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견마지로-133화 (133/226)

133. 절강 항주 (1)

넓은 부둣가의 포석위에 짐을 내려놓은 아룡은 움직임을 멈추고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한참 동안 꿈을 꾸듯 사람들이 걷는 모습을 보던 사내는 다시 고개를 돌려 하늘을 향해 올라간 처마들과 그 아래 펼쳐져 있는 길과 그 옆으로 흐르는 물을 바라보며 뜻 없는 한숨을 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빤히 쳐다보던 당태세가 아룡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허허, 별일이구나. 원래 오고 나감에 미련이 없던 네가 이렇게 떠나기를 아쉬워하는 고장은 또 처음이로다.”

사람을 태우고 남으로 흘러가는 배를 바라보던 아룡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도리도리 돌렸다.

“이리 갑자기 떠나게 되니 아쉬움이 큽니다. 아직 떠난다고 기별을 하지 못한 벗들도 많고 아직 들러봐야겠다 마음먹고 가지 못한 곳도 있는데….”

“그래? 그러면 며칠 더 말미를 주랴? 네가 놀지 못하였다니 내가 다시 항주로 가자는 말을 꺼내기 쉽지 않구나. 그래. 서호(西湖)가 아무리 절경이라 한들 소주의 사람들만 하겠느냐. 자고로 경치는 항주라 하였지만 인물은 소주라 하였으니…….”

당태세의 말을 들은 아룡은 턱을 쓰다듬더니 뭔가 굳은 결심을 한 듯 고개를 끄덕이고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아닙니다. 숙부님. 인생사 어차피 흘러가는 여행길 아니겠습니까? 아무리 풍경이 좋고 내 맘에 드는 곳이 있다한들 행객(行客)이 어찌 한 곳에 머물기만 하겠습니까?”

“오호.”

갑자기 큰 깨달음을 얻은 듯 아룡은 주섬주섬 싸 맨 짐을 놔두더니 당태세를 바라보았다.

“마음을 먹었으니 숙부님 말씀대로 오늘 떠나시지요! 대신 제가 저 앞 주루에 있는 벗들에게 작별인사는 하고 오겠습니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 못하는 데 석별의 잔 하나는 나눠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태세가 손뼉을 치며 근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냐, 그것이 바로 장부의 이별 아니겠느냐! 무두리 너는 속히 벗들에게 다녀오거라!”

“역시 제 맘을 알아주는 이는 오직 숙부님뿐이십니다!”

아룡이 짐을 놔두고 부리나케 주루를 향해 뛰어가는 모습을 보던 당태세는 목괴를 겨드랑이에 끼고 흘러가는 배와 운하들을 지켜보았다.

이 물을 타고 다시 아래로 내려가 사흘 길을 지나면 항주에 도달할 것이고, 그곳에서 그는 또 다른 구원(舊怨)을 만날 터였다.

예전의 추억이 쌓여있는 길을 따라 걷다보면 예전에 알았던 벗들을 만나는데, 이젠 그 벗들은 하늘을 같이 이지 못할 원수가 되어 있었다. 추억을 핏물로 씻고 발자국을 붉게 물들이는 여로가 늙은 자신의 인생에 남은 마지막 행보였다.

“참으로 기구한 것이 인생이구나.”

흐르는 물을 바라보던 당태세의 표정은 더욱 침울해지며 눈가에는 저절로 주름이 잡혔다. 사내의 철석같은 얼굴에도 천천히 그늘이 생기고 천천히 고개가 아래로 내려갔다.

“하늘은 왜 이 비루한 몸에게 잔명을 남겨 주셨는가.”

그때였다. 뒤에서 누군가의 짧은 헛기침 소리가 당태세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슬쩍 고개를 돌린 당태세의 뒤에는 피혁장 곽일지가 지팡이를 짚고 서서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당태세는 낯색을 바로하고 곽일지를 쳐다보았다.

“아니, 이 사람. 여기는 어쩐 일인가?”

“떠나신다는 말씀을 들은 것 같아서 이리 헐레벌떡 부두로 나온 겁니다. 여기를 들르기 전에 이미 두세 군데는 허탕치고 왔습니다.”

그러고 보니 곽일지는 등판이 흠뻑 젖어 있었다. 다리도 불편한 사람이 기를 쓰고 당태세를 찾아다녔다는 이야기였다.

당태세는 무슨 일인가 싶어 그를 쳐다보니 곽일지는 하얀 이를 드러내더니 손에 들린 꾸러미 하나를 그에게 건네주었다.

“아니, 이게 무엇인가?”

“제가 드리는 선물입니다. 노사. 아니, 당대협. 꼭 받아주셨으면 합니다!”

당태세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어 꾸러미를 풀어보니 그 안에서 검은 가죽으로 만든 피혁화가 나왔다. 재질은 물소가죽처럼 보였고 그 문양이나 마감을 살펴보니 이만저만 공이 들어간 신발이 아니었다.

곽일지는 신을 바라보는 당태세를 보며 다시 웃음을 지어보였다.

“단출한 물건이지만 나름대로 정성을 기울여 만든 것입니다. 신의 크기는 일전 제 집에 놓았던 대협의 신을 보고 만들었으니 발에 딱 맞을 겁니다.”

“이보시게 곽대협, 어찌 이런 좋은 것을 내게 주는가?”

“제 생명의 은인 아니십니까?”

곽일지가 당태세의 눈을 보며 환하게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것이 어찌 신발 한 켤레로 보답이 되겠습니까?”

당태세는 말없이 곽일지를 바라보는데, 곽일지는 괜한 말을 했다는 듯 머리를 긁더니 껄껄대며 배들이 나가는 길을 가리키며 말했다.

“노사께서 택하신 길이 험할 것임은 저도 알고 있습니다. 제가 동행하지 못하니 이것으로 제 마음을 갈음할 뿐인 것이죠. 갈 길이 험하면 신이라도 좋은 걸 드리고 싶어서 말이죠.”

“동행한다고?”

당태세의 물음에 곽일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람의 마음이 모두 다를 지언정 그릇된 것을 바로잡고 싶어하는 것은 다 같지 않겠습니까? 대협, 아무쪼록 뜻하신 바를 이루시고 만수(萬壽)를 누리십시오.”

“나는 그런 사람이 못 되네. 곽대협.”

곽일지는 웃으며 고개를 젓더니만 슬쩍 뒤로 물러나 공손히 두 손을 모으고 깊숙하게 허리를 숙여보였다. 그때, 아룡이 어슬렁거리며 벌게진 얼굴로 부둣가로 들어오더니 당태세를 보며 웃는 낯으로 어깨를 잡고 배를 향해 가기 시작했다.

“숙부님! 이제 인사를 다 했습니다! 가시지요! 소주를 봤으면 항주를 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당태세가 엉거주춤 아룡에게 손을 잡히고 배로 터덜터덜 끌려가는데, 곽일지는 그 모습을 보면서 만면에 웃음을 잃지 않고 있었다.

당태세는 말없이 배에 올라타고는 부두에서 그를 바라보는 곽일지를 빤히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곽일지 역시 손을 흔들며 그에게 작별을 고하는 중이었다.

“참으로 떠나기 힘든 곳이었구나! 좋은 사람에 좋은 경치였도다! 항주도 소주만큼이나 좋은 것들로 채워져 있을까?”

아룡이 뱃전에 몸을 기대고 낮술에 취해 히죽대며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는데, 당태세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 말없이 흘러가는 풍경을 보는 중이었다.

그때, 노인의 표정이 슬쩍 변하였다.

부두가 위의 구름다리 위로 두 사내가 헐레벌떡 뛰어와 부두를 살피고는 다시 떠나가는 배를 둘러보며 경황없이 사방을 훑어보는데, 사내들은 낭패했다는 표정이 역력해 보였다.

다름아닌 야장 이국맹과 부가호의 장자 부후경이었다. 그들은 분명 부둣가로 당태세를 찾아 왔을 것이었는데 만날 때를 놓친 것에 안타까워하는 것이 틀림없었다.

당태세는 슬쩍 뱃전에서 몸을 낮추고 시선을 피하였다. 공치사를 받거나 남의 부탁을 들어주려 일을 벌인 것은 결코 아니었다. 부후경의 복수나 이국맹의 목숨을 위해 일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복수를 위해 다른 이의 곡절을 이용했을 뿐이라고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중이었다.

어쩌다가. 그래. 어쩌다가 얻어걸린 일인 것이지. 저들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다더냐.

운하 아래를 내려다보던 이국맹이 손가락으로 당태세를 정확하게 가리켰다. 당태세는 그제야 자신이 들고 있는 검은 목괴를 이국맹이 만들었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깨달았다.

부후경이 눈이 둥그래져 이국맹을 바라보았고, 이국맹은 저 노인이 북경 무명수라는 것을 부후경에게 설명해 주는 것 같았다.

부후경은 다급하게 구름다리를 뛰어내려와 운하를 따라 내닫기 시작하는데 사내는 연신 뭐라고 외치며 배를 따라오는 중이었다.

당태세는 멍하니 사내의 모습을 바라보다 한숨을 쉬고 몸을 일으킨 뒤 되었다는 듯 손을 천천히 내저었다. 마치 먼 길을 떠나는 노인이 집의 가솔들에게 돌아가라 말하는 듯한 시늉이었다.

부후경은 멍한 표정으로 길 위에 멈추어 섰다. 이윽고 사내는 두 팔을 하늘 위로 펴더니 이내 무릎을 꿇고 떠나가는 배를 향해 큰절을 올리기 시작했다.

당태세는 그런 사내의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자기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그래, 떠나기 힘든 곳이로구나. 안 좋은 추억도, 슬픈 기억도 있지만 어찌 좋은 사람들이 없었으랴.”

“숙부님, 이제 안색이 좀 좋아 보이시네요? 아까는 굉장히 우울해 보이시더니 이젠 좀 나아지신 것 같습니다. 배를 타고 움직이니 기분이 좋아지신 겁니까?”

뒤에 앉아있던 아룡이 당태세를 보며 히죽 미소를 지어보이자 당태세 역시 아룡을 보고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보이느냐?”

당태세는 그제야 자신이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

당태세와 아룡을 태운 커다란 배는 항주에서 소주를 거쳐 회안까지 올라가는 장거리 화물을 운송하는 배였다.

남에서 북으로 올라갈 때는 미곡과 목재, 차를 싣고 올라가며 북에서 남으로 내려올 때에는 소금과 과일을 싣고 내려온다 하였다.

사람을 도중에 싣고 내리는 이문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배를 타고 이 고장에서 저 고장으로 옮겨 다니는 것은 강남 백성들의 일상이나 다름없었으니, 화물과 사람은 늘 붐비기 마련이었다.

“물길의 끝은 항주가 맞지만 그 지류는 항주 아래 소흥(紹興)까지 이어진다오. 항주에 내리는 물산도 소주에 맞먹으니 그 부유함은 가히 대단하지요.”

큰 배를 모는 사공은 가히 군선의 선장처럼 위세가 당당하고 관록이 있었다. 수십 년 물 위에 떠 있었다는 커다란 배에는 사공 외에도 부리는 뱃사람이 여남은 명이나 있었으니 말이 사공이지 가히 작은 배 위의 왕이나 다름이 없었다.

사공의 연배는 당태세와 엇비슷해 보였고, 지팡이를 짚고 배위를 돌아다니는 당태세에게 호감을 느꼈는지 이런저런 편의를 봐주고 있었다.

당태세 역시 그간 변해버린 풍광을 바라보며 사공에게 무엇이 어떻게 변하였고 저것이 무엇인지 물으면서 항주로 내려가는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물길은 대부분 변한 것이 없었으나, 여기저기 배가 수로를 벗어나지 않도록 세워둔 탑과 만주족이 내려오며 세워 둔 돈대와 망루는 새롭게 당태세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십 년이 넘는 세월동안 변하지 않는 것이란 드문 법이었는데 오직 이 물길만은 예전의 정취를 그대로 가두고 있었다.

“항주도 이 물길만큼이나 변한 것이 없소이까?”

당태세의 말에 선장이나 다름없는 사공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노대인께서 항주를 마지막으로 들른 적이 언제시오?”

“한 이십 여년 되었지요. 긴 시간이었습니다.”

사공이 당태세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십 년이면 많은 것이 변했겠지요. 저야 매일 보는 것이 같은 성루와 물길이니 바뀐 게 없다 생각하겠지만 지금 가서 보시면 많은 것이 변해 있을 것입니다.”

“산수와 풍광도 바뀌었소?”

당태세의 말에 사공은 고개를 저었다.

“항주의 물길이 변할 리 없고 악왕묘의 충심과 영은사의 불심이 변할 리 있겠습니까? 잔잔한 서호도 그대로이고 아름다운 성곽도 그대로지요.”

“그렇습니까?”

당태세의 말에 사공은 뭔가를 더 말하려다 슬쩍 입을 다물더니 주변을 돌아보고는 당태세를 보며 조용한 목소리로 말하였다. 세월의 풍파가 지나간 사공의 눈 밑에 얽힌 주름은 사내가 그간 살아온 세월의 고단함을 말해주는 것 같았다.

“늘 변하는 것은 사람들 아니겠습니까. 돌과 물이 바뀌는 법은 없지요.”

“사람이 바뀌는 것이라.”

“사람이 바뀌니 모든 것이 조금씩 바뀌는 거지요.”

사공의 의미심장한 말을 곱씹던 당태세가 조용히 말을 받았다.

“나라의 깃발이 바뀌지 않았소.”

늙은 사공 역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하였다.

“노대인의 말 그대로입니다. 항주에 가서 보시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금세 아실 겁니다.”

두 사람은 지는 석양을 보며 입을 다물었다.

붉게 물든 석양빛을 헤치며 남으로 내려가기를 남으로 내려가기를 사흘째, 당태세가 탄 배는 이른 아침 항주의 고색창연한 성벽아래 운하로 미끄러지듯 입항하였다. 익히 알던 풍경 속의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기 위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0