 풍광과 경치를 다시 둘러보더니 슬쩍 이마에 잡았던 주름을 다시 펴고는 당태세를 보며 히죽 웃음을 지어보였다.
“아무려면 어떻습니까! 성 안에 성이 있으니 더 운치가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겁니다! 숙부님도 못 보던 경치가 갑자기 생기니 신기하고 재미있지 않으십니까?”
“아, 그, 그렇지. 못 보던게 생기긴 한 건데….”
“그럼 어서 객잔을 잡고 어디로 가는 것이 좋은 지 한 번 의논해 보시죠!”
아룡은 운하 근처의 주루와 기루들을 보며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근방 골목에 있는 큼직한 객잔을 골라 그 안에 여정을 풀었다. 항주는 대처이면서도 부성(富城)이라, 물가가 다른 곳보다 세고 객잔의 숙박료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아룡은 그간 당태세와 천하를 유람하면서 뭔가 깨달은 것이 있는지 도로도 널찍하고 숙박비도 다른 곳에 비해 비싸지 않은 곳을 용케 찾아내었고, 그중에서도 널찍하니 좋은 방까지 얻는데 성공하였다.
실로 잡다한 방면으로는 요긴하게 써먹을 재주를 타고 난 아이였다.
‘이 아이가 방회같은 곳에 들어가 칼을 잡지 않고, 상회에서 산판을 잡거나 어선을 타고 성실하게 고기를 낚았으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일을 했을 것이다. 사람의 팔자가 자신의 결정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라지만 이 녀석은 제법 아깝구나.’
당태세가 말 못한 심정으로 아룡을 쳐다보고 있는데, 아룡은 뭐가 그리 신났는지 당태세의 손을 잡아채더니 넓은 운하 옆의 거리로 노인을 끌고 나섰다.
“소주에서는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였지만 이제 지팡이도 제대로 맞추었으니 같이 다닐 수 있지 않겠습니까?”
“허허, 거 참. 나와 돌아다니는 것이 뭐 좋다고 말이냐.”
아룡은 당태세를 보면서 히죽 웃음을 지어보이는데, 실로 껑충한 키에 어울리지 않는 천진한 표정이었다.
“그래도 처음 도착한 곳의 첫 날인데 숙부님하고 같이 다녀야 한다는 생각이 든단 말이죠. 제가 제남, 개봉, 무창 같은 곳에서는 그저 저 좋다고 처음부터 혼자 싸돌아 다녔는데…지금 생각해보니 그게 너무 무례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환하게 웃던 아룡이 잠시 입술을 쭈볏대더니 슬쩍 당태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니까 숙부님…그…금월방주님이 개봉이나 제남에 있던 일을 물어보시면….”
“허허! 걱정하지 마라! 네가 여기까지 나를 데리고 천리길을 온 것만 해도 대단한 것이다! 어찌 그런 일에 연연하느냐! 너는 무두리 아니냐! 호연지기를 기르거라!”
당태세는 그제야 적잖이 안심하였다.
결국 아룡이 이렇게 살갑게 구는 것은 나중에 산동으로 돌아가 금월방주 장철오에게 보고를 받을 때 당태세가 나쁜 말을 하지나 않을까 하는 기우에 미안함이 섞여 있던 것이다.
사람의 품성이 한결같은 것이 이럴 때는 적잖이 도움이 되었다. 갑자기 아룡이 진심으로 당태세를 따르고 쫓아다니기 시작한다면 그야말로 복수행에 가장 큰 난관이 될 터였다.
당태세는 오늘 하루 정도는 아룡과 함께 길거리를 다니며 비위를 맞춰주고 사방을 탐문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어디 한번 돌아다니면서 뭐가 달라졌는지 살펴 보자꾸나.”
“그러시지요! 어디로 가 볼까요?”
당태세는 남북으로 길게 뻗은 성의 대로를 돌아다니며 사방을 훑어보기로 마음 먹었다. 특히나 운하와 그 옆 노변의 기루와 상점들이 오늘의 목표였다. 당태세는 이렇게 천천히 움직이며 항주의 동성문을 찾아볼 요량이었다.
십칠 년이 지난 지금, 북경의 무문 동성문은 항주에서 장사를 하고 있다는 게 금월방주의 정보였다.
-항주의 동성문(東星門)은 청조에 부역하며 상업으로 세를 불려 성내에 입지를 쌓고 있음.
금월방주 장철오는 단지 한 줄의 글귀로 동성문에 대한 설명을 마무리 지어 놓고 있었다. 장사를 한다는 것 빼고는 별다른 사항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반증이었다.
나머지는 당태세가 알아서 탐문을 해야만 하였다.
“동성문주가 살아있다면 워낙 인간성이 특이하니 금세 찾을 수 있겠지.”
동성문주 황칠이(黃七二)는 원래부터 탐심이 많았고 타 문파에도 시도때도 없이 강짜를 부리며 분란을 일으키기로 유명한 위인이었다.
동성문의 고강한 무공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명망이 모이지 않은 이유는 온전히 동성문주의 성격 때문이라고 보는 이들도 있었다.
북경에서 가장 탐욕스러운 무문(武門)의 장문인을 뽑으라면 충룡문주 주통산과 함께 첫째를 다툴 위인이었다.
이들이 명말, 보국구대문파에 참전하였을 때 왜 동성문이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황도에 남아있었는지를 궁금해하는 문파들이 더 많았던 것도 사실이었다.
‘사실, 황칠이가 배신을 할 것 같다는 생각은 애초부터 마음속에 늘 가지고 있던 생각이었어.’
황도에서 보국구대문파맹이 배신으로 얼룩지던 날, 동성문주 황칠이는 분명 이자성군에게 전향하자고 맨 처음 외친 인물 중 하나였을 터였다.
자신의 목숨 아까운 줄은 알아도 남의 목숨 귀한 줄은 모르는 작자였다. 이 자와 사형문주 유독중, 충룡문주 주통산 같은 이들이 먼저 보국구대문파맹의 철석같은 결의를 어그러뜨렸을 터였다.
그 결과물은 순천문과 명의 괴멸, 그리고 당태세와 아들 당운천의 죽음이었다.
“어찌 용서할 수 있으랴.”
당태세는 이를 부드득 갈면서 목괴를 짚고 부지런히 항주의 중심가를 걷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주변을 돌아보며 큼지막한 상회와 방회의 간판을 하나하나 다 훑으면서 다니는데, 도저히 하루에 다 볼 수 있을만한 내용이 아니었다. 당태세는 반식경쯤 지난 뒤에 거리에서 동성문을 찾는 것은 포기하기로 마음먹었다.
“안 그래도 커다란 성읍인데 만주족이 들어오면서 더 성세가 커진 것 같구먼.”
항주는 대처이면서 대운하의 종착지니, 천하의 물산을 움직이는 시발점이자 도착지였다. 상품의 종류가 북경보다 많으면 많았지 적을 수가 없는 곳이었다. 그 예는 깔려있는 도로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넓은 길은 가운데 넓적한 돌을 깔아두고 양 끝으로 자갈과 진흙과 석회를 섞어 다진 단단한 도로였는데 사람들은 가운데 석로로 돌아다니며 옆의 길은 마차가 다닐 때 길이 패이지 않도록 만들어진 도로였다.
그 옆으로 하늘 높이 솟은 처마 끝을 자랑하는 기루와 주루가 운하를 앞에 놓고 정렬되어 늘어서 있는데, 그 모습이 자못 장려하고 위세가 있었다.
소주보다 널찍해 보이는 도로에는 사람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며 여기저기에서 물건을 사고파는 모습도 보이니, 실로 태평하기 그지없어 보였고 사람들의 모습에서 여유가 지긋하게 느껴졌다.
사람들의 머리가 변발을 치지 않고, 드문드문 인파 사이에서 물건을 구매하는 팔기의 군사들이 보이지 않았다면 당태세는 자신이 명의 성세 한가운데에 와 있다고 느꼈을 터였다.
“그런데 희한하구나. 무두리.”
“뭐가 말입니까? 숙부?”
“왜 저 팔기의 군사는 여기까지 나와서 술을 사가는 게냐? 저 안에는 술집도 없단 말이냐?”
당태세가 슬쩍 턱으로 서쪽에 있는 커다란 내성을 가리키자 아룡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만성 안에는 술도 팔지 못하게 되었고, 장사하는 곳도 없다고 들었습니다. 원래 장사같이 천한 일은 계교가 많고 잔꾀가 늘 들어차 있는 한족에게나 어울리는 일이지요. 늘 상무(尙武)정신이 가득 차 있는 팔기의 호걸들이 어찌 장사 같은 추잡한 짓을 하면서 산단 말입니까?”
“뭐라고? 그럼 저들은 어떻게 먹고 산단 말이냐?”
“술은 저렇게 사서 집에 가져가 혼자 먹던가 주루에 나와서 먹던가 할 것이고, 식료는 만주족 여인들이 나와서 사 들어가면 되겠지요.”
“저기 기거하는 이들이 몇 백에서 천은 될 것인데 여인 몇 명이 나와서 산다고 다 충당이 되겠느냐? 팔기의 군영은 어쩌고?”
갑자기 당태세가 진지하게 만성에 대한 것을 물어보자, 아룡은 눈을 끔벅대더니만 머리를 긁적이며 한참동안 성을 바라보다가 당태세를 쳐다보았다.
“글쎄요. 누가 대주는 사람이 있지 않겠습니까?”
“무두리 너도 잘 모르느냐?”
“아니 저는 그러니까 개봉과 산동 같은 북방의 일이 전문이지 이곳 남방의 행정까지 다 알지는 못하는지라….”
당태세는 대충 얼버무리는 아룡의 말을 뒤로 하고 슬쩍 이마를 만지작거리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청나라 군관들과 한족이 서로 상점 안에서 거래를 하는 이채로운 모습을 지켜보던 당태세는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청조에 부역하여 상업으로 세를 불린다?”
노인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